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이 사랑을 그리는 방식

사극이 사랑에 빠졌다. ‘이산’의 이산(이서진)과 성송연(한지민)이 그렇고, ‘왕과 나’의 성종(고주원)과 어을우동(김사랑) 그리고 윤소화(구혜선)가 그러하다. 그런데 똑같은 사랑이지만 그 양상은 사뭇 다르다. 사극과 만나 빛을 발하고 있는 멜로라고 해도 어떤 것은 호평을 받고 어떤 것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섬세한 사랑, ‘이산’
이산과 성송연의 사랑은 가까이 앉아 속삭이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궁 하나를 두고 있는 거리에서의 사랑이며, 세손과 다모라는 신분이 말해주는 거리에서의 사랑이기도 하다. 둘이 가까워지는 것을 저어한 혜경궁홍씨(견미리)에 의해 심지어 성송연은 그것도 모자라 이역만리 청국으로까지 보내진다. 이렇게 먼 거리를 두면서 그들은 어떻게 사랑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이산이 처한 생존의 상황 속에서 그에게 성송연이란 어린 시절의 순수함으로의 회귀이다. 칼바람이 도는 현실의 무거움 속에서 신분도 잊고 그저 동무라 부를 수 있었던 시절이 그리운 것이고 그 그리움은 성송연이라는 인물로 실제화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아무리 격무에 시달리던 이산이라도 성송연 앞에 가면 그 목소리가 애틋하게 변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이 동무로서의 그리움인지 아니면 연인으로서의 그리움인지를 알게 되는 것은 성송연이 청국으로 떠난 이후이다. 사랑의 표현이 극도로 우회적인 수밖에 없는 이 두 인물의 신분적 거리로 인해서 사랑은 더 애틋하게 표현된다. 이산은 갑자기 일을 작파하고 청으로 떠난 성송연을 붙잡기 위해 말을 타고 달리며, 성송연은 이산만을 생각하며 그 수만 리 길을 걸어 되돌아온다.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대사를 통한 사랑표현은 극도로 절제된다.

‘이산’이 그려내는 사랑은 따라서 사극으로서의 역사적 사건들과 조우하면서 커다란 무리 없이 흘러간다. 세손과 일개 다모의 사랑이야기에 공감이 가게 되는 것은 물론 그 자체가 가진 판타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사랑을 다루는 방식이 극도로 섬세하기 때문이다. 그 키워드는 ‘애틋한 그리움’으로 축약된다.

자극적인 불륜, ‘왕과 나’
이산이 아내인 효의왕후(박은혜)를 두고 성송연을 사모하는 것이나, ‘왕과 나’에서 성종이 본처인 윤소화를 두고 어을우동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찌 보면 비슷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혀 다른 양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 사랑을 다루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왕과 나’ 다루는 사랑은 순수함보다는 육체적인 욕망으로서의 사랑이다. 성종이 어을우동에게 끌리는 것은 그 도발적인 자태가 불지른 욕망 때문이다. 가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찾아가게 만드는 그것은 우리가 흔히 현대물에서 말하는 그 불륜이다. 이 불륜이라는 단어에는 육욕의 뉘앙스가 늘 포함된다.

따라서 상황은 자극적으로 치닫는데 이것이 실제로는 새롭게 보이지 않는다. 이미 현대물에서 목도한 장면들의 사극 버전 정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윤소화가 일개 어을우동 앞에서 무릎을 꿇는 장면은 불륜드라마에서 본처가 애첩에게 사정하는 장면처럼 보인다. 왕의 용안에 상처를 내는 장면 또한 마찬가지다. ‘왕과 나’가 사랑을 그리는 방식은 이처럼 자극적이고 통속적이다.

이것은 ‘왕과 나’가 가진 태생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내시의 사랑을 다룬다고 했을 때, 혹자는 그것이 정신적인 플라토닉사랑을 그릴 것이라 예측했겠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거세된 자의 사랑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육체적 사랑을 마음껏 하는 왕의 모습이 대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사랑의 감정으로 봤을 때, ‘이산’이 손 한번 잡는 것으로 설렘을 만들 수 있었다면 ‘왕과 나’는 합궁에서조차 그런 감정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극에 있어서 그것도 왕과 연결된 멜로를 그림에 있어서 특히 주의해야할 점은 자칫 왕의 권위 자체를 흠집 내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피해야 한다는 점이다. 연출에 있어서 왕이 버젓이 불륜행각을 벌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면 그것은 아무리 퓨전사극이라 해도 좀 지나친 것이 아닐까. ‘왕과 나’의 경우 그 초점이 왕이 아닌 나에게 아무리 맞춰져 있다 해도, 있지도 않는 사건까지 끌어들여 실존인물인 왕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물론 그 자체로 어떤 재미를 준다면 모르겠지만, 실상은 그다지 재미도 없기 때문이다.
캐릭터의 리얼 야생 스토리, ‘1박2일’

