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풍’은 왜 정치드라마가 아닌 정치 활극을 선택했을까

돌풍

2010년 방영된 드라마 ‘대물’에서 선거 유세 중 서혜림(고현정)이 테러를 당하고 병원에 누워 있다 깨어나 “유세장은요?”라고 했던 대사는 당시 큰 화제가 됐다. 그 대사는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했다는 “대전은요?”와 너무나 유사했기 때문이다. ‘대물’은 이외에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소재로 내세웠다는 점이나, 대통령 탄핵, 잠수함 침몰, 아랍지역에서의 피랍사건 같은 소재들로부터 멀지 않은 과거 정치사의 한 장면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외압이 있었던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이 작품은 초기에 작가와 PD까지 교체되는 일이 벌어졌고 그것이 정치라는 소재의 민감한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실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습과 드라마 속 서혜림은 여성이라는 점을 빼고 닮은 구석이 거의 없었고, 또 극중의 그가 보여주는 행동들 속에는 다른 정치인들의 이미지가 더해져 있었던 게 사실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표적인 그 정치인 중 한 명이다. 탄핵 정국은 물론이고 TV토론 연설에서 서혜림이 이른바 “회초리를 들어주십시오”라고 했던 대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통령의 어버이는 국민입니다. 잘하면 칭찬과 격려를 해주고 잘못하면 회초리를 듭니다”라고 했던 내용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대물’의 사례는 정치드라마가 왜 우리네 현실에서 쉽지 않은가를 잘 보여준다. 그만큼 민감한 사안이고, 때로는 전혀 의도치 않게 현실 정치에서 작품을 끌어다 자기 진영에 유리하게 해석하는 ‘아전인수’가 벌어지기도 한다. 실제로 당시 ‘대물’에 대해 친박계 의원들은 대놓고 서혜림이 박근혜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꺼내놓기도 했다. 실로 닮은 구석은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생각해보면 2007년 대션 때 방영되어 당시 이명박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던 드라마 ‘영웅시대’가 준 잔상이 분명히 우리네 정치드라마에는 그림자처럼 남아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니 넷플릭스 시리즈 ‘돌풍’의 도전은 그 자체로 만만찮다고 여겨진다. 정치에 관심이 좀 있는 분들이라면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어딘가 현실 정치에서 너무나 익숙한 것들이다. 정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때가 되면 당적으로 옮기는 철새 정치인의 이야기나, 시대가 한참 지났어도 여전히 태극기부대를 동원해 북풍 공작을 일삼는 수구 정치인 이야기, 탄핵 정국과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벌어지는 상황이나, 들불처럼 번지는 촛불 시위 같은 사건들이 그것이다. 게다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대통령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대통령의 이야기는 누구나 선명하게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만일 총선 전에 방영되기라도 했다면(아마 이건 의도적으로 피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돌풍’의 화제성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더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에서 드라마 속 내용들을 조목조목 잘라다가 제 입장에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다. 그런 우려들을 염두에 뒀던 것일까. ‘돌풍’은 시작부터 파격적인 전개로 현실성보다는 허구성을 더 드러낸다. 대통령을 시해하는 국무총리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대통령의 경호가 그렇게 허술할 수 없다는 개연성의 허점을 감수하고라도 이런 전개를 선보인 건 이건 그저 드라마일뿐이라는 걸 강변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판을 열어 놓고 ‘돌풍’은 박동호(설경구)와 정수진(김희애)의 끝없는 대결구도로 드라마롤 몰아간다. 판세가 뒤집히고 또 뒤집히는 그 과정은 과거 박경수 작가의 ‘펀치’를 그대로 닮았다. 그래서 드라마는 마치 게임처럼 흘러간다. 서로 한 대씩 펀치를 날리는 게임. 흥미로운 건 서로 판세를 바꾸기 위해 쓰는 카드들이 현실 정치에서 우리가 많이 봐왔던 소재들(이를 테면 북풍이라든가)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돌풍’이 철저히 허구로 재구성된 드라마라는 걸 인식하면서도 그걸 통해 순간순간 틈입하는 현실 정치의 요소들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렇게 함으로써 ‘돌풍’은 정치드라마로서의 복잡미묘한 과정들을 담아내지 못한다. 빠른 속도감으로 치고받는 이야기를 펼치게 되면서 개연성도 상당부분 허술해지고, 대사들은 마치 구호처럼 작가의 목소리를 담는다. 그래서 드라마로 보면 결코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작가가 갖고 있는 현실 정치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극단적인 허무주의가 던지는 메시지만은 더 선명해진다. 어느 쪽도 희망을 발견하기 어려운 정치를 모두 쓸어버리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이 그 메시지로 등장한다. 

