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 스컬아일랜드’가 건드리고 있는 미국의 트라우마와 중국의 야심

누가 세상의 왕인가. 영화 <콩 : 스컬아일랜드(이하 콩)>에서 패카드 중령은 ‘인간이 세상의 왕’이라고 선언한다. 하지만 영화의 제목이 <콩>인 것처럼 인간은 이 세상의 왕이 아니다. 그리고 패카드 중령(사무엘 잭슨)이 말한 ‘인간’이란 우리를 통칭한다기보다는 미국을 지목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사진출처:영화<콩:스컬아일랜드>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베트남전이 끝나는 지점이라는 건 이 영화가 미국의 트라우마를 건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한다. 베트남전은 결국 미국의 패전으로 끝난 것이지만, 백전노장이라고 자칭하는 패카드 중령은 그것이 ‘패배’가 아닌 ‘포기’라고 표현한다.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지 쫓겨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패카드 중령이 굳이 베트남전에 대해 ‘패배’와 ‘포기’ 같은 표현에 집착한다는 점은 그가 이 전쟁에 트라우마를 갖게 되었다는 걸 말해준다. 그는 자신이 패배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모두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스컬아일랜드 탐사 미션이 내려지자 국가가 그에게 그런 새로운 임무를 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한다. 

숨겨진 섬, 스컬아일랜드의 정글이 연상시키는 것은 그래서 베트남전에서 미군들이 그 곳의 정글에서 느꼈을 당혹감이다. 그들은 헬기를 타고 로큰롤 음악을 틀며 폭탄을 투하하지만 그것이 불러일으킬 반향을 생각하지 못한다. 스컬아일랜드의 왕인 깨어난 콩은 그래서 베트남의 정글이 미군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듯이 섬의 침입자들을 처단한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지점은 과연 전쟁을 누가 일으키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패카드 중령과 탐사팀이 이 섬에 들어오기 전까지 이 섬에 살아가는 원주민들은 콩의 보호(그는 마치 섬의 수호자 역할을 한다) 아래 평화로웠다. 섬을 위협하는 괴생물체들이 있지만 콩이 그 위협을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트남전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패카드 중령은 콩을 죽이고 섬을 장악하겠다는 무리한 작전을 수행한다. 섬의 전쟁을 일으키는 건 패카드 중령의 전쟁 트라우마 그 자체다. 

영화 <콩>은 여러 영화들 속 모티브들을 가져와 한 데 엮어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거기에는 베트남전을 소재로 한 영화들의 장면들이 연상되고, 물론 <킹콩> 같은 괴생물체와의 대결과 <쥬라기공원> 같은 특정한 공간에서의 사투 같은 요소들이 뒤섞여 있다. 게다가 중국시장을 겨냥한 듯 이 작품에는 중국을 연상시키는 오리엔탈리즘이 깔려있고 중국배우 경첨이 참여하고 있다. 또한 여기에 등장하는 많은 괴수들은 괴수물 마니아라면 열광할만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이 많은 요소들을 가져와 <콩>이 하려는 이야기는 명백하다. 세상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콩으로 대변되는 자연이라는 것. 그런데 이 이야기에 흥미로운 지점은 미국의 트라우마와 중국의 야심 같은 것들이 어른거린다는 점이다. 전쟁에 광분하는 패카드 중령이 늘 전쟁을 해온 미국을 표상한다면, 스컬 아일랜드의 수천 년을 괴수들과 싸워오며 이제는 거의 달관의 경지에 이른 원주민들은 마치 중국을 표상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런 뉘앙스들은 다분히 중국시장을 염두에 둔 영화의 포석처럼 보이지만.

