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도가 땅에 떨어진 현실, <객주>의 시사점

 

장사에도 상도가 있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장사꾼의 첫 번째 도리다.’ KBS 드라마 <객주>의 천봉삼(장혁)이 말하는 장사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건네는 천봉삼에게 길소개(유오성)는 장사에 상도가 어디 있냐고 말한다. 그는 장사는 그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두 관점의 부딪침. 이것은 아마도 <객주>가 현재에 전하려는 메시지의 대부분일 것이다.

 


'장사의 신 객주(사진출처:KBS)'

상도를 지키려는 천봉삼의 길은 험난하다. 그는 화적들에 의해 막혀있던 북관대로를 뚫고 그 길을 막아놓은 것이 육의전 대행수인 신석주(이덕화)라는 사실에 분노한다. 수로를 이용한 유통망을 독점하고 있는 신석주가 육로를 일부러 막아 엄청난 이문을 남기고 있었던 것. 하지만 한달음에 찾아와 상도를 얘기하는 천봉삼에게 신선주는 오히려 달콤한 제안을 한다. 북관대로를 놔두면 자신이 육의전 어물전을 내주겠다는 것. 하지만 천봉삼은 이를 거부하고 전국의 보부상들에게 이제 북관대로가 열렸다는 사발통문을 돌린다.

 

그렇다면 상도는커녕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가까운 이들조차 죽음으로 몰아넣는 길소개나 신석주의 길은 어떨까. 거대한 자본을 이용해 매점매석하는 것이 이들이 돈을 쉽게 버는 방식이다. 북관대로가 열려 보부상들에 의해 장삿길이 열리자 이들은 대신 물화를 꽉 움켜쥐고 내놓지 않음으로써 보부상들의 뒤통수를 친다.

 

육의전과 보부상. 육의전을 표상하는 인물이 신석주와 길소개라면 보부상을 대표하는 인물은 천봉삼이다. <객주>는 결국 천봉삼이라는 주인공을 통해 국가에 의해 독점적인 권리가 부여된 육의전의 폐해를 알리고 대신 보부상들이 열어갔던 그 험난해도 가치 있는 장삿길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육의전은 거대한 자본을 이용해 장삿길을 막음으로써 매점매석으로 폭리를 취하고, 보부상은 그렇게 막혀있는 장삿길을 맨몸으로 뚫고 나간다.

 

<객주>가 지금의 시청자들에게도 어떤 통쾌함을 주고 있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이 달라졌고 시대도 많이 흘렀으며 먹고 사는 문제도 조선시대에 비해서는 훨씬 나아진 현재이지만 그럼에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고 어떤 면에서도 더 나빠진 것도 있다. 그것은 지금도 여전한 정경유착의 육의전들이 대자본을 이용해 폭리를 취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 과정에서 작은 장삿길들이 막혀 고사하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상도 따위는 없어진 지 오래다.

 

그러니 <객주>의 천봉삼 같은 인물이 육의전 대행수와 맞서 막혀있던 북관대로를 뚫고 달콤한 유혹을 거부한 채 전국의 보부상들이 살아갈 길을 열어주는 대목이 우리에게 특별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객주>가 다루는 길은 그래서 여러 가지 의미들을 내포한다. 그것은 장사꾼들에게는 자신은 물론이고 식구들의 목숨이 달려있는 목숨길이다. 하지만 그것은 장사꾼들만이 살기 위한 길은 아니다. 그 삶과 죽음의 문제는 그들만이 아니라 이 나라 백성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이기도 하다.

 

<객주>의 천봉삼이 육의전의 독점적 상권과 맞서 자유로운 상업의 길을 주창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신자유주의적인 자유방임을 얘기하는 건 아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상도는 그 안에서도 지켜져야 할 것들이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 상도가 지켜져야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천봉삼은 말한다. 장삿길은 그래서 마치 우리네 몸에 돌고 있는 혈관처럼 비유된다. 그 길이 막히면 누구 하나만 죽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가 쓰러질 수밖에 없다.

 

<객주>는 그래서 단순히 천봉삼이라는 민초들이 그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식의 영웅담이 아니라 함께 사는 길의 모색이다. 원작자인 김주영 작가는 <객주>라는 작품에 대해 환난상구십시일반의 정신을 얘기한 적이 있다. 환난상구란 곤란에 빠진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정신이고 십시일반은 완전히 망한 동료에게 한 푼씩 모아 최소한의 밑천을 만들어주던 정신이다. 지금 우리네 경제에는 환난상구십시일반의 정신이 남아있는가. 오히려 저 누군가 막아놓고 독점적 이득을 취하는 북관대로와 작은 장삿길들을 막아버리는 자본만 남은 것은 아닌가. 함께 사는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공멸한다는 것을 <객주>의 그 장삿길이 보여주고 있다.



