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모든 걸 포기하고 죽으려 했습니다. 죽은 동지들의 참담한 비명이 귓가를 맴돌고 눈앞을 떠돌았습니다. 그 순간에 깨달았습니다. 나는 죽은 동지들의 목숨을 대신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해야할 일을 알았습니다. 대한제국을 유린하는 일본 늑대의 우두머리, 늙은 늑대를 반드시 죽여 없애자고.” 우민호 감독의 영화 ‘하얼빈’은 이러한 내레이션과 함께 죽은 줄 알았던 안중근(현빈)이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살아돌아 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영화관에서 봐야 그 압도적인 스케일이 느껴질 법한 그 광경은 실제 두만강의 풍경은 아닐게다. 칼바람이 불어오는 얼음 위를 홀로 걸어나가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오한이 들 것 같은 느낌으로, 그 곳을 걷는 이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 마음은 지옥이다. 

 

그는 신아산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일본군 장교 모리(박훈)를 ‘만국공법’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풀어줬다가 동료들이 희생되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다. 내레이션으로 나온 그 말 그대로 그는 ‘모든 걸 포기하고 죽으려는’ 마음까지 있었을 게다.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 위를 걷다가 그 차디찬 얼음바닥에 누워버린 그는 그러나 끝내 일어나 다시 그 얼음 위를 걸어나간다. ‘길을 잃고’ 방황하던 그를 붙잡아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절망하게 만든 먼저 간 동지들이었다. ‘하얼빈’은 이 일로 목표를 분명히 알게 된 안중근이 늙은 늑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해 계속 앞으로 나가는 이야기다. 그 끝이 결국 자신의 죽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실 안중근의 이 이야기를 모르는 한국인들은 없을 게다. 누구나 역사책을 통해서 그 이야기를 접한 바 있고, 역사 다큐멘터리나 심지어 예능 프로그램에서조차 그 이야기는 자주 등장했다. 뮤지컬과 영화로도 제작된 ‘영웅’이 있었고, 종교적으로 그려낸 영화 ‘도마 안중근’도 있었으며, 보다 인간적인 안중근의 면면을 따라간 김훈 작가의 소설 ‘하얼빈’도 있었다. 이 정도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굳이 영화로 왜 만들었을까 싶지만, 본래 역사를 소재로 하는 작품들은 시대에 따른 재해석이 담기기 마련이다. 우민호 감독의 ‘하얼빈’은 저 두만강을 건너는 장면이나, 사막을 건너가는 장면처럼 마치 지옥도 같은 압도적인 풍광으로 펼쳐진 절망적인 심리적 상황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가는 위대한 인간의 모습으로 안중근을 재해석했다. 그래서 안중근을 비롯한 독립투사들이 은거지에 모여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은 마치 램브란트의 그림을 보는 듯한 음영이 분명한 영상으로 담겼는데, 그것 역시 이들의 내면이 투영된 것처럼 표현된다. 어둠이 금세라도 이들 잡아먹을 것처럼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지만, 그 어둠은 오히려 이들의 굳은 의지가 드러나는 얼굴을 빛나게 한다. 

 

결코 ‘하얼빈’은 편안하거나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절망의 어둠 속을 들여다보는 일이고, 꽁꽁 얼은 길을 함께 걸어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요즘처럼 어려운 극장가에서 400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영화의 힘을 만들어내고 있는 걸까. 

 

혹자는 ‘국뽕’을 이야기하지만, ‘하얼빈’은 결코 감정에 호소하는 작품은 아니다. 이는 마지막에 사형대에 오르는 안중근의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영웅’에서 그 장면은 비장하게 그려지며 관객들의 감정을 끌어올리지만, ‘하얼빈’에서는 무감하게 처형되는 장면으로 간단히 연출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의 흥행은 여러모로 그 누구도 예상 못했던 현 시국의 영향을 얘기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시국이 아니라면 그저 평범한 대사 한 줄로 여겨졌을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인에 대해 말하는 대사가 이토록 큰 화제가 됐을 리 없기 때문이다. “조선이란 나라는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유생들이 지배해 온 나라지만 저 나라 백성들이 제일 골칫거리야. 받은 것도 없으면서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이상한 힘을 발휘한단 말이지.” 메인 예고편에도 고스란히 들어간 이 장면에서 관객들 대부분은 현재 벌어진 탄핵 정국을 떠올렸을 게다. 비상 계엄 선포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국회로 달려가 이를 저지했고, 탄핵안 통과를 위해 국회의사당 앞에 구름 같이 모여 응원봉을 들었던 시민들을 떠올렸을 게다.