리얼 버라이어티쇼는 점점 시트콤과 닮아가고 있다. 거기에는 캐릭터가 있고 그들이 걸어왔던 수많이 이야기들이 중첩된다. 울진에 간 ‘1박2일’팀이 대게잡이를 놓고 벌이는 배드민턴 경기는(특히 MC몽과 이승기의 경기) 화천 이외수의 집에 갔던 에피소드와 중첩된다. 거기서 잠자리를 두고 벌였던 탁구경기에서 MC몽과 이승기는 ‘저질탁구’의 진면목을 보여준 경력이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배드민턴 경기는 더 흥미진진해진다.

배드민턴 경기 하나에 시트콤의 모든 요소가 있다
여기에 재미를 더해주는 것은 MC몽과 이승기가 가진 상반된 캐릭터다. MC몽이 ‘야생 몽키’의 캐릭터를 부각시키고 있다면, 이승기는 야생 속에서도 꼭 머리는 감아야 하는 샌님 캐릭터이다. 캐릭터의 부딪침은 시트콤에서 그런 것처럼 긴장과 재미를 더해준다. 게다가 이 배드민턴 경기에는 이른바 반전이 숨겨져 있다. ‘저질탁구’를 통해 형편없는 실력을 보였던 이 두 캐릭터는 배드민턴 경기에서는 의외로 놀라운 속구의 실력을 발휘해 보인다.

그러니 이 배드민턴 경기 하나에 이미 시트콤이 갖추고 있는 대부분의 요소들이 있는 셈이다. 거기에는 시트콤의 기본 요소인 캐릭터가 살아있고, 그 캐릭터들간의 쌓여온 갈등이 있으며, 이야기의 의외성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갖추고 있는 게 있다. 그것은 이들의 드라마적인 스토리가 짜인 각본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1박2일’이 위치한 곳은 리얼 다큐멘터리적인 속성에 드라마적인 몰입이 합쳐지는 그 지점이다.

여행을 소재로 삼은 ‘1박2일’만의 장점
게다가 ‘1박2일’은 여행을 그 소재로 잡고 있다. 따라서 이 드라마적 속성을 갖춘 프로그램은 그 소재로 인해 로드무비에 해당하는 장점을 지니게 된다. 로드무비란 말 그대로 여행을 통해 벌어지는 예측불허의 사건들을 통해 주인공이 인간관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거나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제시한다. 이 로드무비적인 속성은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자칫 빠질 수 있는 ‘재미만을 위한 무의미’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하지만 로드무비적 속성이 가진 더 큰 장점은 리얼 버라이어티쇼에 있어서 주어지는 상황을 작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만들어준다는 점이다. 여행이란 우리가 늘 경험해왔듯이 새로운 상황과의 직면이며, 야생과 인공의 접점으로서 현실에서의 순간적인 일탈이기도 하다. 따라서 ‘1박2일’에서 잠자리나 먹거리를 두고 사투처럼 벌어지는 복불복 게임은 현실에서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일지 몰라도, 여행이라는 일탈 속에서는 그럴 듯한 상황이 된다. 흔히 여행 속에서 우리는 치기 어린 행동을 하기도 하지 않는가.

시트콤, 리얼 버라이어티쇼에서 배워라
또한 여행이라는 야생과의 만남은 팀원들 간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해주는 힘이 있다. 시트콤에서 흔히 우리는 파편화되어 보이는 관계 속에서도 은근히 드러나는 끈끈함을 통해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야생공간에서의 편안한 잠자리를 위한 사투 끝에서도 감기에 걸린 은초딩(은지원)을 걱정하거나, 배멀미로 고생하는 이승기를 아예 잠을 재우는 모습은 바로 그 끈끈한 관계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작년 시트콤으로서 ‘거침없이 하이킥’이 드라마 부문이 아닌 예능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했을 때, 그것은 리얼 버라이어티쇼와 시트콤의 관계가 그만큼 가깝게 위치해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하지만 ‘거침없이 하이킥’ 이후에 방영된 시트콤이 성공적으로 끝나지 못한 것은, 리얼리티쇼들이 갖추고 있는 캐릭터의 참신성과 스토리의 리얼함이 따라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거침없이 하이킥’의 캐릭터들이 실제 배우 이름으로 세워지고 강화되었던 점은 그저 우연의 결과가 아닐 것이다.

