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나라’ 장혁, 이방원 역할이 깨운 막강 존재감

 

장혁의 존재감이 살아났다. 그토록 오랫동안 KBS 드라마 <추노>의 대길이 이미지에서 벗어나려 애썼던 장혁이다. 물론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강채윤 역할로 또 KBS 드라마 <아이리스2>에서 정유건 역할로 그만의 액션을 보여줬던 건 사실이다. 또 KBS <장사의 신>이나 OCN <보이스>에서도 괜찮은 연기를 보여줬던 장혁이다. 하지만 그의 연기에서 시청자들은 대길이 이미지를 자꾸만 떠올렸다.

 

장혁이 조금씩 다른 느낌을 주기 시작한 건 MBC <돈꽃>과 SBS <기름진 멜로> 같은 드라마에서 액션과는 조금 다른 결의 연기를 보여주면서다. 그러던 장혁의 연기가 JTBC 금토드라마 <나의 나라>로 활짝 피었다. 그 막강한 존재감은 이 사극의 주인공인 서휘(양세종)나 남선호(우도환)를 압도할 정도다. 무협 액션을 가미한 사극인지라 <추노>에서 보여줬던 액션 연기가 여기서도 이어지지만, 그것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건 그가 보여주는 엄청난 욕망과 그 무엇 앞에서도 꼿꼿한 태도에서 나오는 카리스마다.

 

이것은 어쩌면 이방원이라는 그가 연기하는 인물 자체가 드라마틱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왕좌에 오르기 위해 형제들을 죽이고 아버지 이성계까지 밀어내는 인물. 우리네 역사에서 이만큼 강한 면모를 보여주는 인물도 없다. KBS <용의 눈물>의 유동근이나 SBS <육룡이 나르샤>의 유아인이 모두 이방원이란 역할을 통해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였던 건 연기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인물 자체의 극적 매력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이 그려낸 이방원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용의 눈물>의 이방원이 카리스마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원은 신세대 젊은 리더에 가까웠다. 장혁이 소화하고 있는 <나의 나라>의 이방원은 강력한 카리스마에 내적 아픔을 더해놓은 캐릭터다. 그저 폭주하는 인물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설득되고, 나아가 자기 사람을 위해 스스로 손에 피를 묻히는 그런 리더십까지 보여준다.

 

<나의 나라>에서 장혁이 연기하는 이방원의 색깔을 공고히 해주는 이들은 다름 아닌 바로 그 주변인물들이다. 그의 아버지이자 정치적 대적자가 되는 이성계(김영철)는 만만찮은 카리스마를 보이는 인물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앞에서 결코 수그러들지 않는 이방원의 존재감도 살아나게 만들었다. 조선 건국을 위해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은 이방원에게 시키고 그러면서도 그를 적당히 이용만하고 버리려 하는 이성계 앞에서 이방원은 결국 형제의 난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드라마가 역사의 해석에 있어서 이성계보다는 이방원에 더 맞춰져 있어 비정하게 동생들까지 죽인 그가 심지어 처연하게까지 그려진다.

 

이런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게 된 이방원에, 가상의 인물로 이 난을 실질적으로 성사시킨 서휘와의 브로맨스가 겹쳐지면서 어떤 인간적인 면까지 생겨났다. 벗인 남선호 앞에서 그 아버지이자 누이를 죽인 원수인 남전을 죽이지 못하고 망설일 때 대신 그를 베고 이방원이 하는 말은 웬만한 멜로보다 뜨거운 브로맨스를 담아낸다. “벗의 아비를 죽은 죄책감으로 평생을 살지 말거라. 내 그리 살았다.” 정몽주를 죽였던 자신의 괴로움을 알고 있기에 그 아픔을 서휘가 겪지 않게 하려 대신 피를 묻히는 모습이다.

 

이성계 앞에서는 결코 물러서지 않는 단단함을 보여주고, 서휘에게는 그 피 흘리며 휘청대는 몸을 뉘일 수 있는 어깨를 내어주는 이방원. 장혁이 연기로 축조해낸 이방원의 캐릭터는 이토록 입체적이다. 그래서 본래 이 사극의 중심에 있는 인물로 시작하지 않았지만 어느새 그가 중심에 서 있다는 걸 시청자들은 발견하게 됐다. <나의 나라>가 점점 이방원의 나라처럼 보일 정도로.(사진:JTBC)

'의문의', 이런 허술한 대본으로 제대로 된 일승 가능할까

뭐 이런 허술한 드라마가 있을까. 이야기와 액션은 폭주하지만 시청자들은 그 폭주하는 전개에 이입이 잘 되지 않는다. 이유는 너무나 기본적인 걸 이 드라마가 지키지 못하고 있어서다. 개연성 부족. 사형수가 ‘어쩌다 탈옥수’가 된다는 그 설정 자체가 비현실적이고, 그럴 듯한 과정도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새로 시작한 SBS 월화드라마 <의문의 일승>. 이렇게 해서 과연 일승이라도 할 수 있을까.