 

우민호 감독이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이 장면에 대해 꺼내놓은 이야기 역시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실제로 한 말이에요. 유생들이나 왕은 하나도 두렵지 않은데, 마차 타고 총독부를 갈 때마다 자신을 쏘아보는 민초들의 눈빛이 너무 서늘했다고요. 민초들에겐 두려움을 느낀 거죠. 그런데 지금 시대가 이렇다 보니 그게 또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돼 참 아이러니하고 서글프기도 하네요.” 당대의 민초들의 눈빛처럼 현재의 관객들도 같은 눈빛으로 이 영화를 쏘아보며 현 시국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얼빈’은 그래서 그 절망적인 시국을 외면하지 않는 눈빛들이 모여든 영화처럼 보인다. 물론 이건 우민호 감독이 의도한 바는 아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에 무능한 기득권자들에 의해 비극에 내몰린 민초들이 그 절망을 뚫고 나오는 그 과정들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는 건 감독의 말처럼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는 풀 한 포기 자라날 것 같지 않은 얼음 위를 걸어가는 안중근의 모습으로 시작하지만, 그가 사형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서 화면을 전환해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나뭇가지들을 보여준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의 절망이 꽃이 피어나는 봄으로의 희망을 꿈꾸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봄은 그냥 오는 게 아니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누군가 포기하지 않고 가야할 길을 꿋꿋이 걸어간 이들이 있어 그 봄이 오는 것이라고. “어둠은 짙어오고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어올 것이다. 불을 밝혀야 한다.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우리는 불을 들고 함께 어둠 속을 걸어갈 것이다.” 안중근의 외침이 가슴에 와닿는 꽁꽁 얼어붙은 시국이다. (글:이데일리, 사진:영화'하얼빈')

K콘텐츠에 투영된 K시민의 비판의식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 그리고 탄핵 정국까지, 거꾸로 갈 것 같던 시간을 다시 현재로 되돌린 건 다름 아닌 시민들이었다.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은 그 과정들을 보다보면, 새삼 K콘텐츠의 진면목이 바로 그 문제를 바로잡으려는 비판의식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서울의 봄

비상계엄 사태를 ‘현실판 디스토피아’라 보도한 외신

지난 3일 갑작스런 비상계엄 선포와 그 해제 과정에 대해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K팝과 독재자들:민주주의에 가해진 충격이 한국의 양면을 드러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그 기사는 한국이 최근 한류 열풍을 통해 ‘문화적 거물’이 됐지만 갑자기 터진 계엄사태로 ‘현실판 디스토피아’가 생겨났다고 했다. 계엄 선포와 해제 과정에서 국회의원들이 담을 넘어 국회의사당으로 들어가고, 이를 막으려는 계엄군들이 군용 헬기를 타고 내려와 창을 깨고 국회로 난입하는 장면을 꼬집은 것이다. 실제로 그 장면은 현실이라기보다는 디스토피아를 그린 콘텐츠의 한 부분처럼 보였던 게 사실이다. 새벽까지 잠 못 이루며 실시간으로 보도되던 그 과정을 바라본 시민들은 80년 서울 한 복판에 등장했던 탱크를 떠올렸지만, 그것이 2024년 현재에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에 비현실적인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이 정도였으니, 이를 접한 외신들의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국가적 위상과 이미지가 훼손됐다는 비판이 나왔고, 평화로운 이미지가 한 순간에 무너졌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게다가 그 시점은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타는 순간이었고 이제 ‘오징어게임2’의 공개를 앞두고 전 세계의 관심이 다시 한국에 쏠리고 있던 순간이었다. 비상계엄 선포는 문화적 자긍심이 한껏 고조되는 순간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사태는 단 몇 시간 만에 종료되었다. 국회가 비상계엄 선포 해제를 선언했고, 윤석열 대통령도 이를 공식화했다. 그리고 이어진 후폭풍은 시민들을 거리로 나오게 했다. 저마다 응원봉을 하나씩 들고 국회 앞에 모여 대통령 탄핵안 통과를 독려하는 집회를 열었다. 국민의 힘 의원들이 투표에 참여조차 하지 않아 통과되지 못했던 탄핵안은 또다시 국회에 상정됐고 두 번째 투표를 통해 통과됐다. 그 광경 또한 드라마틱했다. ‘현실판 디스토피아’라고 외신이 보도했지만 그건 그저 절망적인 분위기만 가득한 드라마는 아니었다. 희망의 불씨 같은 게 담긴 드라마였는데, 그 주인공은 이름 없는 시민들이었다.