물론 <콩>은 그리 심각하게 볼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저 그런 괴수물의 스펙터클로 끝날 수 있었던 <콩>을 그나마 흥미롭게 해주는 지점은 바로 이 미국의 전쟁 트라우마가 담겨지는 부분이다. 많은 전쟁에서 미국이 계속해서 승리해온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승리한 것이 없다는 사실은 그들이 여전히 전쟁을 늘 입에 올리게 만드는 어떤 강박이 아닐까 하고 영화가 은근히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이클 무어 감독은 일찍이 <다음 침공은 어디?>라는 재기발랄한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한국, 베트남, 레바논,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예멘에서 벌인 미국의 전쟁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들은 2차 대전 이후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다. 가는 곳마다 지고 또 진 패배를 하나씩 짚어갔다. 엄청난 돈을 낭비하며 IS 같은 집단만 생겨나게 했고 그런 전쟁에서 얻은 건 또 다른 전쟁뿐이었으며 장담했던 석유조차 챙기지 못했다.”

‘해빙’, 얼었던 것이 녹으면 진실은 과연 드러날까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봄이 생각보다 일찍 오면서 예년보다 한강물이 일찍 해빙되었다는 소식이 깔리며 카메라는 이전에는 어떤 집들이 있었을 지도 모를 공지에 아파트가 건설되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길을 따라 가다가 어느 한강변에서 불쑥 솟아오른 시체를 보여준다. 얼굴과 팔다리가 잘려져 몸통만 둥둥 떠오른 시체는 그것이 본래 사람의 육신이었는지가 애매할 정도로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인다. 영화 <해빙>의 오프닝은 얼었던 것이 녹아 시체가 떠오른다는 그 사건이 던져주는 이미지와 그 의미들로부터 시작한다. 

사진출처:영화<해빙>

승훈(조진웅)은 이혼 후 미제사건으로 유명한 경기도의 신도시에 있는 선배의 병원에서 일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그가 지내고 있는 건물의 집주인인 정육점을 운영하는 성근(김대명)이 의심스럽다. 성근의 아버지인 정노인(신구)이 자신에게 내시경을 받으며 가수면 상태에서 내뱉은 토막살인을 의심케 하는 이야기가 그 의심을 촉발시킨다. 그는 필리핀에서 왔다가 집을 나가버렸다는 성근의 전 부인이 과연 가출한 것인지 아니면 그들에 의해 도륙당한 것인지를 의심한다. 승훈은 정육점에서 머리카락처럼 보이는 것이 비죽 뛰어나와 있는 비닐에 쌓여진 어떤 물건을 본 후 그것이 머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목 잘린 여인을 정노인과 성근 부자가 토막내는 악몽에 시달린다. 

<해빙>은 이 낯선 곳으로 이주해와 살아가고 있는 승훈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래서 영화의 중반 이후까지 관객들은 승훈의 관점에서 이 살벌한 살육이 벌어지고 있는 신도시, 정육점의 사건들이 공포영화 같은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히스테리를 갖고 있는 이혼한 승훈의 전 부인과 아들이 끼어들면서 긴장감은 한층 더 커지고,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 미연(이청아)이 프로포폴을 빼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사건은 더 복잡해진다. 게다가 승훈에게 자꾸만 나타나는 전직형사 조경환(송영창)은 자신이 과거부터 이 마을에서 벌어진 미제사건을 지금껏 추적하고 있다고 말한다. 승훈의 시점에서 관객들에게 사건은 명백해 보인다. 분명 성근과 정노인이 연쇄살인을 벌인 범인들이라는 것. 

하지만 영화는 이렇게 승훈의 시점으로 나가다가 그가 경찰서 취조실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시점을 바꿔놓는다. 즉 승훈이라는 사람을 다시금 바라보는 형사의 시점으로 바뀌는 것. 그런데 이 형사의 시점으로 보면 승훈은 일종의 정시착란을 겪고 있는 정신질환자다. 조경환이 사실은 형사가 아니고 자신이 탐독했던 추리소설 작가의 이름이며, 실제로는 자신의 선배이자 정신질환 담당의였던 남인수였던 것. 결국 그 많은 공포스런 사건들은 사실상 승훈의 망상이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사실 아내를 죽였고 미연마저 죽이려 했었다는 증언들이 모두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게 주장하면서도 혹시 자신이 망상 속에서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진다. 

