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별이 된 김영애, 마지막까지 보여준 연기투혼

“묵은 빚은 돈으로 갚는 거 아이다. 눈으로 발로 갚는 기다.” 아마도 영화 <변호인>을 봤던 분들이라면 고 김영애가 연기한 국밥집 아줌마의 이 대사를 기억할 것이다. 국밥 한 그릇 먹을 돈이 없어 도망쳤던 송 변호사(송강호)가 성공해 돌아와 그 때의 빚을 갚겠다며 돈을 내밀자 아줌마가 했던 그 대사. 

사진출처:영화<변호인>

이제 그렇게 찰진 대사를 더 이상은 들을 수 없게 됐다. 김영애는 지난 9일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고인이 된 그녀의 소식이 특히 놀랍게 다가왔던 건, 최근까지도 우리의 기억 속에 선연히 남은 작품들 때문이다. 유작이 된 KBS <월계수 양복점>에서 우리는 전혀 그녀가 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느끼지 못했다. 뒤늦게 알려진 것이지만 끝까지 진통제 투혼을 보이며 펼친 연기는 그래서 우리에게 김영애가 얼마나 치열한 배우였는가를 각인시켰다. 

김영애만큼 극과 극의 이미지를 연기한 배우가 있을까. <로얄패밀리>나 <황진이> 같은 작품에서 그토록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보여줬지만, <변호인>은 물론이고 <닥터스>나 <판도라>, <카트> 같은 작품에서는 서민들의 정이 느껴지는 따뜻한 연기를 보여줬다. 이제는 고인이 되었다는 소회 때문일까. 그래도 특히 기억이 남는 건 한 그릇의 국밥 같은 따뜻함이 묻어나는 서민적인 모습이다. 

<변호인>이나 <닥터스> 그리고 <판도라> 같은 작품을 보면 김영애라는 배우가 그 작품 전체에 어떤 정서를 만들어냈는지가 분명하게 느껴진다. 물론 주인공의 역할은 아니지만 작품의 어떤 색깔을 부여하는 역할. 이를 테면 대사 한 마디로도 느껴지는 <변호인>에서 국밥집 아줌마의 그 따뜻함이 주는 서민적 정서는 속물이었던 송 변호사가 인권변호사가 되는 계기가 된다. 

<닥터스>에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유혜정(박신혜)이 엇나가지 않고 잘 자라 당당한 의사가 되는 그 배경에는 역시 강말순 할머니(김영애)라는 존재가 자리했다. “밥 먹는데 무슨 자격이 필요해? 숨 달려 있으면 먹으면 되는 거지.” 거기서도 이 할머니는 유혜정에게 따뜻한 밥을 차려준다. <판도라>에서 사지로 아들을 보내며 오열하는 모습이나, <카트>에서 차츰 노동자들과 연대해가는 모습 역시 서민으로서의 아픔과 따뜻함 같은 걸로 기억된다. 

즉 원로배우로서 작품의 뒤편에 늘 서 있었지만 그 존재가 만들어내는 온기나 때로는 차가움마저 작품 전체의 중요한 정서를 담는 역할을 해줬다는 점이다. 이 점은 아마도 같이 작업을 해온 배우들로서는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고인이 되었다는 소식에 함께 작업했던 제작진들이나 배우들이 진심어린 애도의 뜻을 표하는 건 그래서다. 

김영애가 췌장암을 발견한 건 이미 2012년 <해를 품은 달>을 촬영하던 도중이었다고 한다. 힘겨운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끝까지 책임을 다한 후에야 비로소 9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유작이 된 <월계수 양복점>을 촬영하면서도 고인은 아픈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고 대사 하나하나를 잊는 법이 없었다고 했다. 작품 속에서 그 작품의 정서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고인은 아마도 배우들에게 하나의 귀감이 되는 모습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 모습은 대중들에게 어떤 열정과 따뜻함으로 기억될 것이다. <변호인>에서 보여줬던 영원히 식지 않을 국밥집의 온기처럼.

