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생순’, 핸드볼을 닮은 아줌마들
그동안 많은 스포츠를 다루는 영화들이 포착한 것은 이 땅의 마이너리티였다. ‘슈퍼스타감사용’의 패전처리투수 감사용이 그렇고, ‘이장호의 외인구단’의 외인구단이 그러하며 ‘말아톤’의 초원이와 ‘맨발의 기봉이’의 기봉이가 그렇다. 최근작으로 다큐멘터리로서 놀라운 흥행을 거둔 ‘비상’의 인천유나이티드FC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소외되거나 주목받지 못한 변방의 인물들이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하 우생순)’의 여자 핸드볼팀 역시 이런 견지에서 보면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른 점이 분명히 있다.
그들은 경기장에서 감사용이나 외인구단처럼 늘 꼴찌를 해왔던, 그래서 한번의 우승을 위해 노력하는 선수들이 아니며, 초원이나 기봉이처럼 장애를 이겨내고 평범함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이 아니다. 물론 인천유나이티드FC처럼 최하위팀도 아니었다. 그들은 경기장에서만큼은 시작부터 늘 최고였고 이미 올림픽 2연패의 주역들이었다. 이 점은 임순례 감독에게는 여러 모로 의미부여가 가능한 지점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늘 평가절하 되어온 여성, 특히 결혼한 아줌마의 이야기이기도 하며, 실력이 아닌 돈의 논리로 인기종목은 더 인기를 끌고 비인기종목은 더 소외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들의 ‘박수 받지 못하는 우승’, ‘우승하자마자 해체되는 팀’에서부터 시작된다. 술자리에서 이제 갈곳이 없어진 팀원들이 신세한탄을 할 때, 최고의 선수였던 미숙(문소리)이 가장 당연한 듯 상황을 받아들이는 점은 아이러니다. 그만큼 미숙은 오랜 핸드볼 경기를 통해 포기를 밥먹듯 살아왔던 셈이다. 하지만 그 포기는 핸드볼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팀은 해체돼도 직원대우를 해준다는 말에 그래도 그게 어디냐며 “정직원이겠죠”하고 미숙이 물었을 때, 그녀는 이미 당연히 비정규직이란 점을 예감하고 있었던 셈이다. 일상으로 돌아간 그들의 삶은 핸드볼과 닮아있다.
경기 때문에 생리 조절을 하기 위해 약을 복용한 탓에 불임이 되어버린 정란(김지영), 일본에서는 잘나가던 감독이지만 국내에 와서는 이혼녀라는 이유로 감독대행에서 경질되고 선수로서 뛰어야 하는 혜경(김정은), 그리고 남편 때문에 빚쟁이에 쫓겨다니는 신세가 되어 늘 경기장에 아들을 데리고 다녀야 하고 한편으로는 생계를 위해 뛰어야 하는 미숙은 핸드볼 경기 그 자체와 동일한 처지다. 게다가 그들은 핸드볼 팀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다. 이른바 아줌마들이라는 편견, 구시대적 방식을 고수하는 늙다리로 후배들에게나 감독에게서 모두 비아냥을 듣는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핸드볼이다. 비인기 종목으로서의 핸드볼은 생계를 어렵게 했고, 그럼에도 핸드볼을 떠날 수 없는 삶을 만들었다. 수많은 편견과 무관심 속에서 자학적인 포기가 일상이 된 그들이 다시 그 지긋지긋한 핸드볼 팀으로 모여든 이유는 그들에게 있어 핸드볼만이 그들의 심장을 뜨겁게 해준 진짜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편견 어린 세상과 싸움을 시작한다. 일상 속에서의 남성들과 주목받는 인물들이 그러한 것처럼, 상대는 신체조건이 월등히 좋은 유럽선수들이다. 그들과 대항하기 위해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과학적인 훈련 따위가 아니다. 그들은 일상 속에서 경기 속에서 이미 알고 있다. 그 방법은 ‘더 빨리 뛰고 더 많이 뛰는 것’뿐이란 것을.
이미 싸우는 방식도 알고 있고 그 방식으로 이겨본 경험도 있는 최고의 선수들이 다시 모여 고군분투하는 이 영화가 하려는 이야기는 헐리우드 식의 ‘노력하면 된다’는 교훈담이 아니다. 이 영화는 포기에 대한 영화다. 마지막 경기를 앞둔 상황, 늘 걸림돌이던 남편의 음독으로 경기를 포기하고 돌아가려던 미숙이 전화를 한다. “미안한데. 나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너도 포기하지마.” 그녀는 오랜 음지 생활 속에서 습관화 되어버린 포기, 희생 같은 것들을 그 순간 뛰어 넘는다. 포기를 넘어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 순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도래한다. 그러니 경기의 승패 따위는 이미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감독이 말하는 것처럼 이미 그들은 결과가 어떻게되든 그들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여준 것이다.
임순례 감독의 탁월한 전략은 그들 생애 최고의 순간을 최고의 연출로 보여준다. 자칫 감정 과잉이 될 수도 있었던 영화는 그녀의 전략대로 다큐멘터리적인 차가움을 유지하면서 오히려 영화에 진정성을 부여한다. ‘핸드볼은 팀 플레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 아닌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는 지칭한 것처럼 은근히 기분 좋은 연대의식을 부추긴다. 막연히 알고 있던 여자 핸드볼선수들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극장문을 들어선 관객들은 후배선수들과 감독의 시선을 공유하면서 차츰 변모하고, 마지막 순간에 가서는 “내가 대한민국 아줌마들 안 믿으면 누굴 믿어”라고 말하는 감독과 같은 입장이 된다. 엔딩 크레딧이 오르면서 흘러나오는 실제 선수들과 감독의 다큐 영상으로 영화는 현실로 슬금슬금 걸어나온다.
그래서일까. 등장하는 실제 감독이었던 임형철 감독이 당시에 힘겨웠던 그들에 대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억누를 때, 똑같은 감정이 되는 것은. 그 때 당시 인생 최고의 순간을 경험한 감독처럼 그 영화를 보고 일어나는 마음 한 구석이 훈훈해지는 것은. 그리고 뒤늦게 우리네 생애 최고의 순간을 생각해보게 하는 것은. ‘우생순’은 그 성패와 상관없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온 몸을 던져 노력하던 그 순간이 우리 생애의 최고라고 말하는 영화다. 당신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느냐고 되묻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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