‘1박2일’이 가진 시트콤적인 요소들은 언뜻 현재 단계에서 진화된 형태의 시트콤을 예상하게 만든다. 시트콤은 이제 더 이상 잘 짜인 상황의 재미만으로는 저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가진 리얼한 재미를 이겨내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니 무언가 획기적인 시트콤을 구상한다면 이제 그 단서들을 저 리얼 버라이어티쇼에서 찾아봐야 할 것이다. ‘1박2일’속에는 분명 시트콤의 재미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다.

멜로, 현대물보다 사극에서 빛나는 이유

멜로가 사극과 바람이 났다. 전통적으로 현대물과 조우하던 멜로드라마는 좀처럼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정통 멜로의 부활을 예고했던 ‘못된 사랑’은 출연진들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틀에 박힌 설정과 스토리로 오히려 ‘못된 드라마’라는 오명을 쓰고있고, ‘불한당’은 애초에 기획했던 휴먼드라마보다는 멜로드라마의 성격을 보이면서 여전히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반면, 현대물들이 성공적으로 그려내지 못하고 있는 멜로는 오히려 사극 속에서 더 빛나고 있다. ‘이산’의 이산(이서진)과 성송연(한지민) 그리고 효의왕후(박은혜)의 삼각 멜로가 그렇고, ‘쾌도 홍길동’의 홍길동(강지환)과 허이녹(성유리) 그리고 이창휘(장근석)의 삼각 멜로가 그렇다. 무엇보다도 이런 변화가 감지되는 것은 현대물에서 보여지는 멜로가 식상한 느낌을 주는 반면, 사극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

멜로드라마는 왜 늘 식상하다 욕먹나
멜로드라마는 그 성격상 사랑을 중심에 두고 그 빗나감과 마주침을 연속적으로 만들어가면서 극을 발전시켜나간다. 중요한 것은 이 흐름 속에 웃음과 눈물을 교차시켜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어떤 공식 같은 것이 생겨버렸다. 특정한 상황 속에서 눈물이 터져 나온다는 것을 감지해버린 작가들은 의도적으로 그 상황을 처음부터 만들어가거나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못된 사랑’의 처음 1,2회는 이것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나인정(이요원)의 몰락의 과정을 보여준 이 2회분에는 사실상 작품 전체가 앞으로 어떻게 굴러갈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는 모든 단서들이 놓여져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부분이 꽤 빠른 속도로 진행되며 보여졌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다. 이 예측된 흐름 위에 새로운 어떤 틀이 마련되지 않고 예측한 대로 흘러갔을 때, 드라마는 식상한 것이 되어버린다. ‘못된 사랑’이 가진 문제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사실상 이런 문제는 대부분의 멜로가 가미된 현대물들이 안고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시청률을 확보한 ‘뉴하트’같은 작품에도 마찬가지다. 이은성(지성)과 남혜석(김민정)의 멜로가 이미 의학드라마 속 멜로의 전통 속에서 익숙한 구도이기 때문에 ‘뉴하트’는 긴박한 병원이야기가 돌아갈 때는 참신함을 느끼다가(물론 이것이 ‘뉴하트’의 경우는 익숙한 스토리가 많다), 멜로로 돌아올 때는 무언가 축축 쳐지는 느낌에 빠져들게 된다. 멜로와 전문직의 봉합이 이루어졌을 때 ‘무늬만 전문직’이란 비아냥이 등장하게 되는 이유는 전문직의 디테일을 잘 못 살려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멜로 또한 천편일률적인 구도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사극 속의 멜로가 다른 이유
하지만 이러한 멜로도 사극을 만나면 상황이 달라진다. 먼저 몇 가지 제한점이 생겨난다. 사극은 기본적으로 멜로드라마 자체로는 만들어지기가 어렵다. 시청자들의 인식 자체가 사극은 역사적인 이야기의 재미를 가진 드라마로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 이야기는 양념이 될지언정 본 재료는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사건이 된다. 이러한 사극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는 제한점으로 인해 사극의 멜로는 스토리와 함께 굴러갈 수밖에 없게 된다.

