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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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하늘이시여, 제발 하늘이시여

D.H.Jung 2006. 3. 9.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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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시여>, 그 하드코어 세상이 말해주는 것들

아이들 성추행 사건이 공공연히 벌어지고, 그걸 막는 법을 만들어야할 국회의원이란 사람은 여기자를 성추행하고 뒤늦게 문제가 커지자 가게주인인줄 알았다는 망언을 해대는 세상이다. 할 수만 있다면 “하늘이시여!”하며 기도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다. 드라마 <하늘이시여>에서 악마소굴 같은 곳에 있는 딸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친엄마 한혜숙의 마음이 그랬을까?
사회나 드라마나 TV 속 네모난 세상 속에서 보여지는 것은 늘 아름다운 세상만은 아니다. 때로는 추악한 모습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여지없이 사회문제에 무관심했던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끈다. 그 추악한 모습은 너무나 자극적이고 충격적이어서 일종의 안전장치를 채우기도 한다. 하지만 때로는 가감 없는 방송이 등장해 시청자들의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놀라운 것은 방송사가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런 방송에 시청률이 높다는 것이다.
물론 사회적인 이슈나 정치적 사건들을 만든 장본인들에게 의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혹자들은 정치적 사건들 속에도 음모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번 최연희 의원 성추행 파문을 각종 현안에 대한 물타기로 보는 민노당의 입장이 그렇다). 하지만 그런 내용의 뉴스들을 내보내는 ‘편성’에는 역시 의도가 숨어있다. 공정함이 생명이라는 뉴스에도 공공연한 선정성 논란이 이는 마당에 드라마는 오죽할까. 시청률 확보라는 의도로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노하우를 축적한 드라마는 그 유혹이 너무나 가깝다. 이것이 지나친 감정의 하드코어가 범람하는 드라마가 탄생하는 이유이다.

드라마의 하드코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드라마를 봤다. 드라마 속에서는 시어머니에게 대드는 며느리의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보기에 민망한 며느리가 채널을 돌리려고 하는데 시어머니가 말했다. “내가 언제 저 늙은이 저렇게 될 줄 알았지. 속이 다 후련하다!”
현실의 시어머니들이 이렇게 드라마 속에서 며느리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유는 무얼까. 답은 명확하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드라마 속의 인물에 감정이입되는 대상도 나이가 많은 건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아줌마들도 <하늘이시여>를 보며 자경의 입장 속으로 빠져든다. 그렇다면 자경의 친엄마나 새엄마, 강예리, 왕모 등은 어떨까. 자경보다는 덜 하겠지만 역시 감정이입의 대상이 된다. 아줌마들은 드라마라는 게임의 틀 안에서 그 무수한 인물들 속에 자신을 집어넣으며 때론 웃고 울며 때론 분노하고 때론 통쾌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옷을 벗겨놓은 날 것의 드라마가 가진 본능적인 속성이다. 그러니 드라마 속 인물에 대한 평이 현실에 대한 관점과 다르다고 해서 놀랄 것이 없다. 그것은 감정의 게임이니까. 게다가 이건 그냥 보면 보는 것이고 보지 않으면 마는 드라마가 아닌가.

감정의 게임
놀라울 정도의 수위를 넘고 있는 선정성 시비에도 불구하고 계속 앞으로 전진할 수 있는 드라마의 힘은 바로 이 감정의 게임에 있다. 차라리 불륜이나 이복남매의 사랑같은 근친상간은 이제 입방아거리가 더이상 되지 못한다. 아들을 요정에 데려가 술판을 벌이는 아버지가 등장하고, 심지어는 술 취한 아들에게 여자까지 소개시켜 준다. 아내의 친구와 밀회를 즐기는 남편, 혼자 된 형수를 사랑하게된 시동생, 한 남자를 뺏고 빼앗는 싸움을 벌이는 자매, 친자매와 친형제 사이에 엮이는 결혼, 남자 고교생과 교실에서 키스하고 여관을 드나드는 여교사....
한 측면에서보면 도저히 이해안되는 상황들도 양자의 측면에서 보면 이해가 된다. 드라마는 이 ‘상대방 입장되어보기’ 감정 게임이라는 편리한 틀을 가지고 사람들의 금기를 건드린다. 신문기사에서 보면 혀를 찰 내용도 드라마로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글쎄 그 애가 그랬다니까?” “아! 그래서 그런 거였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내용 자체보다도 이런 감정의 게임을 주로 하는 드라마들은 사실 대부분이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는 첫회에 모든 것을 알게되는 드라마도 있다. 달라지는 것은 주인공의 직업과 배경설정 등이다(이것도 그다지 다르지 않은 걸 보면 드라마 작가들만의 공식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채널을 고정시킨다. 이것은 빤히 다 아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보는 하드코어와 다를 바가 없다. “이번 회에는 임채무가 자경이 친엄마를 만난대.” 다 알고 있지만 시청률은 올라간다. 왜 우리는 다 아는 내용을 또 확인하고자 하는걸까.