 

아쉬움이 적지 않지만 적어도 현실 정치에 답답함을 느끼는 분들에게는 잠시나마 ‘돌풍’ 같은 시원함을 안겨줄 수 있는 드라마다. 물론 지나치게 현실과 연관지어 사건들을 들여다보게 되면 불편함도 생겨날 수 있다. 그러니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 속도감과 몰입감을 즐기는 방식으로 보는 편이 낫다. 그러다 보면 끝내 작가가 절규하듯 외친 진짜 메시지를 여운처럼 느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사진:넷플릭스)

“테니스는 관계야.” 루카 구아다니노 ‘챌린저스’

챌린저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테니스를 소재로 하는 영화를? 청춘의 사랑과 욕망의 감정을 섬세하면서도 폭발력있게 담아냈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고개가 갸웃해질 법하다. 하지만 영화 시작부터 가슴을 울리는 EDM과 더불어, 땀을 뚝뚝 흘리며 테니스 코트를 뛰어다니는 아트(마이크 파이스트)와 패트릭(조쉬 오코너)의 경기를 감각적으로 연출해내는 장면만으로도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다. 역시 테니스를 소재로 해도 뻔한 승부의 세계와는 다른 새로운걸 기대하게 만드는 감독이다. 

 

영화는 테니스라는 스포츠 경기에 빗대, 테니스 유망주 타시(젠데이아)에게 동시에 빠져버린 아트와 패트릭의 사랑과 욕망을 그린다. 처음에는 패트릭과 사랑에 빠지지만 감정 싸움에 부상까지 당하며 헤어진 타시는 아트에게 위로받으며 아내이자 코치가 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13년 후 코트에서 아트와 패트릭은 경쟁자로 다시 만난다. 여러 숨겨진 사건들이 드러나고 감정들이 뒤섞이면서 경기의 승패는 타시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좌우할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펼쳐진다. 

 

“테니스는 관계야.” 타시가 아트와 패트릭을 처음 만났을 했던 그 말은 영화 후반부에 오면 그 의미가 확실해진다. 타시는 테니스가 혼자만 잘하면 되는 운동이 아니라는 의미로 그렇게 말했다. 경쟁자를 어떻게 꺾었는가 하는 승패보다는 공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나누는 그 관계가 진정한 명승부를 만든다는 것이다. 명승부가 어디 스포츠에만 있을까.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 식으로 요즘의 정치를 빗대 말한다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의 승패에만 집착해 이기는 경기에만 나가려 하기 보다는, 생각이 다른 경쟁자라도 일단 코트에 올라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야말로 국민들에게 박수받을 수 있을 거라는.(글:동아일보, 사진:영화'챌린저스')

'옛글들 > 이주의 영화 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지와 착각  (0) 2024.06.03
협력과 숙론  (0) 2024.05.26
그럴 만한 이유  (0) 2024.05.06
독립영화의 가치  (0) 2024.04.29
변화를 받아들이는 마음  (0) 2024.04.22

지배종

 

지난 1월 KBS ‘다큐 인사이트’에서 2부작으로 방송된 ‘지속 가능한 지구는 없다’는 환경 위기의 문제를 전 지구적 차원에서 다룬 다큐멘터리다. 2부 ‘재활용 식민지’편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로 불법 수출(?)되는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를 다뤘다. 값싼 플라스틱 쓰레기를 연료로 사용해 시멘트를 만들고 두부를 생산하는 공장을 16살 환경운동가 니나가 방문해 그 실태를 고발하는 내용이 담겼다. 값이 싸다는 이유로 플라스틱 쓰레기를 연료로 사용하지만, 그래서 쌓인 쓰레기들과 유해한 가스들은 인도네시아의 환경을 급속도로 오염시키고 있다는 내용이다. 니나는 산더미처럼 쌓인 플라스틱 쓰레기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어디서 온 것인가를 확인하는데, 미국, 유럽, 호주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 간 쓰레기들도 쏟아져 나온다. 

