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킹’, 이민호의 판타지보다 이정진의 현실이 공감 가는 이유

 

SBS 금토드라마 <더 킹:영원의 군주(이하 더 킹)>는 이림(이정진)이 정태을(김고은)에게 취조를 받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림은 만파식적을 설명하며 그걸 얻은 순간부터 자신의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고 말한다. 이제 70세가 넘은 나이지만 겨우 중년의 모습을 한 이림은 “그래서 동생을 죽였냐”는 정태을의 질문에 “죽였다”며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모든 날이 허락된 내 아우는 적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황제가 된 그저 선하기만 한 내 이복형제는 세상을 손에 쥐고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 제 손에 들린 그 만파식적이 세상이란 것도 모르더군.”

 

이림은 만파식적을 얻은 후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넘어오는 차원의 문을 통과해 들어와 그 곳에서 더없이 미천하게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을 마주한다. “겨우 이렇게 살고 있었던 거야? 더없이 미천하게? 그래 꽤 닮았지. 네 놈이랑 내가. 근데 네 놈이랑 난 닮은 게 아냐. 난 너야. 다른 세상의 너. 하지만 난 네 놈이랑 아주 달라. 난 네 놈보다 훨씬 고귀한 존재거든.” 그리고 그는 닮았지만 다른 대한민국의 자신을 살해한다.

 

이림의 캐릭터가 강렬하게 다가오는 건 그가 자신의 운명에 맞서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대한제국에서 적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받았다. 태어나기는 첫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모친은 황후가 되지 못했고 열세 살에 금친왕으로 봉해진 채 쥐죽은 듯 살아가야 했던 존재. 그는 결국 역모를 일으킨다. 황제를 시해하고 만파식적을 얻은 후 어린 조카 이곤(이민호)의 목을 졸랐다.

 

그는 대한민국으로 넘어와서도 그 곳에서 비루한 삶을 연명하는 자신을 죽여 버린다. 이로써 그는 대한제국에서도 대한민국에서도 그 체계는 다르지만 태생적으로 정해지는 운명을 거부하고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가는 선택을 한 것이다.

 

물론 <더 킹>에서 이림은 주인공이 아니고,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악역이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이곤과 정태을이다. 그들은 차원의 문을 통과해 만났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으며 그래서 서로를 지켜내기 위해 애쓰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드라마는 이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차원에 서 있으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을 담아낸다. 서로 다른 차원에서 각각 도서관에 들어간 두 사람이 서로를 생각하지만 분리된 채 앉아 있는 장면은 이 애틋한 감정들을 잘 표현해낸다.

 

하지만 이미 태어나면서 모든 걸 갖게 된 이곤이라는 황제가 맥시무스라 불리는 백마를 타고 차원을 넘나들며 정태을과 판타지적인 사랑을 나누는 대목이 담아내는 달달함보다 어쩐지 제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이림의 처절함에 더 큰 공감이 가는 건 왜일까. 그건 어쩌면 모든 걸 가진 자를 통해 느끼는 판타지보다, 가지지 못한 자의 현실이 더 마음을 건드리기 때문이 아닐까.

 

이정진은 이번 작품을 통해 확실히 이림이라는 인물의 아우라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문장이 찍힌 우산을 들고 서 있는 뒷모습의 실루엣만으로도 단단한 긴장감을 만들어내고 있으니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껏 그 어떤 작품에서도 볼 수 없었던 이정진의 강렬한 존재감이 <더 킹>의 악역을 통해서 도드라지고 있다.(사진:SBS)

‘사냥의 시간’, 도망칠 것인가 맞서 싸울 것인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영화 <사냥의 시간>은 정확한 시간적 배경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머지않은 미래라는 것이고, 또다시 벌어진 금융위기로 인해 일상이 처절하게 파괴된 상황이라는 걸 황량한 거리를 통해 보여줄 뿐이다. 특정한 시공간을 적지하지 않고 있어서인지 이 영화는 암울한 미래의 청춘들이 겪는 현실을 은유한 가상처럼 여겨지는 면이 있다.

 

윤성현 감독은 어떻게 그런 공간들을 헌팅하고 축조한 것인지 현재의 공간이면서도 동시에 디스토피아적인 근미래의 공간 같은 그 느낌을 포착해낸다. 분명히 우리가 어디선가 봤던 공간이지만, 영화가 연출하고 편집해낸 영상 속 그 공간은 그 현실과 살짝 뒤틀려 있어 보는 이들을 긴장하게 만든다. 사실상 <사냥의 시간>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지점은 바로 이 독특한 분위기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현실과 가상이 뒤섞여 만들어낸 영화적 공간 위에서 준석(이제훈), 장호(안재홍), 기훈(최우식) 그리고 상수(박정민)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지옥으로부터 도망칠 계획을 세운다. 도박장 금고를 털겠다는 것. 모든 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자그마한 고리들이 드러나면서 이들은 쫓기는 신세가 된다.