<오마비>, 소지섭, 신민아 아니었으면 어쩔 뻔

 

예뻐지고픈 욕망, 잘 빠진 몸매, 멋진 훈남들. KBS <오 마이 비너스>가 포인트로 잡고 있는 건 여성들의 로망이다. 강주은(신민아)은 거기에 딱 맞는 캐릭터. 한 때는 대구비너스라고 불렸지만 지금은 고대의 비너스처럼 살이 쪄버려 오래도록 사귀어온 남자친구에게 차이기까지 한 인물. 게다가 가족도 영 그녀를 도와주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아이를 가졌다며 살림을 차리려는 남동생에게 가게라도 차리라며 통장을 내미는 그녀다. 요즘의 시청자들이 완벽한 스펙과 외모와 직업을 갖고 있는 인물보다는 어딘가 부족한 면이 있는 캐릭터에 동질감을 느끼고 몰입할 수 있어 한다면, 그녀는 거기에 어느 정도 부합한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오 마이 비너스(사진출처:KBS)'

역변한 몸 때문에 모든 걸 잃어버린 인물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시청자들의 로망이 분명하다. 그녀는 요즘처럼 취업이 어렵다는 시대에 변호사씩이나 되는 번듯한 직업을 갖고 있다. 게다가 살이 쪘다고는 해도 한 때 대구비너스의 본판이 어디 갈 것인가. 아마도 신민아라는 배우가 그걸 연기하기 때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살이 쪄 이중 턱이 된 얼굴에서도 귀염성이 묻어난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로망이 되는 건 그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훈남들 때문이다. 세계적인 헬스 트레이너 김영호(소지섭)는 이 시대의 여성들이 선망하는 요소들을 거의 다 갖춘 인물이다. 훈훈한 외모에 잘빠진 몸매, 알고 보면 재벌2세이고 그러면서도 약자를 보고 지나치지 못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졌다. 물론 그 따뜻한 마음을 짐짓 아닌 척 차갑게 포장하는 차게 굴기의 면까지 가졌으니 완벽하지 않은가. 이런 인물이 강주은 옆에서 헬스 트레이너를 빙자해 먹는 것에서부터 생활습관, 운동까지 모든 걸 관리해준다... 이런 로망이 어디에 있을까.

 

김영호만이 아니다. 그를 보좌하는(?) 장준성(성훈) 같은 격투기 선수는 그 잘 빠진 몸과 저돌적인 동작만으로는 시선을 사로잡고, 김지웅(헨리)은 늘 유쾌하고 친절해 분위기를 즐겁게 만드는 인물이다. 게다가 전 남자친구인 임우식(정겨운)은 수영선수 출신에 잘 나가는 가홍 VIP센터장이다. 그는 잠깐 강주은의 친구였던 오수진(유인영)에게 한눈을 팔고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강주은 쪽에 남아 있는 듯하다. 그러니 이런 우글우글한 훈남들 속에서 집중적인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강주은이란 캐릭터가 로망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알다시피 이런 인물 캐릭터 설정과 관계란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때로는 너무 상투적이라 유치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강주은의 아래 층에 사는 그녀의 스토커 남자는 사실 이런 상투성을 잘 보여주는 캐릭터다. 스토커가 그녀를 따라다니고 심지어 집안까지 들어오는 상황은 긴박감을 만들어주지만 그 설정은 누구나 다 알 듯 김영호와의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일회적인 장치에 불과하다. 그것도 너무 상투적인.

 

또한 세계적인 헬스 트레이너인데다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재벌 2세 김영호가 어째서 강주은에게 이렇게 친절하고 점점 마음을 빼앗기는지 그 이유가 불분명하다. 드라마는 그저 그가 약자를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퉁치고 넘어가지만 아무리 봐도 개연성이 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전개가 허용되는 건 그것이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강주은에게 시청자들이 어떤 동질감과 몰입감을 갖고 빙의된다면 개연성과 상관없이 김영호 같은 멋진 남자와의 로맨스를 꿈꿀 수도 있을 게다. 물론 현실성은 없다. 그러니 한 발 물러나 바라보면 이 드라마가 가진 허점들을 발견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다.

