유승준의 13, 대중의 13년 그 온도차

 

결국 예상된 그대로의 내용이었다. 사실 그 이상일 수도 없고 이하일 수도 없었다. 자신이 왜 병역기피자가 되어 입국거부까지 당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장황한 이야기는, 본인은 해명이라 생각했겠지만 우리네 대중들에게는 변명으로 들렸다. 그는 무릎을 꿇고 사죄했지만 그는 그것이 자기 잘못이 아니라 오해에서 빚어진 일이었고 타인의 설득에 의한 일이었으며 사안이 이렇게 중대한지 몰랐던 무지의 소치에서 비롯된 일이었다고 강변하고 있었다.

 

사진출처:신현원 프로덕션

반드시 군대에 가겠다”, “해병대에 자원하겠다는 기사가 나간 것은 기자의 질문에 별 뜻 없이 던진 한 마디가 대서특필된 일이었고, 병무청이 허락해 외국에 나갔다가 국적을 포기한 사실은 당시 소속사와의 계약과 아버지의 설득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사실 앞뒤가 잘 맞지 않는 면이 있다.

 

이 날 해명 속에는 그도 아버지도 군대는 반드시 갈 생각이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었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니 어찌 됐던 군대 가겠다는 기사가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그런 아버지가 그를 설득해 군대를 가지 않게 했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다.

 

그는 돌아오려는 이유로 자식들을 앞에 내세웠다. “어떤 방법으로라도 아이들과 한국 땅을 밟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 역시 그 진정성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1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침묵하다 이제야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마침 군대를 다시 갈 수 없는 나이가 되어서야 돌아오고 싶다고 말하는 건 대중들로서는 충분히 진정성에 의심을 갖게 만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군대를 다시 갈 수 있었던 몇 년 전에 그는 침묵하고 있었을까.

 

유승준이 생각하는 13년과 우리네 대중들이 생각하는 13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심경고백을 하기 전 이 방송을 찍은 신현원 프로덕션의 신현원 대표는 살인을 저지른 범인도 25년간의 공소시효가 있다. 그 정도 기간이면 어느 정도 죗값을 치렀다고 보는 면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승준에 대해서는 13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독 용서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는 이 13년에 대한 엉뚱한 해석이 들어가 있다.

 

유승준측은 그것을 죗값을 어느 정도 치른 기간으로 여기고 있는 모양이지만, 우리네 대중들에게는 13년 간 아무런 사죄도 하지 않고 지낸 기간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13년은 사실상 유승준이라는 이름을 지워버리는 시간이었고, 그가 스티브 유라는 외국인이 되는 시간이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갑자기 사과방송을 한다는 것이 대중들로서는 엉뚱하다고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3년이라는 세월 동안 갈라진 길은 처음에는 가까워보였지만 지금은 도저히 합쳐지기 어려울 정도로 먼 지점에 유승준과 대중들을 세워 놨다. 그는 이미 한국과는 무관한 외국인이 되었다. 만일 소통을 하려 했다면 훨씬 더 일찍부터 오랫동안 해왔어야 하는 것이 맞다. 이제 와서 뒤늦게 봉합하기에 13년이란 시간은 너무 긴 시간이다.

 

<세결여>의 선택, 공감 받지 못하는 이유

 

<세 번 결혼하는 여자(이하 세결여)>에서 왜 태원(송창의)은 모든 짐을 지고 가게 되었을까. 자신의 딸에게 폭력까지 휘두른 계모 채린(손여은)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던 태원이 갑자기 돌변한 것은 엄청난 반전이었다. 채린이 어렸을 때부터 가정폭력에 시달려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연민을 느낀 태원이 마음을 바꾸게 되는 것.