‘이산’의 성송연과 이산 사이에 벌어지는 멜로가 이를 정확하게 잘 보여준다. 이 둘은 신분상의 거리만큼이나 서로 만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그러니 그 사랑의 감정을 전하기 위해서 보여지는 것들은 직접적인 대사보다는 사건 속에서 인물의 행동으로 처리된다. 이산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하면서 미거한 힘이지만 그 일을 해결하려 성송연이 뛰어다닐 때 그 멜로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또한 성송연이 이국 땅으로 떠났을 때, 이산이 말을 달려 그녀를 쫓아간다거나, 그 먼 길을 오로지 이산만을 생각하며 걷는 성송연은 그 자체로 시청자들에게 사랑의 강도를 전한다. 그 둘은 서로 만나지 않아도 멜로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막상 만난다 하더라도 신분상의 차이가 있기에 하는 대사 또한 우회적이다. 성송연이 돌아와 죽을 고비를 넘겨 깨어났을 때, 이산이 그녀에게 말하는 “네가 가고 나는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몰랐더냐”는 대사는 직설어법이 아닌 간접어법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점은 ‘쾌도 홍길동’에서 홍길동과 허이녹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코믹이라는 장르적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은 직접적으로 서로를 향해 애정행각을 벌이는 낯간지러운 대사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홍길동이 허이녹에게 ‘멍청이’이라고 말할 때, 먼 길 떠나는 길에 어머님의 무덤가 흙을 조잡하게 수놓은 주머니에 허이녹이 퍼담아 줄 때 그 사랑의 마음이 전해진다.

무엇보다도 사극이 멜로를 제대로 품어줄 수 있는 것은 멜로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운명적인 사랑이 현대의 가치관으로는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사극은 그 시점을 과거로 돌려 운명적 사랑의 시대에 맞춰준다. 물론 지금의 가치에는 맞지 않지만 어느 정도는 ‘사극이니까’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멜로, 그 진화의 길들
이러한 사극과 멜로가 만나는 것은 멜로드라마의 입장에서 보면 또 하나의 진화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멜로드라마가 처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운명적인 사랑에 호소하는 순전한 멜로드라마에 공감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 멜로드라마는 그 순혈주의를 고집하지 않고 타 장르와 몸을 섞는 실험이 필요하며 그것은 사극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면 이것은 사극만 가능한 일일까. 그렇지 않다.

멜로드라마가 현대물로서 진화의 몸부림과 가능성을 보여준 것은 이른바 휴먼드라마이다. 작년 ‘고맙습니다’가 그 첫 번째 길을 열었고, 그 이후 ‘인순이는 예쁘다’가 그 계보를 이었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불한당’ 역시 휴먼드라마를 표방했지만 그 진화의 계보가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휴먼드라마가 가진 가능성은 멜로드라마의 구도가 가진 남과 여의 만남을 사회적인 이슈로까지 확장시켜나간다는 점이다. ‘고맙습니다’의 영신(공효진)과 기서, 그리고 ‘인순이는 예쁘다’의 인순이(김현주)와 상우(김민준)의 만남은 멜로드라마로서의 남녀의 만남이기도 하지만, 몰이해와 편견을 넘어서는 과정이기도 하다.

또한 멜로드라마는 미스테리와 몸을 섞어 전혀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은 사랑을 넘어 사람을 포착하는 멜로드라마로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사극이 끝없이 진화의 길을 걸어오는 것처럼, 장르드라마가 늘 새로운 도전을 하려 하는 것처럼 이제 멜로드라마도 변화하지 않으면, 실험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그것이 장르적인 퓨전이든 아니면 전혀 새로운 방식이든지 간에 분명한 점은 멜로드라마도 진화해야 산다는 것이다.

이순재, 우리 시대의 아버지를 연기하다

도대체 이순재 연기의 끝은 어디일까. 현재 ‘이산’의 영조 역할 하나만 봐도 그렇다. 우리가 역사책을 통해 막연히 알고 있던 영조는 카리스마 넘치는 성군의 이미지. 하지만 이순재라는 연기자를 통해 드러나는 영조의 모습은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미를 갖고 역사 속 박제된 인물에서 살아나고 있다. 때론 자애가 넘치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일순간 추상같은 불호령을 내리고, 때론 인간적인 부족함을 드러내기도 하는 인물이다. 게다가 매병(치매)을 앓는 모습 속에서도 진지함을 잃지 않는 영조의 면면은 실로 천변만화의 얼굴을 순간적으로 바꾸면서도 전혀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 이순재라는 연기자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순재의 연기가 늘 그러했듯이 거기서 발견되는 것은 여지없는 우리 시대 아버지의 모습이다.