 

썩지 않는데다 태워도 유해가스가 나오는 플라스틱이 환경 오염의 주범이라는 사실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다. 그래서 플라스틱 재활용이 유일한 대안처럼 제시됐고 분리수거만 잘하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믿음도 생겼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다. OECD에 의하면 전체 플라스틱 쓰레기의 약 9%만이 재활용되고 19%는 소각되며 50%는 매립되고 22%는 통제를 벗어나 자연으로 흘러들어간다고 한다. 그러니 유일한 대안은 사실 플라스틱을 쓰지 않는 일이다. 인도네시아의 니나가 자국이 플라스틱 쓰레기로 채워지는 걸 전세계에 폭로하고 환경운동에 앞장서는 이유다. 

 

하지만 환경오염으로 인한 기후 변화가 전 지구적인 위기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고, 또 그것이 지구를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게 만들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왜 우리는 이를 바꾸지 못할까. 거기에는 플라스틱에 의존해 흘러온 기존 산업들이 만만찮은 장벽으로 등장한다. 당장 지속 가능한 지구를 위한 선택으로 플라스틱을 전면 금지하거나 쓰지 않게 되면 이들 산업들은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실제로는 아니지만 ‘친환경’을 실천하고 있다는 식의 위장전술이 등장한다. 그러면서 소비자들이 갖게 되는 죄책감을 친환경 제품이라는 마크를 붙이거나, 재활용에 앞장서는 친환경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더해 상쇄시킨다. 소비자들 역시 늘 해왔던 습관대로 소비하던 방식을 바꾸는 일이 쉽지 않다. 누구나 다 이대로 가면 위기가 닥친다는 걸 알면서도 세상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그 변화에 다양한 이익과 손실들이 부딪치며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지배종’은 어째서 세상을 바꾸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가를 그 포스터에 담긴 문구 한 줄로 표현한다. ‘세상을 바꾼 자. 모두의 표적이 되다’가 그것이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새로운 인공 배양육의 시대를 연 생명공학기업 BF(Blood Free)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드라마는 인공 배양육이 왜 필요한가를 설득하는 BF 대표 윤자유(한효주)의 사업설명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그저 당연하다는 듯 고기를 소비하지만, 그 고기를 위해 무수한 소들이 사육되고 도축된다는 걸 마치 없는 사실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윤자유는 그 과정을 눈앞에서 입체영상으로 보여주면서 환경 오염 문제나, 생명 윤리의 문제 같은 것들을 인공 배양육이 필요한 이유로 제시한다. 기업의 이름처럼 피(희생) 없이 생산된 고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시대. 얼마나 달콤한 이야기인가.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친환경’이라는 포장지를 덧씌움으로써 소비의 죄의식을 상쇄시켰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플라스틱의 사례처럼, 인공 배양육도 일종의 기만술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들이 제기된다. 인공 배양육이 세균덩어리라는 소문이 떠돈다. 또한 윤자유가 사업설명을 하는 연회장 바깥에서는 이를 반대하는 시위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이 든 피켓에는 ‘살인기업 BF 각성하라’라는 글귀와 더불어 ‘축산 다음 타깃은 어디?’라는 문구도 보인다. ‘식량을 위한 피’를 보지 않겠다고 주창하는 인공 배양육을 내놓은 생명공학기업에게 ‘살인기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분명하다. 인공 배양육의 탄생은 축산업자들의 도산으로 이어질거라는 것. 이처럼 세상을 바꾸려하는 일에는 만만찮은 반발과 도전이 이어진다는 걸 ‘지배종’은 보여준다. 플라스틱을 쓰지 말자고 쓰레기들을 하나하나 뒤져 그 출처를 밝히고 그 불법적인 일들을 폭로하는 16살 소녀 니나의 외침은 너무나 합당하고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것이지만, 그 맞은 편에는 플라스틱을 사용해 막대한 이익을 내고 있는 전 세계의 기업들이 서 있다. 그들은 소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변화를 원하지 않고 그래서 심지어 이를 막기 위한 일들도 서슴지 않는다. 