 

다시 보이는 K콘텐츠의 진면목, 비판의식

외신들은 K콘텐츠에 대한 전 세계적인 열광에 국가적 자긍심이 높은 한국이 이번 사태를 통해 심각한 평판의 타격을 입었다고 전하기도 했지만, 잘 들여다 보면 이번 사태는 K콘텐츠의 힘이 어디서 비롯됐는가를 정확히 알려준 것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해외에서 주목받은 K콘텐츠들은 대부분 한국사회가 가진 다양한 문제들을 꼬집거나 비판하는 작품들이었다. 외신이 ‘디스토피아’라는 표현을 썼던 것처럼 K콘텐츠에 투영된 한국 사회는 어두운 터널 안에 들어 있었다. 

 

곧 시즌2가 나올 ‘오징어게임’이 그려낸 디스토피아는 치열한 경쟁이 내면화된 계급사회였다. 약자들이 서로 경쟁하게 만들어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는 그 치열함과 처절함을 동력으로 굴러가는 사회가 그것이었다.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상을 받은 ‘기생충’은 어떤가. 지상과 반지하 그리고 지하라는 공간으로 구획된 한국사회의 양극화를 이 작품은 블랙코미디로 그려냈다. 한국을 이른바 K좀비의 종주국으로 만든 무수한 한국형 좀비물들도 대부분 한국사회가 가진 모순되고 부조리한 시스템들을 비판한 것들이었다. ‘킹덤’이 조선사회를 빗대 권력에 굶주려 좀비가 된 지배층과 배고픔에 굶주려 좀비가 된 서민들을 비교했다면, ‘지금 우리 학교는’은 한국의 입시경쟁이 만들어내는 몰개성화되어 엇나가기도 하는 아이들의 비극적인 현실을 담았다. ‘부산행’은 KTX에 창궐한 좀비들과의 사투를 통해서 압축성장한 한국사회가 마주한 위기들을 디스토피아로 그려내지 않았던가.  

 

즉 K콘텐츠가 가진 진짜 힘은 바로 이러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마주한 문제들은 우리만이 아닌 자본화된 현대사회가 맞닥뜨린 문제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전 세계적인 공감이 생겨났다. K콘텐츠가 글로벌한 각광을 받게 된 이유였다. 이렇게 된 데는 한국사회가 전쟁 후 짧은 기간 안에 압축성장해오며 겪은 일들이 사실상 자본화 단계에서 발생하는 많은 일들을 포함하고 있어서였다. 그래서 한국사회는 빠른 성장을 했지만, 그만큼 다양한 문제들을 동시에 품고 있었고 이에 대한 비판의식들이 K콘텐츠의 자양분이 됐던 거였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이번 비상계엄 사태가 터졌을 때 시민들이 그 비현실적인 장면을 보며 국회로 달려갈 수 있었던 데는 K콘텐츠가 그려내곤 했던 디스토피아의 양상들을 통해 이 사태가 야기할 문제들을 즉각적으로 실감한 부분도 작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서울의 봄’이 주목받게 된 건

작년 방영되어 1300만 관객을 동원하는 신드롬을 불러 일으킨 영화 ‘서울의 봄’은 이번 계엄 사태를 통해 또다시 주목받았다. 79년 12월12일에 버러진 군사 반란을 소재로 긴박하게 돌아간 7시간의 기록을 담은 이 영화는 시민들에게 중요한 교육적 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당시 상황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젊은 세대들도 이 영화를 통해 당대의 계엄 사태를 눈앞에서 생생히 경험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비상계엄 사태가 터졌을 때 인터넷에서는 이 사건을 ‘2024년판 서울의 봄’이라고 칭하며 재개봉을 추진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기도 했다. 또 ‘서울의 봄’을 패러디한 ‘서울의 밤’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했다. 한편의 작품이 그 시대의 어둠을 치열하게 담아냄으로써 현재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서울의 봄’은 이번 사태를 통해 보여줬다. 

 

