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여왕’으로 돌아온, 별에서 온 그대
“나 그때 왜 그랬지? 왜 귀여웠지? 왜 막 귀엽고 필살기 쓰고 홍해인 설레게 만들고 그래 가지고 내 팔자를 내가... 꼬았지? 안 귀여웠으면 이런 결혼도 안 했을 텐데, 내가.” tvN 토일드라마 ‘눈물의 여왕’에서 김수현이 술에 취해 울면서 던지는 그 대사는 이 배우가 그간 쌓아온 연기 공력을 실감케 한다. 그건 울면서 하는 자기 자랑이고 그래서 그 얘기를 들어주는 친구의 어이없어하는 표정과 합을 이뤄 시청자들에게는 빵빵 터지는 웃음을 만들어야 하는 장면이다. 울면서 웃겨야 하고, 찌질하게 보이면서 귀엽게 느껴지게 해야 한다. 그것도 술에 취한 상태로 진지하게. 그 장면 하나에 상당히 많은 감정표현들이 겹쳐져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장면은 김수현이 만들어낸 김지원의 오마주가 더해진 애드리브다. 이 드라마의 이희원 감독은 유부남들의 짠함이 느껴졌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했고, 김수현은 애드리브로 술주정 연기를 보였는데, 압권은 김지원이 과거 출연했던 ‘쌈마이웨이’에서 박서준에게 했던 애교 장면을 오마주한 것이란 사실이다. “나 예쁜 척 하면 재수없지? 근데 나도 진짜 곤란하다. 나는 예쁜 척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예쁘게 태어난 건데...” 귀를 넘기며 툭 던지는 그 말에 어이가 없어 박서준이 들고 있던 외투를 툭 떨어뜨리는 장면이 그것이다. 김수현은 그 애교를 자기 버전으로 바꿔 겨드랑이에 양손을 넣는 장면으로 보여줌으로써 시청자들을 빵 터지게 만들었다.
소년 같은 얼굴이라 지금 고등학생 역할을 한다 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만 같은 최강 동안을 가진 김수현은 이와는 상반되는 묵직한 느낌의 중후한 목소리를 가졌다. 그냥 보면 날아갈 것처럼 가벼운 밝은 이미지의 발랄함이 느껴지는데, 그런 그가 대사를 던지면 그 가벼움을 땅바닥에 단단히 붙잡아줄 것 같은 든든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흔히들 김수현을 ‘갭차이’가 확연한 배우로 이야기하는 이유다. ‘별애서 온 그대’를 연출했던 장태유 감독은 김수현의 이런 이미지에 대해 “소년의 얼굴, 사내의 목소리, 연인의 눈빛을 지녔다”고 표현한 바 있다.
그런데 그 갭차이는 그저 외모와 목소리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이 아니라 그가 가진 내면과 내공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를 스타덤에 올린 ‘해를 품은 달’에서 김수현이 한단계 업그레이드 된 연기로 호평받았던 건 온전히 그의 실력 덕분이었다. 당시 아역을 맡은 여진구가 큰 인기를 끌면서 그 성인역을 맡았던 김수현은 자칫 연기력 논란을 맞을 수도 있었다. 김수현은 그 우려를 호평으로 반전시켰다.
이런 갭차이에서 내면의 묵직함을 가장 극점으로 보여줬던 건 다름 아닌 ‘별에서 온 그대’에서 도민준이라는 인물을 연기하면서다. 외계인으로 지구에 와 무려 400년을 산 이 인물은 외적으로는 연인 관계가 되는 천송이(전지현)보다 어린 모습이지만, 내면적 깊이는 400살의 내공을 가져야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김수현은 이 인물이 가졌을 무심함(400년을 살았으니 어찌 쉽게 감정적으로 흔들릴 수 있으랴!)을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과 절제된 감정으로 표현했다. 그러면서 이 설렘 따위는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던 인물이 천송이를 만나면서 생겨나는 감정적 변화를 조금씩 표정이 나타나는 얼굴로 보여줌으로써 그 감정의 파고를 극대화했다. 결국 “같이 있고 싶다”며 감정을 터트리고 눈물을 흘리는 도민준의 모습에서 시청자들의 감정 몰입 역시 폭발할 수 있었던 건 김수현의 이 ‘갭차이’가 분명한 연기 덕분이었다.
‘별에서 온 그대’의 큰 성공과 함께 박지은 작가의 페르소나로서 ‘프로듀사’ 같은 다소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를 했던 김수현은 또다시 박지은 작가와 ‘눈물의 여왕’으로 돌아왔다. 로맨틱 코미디를 잘 쓰고 그 중에서도 코미디를 잘 그려내는 박지은 작가의 색깔에 맞게 김수현은 울면서도 웃기고, 웃으면서도 울리며 때론 의지하고픈 단단한 모습과 때론 안아주고픈 연민의 모습까지를 오가는 연기를 펼쳐 보이고 있다. 지방에 소가 30마리 넘는 유지의 아들로 서울대 법대를 나와 서울에서 살고 있는 나름 부자인 백현우는 또한 시골 청년의 풋풋함과 도시남의 세련됨이 공존하는 인물인데 여기에도 김수현 특유의 갭차이 나는 두 이미지의 공존이 효력을 발휘한다. 김수현은 순수한 시골 소년 같은 이미지와 카리스마 넘치는 차도남의 이미지가 동시에 느껴지는 배우이기도 하다.
박지은 작가의 작품이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눈물의 여왕’ 역시 로맨틱 코미디 특유의 웃음과 설렘이 가득한 가벼움으로 문을 열지만, 뒤로 갈수록 제목에 걸맞는 애절함과 애틋함을 더하며 무게감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희극과 비극이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작가의 필력에서 나오는 것으로, 갭차이의 효과를 확실히 낼 줄 아는 김수현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김수현의 애드리브가 울면서 웃기는 로맨틱 코미디의 문을 열었다면, 이제 후반부로 가면 김수현의 웃어도 눈물이 나는 희비극의 감정적 폭발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있다.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뜻으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띄게 된다는 걸 이르는 말이다. 어찌 보면 우리가 시쳇말로 ‘갭차이’라 부르는 효과는 바로 이런 지점에서 생겨나는 건 아닐까 싶다. 드러난 것과 드러나지 않은 것 사이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효과라고나 할까. 그래서 삶에서 누군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갭차이’의 효과는 그가 평소 얼마나 많은 것들을 미리 준비하고 갖추느냐에 따라 생겨난다고 말할 수 있을 게다.
김수현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연기와 볼링의 상관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그는 연기가 마치 볼링처럼 “볼이 어디로 갈지 모르지만 믿고 던지는 것”이라며 “결국 연기도 캐릭터에 내가 얼마만큼 몰입해서, 또 그걸 얼마나 믿고 던지는가 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하지만 믿기 위해서 그가 홀로 준비했을 시간들을 간과할 수 있을까. 결국 갭차이의 반전은 거기서 생겨났을 테니 말이다. (글:국방일보,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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