‘시카고 타자기’, 이토록 문학적 상징들이 가득한 드라마라니

독특한 드라마. 아마도 tvN 새 금토드라마 <시카고 타자기>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그런 표현이 적당하지 않을까. 총소리가 타자기 치는 소리를 닮았다고 해서 톰프슨 기관단총에 붙여진 별칭에서 따온 <시카고 타자기>라는 제목은 이 드라마가 어떤 스타일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일종의 문학적 해석이 가능한 상징들을 주요 모티브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시카고 타자기(사진출처:tvN)'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한세주(유아인)가 시카고에서 발견한 한 타자기는 그에게 기묘한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타자기는 1930년대 경성에서 글을 쓰던 자신과 친구인지 동료인지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인물 유진오(고경표), 그리고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듯한 전설(임수정)이 함께 어울렸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것이 실제로 벌어졌던 일인지 아니면 한세주라는 작가의 상상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 타자기를 구입하려 하지만 팔지 않겠다던 주인은 타자기 스스로 자신을 한세주에게 보내달라고 찍어대는 기이한 광경에 놀라 결국 한세주에게 타자기를 보낸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타자기를 한세주에게 배달해주는 인물이 바로 전설이다. 어찌 보면 지나치게 우연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드라마가 이를 허용해주는 건 다름 아닌 한세주라는 작가의 존재 덕분이다.

이 모든 우연적으로 보이는 사건들은 어쩌면 한세주라는 상상력이 넘쳐나지만 지금은 무슨 일인지 슬럼프에 빠져들어 점점 미칠 지경이 되어가는 작가가 재구성한 일들처럼 보여진다. 그것이 한세주의 욕망에서 비롯된 상상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즉 슬럼프에 빠진 그에게 전설과 시카고에서 배달된 타자기는 마치 동격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뮤즈’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전설이 계속해서 한세주에게 날리는 메시지는 “삼류소설 쓰지 말고 위대한 작품을 쓰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한세주가 베스트셀러 작가로 성공은 했지만 스스로에게 느끼는 어떤 자책감과 그래서 더 커지는 욕망의 목소리일 수 있다. 자신의 소설을 그대로 따라해 모방범죄를 저지른 스토커의 등장은 그를 더욱 혼란에 빠뜨린다. 자신의 소설은 마치 시카고 타자기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톰프슨 기관단총처럼 누군가에게 무시무시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심지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만큼. 

게다가 그 스토커가 한 말, 한세주가 자신에게 살인의 영감을 주었듯이 자신이 그에게 문학적 영감을 주었다는 말이 그에게는 날카로운 가시처럼 박힌다. 그래서 한세주에게는 너무나 상반된 영감을 제공하는 두 인물이 양편에 서 있는 셈이다. 하나는 장르 소설 속에서 누군가 살인을 저지르는 인물을 그려내게 하는 영감을 주는 스토커 같은 인물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삼류소설 쓰지 말고 위대한 작품을 쓰라며 영감을 주는 전설 같은 인물이다. 

소설이 잘 써지지 않는 한세주를 끝없이 몰아세우는 건 전속 출판사인 황금곰 대표 갈지석(조우진)이다. 그는 소설을 작품이 아닌 상품으로 본다. 소설의 성공을 게임과 영화 등등으로 멀티유즈하여 엄청난 비즈니스로 만들어내려 한다. 그래서 슬럼프에 빠진 한세주에게 유령작가를 쓰자는 은밀한 제안을 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유진오다. 그런데 드라마는 유진오라는 인물을 진짜 유령 같은 미스터리한 존재로 연출하고 있다. 어쩌면 그 역시 한세주가 만들어낸 상상 속의 인물일 가능성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시카고 타자기>는 이처럼 창작자와 뮤즈라는 영감을 주는 관계를 멜로와 미스터리 등의 장르를 통해 흥미롭게 풀어내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해지는 건 전적으로 한세주라는 작가가 중심에 서 있기 때문이다. 많은 판타지적 설정들이 등장하지만 그것이 용인되고 이해되는 지점은 다름 아닌 성공은 했지만 어딘지 불안하면서도 해소될 수 없는 욕망을 가진 작가 한세주의 상상일 수도 있다는 문학적 개연성이 있어서다. 

