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판사’의 통쾌함과 불편함은 어디서 오나
또 다른 다크히어로의 탄생이다. tvN 토일드라마 <악마판사>는 대놓고 주인공에 ‘악마’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모범택시>, <빈센조>에 이어 <악마판사>까지. 도대체 다크히어로들은 어쩌다 전성시대를 맞이하게 된 걸까.
<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판사 작품 맞아?
사실 <미스 함무라비>를 쓴 문유석 작가는 우리에게는 ‘판사’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건 그가 드라마 작가로 데뷔하기 전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책을 통해 전 부장판사였다는 사실이 대중들에게 각인된 바 있고, 무엇보다 <미스 함무라비>가 바로 자신의 경험이 녹아 있는 판사들의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가 새로 쓴 tvN 토일드라마 <악마판사> 역시 판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사실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적어도 <악마판사>를 기점으로 문유석은 ‘판사’보다는 ‘작가’라는 직함이 더 어울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법정의 현실을 담은 <미스 함무라비>와는 사뭇 다른, ‘가상의 디스토피아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전 국민이 참여하는 라이브 법정 쇼’를 소재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판사로서의 현실 경험보다는 작가로서의 상상이 더 드러나는 작품이 바로 <악마판사>다.
본래 작품의 판타지는 현실의 결핍에서 비롯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가상의 설정을 갖고 있지만 거기에는 현실의 그림자들이 어른거린다. ‘라이브 법정 쇼’에 처음 서게 된 JU케미컬 회장 주일도(정재성)는 독성폐수를 무단 방출해 한 마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물이다. 우리네 현실에서도 이런 유사한 사건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모티브가 됐던 91년에 있었던 낙동강 페놀 방류사건이나, 여전히 법정에서 피해자들이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그렇다. 그런데 이런 사건들을 야기한 가해 책임자들은 거기에 합당한 처벌을 받았을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악마판사>에서 라이브 법정 쇼를 통해 강요한(지성) 재판장은 주일도 회장에게 금고 235년이라는 충격적인 판결을 내놓는다. 또 두 번째로 열린 라이브 법정쇼에서 엄마가 법무부장관이라는 사실 때문에 안하무인 갑질을 일삼아온 피고는 ‘태형(때리는 형벌)’ 30대를 선고하고 그 과정을 생중계한다. 현실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들을 가상의 국가와 라이브 법정쇼 같은 설정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잠시간의 ‘사이다’를 안기는 것.
이런 이야기 구조는 SBS <모범택시>와도 유사하다. <그것이 알고 싶다>의 PD이기도 했던 박준우 연출자는 그 프로그램이 다뤘던 실제 사건을 허구의 드라마 속으로 가져와 그 가해자들에게 ‘사적 복수’를 가하는 무지개 운수팀의 사이다 액션을 그린 바 있다. 여러모로 문유석 작가는 이제 현실의 문제를 좀 더 가상을 빌어 풀어보려는 작가적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인다. <악마판사>는 바로 그런 욕망의 소산이다.
이 라이브 법정쇼가 겨냥하고 있는 것
<악마판사>는 그러나 라이브 법정쇼라는 ‘사이다 법 정의’의 이야기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 강요한(지성)이라는 주인공을 ‘악마판사’라 세우고 있는 데는 그가 과거 어떤 불행을 겪었고 그래서 절치부심 복수극을 펼쳐가고 있다는 걸 드러낸다. 버려진 아이로 대부호의 집에 입양되어 살아온 강요한을 그의 배다른 형인 강이삭(진영)이 살뜰히 챙겨줬지만, 10년 전 그 막대한 유산을 사회적 책임재단에 전액 기부하려던 중 발생한 의문의 성당 화재로 인해 형 부부가 모두 사망하게 된 것. 강요한은 형의 딸 엘리야(전채은)와 함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고 그 기부를 전면 취소했다. 당시 화재 현장에 있었던 사회적 책임재단 인사들은 그래서 마치 강요한이 그 화재를 일으키고 그 재산을 모두 강탈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사실은 달랐다. 그 날 성당에 있던 사회적 책임재단 인사들은 아이인 엘리야를 밟으면서까지 탈출한 그런 비정한 인물들이었다. 그들 사회적 책임재단 인사들은 지금도 이 가상의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는 권력자들이 되어 있었다. 대통령 허중세(백현진), 법무부장관 차경희(장영남), 사회적 책임재단 이사장 서정학(정인겸), 민보그룹 회장, 사람미디어그룹 회장 등등.