영화 <해빙>은 한 가지 일관된 시점을 유지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관객들에게는 당혹감과 불편함을 줄 수밖에 없다. 믿었던 것이 깨지는 그 순간은 극중 주인공인 승훈이 겪는 “아닐 거야”라는 그 부정을 똑같이 관객들도 공유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점은 맨 마지막에 가면 또 다시 뒤집어진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승훈의 망상일 뿐이었다고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 보이지만, 차량용 블랙박스에 찍혀진 영상으로 승훈의 아내를 살해하는 정노인이 포착되고 그것이 익숙한 듯 그 노인에게 항변하다 결국 시체와 블랙박스를 치워버리는 성근의 모습이 포착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진실은 무엇인가. <해빙>이 주는 당혹감은 그 진실을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누가 진짜 살인자이고 누가 진짜 피해자인지 알 수 없고 심지어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승훈마저 어쩌면 내가 저지른 일인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죄의식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왜 이렇게 시점의 변화를 통해 모호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 단서는 시작에 담겨져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오히려 숨겨져 있다. 왜 굳이 ‘해빙’이라는 모티브를 가져왔고 ‘덮여진 진실’이 드러난다며 사실은 드러난 것이 없고 오히려 더 모호해지는 상황을 보여줬을까. 영화가 맨 처음 보여준 지금은 말끔하게 밀어내져 버린 공지는 어쩌면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멀쩡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그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그 곳이 그런 곳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직접적인 가해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밀려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해자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여러 차례 밀어내지고 덮이고 다시 세우고 하는 것들을 반복하다보면 무엇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를 찾아내기 어려워지는 지점에 이르고 만다. 그것이 강물이 녹아 시체가 떠오른다고 해도 그 아무런 단서가 남아있지 않아 진범이 누구인지를 찾아내기 어려운 상황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런데 분명한 건 시체가 있다는 사실이고, 공지가 밀어낸 자리에 아파트들이 세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악의 국정농단 사태 속에서 그 사태를 만든 이들이 아마도 이런 상태가 아닐까.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라고 그들은 생각할 지도 모른다. 수없이 여러 사람들이 개입하고 그들의 행위들이 중첩되고 겹쳐지면서 그것이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자신이 저질렀지만 그것을 까무룩 스스로 지워버리는 망상 속으로 숨어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는 그들 가해자들에게만 생기는 증상이 아니다. 그건 피해자들 역시 나도 모르게 공모한 건 아닌가 하는 죄의식을 만들어낸다. 

<해빙>은 그래서 마치 얼음이 녹으면 진실이 드러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풀어지면서 더 복잡해지는 사건의 양상들을 여러 시점의 교차와 변화를 통해 보여준다. 영화는 당연히 불편할 수밖에 없다. 해결된 것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더 복잡해지니 말이다. 하지만 이 복잡하고 불편한 이야기가 우리네 현실에 건드리고 있는 지점은 예사롭지 않다. 모든 게 명쾌해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도 명쾌한 것이 없게 되어버린 현실을 <해빙>은 공포에 가까운 시점변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봄이 온다고 물이 녹는다고 진실이 모두 드러나기에는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의 문제가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있지 않은가. 물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진실을 밝히는 노력을 멈추면 안되겠지만.

'로건', 17년을 함께 한 슈퍼히어로의 쓸쓸한 뒷모습

휴 잭맨에게 17년을 함께 한 <엑스맨> 시리즈의 고별작이어서였을까. 아니면 울버린이라는 어찌 보면 <엑스맨>의 정서적 바탕이 되는 캐릭터의 최후를 담은 작품이어서였을까. <로건>은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로서의 피와 살점이 튀는 강렬한 액션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내 쓸쓸함과 처연함, 그리고 급기야는 먹먹함에 울컥하는 감정까지를 불러일으킨다. 