 

미스터리한 인물 한(박해수)이 사냥을 시작하고, 사냥감이 되어버린 준석, 장호, 기훈은 필사적으로 도주해 그들이 애초 꿈꿨던 하와이를 닮은 대만 컨딩으로 밀항하려 한다. 한 탕 해서 휴양지로 도망치려 하는 청춘들과 이들을 막아 서 사냥하기 시작하는 한의 대결은 영화 전편을 추격전으로 만들어 버린다.

 

쫓고 쫓기는 일견 단순해 보이는 추격전이지만, 준석, 장호, 기훈의 끈끈한 우정과 총을 들긴 들었지만 두려움과 공포에 떠는 청춘의 초상들은 시종일관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느와르 액션의 틀을 갖고 왔지만 사냥감이 되어 쫓기는 신세라는 그 은유는 영화를 액션 이상의 사회극으로 들여다보게 만든다.

 

경제위기로 인해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는 청춘들과, 그래서 그들이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도망치려 안간힘을 쓰는 장면은 근 미래 설정의 가상극을 현재의 현실과 중첩시켜 놓는 이유다. 피도 눈물도 없이 이들을 추격하며 죽이거나 죽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의지가 없어 보이는 한이라는 존재의 공포 역시 마찬가지다. 청춘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막연한 공포감이 그 캐릭터를 통해 실감나게 구현된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목표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곳 역시 현실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자각은 무얼 말해주는 걸까. 하와이와 비슷해서 가려 했던 대만의 컨딩은 하와이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실제 하와이를 갔다고 해도 그 곳이 그들이 상상했던 그런 하와이는 결코 되지 못했을 게다. 그들은 다만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도망치는 것으로 이 현실을 탈출할 수 있을 거라 착각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질문한다. 사냥감이 되어 끝없이 쫓길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사냥하려는 이와 맞서 싸울 것인가. 어느 곳으로 도망친다 해도 출구는 없다. 그러니 이 지독한 ‘사냥의 시간’을 벗어나는 길은 그들을 사냥감으로 만든 이들과 부딪치는 길 뿐이다. 저 멀리 있을 것처럼 보이는 허상이 아닌 바로 우리 앞에 놓여진 현실과 마주하는 길 뿐.(사진:넷플릭스)

‘부부의 세계’, 적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JTBC 금토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딱 그렇다. 바람을 피워 이혼 당하고 결국 내연녀와 결혼해 가정까지 꾸린 이태오(박해준)는 어째서 지선우(김희애)를 자꾸 신경 쓰는 걸까. 그건 여전히 남아 있는 미련일까 아니면 집착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애증 같은 것일까.

 

이태오는 지선우가 김윤기(이무생)와 가깝게 지내는 걸 자꾸만 신경 쓴다. 이미 이혼으로 끝나버린 부부 관계지만 이태오가 이러는 건 그의 엇나간 애정관 때문이다. 그는 과거 여다경(한소희)과 바람을 피울 때도 뻔뻔하게 두 여자를 다 사랑한다고 말했고, 사랑이 죄는 아니지 않냐고 말한 바 있다.

 

그런 뻔뻔한 애정관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에, 그가 여다경과 꾸린 가정은 불안하기 이를 데 없다. 특히 여다경은 자신이 저질렀던 불륜의 대가를 결혼 후 자신이 지선우의 입장이 되어 톡톡히 치르고 있는 중이다. 남편의 사무실을 염탐하게 하고 그의 서랍에 숨겨진 또 다른 핸드폰에서 지선우의 사진을 발견한 여다경은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자신이 했던 일들이 부메랑처럼 돌아올 거라는 불길한 예감.

 

그런데 이태오는 박인규(이학주)를 사주해 지선우를 위협하게 만든 인물이기도 하고 또한 그의 부원장직을 물러나게 하는 조건으로 병원에 투자를 제안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태오는 지선우를 동네에서 몰아내려 하고 받은 만큼 갚아주려 하는 복수심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다치거나 하는 건 원치 않는다. 그는 너무나 유아적인 본능에 휘둘리는 인물처럼 보인다. 화가 나면 화를 내지만 또 그러면서도 질투를 하기도 하는 그런 이율배반적인 인물이 그다.

 

속을 알 수 없는 건 이 드라마에서 거의 유일하게 지선우를 돕는 괜찮은 남자로 그려져 온 김윤기도 마찬가지다. 그는 지선우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찌 된 일인지 여병규(이경영)와 연결된 인물이라는 게 드러났다. 여병규는 은근히 김윤기를 부원장으로 밀고 있고, 그를 통해 지선우와 이태오의 현재 관계를 묻기도 한다. 과연 김윤기는 여병규가 사주한 인물일까. 아니면 여병규가 그렇게 믿게 만들면서 나름대로 지선우를 도우려는 인물일까. 그의 속내 역시 알 수가 없다.

 

<부부의 세계>에는 관계의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이 가득 채워져 있다. 지선우의 이웃인 고예림(박선영)과 손제혁(김영민)의 관계도 그렇다. 손제혁은 또 다시 바람을 피우고 있고, 고예림은 그 사실을 어느 정도는 감지하고 있지만, 평소에는 그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쇼윈도 부부처럼 보이지만, 또 “우리도 아이를 가질까”하고 묻는 손제혁 앞에서 고예림은 눈물을 쏟아낸다. 가식으로만 가득해 보이지만 때론 진심이 겹쳐지는 그런 관계가 이들의 부부 세계다.

