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내 곁에'의 진정성을 만든 배우들

20kg이라는 살인적인 감량.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몸. 심지어는 미이라 같다는 말까지 들은 김명민의 바짝 마른 몸에서는 눈물 한 방울 나오는 것조차 신기할 따름이었다. 루게릭병 환자 백종우 역을 하면서 그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중력을 견뎌내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 들어올리기가 어렵고, 얼굴에 달라붙은 모기 한 마리 쫓아내지 못하는 이 잔인한 병은 고단하고 힘겨운 육신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김명민이 왜 그런 몸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는지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그는 이 영화의 다른 중력을 만들어내고 있었으니까. 자칫 눈물의 신파로 번져나갈 수 있는 어수룩한 루게릭병 흉내로는 이 병이 갖는 눈물의 진정성을 보일 수 없었을 테니까.

이처럼 이 영화에서 김명민에 대한 주목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김명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먼저 주목할 만한 연기자는 상대역인 하지원이다. 그녀는 점점 히스테릭해지는 백종우의 짜증을 다 받아내면서 웃음 뒤에 눈물을 삼키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손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백종우를 즐겁게 하기 위해 병실에서 핑클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은 백종우가 가진 무거운 중력의 세계 속에 한 줄기 깃털 같은 미소를 만들어낸다. 다리를 다친 장의사였던 아버지, 장례지도사라는 직업은, 죽음을 공기처럼 마시면서도 밝게 살아가는 그녀가 왜 백종우 앞에 갑자기 나타나 사랑을 '불태우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녀의 눈물은 한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의 한 여자의 눈물이면서, 동시에 그 죽어가는 인간을 바라보는 인간으로서의 눈물을 보여준다.

이 영화가 단지 백종우와 이지수(하지원)의 슬픈 러브스토리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루게릭병이라는 소재를 통해 인간애를 다루는 것이라는 점에서, 김명민과 하지원 이외에 같은 병실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은 조역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주연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눈에 띄는 인물은 개그맨에서 묵직한 연기로 돌아온 임하룡과, 삭발투혼까지 벌인 임성민의 열연이다. 거의 시체처럼 누워있는 춘자 역할을 맡은 임성민은 단 한 번 움직임을 보여줄 뿐이지만 상대역인 임하룡 특유의 너스레가 섞인 안타까운 얼굴과 어울리며 눈물 섞인 웃음을 만들어낸다. 아내의 죽음을 앞에 둔 자의 농담은 웃기는 만큼 눈물겹다.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손가인은 피겨스케이팅에서 트리플 악셀을 하다가 사고를 당해 전신마비가 된 서진희를 연기한다. 보는 이들을 심지어 분개하게 만드는 그 자연스러운 싸가지 연기는 첫 연기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 유일하게 자신을 꾸짖는 백종우와 서로 움직이지 못하는 몸을 침상에 두고 "너 이리와 봐!"하고 한 바탕 말로 싸우는 장면은 우스우면서도 움직일 수 없는 병이 가진 삶의 조건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든다. 한편 9년 동안 식물인간 상태인 남편과 그 남편을 지켜온 아내 역할을 연기한 남능미와 최종률, 그리고 수년째 식물인간 상태인 형과 그 형을 돌봐온 동생 역할의 임종윤과 임형준은 그 애증이 교차하는 환자와 환자가족의 이야기를 먹먹하게 전해준다.

이들은 모두 김명민과 하지원의 연기와 어울려 하나의 거대한 진정성을 구축해낸다. 박진표 감독은 독특한 사건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이 특별한 조건에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면면을 담담하게 담아내는 것으로 이 발군의 진정성을 담은 연기를 영상에 고스란히 담아낸다. 자칫 감상의 함정으로 빠져버릴 수 있는 이 소재를 멜로가 아닌 휴머니즘으로, 눈물의 신파가 아닌 작품으로 만들어낸 것은 이 배우들의 열연과 그 열연을 과장 없이 담아낸 카메라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올 가을 가슴을 울리는 인간애에 먹먹해지는 카타르시스의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의 길을 알고자 했노라

