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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시청률지상주의 넘어선 2006 베스트 현대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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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포스트 트렌디 드라마들
올해는 사극은 약진하고 현대극들은 주춤했던 한 해였다. 처음에는 월화 드라마를 ‘주몽’이 잠식하더니, 주말 드라마에 ‘연개소문’과 ‘대조영’이 포진하고, 수목 드라마마저 ‘황진이’가 장악하면서 현대극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과거 형태의 구태의연한 답습을 거듭하는 트렌디 드라마는 더더욱 살아남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꿋꿋이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은 드라마들이 있다. 시청률과는 무관하게 특별한 시도와 보다 높은 완성도를 무기로 이들은 우리네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포스트 트렌디 드라마’의 징후를 읽게 해준 그 드라마들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웰 메이드 드라마, ‘연애시대’
‘연애시대’가 끝난 지 꽤 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 금단증상을 이야기한다. ‘연애시대’를 축으로 그 이전의 드라마가 있고, 그 이후의 드라마가 있다고 할 정도로, 스토리면 스토리, 연기면 연기, 연출이면 연출 어느 하나 군더더기 없는 이 드라마로 인해 여타의 드라마들이 어딘지 시시해 보인다는 것. 영화인들이 참여해 만들어낸 이 드라마는 드라마 제작에 있어서 사전제작에 대한 논의가 일어날 정도로 완성도를 높였다. 감우성, 손예진의 감칠맛 나는 연기에 주연만큼 빛났던 공형진, 이하나는 물론이고 김갑수, 서태화, 오윤아, 문정희까지 어느 조연하나 뺄 수 없이 드라마의 독특한 감미료가 되어주었다. 이러한 연기자들의 호연을 바탕으로 악역이 없는 대신 내적 갈등을 만들어 상황을 관조하게 하는 설정과, 충분한 공감을 일으키면서도 도발적인 ‘이혼 후 시작된 연애’라는 소재, 시간의 씨줄과 날줄을 엮는 연출력이 잘 어우러졌다. 이로써 ‘연애시대’는 지금까지 드라마가 해온 그 이상을 만들어내며 ‘웰 메이드 드라마’의 성공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새로운 내러티브의 실험, ‘굿바이 솔로’
최근 들어 종종 볼 수 있는 새로운 내러티브로서 다중스토리 구조를 들 수 있다. 하나 혹은 둘의 주인공 캐릭터가 나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전통적인 스토리 구조가 아닌 여러 인물들이 똑같은 비중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해나가면서 어떤 울림을 만들어가는 내러티브 방식이다. ‘러브 액추얼리’와 ‘숏컷’ 그리고 ‘크래쉬’라는 영화를 통해 우리는 그 현상을 목도한 적이 있다. 노희경 작가가 ‘굿바이 솔로’를 통해 무려 10여 명에 달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개인화되고 파편화되는 현대인들의 드라마 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전통적 스토리 구조가 역부족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해체된 가족으로부터 상처받은 이들 캐릭터들은 하나둘 카메라 속으로 모여들어 유사가족을 만들어낸다. 카메라 안으로 들어온 인물들은 서로 아파서 부둥켜안으면서 상처를 핥아준다. 노희경 작가는 이들 여러 인물들과 그들의 어우러짐을 주관 개입을 극도로 절제하면서 카메라 속에 넣는데 성공함으로써 이 시대 가족드라마(가족보다 이웃이 낫다)의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었다.

드라마에 대한 만화적 접근, ‘환상의 커플’
만화적 감수성이 하나의 장르적 틀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걸 보여준 드라마가 ‘환상의 커플’이다. 원작만화를 드라마화한 게 아니지만 만화만큼 재미있는 ‘환상의 커플’의 성공요인은 ‘만화 같은 이야기’가 더 이상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었다. 이제 더 이상 그 말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던가, 완성도가 떨어진다던가 하는 의미가 아니다. 이 드라마를 통해서 그것은 상상력과 캐릭터가 독특하며, 이야기 진행이 유쾌하면서도 나름대로의 진지성이 있는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게 되었다. 특히 만화적 캐릭터를 제대로 소화해낸 한예슬은 수많은 유행어를 남길 만큼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코믹 드라마는 기존 트렌디 드라마들의 상투적인 진지함을 벗어나 만화적 편안함과 유쾌함을 만들어주었다.