 

상습적인 폭력으로 감방에까지 갔다온 박인규와 그가 다시 찾아간 민현서(심은우)의 관계도 애매모호하다. 민현서는 더 이상 그와 얽히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딱 선을 긋지는 않는다. 그건 두려움 때문일까 아니면 여전히 남은 미련 같은 것일까. 자신을 감방에 보낸 민현서를 찾아와 다시 시작하자고 말하는 박인규도 마찬가지다. 그건 진심일까 집착일까.

 

<부부의 세계>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봐왔던 관계들을 다시금 들여다보게 만든다. 지극히 완전해 보이는 부부 관계가 실상은 완전히 깨져 있기도 하고, 이혼으로 끝난 관계지만 그 고리가 여전히 이어져 있기도 하다. 제 버릇 남 못주듯 계속해서 바람을 피우지만 그러면서도 어떤 허무함을 느끼며 아내 앞에 진심을 꺼내놓기도 하고, 재혼을 했지만 여전히 미련과 집착이 남아 전처를 신경쓰기도 한다. 그래서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부부의 세계>의 깊은 몰입감을 만든다. 지금껏 잘 들여다보지 않았던(혹은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던) 그 관계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꺼내 보여주고 있으니.(사진:JTBC)

‘슬의생’은 어떻게 자극 없이 시청자들을 주목시킬까

 

마치 평양냉면 같은 맛이다. 그다지 자극적이지 않은 심심한 맛이지만, 조금 지나고 나면 또 생각나는 그런 맛. tvN 목요스페셜 <슬기로운 의사생활>에는 JTBC 금토드라마 <부부의 세계> 같은 강렬하고 자극적인 맛은 별로 없다. 그래서 드라마가 너무 갈등이 없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갈등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그 갈등들이 일상 속에 담겨져 있어 자잘하게 느껴질 뿐이다. 예를 들어 경찰이 꿈이었지만 뇌수술을 받게 되어 더 이상 그 꿈을 이어갈 수 없게 됐다며 자조하는 환자에게 수술 중 안치홍(김준한)이 자신 역시 육사에 들어갔지만 훈련하다 마비가 와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털어놓는 장면 같은 게 그렇다.

 

자잘한 이야기지만, 그간 그가 육사를 그만둔 이유를 동료들에게 굳이 밝히지 않으려 했던 터라 그의 고백에 담겨진 환자를 위로하려는 마음이 더더욱 절절하게 느껴졌다. 또 남편의 간 이식을 받았지만 남편이 외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투약을 거부하며 좌절하는 환자에게 이익준(조정석)이 자신 역시 아내의 외도로 이혼했다는 사실을 들려주는 장면도 그렇다. 늘 밝게만 보이던 익준의 속엣 이야기가 슬쩍 드러나고, 마침 그 옆 병상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택이 아버지’(응팔에 나왔던)가 그 환자를 챙겨주는 훈훈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 일상의 자잘한 이야기 속에 연애가 빠질 수 없다. 혼자 속으로만 끙끙 앓으며 짝사랑을 하던 장겨울(신현빈)이 안정원(유연석)에게 용기를 내서 저녁을 사달라고 말하는 에피소드가 그렇고, 여전히 속앓이만 하는 추민하(안은진)의 양석형(김대명)에 대한 짝사랑도 그렇다. 물론 이제 익준의 여동생 익순(곽선영)과 연인으로 발전해 달달한 관계를 이어가는 김준완이 이를 친구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드라마에 그 흔한 빌런 하나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 드라마지만, 정반대로 이 드라마는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인물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병원이라는 공간이 가진 특징 때문에 환자의 생사가 오가는 급박한 상황들과, 때론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지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마치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는 사람들처럼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래서 이런 자잘한 에피소드들을 줄줄이 나열해 이 드라마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매 회 의대 5인방이 밴드로 모여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들어가는 건 그래서 자칫 흩어져 있는 에피소드들을 그 노래를 통해 묶어내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갈등이나 아픔, 기쁨 같은 것들은 굉장히 극적인 어떤 사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잘한 일상들 속에 담기기 마련이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의 외도나 배신 같은 커다란 아픔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일상은 그런 극적인 사건들조차 서서히 덮어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나간다. 놀랍게도.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그래서 배우자의 불륜 같은 사건이 벌어져도 <부부의 세계> 같은 파국을 그리지는 않는다. 물론 분노하지만 그래도 다시 일상을 살아내는 익준처럼, 힘들어도 숨쉬고 밥을 먹고 수다를 떨고 웃고 우는 그 과정들을 통해 그래도 삶은 계속 이어진다는 걸 보여준다. 그래서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담는 건 병원이라는 특수한 공간의 이야기면서, 동시에 삶을 버텨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똑같이 하루하루의 일상의 무게를 견뎌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만한 위로가 있을까. 슴슴해도 자꾸만 생각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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