사극 전성시대에 홍일점처럼 빛을 발하는 드라마가 ‘황진이’다. 칼과 화살이 날아다니고 성벽을 오르는 군사들과 그걸 저지하려는 군사들간의 피 바람이 부는 사극의 현장에서, 오색이 눈을 현란하게 만드는 화려한 한복에 나풀나풀 돌아가는 춤사위, 입만 열면 달콤한 향내가 날 것 같은 풋풋한 연인들의 부드러움으로 등장한 ‘황진이’가 눈에 띄지 않을 까닭이 없다. 그런데 단지 그 남성적인 사극과 여성적인 사극이라는 이분법에 의해 ‘황진이’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일까. 그 속에는 무언가 다른 아름다움의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역사가 발견한 현대여성 혹은 한 인간
이것은 수많은 남정네들을 갈아치운 ‘색녀’의 이야기가 아니다. 또한 한에 사무쳐 남정네들을 자신의 치맛폭에 쥐락펴락하며 한 시대를 풍미한 한 악명 높은 기녀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운명이라는 굴레 속에 세워진 마음의 줄 위에 올라 한바탕 최고의 연희를 벌였던 한 여인, 예술가, 혹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이 운명에 맞서는 여인의 모습은 당찬 현대여성의 그것과 맞닿아 있다.

여기에 하지원이라는 카드는, 아주 여성적이면서도 그 안에 남성성을 누를 수 있을 만큼 강렬한 카리스마가 존재하는 황진이 캐릭터에 힘을 부여했다. 하지원의 등뒤에 든든히 선 김영애(임백무 역)와 전미선(황진이 모역)은 황진이 속에 존재하는 두 성격의 모태가 될 만큼 특징적이다. 그 양분을 먹고 자라난 황진이는 여성적인 카리스마가 무엇인지를 보여줄 보다 현대적인 여성 캐릭터를 기대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 황진이가 운명과 벌이는 싸움은 다분히 예술가의 삶을 닮았다. 그녀는 가슴속에 생긴 커다란 상처를 예술로서 풀어낸다. 이러자 이 이야기는 단지 한 여성의 아름다움을 넘어서 인간의 보편적 아름다움으로 확장된다. 칼날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그 칼을 가슴에 품어 만신창이가 된 마음을 갖고도 당당히 서서 제 갈 길을 가는 한 인간의 모습일 것이다. 그것은 또한 현대적인 미적 가치와도 잘 맞아떨어진다.

마음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드라마
그 사랑과 운명 사이에 세워진 마음 줄은 그저 장난스런 유희가 아니다. 자칫 발 하나를 잘못 디뎌 균형을 잃는 날에는 살 판이 죽을 판이 되는 그런 줄이다. 사실 칼과 화살만 없다 뿐이지, 조선시대 기생이라는 황진이가 처한 삶은 피비린내 나는 마음의 전쟁과 다를 바가 별로 없다.

기녀는 교방에 발을 디디는 그 순간부터 삶이 결정된다. 그것은 법도라는 사회적 굴레 속에서 사랑도 할 수 없고, 혼례 또한 치를 수 없는 그런 삶이다. 그들은 재주를 익히고, 미색을 키우며 그 재주와 미색을 무기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황진이가 처한 상황이다. 그러니 황진이의 어미인 현금이 그녀를 어린 시절 절로 보낸 것은 바로 그런 세습되는 굴레를 벗어나게 하고자 함이었다. 현금의 마음 한 가운데 자리잡은 것은 바로 자식이 겪을 마음 고생에 대한 회피이다.

이 드라마에서 절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상당한데, 그것은 저 마음과 욕망의 전쟁터인 세속으로부터의 해탈이란 의미를 갖고 있으며 그것이 이 드라마 황진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황진이가 절을 빠져나와 교방에서 재인의 삶을 선택하는 것은 마치 자기완성을 위해 속세로 뛰어드는 불승과 유사하다. 황진이의 마음은 사랑에 이끌리나 사랑을 얻지 못하고, 운명을 거부하려 하나 벗어나지 못한다. 차라리 전쟁이라면 싸워 이기거나 지면 끝날 것이지만 이 마음의 전쟁은 그 운명을 이겨내고 벗어나서 자유로워져야 끝나는 것이다. KBS 드라마 ‘황진이’는 바로 그 마음 줄 위에 서서 줄의 굴레를 넘어서 오히려 자유로워진 한 영혼을 노래한다.