본격 하드코어 드라마 <하늘이시여>
우리에게 하드코어 드라마는 낯선 것이 아니다. 이른바 결혼을 지고선(至高善)으로 주장하는 짝짓기 드라마, 그런 드라마에 늘 등장하는 백마탄 왕자들 혹은 공주님들, 그들이 만나 사랑하는 신데렐라 혹은 온달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불륜 등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드라마의 단골메뉴들이다. 이들이 엮어가는 닭살 애정과 감정 긁기의 하드코어에 우리는 번번이 빠져든다. 관성이자 중독이다.
<하늘이시여>는 하드코어 드라마의 이런 모든 요소들을 빠짐없이 갖고 있다. 누가 왕모와 결혼할 것인가가 이 드라마의 핵심이고, 물론 왕모는 현대판 백마탄 왕자이며 자경은 완벽한 신데렐라다. 딸이면서도 결혼을 반대하고 돈을 벌어오라는 못된 계모까지 갖고 있으니 금상첨화다. 하드코어 드라마가 갖는 중독성은 모두 갖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핍박받는 자경에게 동화되면서, 잘난 왕모가 집안 좋은 강예리를 차고 비천하기까지한 자경에게 지극정성하는 장면에 통쾌함을 느낀다.

드라마를 이끄는 힘은 분노이다
강한 중독은 강한 분노에서 비롯된다. 분노를 만드는 인물들은 거의 악마와 같은 수준이다. 자경의 새엄마는 “네가 결혼하면 돈 벌어다 줄 사람이 없으니 결혼 못시킨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로 시청자들의 감정에 상처를 낸다. 가해자가 말도 통하지 않으니 시청자들의 상처입은 답답한 감정은 폭발할 것만 같다. 잘난 자기를 찼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운 강예리는 “너까짓게..”하면서 자경의 머리끄댕이를 잡아당긴다. 자경에게 동화되어 극중 그녀가 받은 상처를 고스란히 갖고있는 시청자들은 자경을 보호해줄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갈구한다.
보통의 하드코어 드라마에서 그 보호의 역할은 왕자님이 맡는다. <하늘이시여> 역시 마찬가지지만 이보다 더 강력한 것이 들어있다. 그것은 친엄마이다. 친엄마가 가진 사랑이 왕자님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왕자님의 엄마가 친엄마이다. 친 딸을 며느리로 들인다는 비상식적인 설정에 대한 시청자와 드라마와의 암묵적인 계약은 바로 여기서 성립된다. 왕자에 친엄마의 보호막이 있으니 자경이 처한 지금의 현실은 그래도 살만하다. 그리고 앞으로는 저 악마들에게 보복을 할 수 있다. 분노를 가진 시청자들은 그 가해자들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또한 한편으로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불안해한다. 시청자들의 분노와 불안이 극에 달하면 달할수록 시청률은 치솟아오른다.

출생의 비밀이라는 감정의 시한폭탄
여기에 덧붙여지는 출생의 비밀이라는 장치는 두 가지를 가능케 한다.
그 첫번째는 자극적인 설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숨겨진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자 “알고보니 배다른 남매였더라”라는 설정은 드라마 속에 근친간의 사랑을 가능케한다. 게다가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이 된다(요즘은 법안이 바뀌어 이루어질 수도 있는 사랑이 되었지만). 가을동화의 준서와 은서가 그랬고, 피아노의 한재수와 이수아가 그랬으며, 진주목걸이의 김민종, 김유미, 아름다운 죄의 조은숙, 정준호, 최근 천국의 나무에서는 신현준과 최지우가 그러면서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두 번째는 출생의 비밀이 앞으로 도래할 시한폭탄 같은 파장을 예감케한다는 것이다. 이로인해 시청자들은 그간 쌓여온 강한 분노 혹은 억압에 대한 융단폭격을 기다리게 된다. ‘드러난 사실’로 그간의 관계들은 모두 역전되고 해소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된다. 하지만 당해왔던 오랜 시간에 비해 그 보복의 순간은 아주 짧다. 드라마는 해소와 함께 끝나는 것이기에, 사실이 드러나는 그 순간은 종영을 의미한다. 해소는 환상이다. 시청자들을 TV앞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끊임없는 가해이다. 적당한 시기에 드라마 속 악마들은 손톱을 드러내 아물려고 했던 상처를 긁어댄다. 시원한 듯 하지만 그 상처는 계속해서 덧나게 마련이다.

