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거탑’, 드라마 진화 완성시킬까
‘하얀거탑’에 대한 칭찬일색은 그 동안 우리 드라마들이 얼마나 부족했던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구태의연한 뻔한 스토리를 가진‘트렌디 드라마’, 짜여진 스토리와 영상으로 승부하지 않고 편법에만 기대는 ‘시청률 성공, 드라마 실패인 사극’, 어떤 외피를 입어도 늘 멜로에만 집착하는 ‘무늬만 전문직 드라마’가 그 대표 삼인방이다. 물론 아예 시청률을 의식해 욕먹기로 작정한 ‘논란 드라마’는 얘기할 가치도 없다. 이런 드라마들에 식상한 시청자들은 비로소 ‘하얀거탑’이라는 제대로 된(well made) 드라마를 보면서 탄성을 질렀다. 오죽 제대로 된 드라마가 없었으면 ‘웰 메이드 드라마’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하지만 ‘하얀거탑’이란 웰 메이드 드라마는 그냥 우연히 탄생한 것이 아니다. 사실 시청률이 그다지 높지 않았지만 식상한 드라마를 넘어서 그 징후를 보였던 드라마들이 있었다.
‘연애시대’, 트렌디 드라마와 이혼하다
‘연애시대’가 기존 트렌디 드라마의 공식을 깰 수 있었던 것은 그걸 만든 이들이 영화인들이었다는 데 있다. 사전제작을 시도한 첫 번째 드라마였지만 100% 사전 제작이 어려웠던 이 드라마는 영화와는 다른 호흡으로 영화인들을 당혹스럽게 했지만 그들은 노련했다. ‘이혼 후에 시작된 연애’라는 도발적 소재에도 불구하고 진지함을 잃지 않았으며, 탄탄한 캐릭터를 가진 주연이 드라마를 끌고 가는 힘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매몰되지 않았다. ‘연애시대’만큼 출연한 거의 대부분의 조연들이 드라마 말미까지 사랑스러운 드라마는 많지 않다. 스토리면 스토리, 연출력이면 연출력, 영상이면 영상, 연기면 연기까지 도무지 딸리는 것이 없는 이 드라마를 두고 우리는 드디어 ‘웰 메이드 드라마’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이 호칭이 과장이 아닌 것은 기존 트렌디 드라마들이 해왔던 관행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재벌가 남자와 신데렐라형 여자 캐릭터가 만나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는 기존 트렌디 드라마에서 도발적 소재는 있을지 몰라도 진지함은 찾기 어려웠고, 조연은 물론이고 주연조차 식상하기는 마찬가지였으며, 공식으로 만들어지는 스토리와 연출 속에서 영상미는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니 ‘연애시대’는 식상한 기존 드라마들과 이혼한 시청자들이, 그 후에 새롭게 연애를 시작하게 만든 드라마로 기억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웰 메이드 드라마’에 대한 가능성을 알게 된 드라마 폐인들이 제대로 된 드라마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된 것이다.
‘황진이’, 사극을 갖고 한바탕 놀다
‘황진이’에 ‘웰 메이드 드라마’라는 호칭을 부여하게 만드는 것은 그만큼 기존 사극이 기본을 지키고 있지 않았던 탓이 크다. 퓨전사극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출현은 사극과 역사 사이의 간극을 더 넓혀놓았다. 그 사이를 차지하고 들어간 것은 상상력. 정통사극이다 퓨전사극이다 하며 서로들 주장을 해대지만 사실 고구려 사극들은 모두 정통사극으로 보기가 어렵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존재할 뿐. 역사에 그래도 조금 가까운 것이 ‘대조영’이며 그 다음이 ‘연개소문’, 그리고 역사에 가장 멀어 오히려 환타지나 무협에 가까운 것이 ‘주몽’이다. 이들 사극들이 치열한 경쟁에 들어가면서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억지 설정이 남발되었고, 사극의 기본이랄 수 있는 전투 장면의 부실이 도마 위에 올랐다. 결과적으로 20%에서 45%에 이르는 높은 시청률을 이들 사극들은 갖게 되었지만 완성도는 현저히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 칼바람이 쌩쌩 부는 시기에 가녀린 한복을 입고 나타난 ‘황진이’는 칼 대신 거문고를 메고, 전장 대신 연무장에 올라 그 화려한 몸짓을 선보였다. 사극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미(자연, 의복, 고건물)를 느끼게 된 것은 여타의 사극과 달리 ‘황진이’가 거둔 최고의 성과가 아닐까. 미학이라고 해봐야 고작 중국식 무협동작의 아름다움 정도였던 우리네 사극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것이다. 상대적으로 짧은 횟수로 인해 역시 많은 아쉬움이 있는 사극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충분한 캐릭터와 그것을 소화해낸 아낌없는 연기, 그리고 이야기성에 연출력까지 돋보인 사극임에는 틀림없다. 이것이 저 고구려사극들과 한바탕 걸판진 승부를 벌인 ‘황진이’에 ‘웰 메이드 사극’이란 호칭을 붙이는 이유다.