 

중요한 건 그래서 이렇게 한 발 물러나지 못하게 계속 몰입하게 만드는 일인데, <오 마이 비너스>는 적어도 거기에서는 성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름 아닌 소지섭과 신민아다. 이 배우들이 주는 로망과 판타지는 자연스럽게 시청자들의 몰입을 만들어내고 있다. 적어도 그들이기 때문에 개연성 부족 정도는 넘어서 푹 빠져들게 만들고 있는 것. 그러고 보면 <오 마이 비너스>는 캐스팅이 신의 한수가 아니었나 싶다. 그 자리에 소지섭과 신민아가 아니었다고 상상해보라. 이런 판타지에 몰입할 수 있었겠는가.



<육룡이>, 박혁권이 만들어낸 악역의 품격

 

이토록 모스트스러운 악역이라니. SBS <육룡이 나르샤>에는 육룡만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의 활약을 가능하게 해주는 악역들이 있다. 이른바 도당3인방이라 불리는 이인겸(최종원), 길태미(박혁권), 홍인방(전노민)이 그들이다. 고려 말 혼돈기에 백성들의 고혈을 빨고 전횡을 일삼는 이들이 전제되기 때문에 육룡이라는 시대의 영웅들이 훨훨 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드라마 구조상 이들 악역은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 아닐 수 없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그 세 명의 악역이 모두 강렬한 저마다의 캐릭터를 갖고 있다. 이인겸은 정치력을 갖춘 악역이다. 그는 일찍이 이성계(천호진)의 약점을 잡아 무릎 꿇린 바 있고 그의 정계 진출을 막기 위해 갖가지 정치적 책략과 술수를 동원하는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 홍인방은 배신의 아이콘이다. 본래 성균관의 스승이었지만 모진 고문 앞에 스스로를 포기하고 오히려 개인적인 욕망을 터트리는 인물. 해동갑족의 수장에게 대놓고 협박을 하는 모습에서 소름돋는 악역의 면모를 보여줬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 세 명의 악역 중 단연 주목을 끄는 캐릭터가 길태미일 것이다. 삼인방 중 무력을 상징하는 그는 삼한제일검이라 불리며 초절정의 무공을 갖고 있지만 어찌 된 일인지 하는 행동이나 외모, 말투는 여성스럽기 그지없다. 진한 화장에 말할 때 목소리나 손동작은 영락없는 여성의 그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부드러움이 칼을 뽑을 들 때 더 섬뜩한 느낌을 준다.

 

해동갑족 전원의 서명이 들어간 상소를 이방원(유아인)이 가져옴으로써 최영(전국환) 시중이 주상의 윤허를 받아 이뤄진 길태미의 추포 과정에서 그가 보여주는 모습은 그 어떤 사극 속 악역들보다 압도적이다. 얼굴에 피칠갑을 한 채 그를 잡으러 온 군사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배가 고프다며 국밥을 먹는 장면은 길태미의 캐릭터를 제대로 보여준다. 평상시에는 전혀 무공을 할 것 같지 않는 듯한 허술함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오히려 고수의 면면으로 느껴지는 그런 캐릭터.

 

그가 저잣거리로 걸어 나올 때 그를 본 백성들이 도망치는 장면은 마치 영화 <괴물>의 한 장면 같다. 그만큼 그 캐릭터가 가진 살벌함이 드러나는 대목이지만 왠지 길태미에게서는 인간적인 면모도 느껴진다. “어이 이인겸 따까리!” 라고 부르자 그가 분노하는 건 그 역시 스스로를 세우려 노력했지만 실상은 이인겸의 그늘 아래 있었다는 걸 자인하기 때문일 게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돈인 홍인방과 헤어지면서 그래서 사돈 때문에 재밌었다고 토로한다. 그리고 자신은 할 것 다 해봤기 때문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한다. 권력에 대한 끝없는 욕망으로 끝까지 손에 쥔 걸 놓지 않는 홍인방과는 사뭇 다른 캐릭터다. 그리고 그의 앞에 나타난 땅새(변요한)와 대결을 하게 되자 오히려 기뻐하는 모습에서는 무인으로서의 면모도 드러난다. 마치 최고의 무인에 의해 마지막을 장식하기를 바랐다는 듯이.