하드코어 세상, 하드코어 드라마
드라마가 세상을 반영한다는 것은 그것을 비판적으로 보았을 때에만 해당되는 말이다. 어느날 아침 출근길에 갑자기 다리가 끊어지고, 저녁 찬거리 사러나간 백화점이 무너지고, 길을 가다가 가스가 폭발하고, 지하철을 탔는데 누군가 불을 던지는 사회다. 아이들 연속 성추행 사건은 정치인들의 하드코어 취중난동 시리즈들에서 이미 예견된 바다. 최연희 의원에서 정점에 이른 이 시리즈는 술자리에서 욕설을 해 구설수에 오른 주성영 의원에서부터, 맥주병 투척사건의 곽성문 의원, 이어지는 박계동 의원의 맥주 투척사건, 묵사마 정형근 의원의 호텔방 소동으로 이어지는 정치드라마다. 대사의 수준은 DJ 치매노인 발언으로 극에 달한 ‘막말’이 일반적이다. 실제로 정치인들이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TV는 그런 장면들을 보여준다.
우리는 왠만한 자극과 충격에는 둔감해져 있다. 정치드라마 속에서 정치인들이 벌이는 수많은 하드코어적 행태들은 우리에게 극도의 분노를 만들어낸다. 들은 늘 그런 거니까”, 하는 포기가 잇따른다. 포기 뒤에는 무관심이다. 무관심 속에 남는 것은 관성 밖에는 없다. <하늘이시여>는 작중인물들이 만들어내는 분노, 새엄마는 늘 나쁘고 친엄마는 늘 구원이라는 포기, 그럼으로 해서 남는 감정의 하드코어들에 의한 관성이 뒤범벅되어 나타난다.

드라마의 본성과 이야기하는 방식
<하늘이시여>가 갖는 중독성은 자극적인 관계설정과 시청자의 중독을 부추기는 거친 대사들, 그로인해 시청자들이 갖는 작중인물과의 동일시에서 비롯되는 분노 그리고 보복심리에서 비롯된다. 비정상적인 관계들(친딸을 며느리 삼으려는 어머니, 호적상 삼촌과 사랑에 빠진 조카)은 출생의 비밀에 덧대진 자극적인 관계설정의 산물이며, 분장사 비하발언이 계속된다거나 양딸의 결혼을 막기 위해 삼촌과 사랑에 빠졌던 딸의 과거를 예비 시어머니에게 폭로하는 새엄마와 같은 비상식적이고 극단적인 에피소드들은 분노를 부추기기 위한 전략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드라마다. 시청률이 지고선이 된 시대에, 임성한 작가가 “자신의 어머니가 즐거워할만한 드라마를 쓴다”고 말했듯이 재미있으면 됐지 뭘 바라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드라마가 꼭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사실 위의 얘기들은 비단 <하늘이시여>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대부분의 드라마가 갖는 전략들이다. 이것은 고대 소포클레스의 희곡에서부터 셰익스피어를 거쳐 지금까지 내려오는 극(drama)의 본성이다. 이 힘에 의해 우리는 드라마는 물론, 연극, 영화의 재미를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설정, 대사, 흐름을 답습하면서 중독성 강한 하드코어적 진행으로만 간다면 자칫 드라마의 퇴행을 가져올 수도 있다.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과거 드라마들의 리메이크가 이 퇴행적인 양상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이런 하드코어식의 드라마가, 많은 완성도 높은 드라마들을 보는 시청자들의 입맛을 변질시키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소프트코어 드라마를 기다리며
<하늘이시여>를 가지고 임성한 작가의 전작들, <인어아가씨>, <왕꽃선녀님>과 비교하면서 “원래 그 작가는 그렇다”고 치부하는 건 드라마 기획자들이 바라는 바이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임성한 작가는 작가라기보다는 드라마가 갖는 힘을 정확히 알고 있는 장인이라고 할만하다. 50부작을 60부작으로, 60부작을 75부작으로 마음대로 늘릴 수 있는 작가는 흔치 않을 것이다. 드라마 전쟁이라고 할만한 방송3사의 각축전 속에서 좀더 높은 시청률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고집스런 작가보다는 이런 전략에 능숙한 장인이 필요하다. 요는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의 눈이다. 드라마 기획자들은 모든 기획의 초점을 바로 시청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강한 메시지와 새로운 주제, 형식을 반드시 추구할 필요는 없다. 드라마들이 하는 대부분의 이야기, “윤리적으로, 운명적으로 안되지만 사랑한다는 데 어쩔 것인가?”하는 정도의 주제라도 좋다. 문제는 완성도이다. 적어도 소프트코어 드라마를 기다리는 것은 그것이 시청자들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하드코어가 범람하는 세상 속에서 노희경 작가의 <굿바이 솔로>가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은 분노가 아닌 화해로, 포기가 아닌 기대로, 강한 자극에 벼려진 시청자의 눈을 적시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늘이시여! 이제 봄을 맞아 사람들이 하드코어를 더이상 바라지 않는 세상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