연기자 이순재는 우리에게 아버지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아마도 1991년 김수현표 드라마라는 호칭이 붙었던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버지라는 캐릭터 때문일 것이다. 대발이 아버지는 아무리 짜도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치약을 가까스로 짜내고는 ‘아직도 일주일은 더 쓰겠네’하고 말할 정도로 절약정신(?)이 생활화된 조금은 궁상스러우면서도, 가장 보수적이고 엄격한 아버지였다. 그 전까지 드라마 상에서 드러나는 아버지상이 ‘전원일기’의 김회장(최불암)처럼 인자하고 털털한 모습이었다면, 이순재가 연기한 아버지상은 이중적인 모습을 드러내면서 엄격함이나 고집 이면에 포착되는 궁상으로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조금씩 달라져 가는 세상 속에서 젊은 세대들에게 고집스런 아버지, 가부장적인 아버지로 비추어졌던 당대의 아버지들의 모습은 그러니까 ‘아껴야 산다’거나 ‘부지런해야 잘 산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생활이 된 경제 개발 시대를 살아온 당대 아버지들의 이 양면성 때문이기도 하다. 이순재는 바로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때론 이빨 하나 들어가지 않는 엄격함으로, 때론 한없이 부드러워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오가며 연기했고 그것으로 시청자들에게 열렬한 공감을 얻어냈던 것이다.

하지만 시대는 계속 변해 아버지들의 고개는 점점 더 숙여졌다. IMF라는 파고를 넘으면서 권위는 추락했고, 구조조정과 조기퇴직이란 칼날 아래 그 어깨는 더 작아졌다. 반면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면서 가족 내 여성들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이순재는 이렇게 달라지고 있는 아버지상을 다시 보여주었다. 가족 내에서 여전히 호통을 치  
   만 그 권위의 힘은 사라진지 오래다. 며느리인 박해미가 늘 ‘OK’를 연발하는 당당함을 보이는 반면, 이순재는 ‘야동순재’ 같은 굴욕의 모습을 보여주는 아버지가 되었다.

‘야동순재’라는 조어는 당대 달라지고 있는 사회와 아버지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야동’이라는 인터넷 사회를 대변하는 용어와 아버지상을 대변하는 ‘순재’가 만나자 권위적인 아버지상은 사라져버렸다. 또한 젊은이들의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문화를 기웃거리는 아버지의 모습은 수많은 젊은 세대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이 시대의 아버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순재의 아버지 연기는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한없이 무너지던 모습을 통해 친근한 아버지상을 만들었던 이순재는 ‘이산’의 영조 역할로 오면서 권위를 되찾았다. 추상같은 말 한 마디로 대소신료들을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그 권위는 카리스마 자체였다. 그 앞에서 이산(이서진)은 물론이고 부인인 정순왕후(김여진)나 며느리인 혜경궁 홍씨(견미리)는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순재는 영조를 그저 권위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로만 만들지 않았다.

자애로운 눈길로 이산의 가녀린 어깨를 두드려주기도 하며, 자신의 인간적인 과오를 한없이 뉘우치기도 한다. 이러한 ‘이산’의 아버지상은 좀더 현대 사회가 희구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낸다. 즉 ‘거침없이 하이킥’의 이순재가 무너져 내리는 아버지를 현실적으로 포착했다면, ‘이산’의 아버지, 영조는 그 시대를 과거로 돌려 다시 세워지는 아버지에 대한 환타지를 끄집어냈다. 강하면서도 자애로운 모습으로의 복권을 희구하게 된 것이다.

이순재의 연기인생을 들여다보면 거기서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것 같은 고집과 권위를 내세우던 아버지이기도 하고, 한없이 권위가 무너져 내리던 아버지이기도 하며, 우리가 드라마 속에서라도 발견하고 싶은 강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순재의 아버지 연기는 그 겉모습에 머물지 않고 그 고집이나 굴욕 이면에 숨겨진 아버지들의 속내를 잡아낸다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이순재의 얼굴 표정 하나를 살피는 것으로 이 시대 아버지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모쪼록 이순재의 얼굴이, 아니 이 시대 아버지들의 얼굴이 환하게 웃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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