물론 모든 드라마가 현실성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만화 같은 전개라고 해도 나름의 개연성은 주어야 하지 않을까. 무슨 감옥이 마음만 먹으면 나갔다 들어왔다 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버렸을까. 또 탈옥한 마당에 시체를 처리하는 의문의 인물들을 만나 쫓기게 되는 상황이 마침 벌어질 확률은 얼마나 될까. 

<의문의 일승>에 대한 기대를 만든 건 윤균상과 정혜성 같은 매력적인 배우가 주인공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윤균상은 <육룡이 나르샤>, <역적>, <닥터스> 같은 작품을 거치며 성장 가도를 걷는 배우이고, 정혜성은 <구르미 그린 달빛>과 <김과장>을 통해 매력적인 연기자라는 걸 증명했던 배우다. 그러니 이 두 사람의 조합이 어떤 그림을 그려낼 것인가에 대한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배우들이 출중해도 역시 드라마는 대본과 연출이 중요하다. 안타깝게도 <의문의 일승>은 대본이 너무 허술하다. 사형수에서 탈옥수 그리고 이제는 형사 역할로 변신하는 인물이 바로 오일승(윤균상)이다. 결코 쉽게 납득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그 변화 과정에 대한 디테일한 설득이 이뤄져야 비로소 이 이야기가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다.

오일승이 탈옥을 결심하게 되는 그 이유도 사실 너무 약하다. 자신 때문에 살인 공범 누명을 쓰고 감방에 들어온 딱지(정성우)의 여동생 은비(김다예)을 노리는 감옥 동기의 살인을 막기 위해서가 그 탈옥의 이유다. 그렇게 탈옥해 은비를 살해하려는 범인을 막는 과정도 저게 가능할까 싶은 개연성의 부족을 보인다. 

옥상 물탱크에 묶어놓고 물이 차올라 죽을 위기에 처한 은비를 구하는 과정은 시청자가 바라보기에 끔찍한 장면일 수밖에 없다. 은비를 구하기 위해 나서는 오일승이 형사들과 대치하고 결국 물탱크에 구멍을 내서 구하고는 유유히 사라지는 그 과정도 어떻게 된 것인지 생략되어 있다. 대본도 대본이지만 이 물탱크에서 은비를 구해내는 과정의 연출은 스펙터클하긴 해도 잘 납득이 되진 않는다. 

아마도 <의문의 일승>은 다소 만화적인(그렇다고 모든 만화가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야기에 연출을 의도하고 있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청자들의 입장에서는 납득되지 않는 상황의 반복 끝에 남는 건 잔인하고 자극적인 장면들뿐이지 않을까. 특히 강간살인을 의도하는 범인의 면면들은 너무 자세하게 등장해 보기에 불편할 수 있었다. 

첫 회이기 때문에 시선을 잡아끌려는 목적이 강했을 것이다. 그래서 좀 더 스펙터클하고 빠른 전개를 보여주려 했을 테지만, 인물과 스토리에 대한 납득 없이 그저 보여주기식 전개는 오히려 드라마에 대한 몰입만 방해할 뿐이다. 이런 대본과 연출로는 제 아무리 윤균상 같은 배우라도 매력을 드러내기가 어려울 수밖에. 첫 방의 부족한 면들은 과연 <의문의 일승>은 채워나갈 수 있을까.(사진:SBS)

‘시카고 타자기’ 유아인이 그려낸 또 다른 청춘의 초상

일제강점기, 거사를 앞두고 청년들은 저마다 해방된 조국에서 꿈꾸는 행복에 대해 말한다. 일제에 빼앗긴 논마지기를 찾아 시골에 계신 노모를 모시고 살아가는 게 행복이라고 말하고, 순사가 꿈인 아들이 일본의 순사가 아니라 조선의 경찰이 되는 게 소원이라 말한다. 누군가는 어릴 적 첫사랑을 만나 신나게 연애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고, 이제 막 딸아이의 아빠가 된 청춘은 그렇기 때문에 하루빨리 해방된 조국이 되어야 하기에 거사를 위해 달려왔다고 말한다. 