남자의 눈물을 보여준 ‘투명인간 최장수’
이른바 ‘남성신파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극중에서 남자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것은 과거와는 달라진 남녀의 사회적 위상이 반영된 결과. 드라마를 보는 주 시청자는 여성이지만 그들은 더 이상 우는 여성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의 현상처럼 나타난 것이 남자의 눈물이다. ‘투명인간 최장수’는 이 시대에 가족에게 있어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가장의 이야기. 알츠하이머에 걸린 최장수를 통해 가족들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고싶은 아버지의 모습을 제대로 담아냈다. 이 사나이 울리는 신파 드라마는 그러나 웃으면서 우는 연기가 물에 오른 유오성으로 인해 아버지의 초상을 제대로 그려낸 신파 이상의 의미를 만들어냈다. 새로운 드라마 시청층의 가능성을 보여준 드라마이다.

장르의 폭을 넓힌 ‘돌아와요 순애씨’
‘투명인간 최장수’의 정반대편에 선 ‘돌아와요 순애씨’는 아줌마들의 웃음을 공략하며 인기를 끌었다. 이 40대 아줌마와 20대 처녀의 영혼이 바뀐다는 황당한 설정의 드라마는 그러나 그 전하려는 메시지에 있어서 아줌마들의 감성을 매료시켰다. 시트콤에나 가능할 것 같은 이러한 설정이 수목드라마에서 제대로 시청자들에게 소구한 것은 장르적으로 선택한 코미디에 진한 페이소스를 달아놓았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여자들의 연대에서부터, 생활력에서부터 만들어진 아줌마 속성에 대한 웃지 못할 풍자, 젊은 여자에 대해 갖는 남자들의 속물근성 등등 남녀 관계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을 다룬다. 40대 아줌마에서 20대 처녀로 탈바꿈한 순애씨의 거침없는 비판과, 욕망의 분출은 TV 앞에 앉은 수많은 우리 시대의 아줌마들에게 커다란 카타르시스를 주었다. 새로운 시도에 대한 진지함이 시청자에게 얼마나 공감을 줄 수 있는가를 보여준 드라마다.

상큼발랄 아줌마 트렌디, ‘발칙한 여자들’
우리네 드라마 세상에서 아줌마들이란 ‘불륜’과 ‘신파’를 오가며 살아왔다. 하지만 ‘발칙한 여자들’이 꿈꾸는 세상은 끈적임 없는 상큼 발랄 경쾌한 세상이다. 과거 아줌마 이미지에서 기름기와 물기를 쪽 빼내 비로소 ‘여자’를 보기 시작한 드라마, 바로 ‘발칙한 여자들’이다. 이 질척하지 않은 발칙한 여자의 복수극이 상큼했던 것은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알고 경제적으로도 독립했고, 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한 아줌마’ 캐릭터로부터 가능해진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알게된 여자는 이제 다른 남자들에게 사랑 받을 자격이 갖춰진 셈이다. 이로써 ‘발칙한 여자들’은 ‘아줌마의 사랑 = 불륜’이라는 악의적인 등식을 깨고 당당한 ‘중년여성의 사랑’을 보여준 드라마다.

사회적 편견과 맞선 진짜 트렌디, ‘여우야 뭐하니’
‘여우야 뭐하니’는 과거와는 달라진 사랑방정식으로 보여준 트렌디 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먼저 재벌집 아들도 아니고 신데렐라를 꿈꾸는 여자도 아닌 보통 남녀의 사랑으로 선회한다. 이 밋밋해 보이는 설정에 드라마성을 가미해주는 것은 최근의 결혼풍속도라 할 수 있는 연상연하 커플. 나이와 나이에 따른 현실 등이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편견과 맞선 트렌디라 할만하다. 결국 사랑이야기에, 그 사랑에서 선택해야할 것이 현실이 아닌 마음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드라마이지만 요즘의 트렌드를 제대로 읽어낸 진짜 ‘트렌디 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그 밖의 다양한 시도들
이밖에도 저 김윤석이라는 배우의 가능성을 읽게 해주었던 ‘인생이여 고마워요’, 금요드라마는 불륜드라마라는 공식을 깬 ‘내 사랑 못난이’, 공백을 메꾸려 채워졌지만 호평을 받으며 사회드라마의 가능성을 보여준 ‘내 인생의 스페셜’, 최근 아직 종영하지 않았지만 불륜과 불치에 대한 새로운 공식을 써나가는 ‘90일 사랑할 시간’ 등등 열거하지 못한 많은 트렌디 드라마들의 시도가 있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주6일사극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인해 더 치열했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시청률은 저 사극들의 빛에 가려졌지만, 보다 완성도를 높이려는 시도를 한 몇몇 드라마들이 있어 트렌디를 뛰어넘는 포스트 트렌디를 기대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