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극장가 대목? 아 옛날이여!

 

보통 설이면 극장가는 대목이다. 그래서 이 대목에 맞춰진 영화들도 속속 개봉했었고 극장가는 연회 매진을 기록하며 발 디딜 틈 없는 인파가 몰리곤 했다. 하지만 이런 풍경은 이제 옛말이 되어버렸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작년 한 해 내내 극장가가 한산했고 명절이라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불러온 새로운 풍경은 명절에 넷플릭스 영화 <승리호>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회자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승리호>는 딱 봐도 여름 블록버스터 시장에 어울리는 영화다. 실제로 작년 여름을 겨냥해 만들어진 작품이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추석 개봉으로 미뤄졌고 이마저 어려워지면서 결국 넷플릭스행을 결정했다.

 

넷플릭스에서 방영되고 있는 <승리호>에 대한 반응은 그래서 호불호가 갈린다. 애초 영화관 영화로서 기획되고 만들어진 작품인지라, 블록버스터 특유의 비주얼적 완성도는 높지만, 상대적으로 스토리는 단순하기 때문이다. 넷플릭스를 통한 안방극장 시청은 아무래도 이러한 비주얼적인 자극보다는 스토리에 더 집중하기 마련이다.

 

'신파'적 요소에 대한 아쉬움이 나오지만, 사실 우리네 여름이나 명절 블록버스터 시장에서 이른바 '되는 작품'은 신파 같은 다소 쉬운 가족용 스토리에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법한 확실한 볼거리나 웃음, 액션 같은 요소들이 들어간 작품들인 게 사실이다. 그러니 <승리호>에 대한 호불호는 물론 작품에 대한 관객들의 눈높이가 높아진 데도 원인이 있지만, 플랫폼이 바뀐 영향도 적지 않다 여겨진다.

 

어쨌든 올해 설 명절 영화로 떠오르는 건 극장가에 세워진 작품이 아니라 넷플릭스에서 방영되고 있는 <승리호>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코로나19가 야기한 설 명절 영화의 색다른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극장가에서 선전하고 있는 건 디즈니 픽사의 애니메이션 <소울>이다. 설 명절에 아이와 함께 부모가 보는 애니메이션 영화들은 늘 선전할 수밖에 없는 장르였지만, <소울>은 특히 어른들도 감동받을 만큼 깊이 있는 내용을 애니메이션으로 잘 표현하고 있어 코로나 시국에도 관객을 끌어 모으고 있다. 20일 개봉 이후 누적 관객이 120만 명을 넘어섰다.

 

설 명절에 맞춰 개봉한 우리네 작품으로는 옴니버스 로맨틱 코미디 <새해전야>가 그나마 선전하고 있는데, 누적 관객 수 7만 명대(12일 기준)를 기록하고 있다. <소울>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예매율을 기록하고 있지만 이렇게 현저히 적은 관객 수는 코로나가 바꾼 극장가의 상황을 실감하게 해준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극장가 대목을 겨냥한 작품 자체가 세워지지 않는 형국이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코로나가 어느 정도 지나가고 나면 극장가 풍경은 달라질 것이고 또 극장에 어울리는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다시 기지개를 켤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래도 이 '경험의 관성'은 향후에도 분명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승리호>를 통해 느낄 수 있듯이 넷플릭스 같은 OTT를 통한 영화 관람이 그리 낯선 풍경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사진:넷플릭스)

240억짜리 비주얼 갑 '승리호', 넷플릭스와의 어색한 만남

 

한국 최초의 우주 SF 블록버스터. 아마도 조성희 감독의 영화 <승리호>에 대한 가장 큰 기대감은 바로 이 지칭 안에 들어 있을 게다. <스타워즈>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같은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모험서사들은 우리와는 거리가 먼 할리우드의 이야기로만 여겨온 우리네 관객들에게 <승리호>는 그 제목이 먼저 소개됐을 때부터 어딘가 이질감을 줬던 게 사실이다. 일본 만화를 번역해 방영했던 추억의 만화 <이겨라 승리호>가 먼저 떠오를 정도로.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승리호>는 그러나 생각보다 괜찮은 비주얼 블록버스터의 색깔을 보여줬다. 시작부터 우주쓰레기 청소선 승리호가 다국적 경쟁 청소선들과 우주쓰레기를 놓고 벌이는 추격전은 시선을 잡아끈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현란하게 움직이는 우주선들의 이미지들이나, 빈티지한 무게감까지 더해진 미술로 구현된 승리호 내부의 이미지는 할리우드의 비주얼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잘 구현되었다. 