 

'세 번 결혼하는 여자(사진출처:SBS)'

태원이 채린에게 이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부친의 폭력으로부터도 지켜주겠다고 하자 채린은 아이처럼 태원에게 안겨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개과천선한 채린은 슬기(김지영)와도 가까워진 모습을 보여주었고, 태원네 가족들과의 불편한 관계도 순식간에 풀어버렸다. 또한 태원은 전처인 은수(이지아)를 만나 자신이 이혼하지 않고 가정을 지켜내겠다는 이야기로 둘 사이를 마무리 지었다.

 

태원의 용서라는 선택이 이해가지 않는 건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김수현 작가가 생각하는 결혼관을 담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남과 남으로 만나 한 가족을 꾸려나가는 결혼이라는 일에서 누군가의 희생과 용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덕목일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의 잘못을 바로 고치기 위해 파국으로 상황을 몰고 가기보다는 한 때의 잘못을 용서하고 받아들여주는 자세가 보다 성숙한 선택이라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시청자들은 이 태원의 용서라는 선택에 쉽게 공감하지 못할까. 그것은 이 선택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이뤄지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김수현 작가의 작품답지 않게 그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했다는 점이다. 어딘지 우유부단하고 미성숙하게 보였던 태원이 드라마 막바지에 이르러 거의 성인같은 선택을 한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다. 결국 채린이라는 막장 계모라는 카드와 성인으로 돌변한 태원의 선택은 이 드라마가 가진 완성도의 흠결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드라마 중반에 채린을 다루던 이 드라마의 방식을 떠올려 보라. 거의 미저리에 가까운 막장 캐릭터로 채린은 일방적으로 몰아세워졌다. 친엄마의 육성동화를 듣는다고 녹음기를 발로 밟아 부숴버리는 장면이나 심지어 아이를 때리고도 그깟 한 대 때린 걸 갖고...” 운운하는 모습은 이 드라마의 극성을 한껏 높여놓은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 채린이란 캐릭터가 왜 그런 행동을 보였는지에 대한 이유나 근거는 애초에는 보여주지 않았다. ? 그것이 더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고작 2회 분량을 통해 갑자기 채린의 부친이 저질러온 상습적인 폭행이야기가 등장하고 그 때문에 태원이 마음을 바꿔먹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이로써 채린은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바뀐다. 그리고 태원은 갑자기 피해자에서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 또한 가해자였음을 깨닫는다. 물론 손보살(강부자)의 말처럼 부처님 말씀 같은 결론이다. 하지만 드라마가 갑자기 인간군상의 이야기를 하다가 성인군자의 말씀처럼 끝을 맺는 건 너무 허무한 느낌마저 준다.

 

태원은 이로써 모든 걸 용서하고 받아들이며 희생하는 인물이 된다. 물론 인물의 성장은 부정적으로 볼 게 아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인물의 변신은 그 선택의 이유를 의심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모든 갈등과 대립이 태원의 희생 하나로 급히 봉합되는 결말은 그래서 그 선택의 의미가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에게 공감 받지 못하게 되었다. 어쩌다 이런 결과가 만들어진 걸까. 의도는 이해되지만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던 것. 바로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메이퀸>, 출생의 비밀 하나로는 부족했나

 

출생의 비밀 하나로는 부족했나. <메이퀸>이 마지막 반전 카드로서 또 다른 출생의 비밀을 꺼내들었다. 해주(한지혜)가 윤학수(선우재덕)의 딸이 아니라 사실은 장도현(이덕화)의 딸이었다는 것. 해주가 사실은 친모인 이금희(양미경)를 장도현이 강제로 품어 낳게 된 딸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해주의 아버지는 셋이 되었다. 그녀를 키워준 천홍철(안내상)과 딸로 받아들여준 윤학수, 그리고 피를 이어받은 장도현이다.