넷플릭스에서 지난 10월 공개됐던 김상만 감독의 영화 ‘전,란’도 이번 비상계엄 사태를 통해 재조명됐다. 임진왜란을 시대적 배경으로 조선 최고 무신 집안의 아들 종려(박정민)와 그의 몸종 천영(강동원)이 각각 선조(차승원)의 최측근 무관과 의병이 되어 서로 칼을 겨누게 되는 상황을 그린 이 작품에서는 왕의 무능이 어떻게 민란으로까지 이어지는가를 그려냈다. 전쟁으로 피폐된 상황에서도 궁궐을 짓는데만 혈안인 왕의 실정으로 결국 봉기하는 민초들의 모습은 현재의 탄핵 정국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번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 그리고 이어진 탄핵정국이라는 일련의 사태들이 보여준 건 몇몇 권력자들이 만들어낸 위기상황 속에서도 빛나는 시민의식이 한국사회가 가진 희망이라는 점이다. 여의도 집회 현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이 저마다 색색의 응원봉을 들고 한 마음이 되어 한 목소리를 내는 광경은 바로 그걸 상징하는 장면들이었다. 그리고 이 드라마틱한 장면들 속에서 떠오르는 무수한 K콘텐츠들의 잔상들은 이 작품들이 본래 시민들이 가진 건정한 비판의식들을 담고 있었다는 걸 새삼 절감하게 만든다. K콘텐츠는 바로 이 높은 시민의식들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과 시대적 갈증들을 담아내면서 대중들의 호응을 얻었던 거였다. 

 

혹자들은 이번 비상계엄 사태가 언젠가는 K콘텐츠의 소재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이다. 비현실적으로 여겨질만큼 드라마틱한 사건이 아니었던가. 이러한 현실에 대한 재연과 재구성을 통한 비판과 문제의식의 공유는 K콘텐츠에도 또 한국사회에도 희망을 갖게 하는 토양이 될 것으로 보인다. (글:시사저널, 사진:영화'서울의 봄')

‘대립군’, 왕과 백성은 어떻게 소통하고 성장하는가

‘남을 대신해 군역을 하는 사람’을 뜻하는 <대립군>이라는 제목은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렇게 누군가의 허깨비가 되어 오로지 살아남아야 그 존재가 의미를 갖는 ‘대립질’을 하는 민초들을 뜻하기도 하지만, 임진왜란 시절 선조의 분조에 의해 반쪽짜리 왕으로 추대된 광해를 뜻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군’은 군대를 뜻하기도 하지만 임금을 뜻할 수도 있는 것이니 말이다. 

사진출처:영화<대립군>

영화 <대립군>은 그래서 임진왜란이라는 절체절명의 국가위기 상황을 전제하고, 그 안에 왕과 백성이라는 두 존재를 ‘대립군’이라는 하나의 틀로 묶어낸다. 애초에 왕이 되고 싶지 않았던 유약한 왕 광해는 대립군과 함께 하는 여정을 통해 조금씩 백성들의 고단함이 무엇인지 또 그들이 원하는 왕이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를 깨달아간다. 

백성을 대표하는 인물은 대립군의 수장 토우(이정재)다. 그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광해를 절벽 끝에 세우는 인물이다. 그는 용감하게 적과 맞설 수 있는 그 힘은 바로 그 절벽 끝에 서있어 갖게 되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광해에게 말한다. 편안한 삶을 살아왔을 광해는 이 대립군과 함께 지내는 절벽 끝의 시간들을 통해 점점 왕으로서의 자신을 세워나간다. 

자신을 죽이려는 조정의 세력들과 또 왜군들에게도 추격당하며 굶주림 속에 산속을 헤매던 광해가 일단의 백성의 무리들을 만나는 장면은 드디어 왕과 백성이 제대로 마주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백성들로부터 식량을 빼앗으려는 신하들을 광해는 제지하고, 그래서 백성들이 밥을 지어 왕과 나누자 광해는 자신이 그들에게 해줄 게 잠시간의 고단함을 풀어줄 춤사위밖에 없다며 춤을 춘다. 백성 앞에서 춤을 추는 왕. 그렇게 한껏 자신을 낮추는 순간, 백성들은 저절로 고개를 숙인다. 

왕이 제대로 된 왕으로 서게 되고, 또 백성이 백성의 자리를 찾아가는 그 과정은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대신하는 삶을 살아온 광해와 대립군이 절벽을 뒤로 한 작은 성에서 결사항전을 하며 그들은 그 전쟁이 이제 누군가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사투라는 걸 확인한다. 광해는 그 결사항전을 거쳐 스스로를 왕이라고 자인하게 되고, 대립군들은 비로소 자신의 이름으로서 당당히 서게 된다. 

<대립군>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 이야기가 작년부터 현재까지 우리가 겪고 있는 정국과 맞물려 묘한 여운을 남기기 때문이다.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를 접하고 대통령 탄핵과 새로운 대통령을 세우는 그 과정을 온전히 해낸 건 다름 아닌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갔던 국민들이 아닌가. 문재인 대통령이 ‘운명’이라고 말하며 그 힘겨운 여정을 통해 대통령이 된 과정에는 항상 함께하는 국민들이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며 국가의 위기상황에 힘을 모으고 그럼으로써 대통령과 국민이 스스로 자신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역할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가는 과정은 그래서 저 영화 <대립군>의 광해와 대립군 사이의 소통과 성장을 닮았다. 

