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동심 vs 살벌한 어른들 세상
MBC 월화드라마 ‘이산’에서 이산(이서진)은 어린 시절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그것은 할아버지(영조)가 아버지(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것이다. 어린 이산은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게 한 뒤주 앞에 와서 아버지의 손을 잡고는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그것이 끝이 아닌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살아남은 불씨가 된 이산은 끝없는 암살 위협 속에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힘겨운 일은 아버지를 죽게 한 할아버지 영조(이순재)가 자신을 끝없이 시험에 빠져들게 한다는 점이다. 그 시험에서 탈락하는 순간, 이산은 자신도 저 버려진 아버지의 운명이 될 거라는 점에 몸서리친다.
게다가 자신을 죽이려하는 암살자들이 바로 이산의 고모인 화완옹주(성현아)라는 사실은 절망감을 더 깊게 한다. 아직까지 이산에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음모의 몸통에는 영조의 계비이자 이산의 할머니가 되는 정순왕후(김여진)가 있다. 서로 죽고 죽이게 되는 이 잔인한 가족사는 저 고대 그리스의 비극이나 셰익스피어의 비극만큼 비장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살벌한 어른들 세상 속에서 이산은 생존하기 위해 강해지고 노련해진다. 하지만 이것은 이산이 원하던 것이 아니다. 이산은 늘 어린 시절 우연히 만나 운명의 여인이 되어버린 성송연(한지민)과, 평생의 동무가 된 박대수(이종수)를 그리워한다. 이 숨가쁘게 돌아가는 궁 속의 음모들 속에서 이 세 사람 즉 이산과 성송연, 박대수가 만나는 장면은 과거로 과거로 시간을 되돌려 놓는다. 현실이 아닌 어린 시절의 동무로 돌아간 그들은 실로 어린아이들처럼 말하고 웃고 수줍어한다.
이것은 동화의 세계이다. 동화가 가진 세계와의 대결의식은 늘 순수한 동심과 잔인한 어른들의 세계를 병치시킨다. 이산은 그 깊은 트라우마가 생기기 이전의 시간을 희구하지만 현실은 자꾸만 어른들의 세계 속으로 그를 인도한다. 성송연과 박대수는 그 캐릭터 자체가 어린이에 머물러 있고 그것은 잔인한 어른들의 세계를 잘 알고 있는 이산이 늘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이 어른과 어린이의 대결 속에서 홍국영(한상진)이란 인물이 차지하는 위치는 절묘하다. 홍국영은 어른들의 세계를 철저히 이해하고 있는 인물. 그는 때론 어린이 같은 마음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그가 이산의 옆에 자리하면서 드라마는 그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게 만든다. 홍국영은 그 목적이 어떻든 이산과 그 동심을 지켜내는 파수꾼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시청자들이 ‘이산’에 깊이 빠져드는 이유는 바로 이 아이들의 세계를 가진 이산과 성송연, 박대수를 저 잔인한 어른들의 세계에서 지켜주고 싶은 측은지심 때문이다. 현실 세계의 무거움 속에서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그리는 건 누구나의 인지상정 아닌가. 그러니 이 한 가족이 서로를 죽이고 죽는 잔인한 동화의 세계는 동심에서 어른의 세계 속으로 편입되는 일련의 성장과정을 내포한다. 때론 그것이 퇴행적으로 보이지만 그 어린 시절의 순수로 되돌아감이 현실과의 대결구도를 이룬다는 점에서 이산이 그리는 동화는 그 가치를 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산의 정치란 결국 이전투구의 진흙탕 정치세계를 넘어서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으로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그 곳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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