 

승리호의 주역들인 4인방 캐릭터도 저마다의 색깔이 뚜렷하게 나올 정도로 매력적이다. 아웃사이더이면서 아이를 찾기 위해 돈 되는 일이면 뭐든 다 하는 조종사 태호(송중기), 거대한 레이저총을 난사하는 걸 크러시 캐릭터 장선장(김태리), 조직 두목으로 살벌한 문신을 하고 있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진 기관사 타이거 박(진선규) 그리고 유해진의 목소리가 입혀진 작살잡이 로봇 업동이는 애초 이 작품이 IP의 확장으로 계획하고 있는 캐릭터 비즈니스가 충분하게 느껴지는 매력들을 보여준다. 

 

게다가 2092년 사막화된 지구의 디스토피아를 시각적으로 구현해낸 각종 위성들 속 도시 풍경들도 흥미롭다. 나라나 언어의 구분 자체가 의미 없어질 정도로 다국적화된 그 도시들 속에서 어딘지 비정한 사람들의 어두운 모습들은, 지구로부터의 탈출을 계획하는 UTS의 리더 설리반(리처드 아미티지)이 꿈꾸는 화성의 자연이 살아있는 풍광과 대비를 이룬다. 

 

영화 <승리호>가 공개된 후 여러 언론들이 일관되게 이야기하고 있는 아쉬움은 역시 스토리다. 이렇게 비주얼적으로 잘 구현된 세계와 상반되게 이야기는 너무 평이한 클리셰에 머물고 있고, 보는 이에 따라서는 신파적인 이야기가 공들인 세계를 다소 허무하게 만들었다 여겨질 수도 있다. 스토리는 확실히 아쉽다. 도로시라는 아이를 두고 벌어지는 쟁탈전은 부성애 코드가 강조되면서 너무 뻔한 스토리로 이어진다. 

 

또한 <승리호>라는 한국 최초 우주 SF 블록버스터라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우리식의 어떤 해석이나 색깔이 이야기나 연출에서 도드라지게 나타나지 않은 점도 아쉬운 부분이다. 단순한 '국뽕'이 아니라, 글로벌한 우주를 배경으로 한다 해도 우리네 '로컬'의 색깔 같은 차별성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킹덤> 같은 넷플릭스 오리지널이 좀비 장르라는 보편성을 가져오지만 동시에 '조선'이라는 차별성을 내세워 글로벌한 반향을 일으켰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다소 신파적인 스토리가 그 로컬의 색깔처럼 드리워진 건 <승리호>에 가장 큰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스토리의 아쉬움은 이 작품이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결정한 넷플릭스를 통한 상영이 과연 괜찮은 선택이었는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만일 블록버스터로서의 우주 액션과 비주얼들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대형스크린을 통해 봤다면 그 느낌이 사뭇 달랐을 거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스토리는 단순하지만, 블록버스터로서의 시각적 쾌감이 그 부족함을 채워줬을 테니 말이다. 

 

다만 제작비 240억원이 투입된 <승리호>가 우리네 영화에서는 미지의 세계처럼 여겨졌던 우주를 소재로 끌어와 적어도 이물감 없이 구현해냈다는 점이 분명한 성과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따라서 이 작품이 내딛은 첫 걸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이번 작품을 통해 갖게 된 노하우가 향후 또 다른 우주 SF에서는 채워지길 기대한다.(사진:넷플릭스)

'소울', 우리의 삶은 추락인가 비행인가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디즈니 픽사는 어떻게 삶과 죽음 같은 철학적인 주제마저 이토록 경쾌하고 명징한 상상으로 그려내는 걸까. <소울>은 한 마디로 인생 전체를 다시금 돌아보게 만들 정도로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지만, 그걸 표현해내는데 있어서는 아이들도 즐길 만큼 쉽게 담아낸 놀라운 작품이다. 그건 마치 구상에서 점점 깊어져 선의 단순한 연결로 오히려 실체에 접근한 피카소의 추상을 보는 듯하다. 스토리도 그렇지만, 그림이나 연출에서조차도 우리네 삶이 가진 오르막과 내리막 그리고 추락과 비행의 아름다운 이중주가 묻어나는 작품이라니.

