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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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추억의 숨은 그림 찾기 VS 숨기기

D.H.Jung 2006. 3. 22.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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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왈츠> VS <넌 어느 별에서 왔니>

‘봄의 왈츠’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기나긴 겨울을 전제로 한다. 그 겨울 동안 그들을 버티게 해준 힘은 어린시절 한 자락 가슴 속에 들어앉았던 추억들이다. 윤재하라는 새로운 이름의 겉옷을 입고 겨울을 살아온 이수호의 가슴 속의 절망은 “은영이 수술 후유증으로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은영이 죽은 한국은 겨울같은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여자를 통해 그녀가 은영일지도 모른다는, 그녀가 살아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의 한국행을 결심하게 만든다. 윤재하로 돌아온 그는 이제 이수호로 지내며 은영과 추었던 추억의 봄의 왈츠를 찾아나선다. 숨은 그림 찾기의 시작이다.

추억의 장소. 과거에 그녀가 있었던 장소. 하지만 지금은 없는 그 장소에서 그가 서성댄다. 이 설정은 <봄의 왈츠>가 앞으로 전개될 드라마의 방향을 예고한다. 윤석호 PD의 뛰어난 영상과 연출은 ‘빈 자리’를 보여줌으로 해서 그 자리에서 함께 했던 따뜻한 봄의 기억들과 현재 진행형이 차가운 겨울을 병치한다. 그 거리감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안타깝게 만든다. 은영을 마지막으로 두고 나왔던 병원, 은영을 잃어버린 줄 알고 찾아헤맸던 남대문 시장, 그 시장통 한쪽에서 은영이 수호에게 주려고 허기를 참아가며 들고 있던 붕어빵을 팔던 노점상... 재하(과거의 수호)는 그 과거의 언저리를 서성대면서 은영의 그림자를 찾아해맨다. 시청자들은 재하의 상황에 감정이입되며 은영이 바로 재하가 찾는 그 인물이라는 확신을 갖게된다.

하지만 여기서 윤석호 PD는 시청자들의 기대를 한번 무너뜨린다. 막상 찾은 은영은 자신이 생각한 그 추억의 은영과 같은 인물이 아닐 거라는 믿음을 재하에게 심어주는 것이다. 시청자들은 그 드라마에 안타까워하면서 더욱 더 재하와 은영의 만남을 갈구한다. 여기에 끼어드는 송이나라는 과거 진짜 재하(수호가 현재 대신 살아가고 있는)의 단짝친구는 재하에게 정체성의 혼란을 부추긴다. 은영은 죽었을 거라는 재하의 실망은 수호라는 진짜 자신과 그 수호가 가졌던 봄의 기억을 잊고, 가짜지만 현실인 재하라는 새로운 실존에 타협하려 한다. 그는 송이나에게 새롭게 시작하자고 한다.

<봄의 왈츠>는 그 경쾌한 외연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무거운 과거의 설정으로 인해 추억의 언저리에서만 빙빙 돌고 있다. 윤석호 PD의 영상과 내러티브의 힘이 바로 그 추억과 노스텔지어에 있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청자들에게 <봄의 왈츠>는 첫번째 작품이 아니다. 시청자들은 이미 겨울과 가을과 여름을 거쳐 봄을 보고 있는 것이다. 추억찾기와 숨은 그림 찾기, 그리고 그 엇갈림은 많은 드라마에서 답습해오던 문법이며 그 나름대로의 의미와 힘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아마도 지금의 시청자들은 과거를 걷는 이야기보다는 현실적인 카타르시스를 더욱 요구하는 것 같다. 요는 무거움보다는 가볍고 발랄하며 상큼한 이야기에 매료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서 오히려 부각되는 인물은 다니엘 헤니가 연기하는 필립이라는 인물이다. 애초의 대본에는 없던 필립이 그 가벼움으로써 이 무거운 드라마의 무게중심을 맞춰주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에서 나오는 드라마틱한 대사들은 고전적이면서도 힘이 있지만, 그것이 새로운 것이 아닐 때 상투가 되기도 한다. 심각한 대사가 닭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반면 <넌 어느 별에서 왔니>는 철저히 가벼움과 경쾌함을 목표로 드라마를 엮어가고 있다. 가벼움과 경쾌함은 과거의 기억보다는 그 현재의 아이러니나 대결구도에서 나온다. 인물들의 시소타기 게임의 귀재인 표민수 PD는 시골소녀 vs 도시남자의 기본 대결구도(물론 이건 관계의 호전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보는 이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를 바탕으로 시골과 도시에서의 엎치락뒤치락하는 드라마를 엮어간다. 시골마을에 오게된 영화감독 최승희로 하여금 시골소녀 김복실의 집에서 기거하게 만들고, 서울로 상경한 시골소녀 복실이 최승희의 밑에서 일하게 만든다. 자본주의 논리에 의하면 도시에서 잘나가는 영화감독인 최승희가 시골의 별볼일 없는 소녀 김복실에게 확실한 우위가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특유의 김복실이 가진 명랑함과 순박함은 최승희를 번번히 손들게 한다. 그 밑바닥에 있는 것은 자신이 한 아무렇지도 않은 행동으로 상처받는 복실에 대한 미안함과 가책이다.