이처럼 문학적인 상징들로 가득 차 있는 작품을 대중적으로 설득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다행스러운 건 이런 상징들을 인물들의 밀고 당기는 멜로와 스릴러가 덧붙여진 장르적 긴장감 그리고 판타지까지 동원해 흥미진진하게 만들어내는 진수완 작가와 김철규 감독의 공력이 있고, 이를 제대로 받쳐주는 유아인이나 임수정, 고경표 같은 믿고 보는 배우들이 있다는 점이다. 

<시카고 타자기>는 지금껏 이런 형태의 드라마가 국내에 별로 없었다는 점에서 제작진에게도 또 시청자들에게도 결코 쉽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그 독특함 안에서도 어떤 대중적인 공감을 이끌어가는 작가와 연출자 그리고 배우들의 힘이 느껴진다. 그리고 바로 이런 도전적인 시도 그 자체에 이 드라마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법안 아이디어 넘쳐난 ‘무한도전’, 이대로만 된다면...

“교육 관련법은 저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직접 뽑을 수가 없어요. 직접 뽑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 ‘국민의원 특집’에서 청소년 참정권을 제안한 한 여학생은 적어도 교육감 선거에는 청소년이 참여할 수 있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녀는 자신들이 원하는 건 자신들이 제일 잘 알고 있다며 그런 자신들이 배제된 선거권에 대한 불합리함을 지적했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한 임신부는 평소 차량을 주차할 때의 불편함을 호소하며 ‘임신부 주차 편리법’을 제안했다. 임신부로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가 너무 힘들고 그래서 차를 끌고 나가면 주차할 때 공간이 너무 좁아서 내릴 때 배가 끼거나 긁힌다는 것. 그녀는 장애인 주차공간에 임신부도 포함시켜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법안 제안에 담았다. 

한 국민의원은 항상 정치인들이 ‘국민의 뜻’이라고 말하는데 자신은 그런 뜻을 밝힌 적이 없다며 지역구 주민들과 국회의원이 만나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이른바 ‘국회의원 미팅법’을 제안했다. 국민의 의견을 입법을 담당하고 있는 국회의원들에게 직접적으로 전하고픈 마음이 그 안에서는 느껴졌다. 

‘국회의원 4선 방지법’도 눈에 띄는 법안 아이디어였다. 오래도록 연임하는 국회의원들과 새내기 의원들이 공정하게 선거를 하기가 쉽지 않고, 또 이렇게 새로운 의원들이 들어와야 다양한 의견이 담겨진 법안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뜻에서였다. 또 한 대학생은 학비도 어마어마한데 집에서 나와 자취를 해야 하는 학생들의 경우 주거비 역시 감당하기 어렵다며 ‘청년 주거 지원법’을 제안했다. 감옥 독방보다도 작은 고시원에서 청춘을 버텨내고 있는 청년들의 현실이 절절히 담겨진 법안 아이디어였다. 

국민들의 이러한 제안에 그 자리에 참여한 현역 국회의원들은 적이 깊은 감명을 받았다. 박주민 의원은 “마지막쯤 되니까 꼭 한 마디씩 하고 싶어하시더라”며 평소 국민들이 얼마나 하고픈 이야기들이 많았다는 걸 실감했다고 했다. 이용주 의원은 “200분의 국민의원들이 300명의 국회의원보다 더 많은 생각을 갖고 계셨다”고 말했고, 이정미 의원은 법안이 자신들을 위한 필요보다는 타인들을 위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음을 짚어내며 “함께 사는 공동체를 꿈꾸신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고 했다. 