결국 <악마판사>가 보여주고 있는 구도는 사회적 책임재단으로 불리며 마치 나라 걱정을 하는 이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적 이익에만 혈안인 이들에 대한 강요한의 처절한 복수극이다. 아직 그 실상이 드러나진 않았지만, 당시 성당의 화재와 형인 강이삭의 전 재산 기부 같은 사안의 이면에는 아마도 보이지 않는 사회적 책임재단의 음모가 숨겨져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강요한이 하는 ‘라이브 법정 쇼’는 그래서 전 국민이 보고 참여하는 라이브 쇼라는 방식을 통해 실제 법이 해결하지 못하는 사법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비극을 겪은 가족을 위한 복수극이 펼쳐지는 곳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악마가 판을 치는 다크히어로 전성시대
<악마판사>는 제목에서 느껴지듯 선한 주인공이 아닌 다크히어로를 그리고 있다. 그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은 집이지만 텅 비어 있어 어딘지 음습하고 쓸쓸한 대저택은 거기 살고 있는 강요한이라는 다크히어로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는 마치 <배트맨>의 브루스 웨인을 닮았다. 고풍스런 대저택에서 살지만 고독하고, 어딘가 과거의 아픈 상처를 숨긴 채 살아가는 어두운 인물. 그래서 드라마는 초반에 라이브 법정 쇼로 전 국민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는 강요한이라는 인물이 그 모습과는 다른 ‘악마적인 면모’가 있다는 걸 슬쩍 드러낸다. 그의 등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십자가 모양의 커다란 화상의 흔적은 ‘요한’이라는 그의 이름과 묘하게 어우러지면서, 십자가를 진 채 저들 악마의 불길 속으로 뛰어든 다크히어로의 아우라를 만든다. 결국 그가 악마가 되기로 한 건, 그래야만 저 악마보다 더 한 사회적 책임재단의 가면을 쓴 어둠의 카르텔과 맞설 수 있기 때문이다.
<악마판사>에서 단박에 <모범택시>가 떠오르고, 그 어두운 인물의 면면에서 tvN <빈센조>가 떠오르는 건 이들 드라마들이 모두 다크히어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어서다. <모범택시>의 김도기(이제훈)는 부모가 모두 살해당하는 일을 겪었지만 정작 가해자에 대한 미온적인 사법 처리 과정을 겪으며 ‘사적 복수 대행’이라는 선택을 하는 인물이다. <빈센조>는 이탈리아에서 온 마피아 변호사로서 “악은 악으로 처단한다”고 말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인물이다. 어쩌다 지금 정의를 메시지로 담은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선이 아닌 악을 선택하게 된 걸까. 그건 이 정도의 강력한 대응이 아니면 저들끼리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심지어 ‘성실하기까지 한’ 악을 대적할 수 없다는 공감대에서 비롯된 일이다. 다크히어로는 그래서 어설픈 착함이 아니라 프로페셔널한 악함으로 저들과 싸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러한 다크히어로 전성시대의 밑그림에 어른거리는 대중들의 정서는 사법행정에 대한 불신이다. 도저히 용서하기 어려운 범법자들이 돈과 권력의 힘으로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법 위에서 오히려 법을 이용하는 행태를 우리는 너무나 많이 봐왔지 않은가. 그래서 서민들의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외침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현실 속에서 다크히어로는 탄생한다. 그들이 주는 사법 정의가 물론 일시적인 통쾌함을 선사할 뿐일지라도 잠시간의 사이다일 뿐일 지라도 그 시원함을 맛보고 싶어진다. 물론 그 통쾌함 뒤에 남는 건 이런 식의 가상까지 동원해야 하는 현실이 주는 불편함이지만.(글:매일신문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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