 

여성스러움과 난폭함을 동시에 갖춘 이 이중적인 캐릭터가 제대로 구현된 건 다름 아닌 박혁권이라는 연기자의 공력 덕분이다. 지금껏 어딘지 찌질하거나 소심한 중년의 모습을 자주 보여왔던 그지만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그 누구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 악역 길태미를 시청자들의 뇌리에 깊게 남겨놓았다. 길태미는 시쳇말로 모스트스러운 악역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역할에서 박혁권은 악역의 품격이 무엇인가를 보여줬다.



<응팔>의 가장 강력한 판타지, 쌍문동 골목

 

우리에게 골목이란 어떤 공간인가. 골목이 존재하려면 일단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집과 집들이 이어져 다닥다닥 붙어있어야 하고, 그렇게 이어진 집들이 두 줄 이상 있어서 그 사이에 공유공간을 두고 있어야 한다. 바로 그 공유공간이 다름 아닌 골목이다. 골목은 그래서 집과 집 사이를 수평적으로 연결해주는 기능을 한다.

 


'응답하라1988(사진출처:tvN)'

아마도 80년대를 살았던 이들이라면 방과 후 집에다 가방을 던져놓고 그 골목으로 뛰쳐나온 동네 아이들이 함께 다방구 같은 놀이를 했던 걸 기억할 게다.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골목에서 함께 놀던 아이들은 나이 들어 학교가 달라져도 여전히 그 골목을 매개로 친구이자 이웃처럼 지내기도 했다.

 

어디 아이들뿐인가. 저녁 준비 하다 양념이 미처 떨어진 걸 깜박했다 치면 아이들 시켜 이웃집에서 빌려오는 건 일쑤고, 때때로 아이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면 마치 제 자식 문제나 되는 듯 이웃들이 함께 걱정해주기도 했다. 공간은 사람이 점유하기 마련이지만 그 공간은 거기 점유한 사람들의 일상을 규정하기도 한다.

 

알다시피 80년대 이후 아파트들이 도처에 들어서고 부동산 과열로 인해 그것이 살아가는 공간이 아니라 사야하는 공간으로 바뀌어나가면서 골목이라는 공간은 점점 사라져갔다. 수평적 공간을 이어주던 골목 대신, 어느 곳에 있는 어느 아파트 몇 평이 그 사람의 지위를 표징하는 수직적 지표가 되는 사회의 도래.

 

<응답하라1988>이라는 드라마에서 가장 큰 판타지는 이렇게 사라져가는 골목이 아닐까. 이 드라마가 특이한 건 대단히 큰 사건을 다루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산타클로스를 믿는 한 아이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해 온 이웃들이 반상회를 거듭하고 함께 얼음으로 된 눈사람을 만드는 그런 것이 사건이라면 사건이다.

 

물론 인물들의 끈끈함이 있지만 친구들이 함께 모여 마니또를 하고 어른들은 비오는 날 소주 한 잔을 기울이는 그런 장면들이 대단한 사건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대신 이 드라마는 그들의 아주 일상적이고 소소한 일들을 툭툭 던져 놓는다. 이를테면 선우(고경표)가 팔목이 안 좋다는 엄마 대신 병뚜껑을 따주는 장면을 옆에서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는 라미란의 시선 같은 것이나, 엄마 없이 자라온 택이(박보검)에게 한없는 미안함을 소주 한 잔으로 토로하는 택이 아빠(최무성)의 이야기를 앞에 들어주며 세상에 택이 아빠 같은 사람이 어딨냐고 얘기해주는 선우 엄마(김선영)의 뭉클한 시선 같은 것이다.

 

이렇게 선하고 착하며 타인을 배려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때로는 함께 모여 한 아이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해 노력하는 이웃들이 있는 곳. <응답하라1988>의 골목은 그래서 한참을 보다보면 그런 곳에서 살고픈 마음이 새록새록 들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저런 이웃이 있고 저런 친구들이 있고 저런 언니와 누나와 동생과 형들이 있는 곳이라면 얼마나 사는 맛이 날 것인가.

 

이 판타지를 <응답하라1988>은 쌍문동 골목이라는 공간 안에 채워 넣는다. 물론 그것은 너무나 이상적이라 현실적인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복고라는 것은 결국 기억의 왜곡을 통해 만들어지는 아름다움이 아닌가. 그러니 이미 싹 다 밀어져 빌딩과 아파트가 세워진 곳에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골목의 풍경에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일 게다. 우리 눈앞에서는 사라졌지만 마음 속에는 여전히 남아있는 골목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 그것이 <응답하라1988>의 가장 강력한 판타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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