<무한도전> 국민의원 특집은 예능이라는 새로운 접근방식으로 정치에 대한 문턱을 대폭 낮춰주었고 법안이라는 것이 저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 생활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안들이이라는 걸 확인시켜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치인만이 아니라 국민들 역시 함께 머리를 모을 때 더 좋은 사회를 위한 아이디어들이 나올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무엇보다 <무한도전> 국민의원 특집이 특별하게 다가온 건 그 자리가 현 국민들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법안이란 사실 국민들이 느끼는 힘겨움이나 갈증, 불만 같은 것을 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정미 의원이 밝힌 것처럼 우리네 국민들이 자신만의 문제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우리 사회가 보다 나아지기를 바라는 그 진심들이 느껴진 부분이다. 이러한 국민들의 뜻대로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철거된 ‘윤식당’, 위기는 기회라는 걸 보여주다

장사도 방송도 언제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다. tvN 예능 프로그램 <윤식당>에게 닥친 가게 철거라는 변수는 모든 걸 원점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점에서 난감함을 넘어 절망적인 느낌마저 주었을 게다. 순식간에 주저앉아 거의 폐허가 되어버린 그 윤식당 앞을 지나며 정유미가 애써 참던 눈물을 결국 보인 건 단 하루라도 그 곳에 주었던 정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 나가야하는가에 대한 막막함. 

'윤식당(사진출처:tvN)'

하지만 나영석 PD는 역시 이러한 변수에 노련함을 보여줬다. 그 상황 자체가 갖는 쓸쓸함과 허망함 그러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 2호점을 준비하는 그 과정을 차근차근 담아낸 것이다. 철거된 가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허름한 가게를 단 하루 만에 괜찮은 2호점으로 변신시켰던 것. 

물론 새로 오픈한 2호점은 위치가 조금 동떨어져 있어 찾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폐허 앞에서 망연자실했던 식당 식구들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주는 희망은 컸다. 손님이 없어 남은 불고기를 집으로 돌아와 함께 먹으며 그들은 신 메뉴로 라면을 넣을 계획을 세우며 2호점에 대한 꿈을 키웠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번 <윤식당>에 닥친 철거라는 극단적인 위기 상황은 오히려 방송에는 호재로 작용했다. <윤식당>은 2회에서 이미 본격적으로 외국인 손님들이 문정성시를 이루는 식당의 면면들을 보여준 바 있다. 가게를 처음 오픈하는 날의 그 긴장감과 설렘의 교차가 만들어내는 재미는 의외로 쫄깃했고 맛있게 음식을 먹는 외국인들의 반응은 보는 이들마저 흡족하게 해줬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만 반복해서 보여줬다면 어땠을까. 식당은 잘 됐을지 몰라도 방송은 조금 심심해졌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잘 됐던 식당을 하루만에 철거당하는 위기 상황은 <윤식당>에 새로운 긴장감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윤여정은 새로 연다는 가게의 조악한 상황에 낙담했고 하루 만에 싹 바뀐 가게에 반색했다. 정유미는 무너진 1호점 앞에서 안타까움의 눈물을 보였지만 곧 씩씩하게 긍정 에너지를 보여주며 윤여정을 도왔다. 이서진은 그 위기 상황에서도 내려놓을 건 내려놓고 유머를 잃지 않는 모습으로 어떤 든든함을 주었고 신구는 역시 경륜에서 나오는 혜안으로 “걱정할 것 없다”며 정유미를 다독였다. 그 많은 다양한 감정들이 나올 수 있었던 건 어쩌면 이 1호점 철거와 2호점 시작이라는 위기의 변수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들이다. 

물론 예능은 예능이고 실제 장사는 장사다. 그것이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갑작스레 변수가 생길 수 있는 건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이고 그럴 때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결국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 시작하는 것일 게다. <윤식당>은 그런 점에서 보면 장사를 하다 어떤 위기를 맞게 되기도 하는 이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위기 속에서 빛난 건 서로가 서로를 챙기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이라는 걸 <윤식당>은 보여줬다. 가게는 무너졌지만 그래도 새로 시작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 건 모두 가족 같은 <윤식당> 사람들 덕분이 아닌가. 1달이나 공을 들였던 가게가 무너지는 걸 보며 가장 마음 아팠을 미술팀은 밤새 2호점을 말끔하게 만들어냈고 그걸 보고 정유미는 엄지를 척 들어올렸다. 2호점의 새로운 시작점에 선 그들에게서 다시금 설렘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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