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전원일기’와 최불암, 이것이 연기이고 우리네 인생이다 본문

동그란 세상

‘전원일기’와 최불암, 이것이 연기이고 우리네 인생이다

D.H.Jung 2021. 7. 16.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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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일기2021’이 보여준 연기와 삶의 이중주

전원일기

오랜 세월 한 역할의 연기는 그 사람의 삶을 어떻게 바꿔 놓을까. MBC 창사 60주년 특집 <다큐플렉스-전원일기 2021> 4부작이 막을 내렸다. 4부작의 분량으로 무려 22년간 방영됐던 <전원일기>가 남긴 발자취와 소회를 모두 담아내는 건 불가능한 일일 게다. 하지만 이 짧은(?) 다큐를 통해 연기와 삶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치는가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건, 짧아도 충분한 가치를 증명했다 평가할 만하다.

 

이 가치증명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전원일기>의 김회장, 최불암이다. 최불암은 <전원일기>를 현재로 소환해낸 이 다큐의 시작을 열었고 마무리를 장식했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라는 무거운 초상을 짊어진 채 김회장이라는 인물을 삼십대 후반의 나이부터 맡아 22년을 살아왔고, 그 후로도 그는 그 김회장으로 산 22년의 삶의 영향과 동력으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었다. 

 

이 다큐를 통해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지만, 그가 어느 날 갑자기 KBS <한국인의 밥상>이라는 교양 프로그램을 하기 시작한 것도 그 <전원일기>의 김회장이 여전히 그의 가슴 한 켠에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점점 도시화가 이뤄지고, 모두가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오고 있는 그 와중에 김회장은 마치 마음의 부채라도 있는 듯 여전히 농촌의 삶을 찾아 나섰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찾아간 시골의 아주머니들과 어르신들은 반갑게 그를 김회장으로 맞아주곤 했다. 

 

몇 차례의 고사 끝에 인터뷰를 하게 된 김혜자는 여전히 최불암을 ‘선생’이라고 지칭했다. “저는 최불암씨가 선생님 같았어요.... 나는 연극영화과가 아니라서 공부를 안했다고요. 그니까 그 연기 공부한 거를 말해주는 게 너무 신기하고 재밌고.. 그래서 둘이 있을 때는 참 많이 ‘또 해줘 봐’ 그러면 인제 얘기해줘요.” 

 

지금껏 그저 최불암 하면 당연히 ‘국민 아버지’나 혹은 ‘최불암 시리즈’ 그리고 간간이 개그맨들이 “파-”하는 웃음으로 흉내 내곤 했던 그런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전원일기 2021>은 최불암이 얼마나 노력하고 준비된 연기자였는가를 잘 보여줬다. 예를 들어 “파-”하는 그 웃음도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크게 하하 웃는 것보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웃는 게 김회장이라는 인물에 어울린다는 판단에서 나온 연기였다. 그 연기는 놀랍게도 습관이 되어 최불암의 웃음이 되어갔지만.

 

4회에서 금동이 역할을 했던 임호나 영남이 역할을 했던 남성진은 모두 <전원일기>의 연기가 당시의 분위기와는 달랐다고 증언했다. 즉 당시만 해도 다소 과장된, 신파적인 연기가 많았다는 것. 하지만 <전원일기>는 그런 과장을 뺀 자연스러운 ‘메소드 연기’를 배우들이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 중심에는 바로 최불암이 있었다. 남성진은 처음 녹화를 할 때 최불암이 세트에서 등을 지고 앉아 있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 것에 놀랐다고 했다. 그건 세트 촬영이라도 모두 화면을 향해 있는 게 너무 ‘연극적’이라는 판단에 최불암이 보인 자연스러운 연기였다는 것이었다. 

 

당시를 술회하며 최불암은 <전원일기> 녹화하러 방송국을 찾았을 때 경비실에서 그를 보고는 “오늘 <전원일기> 녹화시네요?”라고 했던 일화를 들려줬다. 멀리서 봐도 김회장이 오는 것 같아서 경비하시는 분이 딱 알아봤다고 했다는 것. 그만큼 그 인물에 대해 몰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일화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그의 노력은 <전원일기>를 함께 했던 배우들에게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쳤다. 

 

김혜자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에서 전혀 다른 엄마의 모습을 연기해낸 바 있다. 그런데 그 엄마의 또 다른 얼굴 또한 <전원일기> 안에 이미 있었던 걸 다시 꺼내 쓰는 것이 아니냐는 제작진의 말에 동의했다. 최불암이 도움을 주기도 했고, 또 그 노력하는 모습 자체가 주변 배우들에게는 귀감이 되었을 터였다. 그 영향이 결코 작지 않았을 게다. 

 

<전원일기>는 거기 출연했던 배우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 인물을 오래도록 연기하면서 그 인물의 모습과 습관과 생각 같은 것들이 삶으로 전이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김혜정이나 이계인 같은 배우는 그래서 지금도 전원으로 내려가 그 삶을 이어가고 있었고, 이 작품에서 티격태격 연인으로 만난 김지영과 남성진은 실제 부부가 되었다. 김수미는 이 작품을 통해 갖게 된 그 일용네 이미지가 지금은 하나의 캐릭터가 되어 예능 프로그램으로 그 맥을 이어가게 됐다. 물론 안타까운 일들도 있었다. 우리에게 ‘응삼’이라는 인물로 더 기억된 박윤배는 실제로도 일찍 이혼해 혼자 사는 삶을 살다가 병으로 먼저 떠났다. 

 

흔히들 연기는 삶과 동떨어진 어떤 ‘역할극’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다른 인물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삶 속에서 끄집어내 보여주는 게 연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연기는 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도 20년이 넘는 세월을 했다면 더더욱 그럴 게다. 최불암은 김회장이 금동이를 입양하는 그 연기를 한 후 시청자들이 상찬하는 바람에 진짜 ‘어린이 재단’ 후원 일을 앞장서게 됐다고 말한 바 있다. 연기란 그런 것이다. “파-”하고 웃던 웃음이 진짜 자신의 웃음이 되기도 하는.

 

되돌려 말하면, 우리 모두는 어쩌면 각자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연기할 것인가를 선택하며 살아가는 지도 모른다. 그 연기는 가짜가 아니라 진짜다. 그래서 그 선택이 그의 삶이 되기도 한다. <전원일기2021>은 놀랍게도 이러한 ‘연기의 실체’를 끄집어내 보여줬다. 20년 넘게 연기해온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조명하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난 의외의 결과다. <전원일기>를 재조명한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배우들의 삶을 통해 연기가 그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에둘러 보여주게 된 것. 이것은 배우가 아닌 우리네 보통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의미 있는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됐다. 나는 어떤 연기를 선택했고 그걸 연기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사진:M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