하지만 이건 이 드라마의 겉모습이다. 만일 <넌 어느 별에서 왔니>가 이러한 가벼움으로만 일관한다면 그건 금방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을 것이 뻔하다. 하지만 그 속모습을 들여다보면 이 드라마의 말하지 않는, 어찌보면 철저히 숨기려 하는 드라마들이 보인다. 최승희가 김복실에게 끌리는 것은 사실 세상을 떠난 과거의 그의 연인과 닮았기 때문이 아니고, 김복실 그녀가 갖는 순박함 때문이다. 최승희가 가끔씩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가 미쳤지. 저런 애를’하는 투의 대사를 하는 것은 그의 착각 때문이다. 그는 김복실에게 끌리는 것이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정신이 약간 이상한 엄마, 수술을 해야 하지만 수술비가 없는 상황, 시골에서 좌판을 하며 먹고 사는 자신 등등 김복실은 사실 현실적으로는 불행해야 하는 인물이지만, 그 대책없는 발랄한 캐릭터로 인해 이러한 신파적 상황들은 전혀 드라마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사실 속모습은 신파가 내재되어 있지만, 드라마는 의도적으로 발랄한 겉모습만을 보여준다. 복실이 엄마의 이야기라며 최승희에게 드라마 소재를 얘기해주자, 최승희가 바로 “그런 신파를 누가 보냐”고 하는 것은 이 드라마의 의도적인 숨기기를 말해준다. 표민수 PD는 말하는 것 같다. “본래 사는 건 신파지만, 그걸 뭘 드라마에서 다 시시콜콜 얘기하느냐”고 말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의 반전은 속모습이 드러나면서 일어난다. 임예진이 친엄마가 아니고 이보희가 친엄마라는 게 밝혀지는 것. 그리고 임예진이 울면서 미안하다고 말하자, 그 입을 막으며 그런 말 하지 말라는 복실에서 우리는 가슴뭉클함을 느끼게 된다. 다소 신파적이긴 하지만 드라마는 그 와중에도 월드컵 경기장에서 복실을 기다리는 최승희의 뚱한 모습을 보여주며 무게중심을 잃지 않는다.

이 드라마는 늘 현재진행형이다. 과거의 일들이 밝혀졌다는 것은 등장인물과 시청자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지만, 이 드라마는 그 과거에 멈춰서거나 서성대지 않는다. 대신 기대하게 되는 것은 시골소녀에서 도시 부유층의 딸이 된 달라진 환경 속에서의 복실과 최승희가 엮어갈 새로운 시소타기 게임이다. 표민수 드라마의 장점은 이 아픔을 숨긴 발랄한 시소타기 게임을 하면서도 가끔씩 반짝반짝하는 대사들을 던진다는 것이다. 밤하늘의 별이 아름다운 것은 그 밤이 많은 것들을 숨기고 가려주기 때문이다. 그걸 표민수는 알고 있다.

많은 드라마에 익숙한 요즘의 시청자들은 친절하게 상황을 알려주는 드라마보다는 저 스스로 상황을 읽는 드라마를 좋아한다. 모든 드라마의 시작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 숨은 그림을 하나씩 펼쳐보이는 드라마가 <봄의 왈츠>라면, <넌 어느 별에서 왔니>는 철저하게 가려진 채 진행되는 드라마 속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그림들을 보여준다. 숨은그림찾기나 숨기기나 모두 목적은 드러내는 데 있다. 그것은 단지 말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드라마에 있어서 그 말하는 방식은 드라마 자체가 되기도 한다. 과거에 잃어버린 봄의 숨은 조각들을 맞춰나가는 재미인가, 아니면 어두운 밤하늘에 숨겨져 있다가 어느 순간 반짝이는 별을 찾는 재미인가. 두 드라마가 나갈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