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과 <운명>이 제시하는 10억의 사회학
요즘 드라마가 제시하는 액수는 1억도 아니고 100억도 아닌 10억이다. 10억이라는 돈이 제시될 때는 그만한 조건이 따라붙기 마련. MBC <운명처럼 널 사랑해>에서 이건(장혁)이 김미영(장나라)에게 10억을 주는 조건은 이혼합의서다. 아이를 낳으면 자동적으로 이혼이 되는 합의서. 10개월 동안 위자료로 10억. 한 달에 1억씩 받는 셈이다.
'운명처럼 널 사랑해(사진출처:MBC)'
SBS <유혹>에서 세영(최지우)이 석훈(권상우)에게 10억을 제시하면서 붙이는 조건은 3일 간의 시간을 자신에게 팔라는 것이다. 육체적 관계를 상상했지만 알고 보면 그것은 세영이 석훈 부부를 일종의 시험에 들게 한 대가로 보인다. 완벽하다는 그 신뢰가 얼마나 돈 앞에서 무력한가를 실감하게 하려는 것. 하지 않겠다던 석훈도 계약금으로 1억이 즉시 입금되자 눈빛이 흔들리고 결국은 먼저 아내를 귀국하게 만든다. 그리고 3일 동안 나머지 9억을 받는다.
두 드라마는 서로 다른 상황에 놓여있지만 그것은 또한 비슷한 정황이기도 하다. 돈 10억이면 사람을 사고 팔 수도 있다는 것. 돈 가진 자들의 사고방식이 스테레오 타입으로 그려져 있다. <유혹>의 세영은 돈 앞에 완전한 사랑 따위는 없다는 것을 석훈의 시간을 돈으로 사는 것으로 증명하려 하고 이것은 그대로 실제가 된다. 불편한 일이지만 ‘3일에 10억’은 하루하루를 빚쟁이에 끌려 다니며 사는 삶에게는 유혹적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이혼합의서를 내밀며 10억을 제안하는 이건의 제안에도 그대로 들어가 있다. 본뜻은 그게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돈 10억에 아이도 산다는 얘기다. 물론 <유혹>과 <운명처럼 널 사랑해>의 상황은 다르다. <운명처럼 널 사랑해>는 모성애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10억은 유혹적이지만 그렇게 강력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걸 거부하고 진심을 드러내는 김미영 앞에 그런 제안을 한 이건이 머쓱해지는 상황이다.
<유혹>과 <운명처럼 널 사랑해>는 장르가 다르지만 그 주제의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유혹>이 일종의 치정극을 보여주면서 드러내려는 건 10억으로 표징되는 자본 앞에 얼마나 우리가 무력해지는가 하는 그 불편한 진실이다. 반면 <운명처럼 널 사랑해>는 여전히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현실에서 그래도 사람의 가치를 지키고 살아가려는 김미영이라는 인물을 통해 오히려 이건의 사고방식을 바꿔놓는 이야기다. 전자가 현실적이라면 후자는 판타지적이다.
장르적 차이 때문에 선택과 양상은 다르지만 드라마가 드러내는 현실은 같다.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씁쓸한 세태가 그 바탕에는 깔려 있다.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지 않은가! 세월호 참사 같은 비극이 벌어져 실종자들을 찾지도 못한 와중에도 보상금을 얼마 받을까를 보도하는 세상이다. 사람의 가치가 언제부터 이렇게 돈 몇 푼으로 환산되게 되었을까.
실로 돈이면 안되는 게 없는 세상이다. 그래서인지 드라마가 제시하는 10억 속에는 그 개탄할 세상에 대한 인식과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유혹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왜 하필 10억일까. 몇 년 전에는 아예 <10억>이라는 우승상금을 두고 벌어지는 서바이벌 소재의 영화가 나오기도 했다. 출판가에 가보면 ‘10억 모으기’ 비법을 알려주는 책들이 베스트셀러로 자리해 있다. 그것은 10억이라는 액수가 이제 서민들이 인생역전을 할 수 있는 현실적인 액수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유혹적이지만 어찌 보면 손에 닿을 듯한 거리에 놓여진 그런 액수.
한때는 연봉 1억이 성공한 직장인의 기준처럼 제시되곤 했지만 요즘처럼 물가와 세금이 갈수록 많아지고 벌이는 시원찮은 시대에 이들 또한 그저 샐러리맨의 하나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니 이제 누군가 갑자기 제시하는 10억 정도는 되어야 마음이 움직이게 된 것. 사실 자신의 몸값을 연봉으로 환산하는 그 때부터 이미 우리는 돈에 포획된 삶을 살게 되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유혹>의 석훈의 선택보다 <운명처럼 널 사랑해>의 김미영의 선택에 그나마 위안을 받는 것은. 10억 앞에 무릎 꿇는 현실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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