 

'메이퀸'(사진출처:MBC)

드라마가 극적 장치로서 출생의 비밀을 활용하는 것은 그 카드 하나로 모든 상황을 뒤집는 반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특유의 핏줄의식을 끄집어냄으로써 사실을 알고 있는 시청자들을 더욱 몰입하게 만들 수도 있다. ‘알고 보니 누구의 자식’이라는 그 단순하고도 효과적인 방식은 그래서 이제 가족을 다루는 거의 모든 드라마에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다. 너무 반전의 반전을 활용하기 위해 억지스런 출생의 비밀 코드를 활용하면 시청자들은 우롱당한 느낌을 받기 마련이다. 결국 작가의 장난에 휘둘린 꼴이 되니까.

 

이것은 극중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해주가 자신의 피붙이인 줄 알고 그토록 애타게 찾던 윤정우(이훈)가 대표적이다. 그는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이금희를 만나 이렇게 분노를 터트린다. “그럼 난 뭐야? 이 세상에 유일한 피붙이는 유진인 줄 알고 그리워하고 평생 한으로 남겨온 난 뭐냐구? 유진이를 보며 형을 떠올린 난 뭐냐고?” 이 토로는 아마도 시청자들의 마음 그대로일 게다. 윤정우와 해주를 어렵게 다시 만난 가족이라 생각하며 흐뭇해했던 시청자들은 뭐냔 말인가.

 

결국 이런 무리한 설정을 하게 된 것은 뻔한 가족의 테두리로 모든 것을 끌어안으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죽을 죄를 지어도 가족이기 때문에 결국은 용서해야 한다는 그 뻔한 메시지. 하지만 과연 가족이면 모두 용서가 되는 것일까. 장도현은 윤학수를 죽인 살인자이고 평생 박기출(김규철)을 머슴 부리듯 부려온 그런 인물이다. 게다가 강산(김재원)의 할아버지인 강대평(고인범)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인물을 굳이 해주의 친 아버지로 변신시켜 놓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무리한 출생의 비밀 때문에 이상한 캐릭터가 되어버린 윤정우는 그래서 이 사실을 알고는 해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내가 잘못했다. 우리 형이 너를 딸로 생각한 건 핏줄이 아니라 사랑이야. 넌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였어. 그러니까 넌 우리 형이 낳은 딸이 맞아. 널 키운 천홍철씨도 너를 더 큰 사랑으로 안았으니까 그 분도 너의 아버지야.” 이것은 하나의 설명이자 의미부여다. 과도한 출생의 비밀이 낳은 너무 많은 아버지들을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라는 작가의 이야기다.

 

그 근거로 제시되는 것은 조달순(금보라)이 윤정우에게 해주는 이야기 속에 들어있다. “죽은 상태 아버지가 해주한테 그랬대요. 가족은 피를 나눠서 가족이 아니라 배고픔도 슬픔도 고통도 나누는 게 가족이라구. 그게 뭔 말인지 이제 알겠더라구요.” 핏줄을 넘어선 가족애. 어찌 보면 이 대사는 잘만 활용되었다면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주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러 번 출생의 비밀 카드를 끄집어내 시청자를 이리 저리 휘두른 다음 나오는 이런 대사는 이제 변명처럼 다가온다.

 

“밥 먹기 전에 꽈배기를 먹었나. 왜 이렇게 꼬였어?” 상태(문지윤)가 밥상머리에서 해주에게 핀잔을 주며 던지는 이 대사는 마치 이 드라마를 두고 하는 얘기 같다. 배배 꼬아서 뒤집을 건 죄다 뒤집어 자극적인 상황에만 몰두하던 드라마가 이제 결말을 위해 제 멋대로 가족 관계를 엮어놓는 것은 그래서 시청자들을 희롱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쩌다 아버지가 셋이나 되어버린 캐릭터는 또 무슨 죄인가. 해도 해도 너무한다.