<대립군>은 물론 스펙터클한 전투 장면들이 있지만 그런 액션 장르를 추구하는 영화는 아니다. 대신 왕과 백성의 소통을 통한 성장과정을 그들이 겪는 혹독한 전쟁을 통해 담아낸다. 그래서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보여주기보다는 한번쯤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주는 영화다. 특히 지금의 정국을 영화 속 상황과 견주어보면 더더욱 큰 울림을 주는.

‘역적’, 기꺼이 홍길동과 함께 역적이 되고픈 이유

연산(김지석)의 폭정은 날이 갈수록 혹독해진다. 여악들이 아기를 낳자 그 아기를 엄마에게서 떼어낸 후 땅에 묻어버리라고 하고, 임금이 사냥을 나오는 곳에 들어오는 자는 목을 잘라 성문 앞에 내건다. 급기야 학정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익명서’를 붙인다. 지금으로 치면 대자보다. 그 익명서를 붙이다 잡힌 이들은 역시 죽을 때까지 두드려 맞는다. 

'역적(사진출처:MBC)'

MBC 월화드라마 <역적>이 하필이면 연산군 시절의 그 암흑기를 사극의 소재로 삼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결국 사극이란 과거의 어느 시점을 현재로 가져오는 것이고, 따라서 그 시점이란 현재와 조우하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역적> 작가의 우리네 현재의 삶이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이 연산군 시절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인식이다. 

<역적>에는 지금의 우리가 처한 시국 상황을 연상시키는 대목들이 다수 등장한다. 익명서를 붙였다고 끌려가 죽어가는 백성들을 보다 못한 길동(윤균상)이 그들을 구해내고 싶다고 하자 길동의 형 길현(심희섭)은 궁의 담이 높아서 백성들이 그걸 넘지 못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그것보다는 감히 임금을 범하지 못하는 그 ‘마음의 담’이 높아서라는 것.

지난 탄핵 정국 때 대통령을 감히 넘어서는 안 될 신성한 존재처럼 감싸던 이들이 갖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마음의 담’일 것이다. 이미 시대는 왕의 시대가 아니라 국민의 시대로 바뀌었는데, 여전히 과거에 살아가는 이들은 대통령을 받들어야 할 존재로 여기고, 국민은 왕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그렇게 ‘마음의 담’이 공고해지는 건 임금 혼자가 아니라 그 주변을 둘러싼 촘촘한 권력구조 때문이다. “그래. 전하는 조선의 쌀이고 군사고 땅이지. 해서 전하 뒤에 숨어 쌀과 군사와 땅을 얻는 자들이 많아. 그자들은 아무리 임금이 학정을 해도 자신들의 안위만 보장된다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그자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임금은 안전해.”

임금 주변에 달라붙어 권력과 사익을 추구하는 비선실세들이 존재하고,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임금을 보호 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 ‘마음의 담’이 무너지지 않고 공고해진다는 걸 <역적>은 길현의 목소리를 통해 드러낸다. 결국 여기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건 백성 스스로 의식을 바꾸는 일이다. 그래서 길동은 숨어서 움직이는 도적이자 의적이 아니라, 나서서 세상을 바꾸는 역적이 기꺼이 되려 한다.

“성님, 말을 들으니 사람들 마음의 담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줄 이제야 알겄소. 해서 밤에 몰래 백성들 꺼내오는 일은 안하겄소. 대신 벌건 대낮에 백성들 꺼내 올랍니다. 만약 벌건 대낮에 임금님 안방에 들이닥친 미친놈들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백성들 마음의 담이 좀 낮아지지 않겄소?” 숨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나서서 모든 것들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게 싸워나가는 것. 이것은 우리가 최근까지 촛불을 들고 부조리를 알리려고 했던 그 집회의 의미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그 궁극의 목표는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임금이지만 감히 범할 수 없다는 ‘마음의 담’ 때문에 하지 못했던 임금을 바꾸는 일이다. “하늘에서 큰 눈이나 우박이 내리면 한 해 농사를 다 망쳐버리지요. 그런데 어쩌겠소. 그건 우리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임금님은 하늘에서 내리는 우박도 아니고 큰 눈도 아닙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요.”

길동의 이 연설은 마치 탄핵 정국에서 광화문 광장에서 들려오던 그 목소리들을 고스란히 연상케 한다. 연산의 폭정과 비선실세들 그리고 이어지는 탄핵의 목소리. <역적>은 탄핵 정국을 일찌감치 예견이라도 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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