 

뉴욕에서 음악선생님으로 일하지만 평생의 목표가 재즈클럽에서 최고의 밴드와 함께 연주하는 것인 조. 드디어 그 기회를 갖게 된 조는 그러나 맨홀에 빠지는 불의의 사고로 영혼이 되어 저 세상으로 가는 길 위에 서게 된다. 거대한 빛을 향해 저절로 움직이는 계단 위에 서게 된 조는 그러나 그 목표가 눈앞에 있던 순간 이렇게 끝나게 된 걸 용납할 수가 없고, 결국 그 곳을 벗어나 '태어나기 전 세상'으로 떨어진다. 그 곳은 탄생 전 영혼들이 자신의 관심사로 인해 켜지는 마지막 불꽃을 찾아 지구로 돌아가는 곳. 하지만 조는 그곳에서 지구로 가는 걸 원치 않는 영혼 22를 만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조는 다시 살아나 그토록 원하던 재즈클럽에서의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을까. <소울>의 스토리는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조가 얻게 되는 깨달음이다. 영혼 22 대신 지구로 가는 통행증을 갖게 되어 다시 살아난 조는 자신이 삶의 목표로 생각했던 재즈클럽에서 연주를 하게 되지만, 그걸 마치고 나서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목표를 달성하긴 했지만 그것이 삶의 진정한 행복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그는 어느 날 은행나무에서 비행하며 떨어지는 씨앗을 보며 깨닫는다. 삶의 행복은 그런 거창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었던 게 아니고, 매일 먹던 음식,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느꼈던 희열의 순간, 처음 재즈를 접했을 때의 그 기분 같은 일상의 순간순간에 깃들어 있던 행복감에서 찾아진다는 것이 그것이다.

 

<소울>은 이러한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조와 22의 모험을 통해서 우리네 삶이 추락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비행하고 있는 것인가를 묻는다. 드디어 평생을 원하던 목표를 눈앞에 둔 순간 맨홀로 '추락'하는 비운을 겪는 조의 상황은 우리네 삶에 대한 비관적 시각을 담아낸다. 삶이란 그렇게 어떤 최고의 순간에 다다르기 직전 추락하기도 하는 비극일 수 있다는 것. 추락하는 삶은 그래서 무겁디 무거운 존재의 무게를 드러낸다.

 

하지만 영혼이 된 조는 거대한 빛을 향해 저절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서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삶의 무게는 죽음 후의 가벼워진 영혼과 대비된다. 그래서 추락하는 삶은 죽음 이후의 비상하는 영혼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조는 그렇게 저 위로 가벼워진 채 비상하는 영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다시 뛰어내리고 그 무게 그대로 '태어나기 전 세상'으로 떨어진다.

 

<소울>이 깊은 감동을 주는 건 그것이 단지 삶과 죽음이라는 추상적이고 철학적이기까지 한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의 섬세한 표현들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영혼의 세계가 마치 피카소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2차원적 형상으로 제리, 테리는 물론이고 영혼들의 가벼움을 표현해냈다면, 삶의 세계는 이와는 상반되는 중력과 무게감이 느껴지는 캐릭터들을 담아낸 점이 그렇다. 이런 가벼움과 무거움, 경쾌함과 장중함은 조가 그토록 하고 싶어 했던 재즈의 연주 속에도 그대로 묻어난다.

 

그 누가 추락하길 원할까. <소울>은 조가 그랬듯이 어떤 목표를 세워두고 그 곳을 향해 오르는 이들의 마음속에 어른거리는 추락에 대한 회피를 포착해낸다. 하지만 삶은 어쩌면 태어나면서부터 추락의 과정 그 연속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걸 마주하고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을 뿐. 그렇지만 조는 떨어지는 은행 씨앗을 보며 그것이 추락이 아닌 비행이라는 걸 알게 되고, 더 이상 추락하지 않고 저 높은 곳으로 오르는 영혼의 세계보다 그 비행이 더 아름답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래서 <소울>이 전하는 '일상'의 소중함과 그 가치는 지금 같은 일상이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코로나 시국에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코로나 이전에는 몰랐던 길거리를 마스크 없이 활보하고, 마음껏 숨을 쉬며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그 일상의 소중함들. 그것이 진짜 삶의 행복이었다는 걸 우리는 깨닫고 있지 않은가. <소울>이 말하고 있듯이.(사진:영화'소울')

넷플릭스로 간 '콜', 대본·연출·연기의 삼박자가 만든 전율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음산하기 이를 데 없는 외딴 산 속의 고택. 그 집의 낡은 전화기가 20년의 시간차를 두고 과거의 영숙(전종서)과 현재의 서연(박신혜)을 연결한다. 넷플릭스 영화 <콜>은 이 단 하나의 설정으로 벌어지는 충격적인 사건들을 다룬 스릴러다.