한복만 입히면 다 사극인가
굵직한 캐릭터와 예사롭지 않은 메시지를 무기로 가진 황진이는 아름다운 화면으로 옷을 입는다. 최근 들어 사극에 등장하는 복식은 점점 역사라는 굴레를 벗어나 화려해지고 다양해지고 있다. 그것이 분명한 볼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빠진 듯한 느낌을 갖게 되는 건 왜일까. 그것은 우리네 복식을 화면구성이 제대로 잡아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황진이’가 방영되기까지 사극은 그 화려한 CG 전투장면을 빼고는(이것도 그다지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는다) 이야기 전개에 급급한 화면처리를 해왔다. 나란히 장수들이 서서 화면 쪽을 바라보며 적의 동태를 얘기하는 화면은 너무나 연극적이어서 드라마가 과거로 퇴행하는 느낌마저 준다. 또한 누가 누군가를 찾아가고 인사를 하고 앉기를 권하고 앉아 대사를 처리하는 장면도 너무나 관습화되어 있다. 말이 달려가고 기습을 하고 사로잡히고 하는 모든 사극의 장면들은 이제 영상미학을 포기한 지 오래다.

황진이는 드물게도 이들이 포기한 유려한 미장센을 다시 끌어들였다. 춤사위에 살짝 움직이는 손끝과 발끝에도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것은 화려한 복식의 색 때문이 아니다. 꽃잎이 떨어지는 길을 걸어오는 황진이의 모습은 부감으로 잡혀 우리네 담장과 조화를 이루며 한국적인 미를 보여준다. 정자 끝에 걸린 파란 하늘과, 정자 아래로 언뜻 보이는 연꽃들의 장관 역시 마찬가지다. 황진이와 백무가 탄 배가 화면 좌측에서 우측으로 움직이는 장면은 동양화 속으로 한발 들어갔다 나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아름다운 한복이 아름다운 영상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그것을 잡아내는 섬세한 카메라만이 그걸 가능하게 해준다.

교방 이야기로 인간의 길을 조명
또한 이 드라마가 가진 미덕은 그 흥미진진한 대결구도의 교방생활과 조선시대의 연애 풍경이라는 호기심에도 불구하고 그런 가벼운 소재들을 엮어 ‘인간의 길’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향해 간다는 것이다. 그저 단순하게 기생의 삶을 그렸다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교방 풍경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교방생활은 수련자와 구도자, 그리고 예술가의 길과 다르지 않게 그려진다. 그들은 호흡을 길게 하려고 물 속으로 잠수를 하고, 손끝 발끝의 선을 살리기 위해 줄에 매달려진다. 걸음걸이 하나를 만들기 위해 줄타기를 하며, 가야금에서부터 거문고까지 밤낮 없이 연습에 몰두한다. 또한 우리가 흔히 생각하던 조선시대의 연애풍경을 그림에 있어서도 그 절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만남과 이별과 그리움 같은 것들이 고풍스러운 멋으로 잘 포장되어 보여지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 드라마가 호기심 충족과 자극적인 재미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황진이는 재주와 미색과 더불어 한 가지 무기를 더 갖는다. 그것은 바로 ‘마음을 부릴 줄 아는 힘’이다. 이 힘은 그녀의 스승인 백무의 표현대로 ‘고통’에서 나온다. ‘고통과 벗해야 진정한 기녀이자 예인’이라 할 수 있다는 백무의 말은 사실 ‘인간의 길’과 다르지 않다. 허태휘가 한 “당신의 삶은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에, 황진이가 했다는 그 말, “인간의 길을 알고자 했노라”고 답한 그 말과 일맥상통한다. 황진이가 처한 삶이 주는 고통은 예술을 통해 승화되고, 그 과정에서 그녀는 사랑 저 너머에 있는 인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드라마 ‘황진이’는 전하려는 메시지와 그걸 담는 영상문법이라는 그릇이 제대로 맞아떨어진 보기 드문 작품이다. 그 아름다움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할 수 없지만, 그 궁극적인 길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황진이’가 앞으로 보여줄 인간의 길이 자못 궁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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