이정향 감독의 '오늘', 용서란 무엇인가

사진출처: 영화 '오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마이클 샌댈의 조금은 진지한 인문서적이 우리 사회를 뒤흔든 적이 있다. 물론 엄청나게 책이 팔린 것과 많이 읽힌 것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 사회에서 '정의'라는 문제에 대해 대중들이 그만큼 민감해하고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미술관 옆 동물원', '집으로...'의 이정향 감독이 들고 온 신작 '오늘'은 여러모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이렇게 묻고 있다. 정의는 무엇이고 또 용서란 무엇인가.

"용서하고 나니 편해?" 영화는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을 죽게 만든 소년을 용서한 다혜(송혜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정말 용서하고 나서 편해졌을까. 멀리서 바라보면 아름다워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보면 심지어 끔찍한 것이 삶이다. 용서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며 '멀리서 바라보는 삶'을 살던 다혜는 어느 날 자신이 용서한 소년이 누군가를 죽였다는 그 끔찍한 사실을 눈앞에 목도하게 된다. 그러자 자신의 편안함(?)이 사실은 자기 기만적인 위안에 불과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용서란 가해자가 진심으로 참회하고 사죄할 때 해줄 수 있는 일이지, 피해자가 저 혼자 용서한다는 것은 어쩌면 거짓이며, 나아가 정의의 시점으로 보면 또 다른 죄악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오늘'이 파고드는 건 바로 이 지점들이다. 끔찍한 사건을 당한 피해자에게 제대로 된 사죄도 없이 스스로 '용서'할 것을 종용하는 사회. 그래서 용서했으니 죄도 가볍게 사해주는 사회. 하지만 제대로 된 사죄 없이 용서받은 그들이 다시 죄를 짓게 되는 현실. 잘 살겠지 하며 용서해줬지만 살인을 저지르고 소년원에 들어간 소년을 찾아간 다혜는 '소년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피해자와의 대면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맞닥뜨리게 된다. 이 즈음에서 정의는 애매해진다. 법은 피해자를 위한 것인가 가해자를 위한 것인가.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은 사실 다혜가 극중 인물로 다큐멘터리를 찍는 감독이라는 장치 속에 들어있다. 이 액자구조는 어쩌면 다혜라는 가상의 주인공이 겪는 심경의 변화가 바로 이정향 감독 자신이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점의 변화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영화가 마치 심층다큐나 토론 프로그램처럼 여겨지는 건, 이 '피해자들의 고통스런 세계'를 감정적인 접근이 아니라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사회적인 맥락에서 바라보려는 감독의 노력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늘'이라는 영화가 건조하기만 한 영화라는 얘기는 아니다. 거기에는 이정향 감독 특유의 멜로적인 선이 들어가 있고, 가족적인 코드도 들어가 있다. 그래서 마치 멜로드라마와 다큐가 섞인 듯한 이 영화는 찡한 눈물과 우리의 이성을 두드리는 둔중한 질문이 공존한다.

하지만 이 '피해자들의 풍경'은 실로 처절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어려운데 그를 죽인 자를 용서한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일까. 하지만 자신에게 직접 찾아와 사죄도 하지 않은 그들을 세상은 모범수라는 이름으로 용서해준다. 피해자가 진정으로 용서하지 않은 자를 국가는 무슨 자격으로 용서하는 것일까. 다혜는 피해자들을 찾아가 용서의 모습을 찍으려 하지만, 피해자들은 거꾸로 용서할 수 없는 상황들을 늘어놓는다. 즉 다혜가 찍으러 다니는 인터뷰는 거꾸로 다혜에게 질문한다. '용서하고 나니 정말 편하냐'고.

이 영화는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으로 이 질문에 대답한다. 그 '불편한 진실'을 관객들에게 끄집어냄으로써 '사과 없는 용서'라는 허울 좋은 세상의 밑그림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오늘'이 바로 가해자들이 처참하게 빼앗은 피해자들의 미래라는 것을 아프게 말한다. 당신이 숨 쉬고 있는 그 오늘이 당신이 빼앗은 피해자들이 그토록 바라고 간절하게 여긴 그 시간들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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