 

본래 좋은 판타지일수록 단 하나의 룰을 통해 다채로운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그런 점에서 <콜>은 20년의 시간의 장벽을 넘어 같은 공간에 살아가는 두 인물이 연결된다는 그 설정 하나로 기막힌 반전의 반전이 이어지는 스릴러를 완성해낸다. 과거가 바뀌면 현재가 바뀐다는 지점은 화재로 아버지를 잃었던 서연이 20년 전의 영숙에 의해 새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만든다. 하지만 그 영숙은 학대하던 엄마에게 자신이 살해된다는 미래의 사실을 서연을 통해 알게 되면서 폭주하기 시작한다.

 

시간의 흐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터질지 알 수 없는 영숙이 과거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서연에게는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서연의 아빠를 살려내 그에게 새 삶을 살 수 있게 해줄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들을 죽여 서연의 미래를 비극 속으로 빠뜨릴 수도 있다. 결국 폭주하는 영숙에 손아귀에 붙잡힌 서연의 삶이 주는 공포감이 이 영화가 주는 쫄깃한 스릴러의 정체다.

 

<콜>은 과거와 미래가 연결되는 설정을 통해 얼마나 다양한 이야기들이 가능한가를 그 촘촘한 대본이 보여준다. 또한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미래의 서연이 과거의 영숙을 공격하는 놀라운 상상력도 돋보인다. 게다가 그렇게 멀리 시간의 벽을 두고 있던 두 인물이 점점 가까워지며 결국 부딪치는 폭발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단선적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이 설정의 이야기는 끝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고 다양한 변주를 이어간다.

 

과거가 바뀌면 미래도 바뀌는 그 변화들을 이충현 감독은 음산한 고택의 분위기를 표현해낸 미장센과 신비롭게까지 느껴지는 효과적인 CG 연출로 담아낸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건 인물들의 심리 변화를 따라가는 고택의 분위기가 빛과 어둠의 적절한 배치를 통해 잘 연출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대본과 연출 그리고 연기라는 세 요소 중 가장 독보적인 역할을 한 부분을 꼽으라면 단연 연기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미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을 통해 신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에너지와 전율을 보여줬던 전종서는 폭주하는 연쇄살인범 영숙을 소름끼치게 연기해낸다. 고택에 엄마에 의해 갇혀 있던 그가 그 곳을 빠져나와 동네로 달려가는 장면은 연쇄살인범의 끔찍함과 더불어 이 인물의 '자유'를 느끼게 할 정도로 복합적인 감정을 이끌어낸다.

 

즉 전종서가 연기하는 영숙은 살인자의 끔찍함과 동시에 억압에 의해 짓눌려왔던 날짐승의 자유를 표현해낸다. 전종서가 아니라면 과연 가능했을까 싶은 에너지가 영숙이라는 인물에 의해 뿜어져 나오고 그 힘은 이 스릴러의 긴장감이 끝까지 힘을 잃지 않는 이유가 된다.

 

단연 이 작품의 힘이 전종서에게서 나온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의 상대역으로서 서연 역할을 연기한 박신혜의 변화도 주목할 만한 연기였다. 처음 시작점에는 우리가 늘상 봐왔던 선하고 밝은 이미지의 박신혜로 등장하지만, 폭주하는 전종서의 에너지와 더불어 박신혜도 그 본래의 이미지를 찢고 나와 폭주하는 에너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박신혜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었던가 싶은 순간이 주는 카타르시스라니.

 

<콜>은 코로나19 때문에 극장 개봉이 아닌 넷플릭스 독점 방영을 선택했지만, 만일 극장에서 개봉했다면 더 뜨거운 입소문으로 화제가 됐을 작품이다. 촘촘한 대본과 효과적인 연출 그리고 독보적인 연기의 삼박자가 보는 이들에게 만족스런 전율을 주는 영화였을 테니.(사진:넷플릭스 영화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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