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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명랑TV

박정현의 '나 가거든', 무엇이 우리를 울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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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스토리와 우리들의 스토리가 만나다

'나는 가수다'(사진출처:MBC)

다가오는 죽음을 앞두고 있는 자의 마음은 어떨까. '나 가거든'의 화자는 '쓸쓸한 달빛 아래' 지나는 바람 한 점에 한숨 쉬듯 묻는다. '나는 왜 살고 있는지'. '명성황후'의 OST로 잘 알려진 '나 가거든'은 바로 그 명성황후의 못 다한 목소리를 깨워내는 노래다. 명성황후로 연기했던 이미연의 "내가 조선의 국모다"라는 대사는 여전히 그 울림이 깊다. '나 가거든'은 바로 그 죽음 앞에 섰지만 '조선의 국모'로서 칼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꼿꼿함을 보인 명성황후와,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그저 한 인간으로서의 쓸쓸함과 슬픔이 교차하는 정조를 담고 있다. 아름다운 발라드에 비장미가 넘치는 것은 이 두 정조에서 비롯된다.

"작은 시간 안에 스토리의 시작, 중간, 끝 이렇게 나뉠 것 같아요." 박정현이 이 노래를 "5분짜리 연극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 건 이 곡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다. 마치 새벽녘 죽음을 앞둔 자의 외로움에 홀로 독백하듯 시작했다가, '슬퍼도' 살아야 하고, 아니 '슬퍼서' 살아야 하는 자신의 삶, 그리고 결국 죽음으로써 비로소 자신이 살아야했던 이유를 남길 수밖에 없는 절절한 마음을 토로하고는, 자신을 기억할 이들에게 그 '슬픔까지도 사랑'했다는 말을 남기며 끝이 난다. 이것은 명성황후의 엄청난 비극적인 운명을 그려내는 것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네 모든 인간의 운명을 담아낸 가사이기도 하다.

결국 죽음을 앞두고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 언젠가는 떠나게 될 것이고 그래서 슬프지만 바로 그 슬프기 때문에 살아야 하며, 그 삶이 다 하는 날 그를 기억하는 이들로 인해 한 삶을 살아낸 이유를 알 수 있는. 모두가 스러질 운명이지만 그 기억 속에 살아남아 있기에 그 슬픔 또한 사랑했다 말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바로 우리들이 아닌가. '나 가거든'은 이처럼 명성황후라는 특수한 스토리를 그려내면서도 그 안에 우리들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스토리를 담아낸다.

조수미가 성악 창법으로 담담하면서도 비장한 '나 가거든'을 불렀다면, 박정현은 자신이 말한 것처럼 때론 감정을 절제하고 때론 감정을 몰아치면서 이 노래를 한 편의 연극으로 만든다. 그래서 쓸쓸한 바람소리 같은 해금연주 위에 심지어 예쁘게까지 느껴지는 박정현의 목소리로 시작한 노래는 차츰 감정이 고조되면서 한숨 쉬듯 내뱉어지다가 '나 슬퍼도 살아야 하네'에서 그 아픈 속내를 살짝 드러내고는 다시 감춰진다. 그리고 다시 차츰 비장해지면서 감정은 폭발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두 번째 토로하는 '슬퍼서 살아야 하네'에서는 애써 숨겼던 깊은 슬픔이 마구 밖으로 드러나면서 듣는 이의 가슴을 후벼 판다.

'나 가거든'은 박정현 말고도 조관우, 김범수, 김경호 등 여러 가수들에 의해 불려졌다. 그 한국적인 '한'의 정조가 현대적인 록 발라드 장르와 너무나 잘 어우러지며 듣는 이에게 깊은 감흥을 남기면서도, 부르는 이의 창법에 따라 전혀 다른 색다른 느낌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경호의 '나 가거든'은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한 강은경 이경섭의 록 발라드 버전을 가장 충실하게 전해주면서, 이들이 작사 작곡해 김경호가 부른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김범수의 '나 가거든'은 마치 그가 부른 '하루' 같은 느낌을 주고, 조관우는 그 특유의 창법으로 한편의 오페라 같은 느낌을 준다.

반면 박정현의 '나 가거든'을 듣다보면 이 가수가 가진 다채로운 목소리와 감정 선에 놀라게 된다. 어떨 때는 귀여울 정도로 맑다가 어떨 때는 마치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로 바뀌는 박정현 특유의 창법은 그래서 이 노래를 한 편의 연극이게 만든다. 절정의 순간에 가슴 한쪽이 아려오면서 뭉클해지는 것은 이 기승전결의 스토리가 마치 드라마처럼 감정을 서서히 끌어올려 결국 폭발시키기 때문이다. 그녀의 그 가녀린 체구는 어디서 그런 깊은 아픔의 목소리가 솟아나는지, 오히려 이 폭발적인 감성을 더욱 증폭시킨다.

완벽한 스토리 라인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감정의 절제와 폭발이 적절한 스토리 라인 위에서 드라마틱하게 연출되는 '나 가거든'은 사실 노래 자체가 주는 힘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좋은 노래는 좋은 가수와 무대를 만나면 또 다른 감흥으로 다가올 수 있다. 어딘지 마지막 경연장 같은 비장미가 넘치는 '나는 가수다'라는 무대에서 박정현이라는 가수에 의해 불려진 '나 가거든'이 더더욱 우리를 먹먹하게 하는 건 아마도 그 가수라는 존재의 쓸쓸함과 슬픔과 기쁨이 노래를 통해 전해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노래는 또한 듣는 이에게도 똑같이 '나는 왜 살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래서 이 노래를 매개로한 부르는 이와 듣는 이 사이에서 느껴지는 같은 인간으로서 삶에 대한 공감이 노래로 전달될 때, 우리의 가슴은 떨릴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