‘하얀거탑’, ‘무늬만 전문직’ 도려낼까
작년부터 슬슬 불기 시작한 것이 제대로 된 ‘전문직 드라마’에 대한 요구. 외국의 시즌제 드라마들에 익숙한 시청자들이 많아지고 우리네 멜로 드라마들이 식상해지면서 생겨난 수요이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없을 리 없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전문직 드라마’는 포장만 그럴 듯했을 뿐, 막상 뜯어보면 멜로 드라마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형사나 의사, 변호사가 등장해도 그들의 직업적인 특성이 드라마의 갈등 요인을 작용하는 것이 아닌, 여전히 트렌디 드라마의 삼각, 사각관계만이 드라마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었다는 것. 결국에는 다 그럴 것이라는 예상을 깬 것이 ‘하얀거탑’이다.
이 드라마 속 캐릭터들은 일단 대부분이 기혼자들이다. 그러니 삼각 구도 같은 건 애초에 기대하기가 어렵다. 그런데도 손에 땀을 쥐고 보게 만드는 요인은 따로 있다.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의사라는 집단이 가진 막강한 권력과 그 이면을 움직이는 욕망들이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권력 사이에 갈등이 생겨나고 그 대결구도 속에서 신분상승 욕구를 기도하는 보편적인 인간 욕망의 정서를 의사라는 캐릭터 속에 제대로 녹여놓은 것이 그 성공 요인이다. 요컨대 의사는 사람을 살려야 하는 가장 인간적인 직업이면서도 동시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이 이 드라마 캐릭터들이 갖는 가장 큰 매력이다. 김명민을 비롯한 이정길, 김창완의 야누스를 방불케 하는 연기와 수술대를 중심으로 긴박한 상황을 잡아내는 연출력이 잘 맞물려, 멜로 없이도 성공 가능한 ‘웰 메이드 전문직 드라마’를 예고하고 있다.
드라마들은 꾸준히 진화하고 있다. 그 진화에는 반드시 선결되어야 하는 것이 실험이다. 트렌디 드라마와 사극의 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난 마당에, 이제 남은 전문직 드라마의 실험이 성공한다면 우리네 드라마 지평은 더 넓어질 것이 틀림없다. 관건은‘리얼리티’다. 얼마나 달라진 시청자들의 감성을 따라잡고, 얼마나 치열하게 드라마의 정밀도를 높여 실감나게 만드느냐가 그 성공의 척도가 될 것이다. 트렌디 드라마는 좀더 트렌드를 정확히 읽어야 하고, 사극은 사료에 충실해야 하며, 전문직 드라마는 그 전문분야에 정통해야 할 것이다. ‘하얀거탑’을 끝으로 진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모든 드라마들이 '제대로 만들어지는' 그 날, 더 이상 ‘웰 메이드 드라마’란 호칭은 불필요해질 것이다. 이것이 ‘하얀거탑’의 성공을 기대하게 하는 이유다.
'옛글들 > 드라마 곱씹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드라마 성패를 좌우하는 연기자들 (0) | 2007.01.16 |
---|---|
황수정 캐스팅 논란, 실체는 도덕불감증? (0) | 2007.01.13 |
시청률지상주의 넘어선 2006 베스트 현대극들 (2) | 2006.12.20 |
논란드라마, 누가 더 많이 욕먹었나 (0) | 2006.12.14 |
역사의 갑옷 벗은 ‘주몽’, 사극마저 버리나 (0) | 2006.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