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기 문화풍경을 바꾼 비주류의 전복
불황기를 맞아 늘 에스프레소나 카푸치노 같은 화려하고 세련된 음악적 감성들이 어딘지 다른 나라 얘기처럼 들렸던 분들이라면, 장기하가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하고 외쳤을 때 무릎을 탁 쳤을 만도 하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오는 그 ‘싸구려 커피’의 감성은 홍대 클럽에서는 익숙한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처음 ‘이하나의 페퍼민트’에서 전파를 탔을 때는 날카로운 B급 감성의 바늘에 찔린 것 같은 충격이 되었다. 그 낯선 노래가 가진 천진함에 가까운 솔직함은 불황을 맞아 오히려 화려하고 세련된 음악들의 수사를 낯선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단지 낯설게만 느껴지는 비주류의 감성에 머물지 않고 주류로 떠올랐다. 지난 27일 발표된 ‘장기하와 얼굴들’의 첫 정규앨범 ‘별 일 없이 산다’는 초판 8천 장이 예약으로 모두 팔려나가 급히 1만 장을 새로 찍었다고 한다. 장기하에 대한 폭발적인 대중들의 반응은 물론 그 음악의 독특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항간에는 산울림과 송골매의 재림이라고 부를 정도로 ‘장기하와 얼굴들’음악적 뿌리를 포크 록의 계보에서 찾고 있다. 장기하는 포크가 가진 메시지성에 B급 감성을 노래에 장착해, 장기 불황과 취업 전쟁에 내몰린 청춘들의 암담함을 거꾸로 뒤집는다.
‘별 일 없이 산다’는, 이 기가 막힌 중의적 의미를 가진 제목의 노래는 ‘일 없이 사는 자’가 그로 인해 ‘별 고민 없이 산다’고 말하는 노래다. 이 일 없는 자가 일을 좇지 않고 일 없음을 즐기는 태도는 실로 (아마도 일이 있는 자가) ‘깜짝 놀랄 만한 얘기’면서 ‘십중팔구 불쾌해질 얘기’로 전복된다. 장기하는 여기서 하나 더 나아가 바로 이 ‘일 없는 상태’가 즐겁고 신나고 재밌다고 말함으로써, 먼저 상황을 뒤집고 그런 상황을 만든 그 누군가의 의도가 실패했음을 통쾌하게 역설한다.
B급 감성이 주류로 편입되는 현상은 장기하의 경우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워낭소리’이후 갑자기 관심을 갖게 된 독립영화에서도 B급 감성은 도드라진다. 고작 제작비 1천만 원으로 무려 3만 명의 관객을 향해 가고 있는 ‘낮술’이 대표적이다. 여자친구와 실연을 당하고 친구들의 부추김으로 떠난 정선 여행길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룬 이 영화에서는 비루하게까지 느껴지는 청춘들의 감성이 곳곳에서 배어 나온다. 남들 다 일하는 시간에 음침한 주점 한 구석에서 소주를 마시며 술기운을 빌려 한바탕 호기를 부리는 그 낮술의 광경은, ‘장기하 감성’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이 시대 청춘들의 좌절과 그럼에도 절대로 고개 숙이지는 않는 자존감을 상징적으로 그려낸다.
비주류가 주류가 되는 상황을 부추긴 것은 다름 아닌 불황이다. 투자는 전체적으로 줄어들었고, 그 줄어든 투자에서 어떻게 하면 가장 많은 수익을 끌어올릴 수 있는가가 불황기 생존법이 되었다. 대규모 투자로 대규모의 수익을 얻어가던 주류는 이 시기에 오히려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 전반에 나타나는 투자상황의 변화보다 중요한 것은 불황을 맞아 달라지게 되는 대중 정서의 변화다. 심각한 불황기에는 비주류 정서가 주류가 되기 마련이다. 이른바 ‘장기하 감성’은 바로 그 지점에서 역설의 자양분으로 피어난 이 시대 청춘들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
'옛글들 > 네모난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대중음악상이 ‘싸구려 커피’인가 (4) | 2009.03.13 |
---|---|
‘지식채널e’, 그 역설의 미학 (2) | 2009.03.11 |
‘워낭소리’촬영지 관광과 증발되는 시골 (0) | 2009.03.04 |
‘소녀’와 ‘꽃남’에 꽂힌 중년들, 왜? (1) | 2009.03.02 |
‘워낭소리’의 대박, 왜 위기일까 (1) | 2009.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