사진출처:영화<로건>

사실 <엑스맨>의 캐릭터들이 가진 핵심이 이 놀라운 초능력과 함께 그것이 축복이 아닌 저주이기도 한 캐릭터들의 희비극이다. 그들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놀라운 초능력을 가졌지만 바로 그 다르다는 점 때문에 배척받고 위협받는다. 인간을 위해 싸우면서도 인간에 의해 배척받는 존재들. 그들이 <엑스맨>이라는 캐릭터들의 기저에 흐르는 어떤 쓸쓸한 정서의 정체다. 

그 중에서도 울버린 로건만큼 기구한 한 평생을 살아가는 슈퍼히어로도 없다. 그는 부모도 사랑하는 여인도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그래서 극도로 그 누군가와의 관계를 맺는 일을 피하려 한다. <로건>에서도 그는 리무진을 모는 운전기사로 일하며 이제 나이 들어 자기조절이 잘 되지 않아 심지어 타인들에게 고통을 줄 위험성을 가진 프로페서X(패트릭 스튜어트)를 보필하며 살아간다. 물론 그 자신도 늙어 자가 치유되는 힐링팩터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그는 죽어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자신과 똑같은 능력과 운명을 가진 소녀 로라(다프네 킨)가 나타나고 그녀를 쫓는 정체불명이 집단들과 대결하게 된다. 

그러니 이 <로건>은 단순히 슈퍼히어로들의 놀라운 힘과 능력을 스펙터클로 보여주는 그런 영화가 아니다. 나이든 로건과 90세에 가까운 나이로 죽음에 임박한 프로페서X 그리고 너무나 작디작은 소녀. 이들은 겉으로만 보면 슈퍼히어로라기보다는 ‘사회적 약자’들을 모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 실체는 심지어 짐승처럼 보이는 힘을 숨기고 있는 것이지만.

역시 로건의 액션은 강렬하다. 마치 한 마리 야수처럼 날카로운 발톱을 긋는 것만으로도 적들은 사지절단이 된 채 날아가 버린다. 프로페서X 역시 조절이 되지 않지만 걸어다니는 시한폭탄이라고 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물론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반전 액션을 보여주는 인물은 바로 로라다. 이 작디작은 소녀는 통제되지 않는 강력한 살인무기로서의 액션을 소름끼치도록 완벽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영화가 추구하고 보여주려는 건 그런 액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셰인>의 마지막 장면에서 느껴지는 히어로의 쓸쓸한 뒷모습 같은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부극 <셰인>의 마지막 장면에서 악당들을 다 해치운 셰인은 꼬마 아이에게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며 각자 자기 길을 가는 것이라고 말한 뒤 황야를 향해 떠나간다. 셰인이 꿈꾼 것도 어쩌면 소박하고 평범한 가족과 함께 지내는 보통의 삶이었을 것이다. 로건이 보여주듯 결코 다른 존재인 슈퍼히어로는 가질 수 없는 보통의 삶.

<로건>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퀀스는 그래서 로건과 프로페서X 그리고 로라가 어느 평범한 가정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이야기다. 그 단 하룻밤을 보낸 후 프로페서X는 자신의 일생 중 가장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말한다. 심지어 지구를 구하기도 했던 그 엄청난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 결국 꿈꾼 것이 소박한 보통의 삶이었다는 건 <로건>이 주는 메시지이자 이 영화의 정조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서부극 <셰인>을 오마주한 이 영화는 그래서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액션물이면서 그들이 꿈꾸는 평범한 가족의 삶이 유사가족이라는 형태로 슬쩍 드러나는 드라마적 요소들까지 갖고 있다. 할아버지 프로페서X와 아버지 로건 그리고 딸 로라가 함께 걸어가는 그 여정이 강렬하면서도 먹먹해지는 이유다.