 

변화에는 반발이 따른다. 이건 ‘지배종’을 쓴 이수연 작가가 지금껏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일관되게 그려온 세계의 역학이다. ‘비밀의 숲’이 검찰의 부패를 척결하고 그 조직을 개혁하려는 자와 이를 막으려는 세력과의 대결을 그렸다면, ‘라이프’는 병원에 대한 두 관점, 즉 생명을 다루는 곳이면서 자본의 논리에서 경영되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두 관점을 대변하는 세력의 대결을 그렸다. ‘지배종’ 역시 인공 배양육이라는 근미래에 화두로 대두될 수 있는 문제를 가져와 생명윤리와 환경문제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상은 그 이면에 놓여진 기득권자와 새로운 세력 간의 대결을 그리고 있다. 

 

사실 정치가 요구되는 건 바로 이러한 저마다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들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갈등과 분쟁들을 대화와 타협으로 이끌어내는 일이다.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보수와 진보는 그래서 잘 들여다보면 변화를 요구하는 자들과 이를 원치 않는 자들 사이의 대결구도로 등장한다. 물론 보수든 진보든 자기 목소리를 내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서로의 입장을 들어보고 어떤 타협점을 찾아가는 길이 아니라, 편가르기를 통해 상대를 무시하고 무너뜨리려 하는 건 잘못된 일이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어렵고 또 그 과정은 당연히 어려워야 한다. 정쟁이 아닌 진짜 정치를 해야 하는 이유다. 총선이 끝나고 민심이 드러난 현재, 국민의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 필요한 게 바로 이것이다. (글:이데일리, 사진:디즈니+)

“긴데 이런 내가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거가?” 김희진 ‘로기완’

로기완

탈북해 중국 공안에게 쫓기다 어머니까지 사고로 잃게 된 로기완(송중기)은 홀로 낯선 땅 벨기에까지 와 그 곳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한다. 난민 지위를 얻어야 살 자격이 주어지지만 벨기에 당국에 그걸 입증하는 일은 쉽지 않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가끔은 여행을 떠나기도 하는, 우리에게는 숨쉬듯 주어진 것들이 로기완에게는 ‘자격’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 그가 마리(유성은)라는 한 여성을 만나 사랑하게 되고 행복을 느끼게 된다. 그는 자신 때문에 어머니까지 돌아가셨던 아픈 기억을 마리에게 꺼내놓으며 말한다. “긴데 이런 내가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거가?” 

 

김희진 감독의 영화 ‘로기완’은 이 탈북인의 이야기를 통해 자유롭게 살아갈 자격에 대해 묻는다. 탈북해 쫓기며 어느 곳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부유하는 삶. 마리는 그래도 우리는 지금 충만하지 않냐며 이 행복은 아무런 자격 없이 이미 주어진 거라고 위로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사적인 차원에서의 행복이란 마리의 말대로 자격이 필요없어 보이지만, 한 나라에서 살아가는 데 어찌 자격이 요구되지 않을까. 그 곳에서 태어났거나 외국인이라도 법적 요건을 갖춰 귀화했거나, 자격이 있어야 자유롭게 살 권리가 주어진다. 생계를 위한 경제활동도,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정치적 참여도 하다못해 여행을 떠나거나 심지어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함께 살아갈 권리 또한 자격이 필요하다. 자격을 부여받지 못한 삶이란 뿌리 뽑혀 서서히 말라가는 로기완의 삶처럼 처절할 수밖에 없다. 

 

당연한 권리처럼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자격을 갖추고 있어 가능하다는 것. 떳떳하게 사람답게 사는 일 또한 자격이 필요하다는 걸 우리는 종종 잊어버린다. 그래서인지 자격에 부여된 권리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때도 있다. 때되면 돌아오는 선거에 한 표를 행사하는 일이 얼마나 큰 권리이자 자격을 요구하는 일이란 걸 로기완이라면 얼마나 절절하게 생각했을까. 선거를 통해 자격과 권리를 부여받은 정치인들 또한 그 한 표 한 표에 담긴 막중한 무게감을 잊지 않아야 하겠다.  (글:동아일보, 사진:넷플릭스)

'옛글들 > 이주의 영화 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승패보다 명승부  (0) 2024.05.13
그럴 만한 이유  (0) 2024.05.06
독립영화의 가치  (0) 2024.04.29
변화를 받아들이는 마음  (0) 2024.04.22
상극과 상생  (0) 2024.04.08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