'시카고 타자기(사진출처:tvN)'

tvN 금토드라마 <시카고 타자기>의 전생으로 그려지고 있는 일제강점기의 청춘들이 말하는 해방된 조국에서 꾸는 꿈은 실로 너무나 소소하고 조촐하다. 목숨을 거는 그들이지만 꿈이란 것들은 대부분 그저 평범한 일상을 자유롭게 누리고 싶은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을 보는 이 청년조직의 수장 휘영(유아인)은 거사를 앞두고 마음이 착잡해진다. 그들을 사지로 내보내야 하고 그들 중 대부분은 돌아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득 휘영의 동지인 신율(고경표)이 그에게 묻는다. 해방된 조국에서 아니 다시 환생해 태어난다면 무엇이 하고 싶냐고. 휘영은 말한다. “낚시나 함께 갈까?” 물론 그건 그의 진짜 소원이 아니다. 그는 수연(임수정) 앞에서도 속내를 숨긴다.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지만 무수한 동지들의 수장으로서 그는 그런 사적인 감정이 사치라 생각한다. 그런 그의 냉랭함 앞에서 수연 역시 마음을 접었다고 말한다. 조국을 상대로 투기를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고. 

대신 그녀는 다음 생을 이야기한다. 해방된 조국에 다시 태어나면 그때는 자신을 여자로 봐달라고. “괜히 망설이지 말고. 철벽치지도 말고. 거짓말 하지도 말고 혼자 아프지도 말고 나한테 솔직하게 다 말해 달라고요. 이번 생에 못해준 거 다 해준다고 약속해.” 자꾸만 다음 생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말에 휘영은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음의 표현을 수장의 목소리로 말한다. “꼭 살아 돌아와. 수장의 명령이야.”

거사를 앞둔 이 청춘들이 현생에서의 꿈과 소원이 아니라 다음 생에서의 그것을 얘기하는 부분은 아마도 <시카고 타자기>가 전생과 현생을 넘나드는 판타지로 그려지게 된 모티브가 아니었을까. 그들은 당장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그 생에서의 찬란한 청춘의 행복을 유예하고 있었다. 그저 옆에 있는 사람과 마음껏 사랑하고 싶은 마음마저 철벽을 치며 살아가야 했고 그렇게 산화해야 했던 청춘들. 그들은 그래서 다음 생 해방된 조국에서 행복을 맞이했을까. <시카고 타자기>는 이 전생과 현생으로 이어지는 두 부류의 청춘들의 현실을 더듬는다. 

<시카고 타자기>라는 낯선 제목은 그래서 일제강점기의 휘영 같은 청춘들을 설명하는 자화상처럼 느껴진다. 마치 타자치는 소리 같다고 해서 붙었다는 톰프슨 기관총의 별칭으로 불린 ‘시카고 타자기’. 글을 쓰는 지식인이지만 그 글은 또한 톰프슨 기관총 같은 무장투쟁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글과 총을 동시에 들었어야 했던 당대 청춘들의 초상이 그래서 ‘시카고 타자기’가 아닐까. 

그리고 이 일제강점기 청춘들이 해방된 조국의 다음 생에서 했으면 했던 소망과 꿈들은 고스란히 현생의 청춘들의 삶을 되묻게 한다. 과연 지금의 청춘들은 그들이 유예했던 그 소망과 꿈들을 이루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어쩌면 조국은 해방되었어도 여전히 그 현실의 많은 무게들을 청춘들에게 부담지운 채, 그 현재의 행복들을 유예시키고 있는 건 아닌가. ‘카르페 디엠’이라는 당대의 카페 이름에 담긴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라는 의미는 그래서 그 때나 지금이나 슬픈 정조를 담고 있다. 미래를 꿈꿀 수 없기에 지금 현 순간이라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전생의 독립운동을 하던 청춘인 휘영과 현생의 베스트셀러 소설가인 한세주라는 두 청춘을 연기하는 배우가 유아인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유아인은 유독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다양한 청춘의 자화상을 그려냈던 배우다. <밀회>에서의 이선재라는 청춘이 그랬고, 영화 <사도>에서의 사도세자라는 청춘이 그랬으며, <육룡이 나르샤>에서의 이방원이란 청춘도 그랬다. 그래서 <시카고 타자기>에서 유아인이 그려내는 전생과 현생의 두 청춘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현재를 유예하지 않고 미래를 마음껏 꿈꿀 수 있는 그런 청춘들의 시대는 언제나 올까.