‘재심’, 진실에 대한 갈망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2013년 6월 그리고 2015년 7월 이렇게 2회에 걸쳐 이른바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을 다뤘다. 그 사건은 이미 2000년에 벌어진 사건으로, 당시 살인죄로 검거된 15세 소년은 재판에서 법정최고형인 징역 15년을 구형받았고 결국 10년을 감옥에서 살다 나왔다. <그것이 알고 싶다>가 이미 다 지나가버린 사건을 다시 들고 온 건 한 소년의 청춘을 송두리째 날려버린 그 사건의 숨겨진 진실을 찾기 위함이었다. 형사들의 강압수사로 모텔에 끌려가 몇 시간 동안 죽도록 맞고는 어쩔 수 없이 쓴 자술서 한 장이 만든 엄청난 비극. 

사진출처:영화<재심>

영화 <재심>은 바로 이 <그것이 알고 싶다>가 다시 끄집어낸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을 다시금 영화로 끄집어낸 작품이다. 그래서 이미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많이 알려진 사건이라는 점은 영화로서는 약점이 될 수도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재심>은 이 실화에 다양한 영화적 장치를 덧붙여 극화함으로써 사건을 이미 알고 있는 관객들도 충분히 빠져들 수 있게 만들었다. 

<재심>이 영화를 통해 담고자 하는 건 저 <그것이 알고 싶다>가 처음 이 지나간 사건을 다시금 꺼내온 의도와 같다. 그것은 2000년에도 그리고 <그것이 알고 싶다>가 방영됐던 2013년, 2015년에도 또 지금 현재 2017년에도 여전히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는 걸 말해준다. 극중 변호사인 이준영(정우)과 피해자인 조현우(강하늘)가 던지는 질문, “과연 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가 그것이다. 

<재심>이라는 제목에 담겨져 있지만 이 영화에서 핵심적인 키워드는 ‘다시 들여다본다’는 점이다. 이미 구형도 끝나고 감옥에서 수감생활도 마쳤지만 애써 그 고통스런 세월을 다시 들여다보는 이유는 여전히 진실이 묻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진실을 묻어둔 이들은 그 대가로 얻은 권력을 여전히 쥐고 살아간다. 다시 들여다보려는 이들로부터 그 진실을 다시 숨기려 권력을 이용하면서. 

이 영화가 흥미로운 건 이렇게 진실을 외면하고 살아가던 이준영과 조현우 모두 그 진실을 다시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하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삶을 찾게 된다는 점이다. 변호사가 하는 일이 일종의 서비스로 의뢰인의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의뢰인이 낸 돈만큼의 서비스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해왔던 이준영. 그리고 진실을 묻어두고 심지어 자신이 범인이라고 거짓 자백을 한 후 자기 파괴적인 삶을 살아온 조현우. 그들은 그 묻어준 진실을 다시 꺼내려 노력하기 시작하면서 구원을 받는다. 웃음이란 걸 잃고 살아가던 그들이 진실 앞에 연대하고 비로소 웃음을 찾게 되는 과정은 그래서 사건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도 깊은 울림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재심>을 보다보면 새삼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프로그램의 위대함을 느끼게 된다. 당시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을 추적하던 담당PD는 강압수사를 했던 담당형사를 찾아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 때까지도 버젓이 형사 일을 하고 있는 그는 인터뷰를 함부로 할 수 없다며 정식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말한다. 거기에 대해 PD는 질문을 던진다. “지금 경위님께서 정식절차를 말씀하십니까? 최영진(가명)을 정식절차에 의해서 수사하셨습니까?” 아무 답변도 하지 못하는 담당형사가 버럭 화를 내자 PD는 계속해서 묻는다. “모텔에는 왜 데려가셨습니까?” “왜 구타하셨습니까?” 

어쩌면 세상을 바꾸는 건 이런 의혹들에 대한 계속된 질문이 아닐까. <그것이 알고 싶다>가 던진 질문이 한 억울한 소년의 삶과 잘못된 법 정의를 바꾸어 놓았듯이, <재심>은 그 이야기를 다시금 가져와 지금도 어딘가에 묻혀지는 진실로 인해 고통 받는 현실이 바꿔지기를 꿈꾸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인 영화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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