사극은 무조건 장편? 늘어뜨리기보단 더 압축할 필요 있다

우리네 사극은 아직도 그 앞에 ‘대하’라는 수식어를 붙이길 좋아한다. 그래서 사극이라고 하면 적어도 30부작, 길게는 50부작 정도의 장편이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선입견 같은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대하사극’의 시대가 여전히 유효할까. 최근 방영되었거나 방영되고 있는 사극들, 이를테면 KBS <화랑>, MBC <역적>, SBS <사임당, 빛의 일기>를 보면 사극이라고 무조건 길게 늘어뜨리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만든다. 

'사임당, 빛의 일기(사진출처:SBS)'

종영한 <화랑>의 경우 20부작이었지만 굵직한 이야기는 실종되고 대신 인물들의 멜로와 소소한 미션들이 매회 배치되면서 기대이하의 성적으로 끝나버렸다. <화랑>이라고 하면 삼국통일을 이룬 그 인물들의 장중한 이야기가 있어야 했지만 이 사극은 화랑을 ‘꽃미남’ 아이돌처럼 해석함으로써, 애초에 하려던 신분으로 좌절된 청춘들의 현실을 담아내려던 의도마저 흐려져 버렸다. 이런 이야기라면 굳이 20부작이 필요했을까. 

30부작 <역적>은 역사에 기록된 실존인물 홍길동의 이야기를 재해석한 것이지만 그 절반에 해당하는 16부 동안 길동의 아버지 아모개(김상중)의 이야기로 채워졌다. 물론 이 사극이 갖는 현재의 현실을 빗댄 해석들은 실로 주목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지나치게 늘어진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무엇보다 주인공 홍길동의 활약과 이야기들이 생각만큼 다양하게 전개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 괜찮은 기획의도를 가진 작품의 시청률이 왜 갈수록 꺾어져 8%대까지 주저앉았는가를 설명해준다. 

역시 30부작인 <사임당, 빛의 일기>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이 사극과 현대극을 뒤섞은 드라마는 벌써 17부가 방영되었지만 애초에 그리려던 사임당(이영애)의 예술혼은 아직까지도 등장하지 않고 있다. 고려지를 재현해내려는 사임당의 이야기가 치열한 대결구도로 그려지고 있지만 그것이 과연 애초 기획의도였던 ‘히스토리’가 아닌 ‘허스토리’로서의 워킹맘 사임당의 일과 사랑, 그리고 예술의 세계를 얼마나 잘 구현하고 있는가는 미지수다. 

사실 30부작은 그나마 과거의 사극들이 대부분 50부작을 기점으로 만들어졌던 것에 비하면 많이 줄어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방영되고 있는 <역적>이나 <사임당>을 두고 보면 그 30부작도 너무 느슨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매회 한 가지씩의 굵직한 사건들이 전개되며 밀도 있는 드라마를 기대하는 시청자들로서는 “아직도 그 얘기야?”라는 답답함을 토로하는 게 당연하다 여겨진다. 

지상파에 종편, 케이블까지 합쳐져 우리네 드라마 편수는 과거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 지상파가 일일드라마와 주말드라마를 빼고도 한 주에 6편을 내놓고 있고, 케이블이 월화와 금토 또는 토일 편성으로 3편을 종편은 매 주 한 편씩을 내놓고 있다. 이것만 해도 일주일에 시청자들에게 보여지는 드라마가 10편에 달한다. 

이처럼 늘어난 드라마 편수는 시청자들이 더 압축적인 드라마를 요구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괜스레 질질 끌기보다는 한 편을 봐도 몇 편을 본 것처럼 확실한 이야기가 있는 드라마가 요구되고 있는 것. 그게 아니라면 굳이 채널을 고정시킬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사극은 그래서 과거의 연속극의 특성에서 더 과감한 탈피를 시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모든 사극이 그래야한다는 건 아니다. 이를테면 <육룡이 나르샤> 같은 사극은 50부작이었지만 매회 빈틈이라는 걸 느끼기 어려울 만큼 압축미가 있었다. 그렇지만 <역적>이나 <사임당> 같은 사극은 굳이 30부작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은 느슨함을 보이고 있다. 이래서는 그 어느 때보다 눈높이가 높아진 이탈하는 시청자를 잡기는 어렵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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