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자', 감동적인 서사를 위해 봉준호가 심어놓은 상징들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봉준호 감독의 새 영화 <옥자>는 단순명쾌한 영화다. 도축될 위기에 처한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슈퍼돼지 옥자를 미자(안서현)가 구하는 이야기. 하지만 이 단순한 마치 동화 같은 이야기에 봉준호 감독은 무수히 많은 상징들을 넣어 그 울림을 극대화했다. 영화는 단순하지만 영화 속 인물들(슈퍼돼지 옥자를 포함해)이 처하는 상황과 그 상황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선택과 행동은 그래서 곱씹어보면 꽤 많은 의미들로 읽혀진다. 

사진출처:영화<옥자>

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던 옥자와 미자가 초반 보여주는 벼랑 끝에서의 생존 장면은 그저 대상이 아닌 가족으로서의 둘의 관계를 곧바로 드러내고 후에 이어질 옥자 구출작전에 아무런 고민도 없이 뛰어드는 미자의 행동을 너무나 쉽게 이해시킨다. 영화 속에서 미자는 마치 자연 그대로를 캐릭터화한 것처럼 고민하고 생각하기보다는 행동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영화가 끝나고 나도 미자가 달리고 또 달리는 그 장면이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있는 건 그래서다. 

옥자를 끌고 간 미란도 서울사무소를 찾아간 미자가, 투명해 저 앞에 안내원이 보이지만 단단해 결코 뚫고 들어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창을 향해 돌진하는 장면도 대단히 인상적이면서 상징적이다. 그건 앞뒤 재지 않고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미자의 직진 캐릭터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자본으로 구축된 그 회사의 말끔한 세계가 결코 이 작은 소녀에 의해 부서질 것 같지 않지만 그녀가 만든 충돌의 울림으로 인해 의외로 깨져버린다는 걸 그 장면은 드러낸다. 그건 아마도 이 영화가 자본의 세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저들과 싸워나갈 것인가에 대한 단초를 담아낸 것일 게다. 

결국 미자는 옥자를 구출하려는 그 행위를 바로 성공시키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언론에 노출되게 함으로써 ‘울림’을 만들어낸다. 옥자 같은 슈퍼돼지가 유전자조작을 통해 만들어진 것에 대한 불편함을 미자 같은 농민들에 의해 친환경적으로 길러졌다는 것을 통해 상쇄시키려던 글로벌 기업 미란도의 CEO 루시(틸다 스윈튼)는 미자에 의해 만들어진 이 ‘울림’을 다시 덮기 위해 그녀와 옥자의 감동적인 상봉식을 계획한다. 

하지만 그런 포장 역시 동물해방전선(ALF)에 의해 끔찍한 고기공장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실패로 돌아가자 루시가 이끌던 미란도는 그녀의 쌍둥이 언니인 낸시 손으로 넘어간다. 루시가 그나마 친환경적 이미지 같은 거짓 홍보를 통해서나마 이 고기산업을 이해시키려 했다면, 낸시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자본주의적 판단만을 내린다. 가격을 낮추면 결국 소비하게 될 것이라고. 이것은 아마도 노골화된 자본주의의 민낯을 고발하는 대목일 것이다.

공장은 마치 수용소의 홀로코스트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끔찍하고 슬프다. 공장으로 끌려 들어가는 슈퍼돼지들의 물결 속에서 돼지들은 생명을 잃은 채 고기로 분해되어 포장된다. 그런데 똑같은 위기에 처한 옥자를 미자가 구해내는 방식이 의미심장하다. 보다 액션을 통해 구출작전이 벌어질 것처럼 여겨졌지만, 의외로 간단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옥자를 사기 위해 모았지만 살 수 없게 된 걸 알고 대신 산 금돼지를 옥자의 가격으로 지불하는 것. 아마도 루시는 거부했을 이 제안을 철저히 자본주의 논리에 입각해 결정하는 낸시는 받아들인다. 금돼지를 쥔 그녀에게 미자는 고객이다. 돈과 생명은 그렇게 교환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픈 장면은 마지막 엔딩에 들어가 있다. 옥자를 구해나오는 미자의 발걸음이 철조망 저 편으로 가득 채워져 공장으로 끌려 들어가는 슈퍼돼지들을 바라보며 한없이 무거워질 때, 가족으로 보이는 슈퍼돼지 부부가 새끼를 철조망 바깥으로 밀어내는 장면이다. 마치 아이를 부탁한다는 듯 얼굴로 마음을 전하는 그 슈퍼돼지 부부를 뒤로 두고 새끼는 옥자의 입 속에 숨겨져 그 홀로코스트를 빠져나온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될 이미지는 ‘입’이다. 고기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유전자조작으로 탄생한 슈퍼돼지가 스테이크로 나와 그것을 시식하는 자리에서 사람들은 고기를 먹고 “최고”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생명에 대한 불편함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그 고기가 한 때는 말을 알아듣는 생명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사람은 고기를 먹어치우지만, 옥자는 그 입에 새끼를 숨겨 생명을 구한다. 사람들은 공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렇게 생산된 고기를 듣지 않는 대가로 맛있는 식사를 한다. 그들에게 생명은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대상일 뿐. 반면 미자는 집으로 돌아와 옥자와 할아버지와 함께 소박한 식사를 한다. 그것은 우리 식의 정서로 ‘식구’의 의미가 들어가 있다. 

옥자의 귀에 대고 미자는 무언가 귓속말을 한다.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옥자에게 했는지는 알 수 없고, 또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렇게 이야기를 건네는 존재로서 생명을 대하는 모습이니까.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돼지의 이야기지만, 이토록 감동적인 서사가 가능한 건 그 단순명쾌한 이야기 안에 봉준호 감독이 곳곳에 심어놓은 상징들 덕분이다.

‘수상한 파트너’, 그들은 기억의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을까

끔찍한 사건이 만들어낸 기억의 트라우마는 우리의 현실을 어떻게 바꾸는 걸까. SBS 수목드라마 <수상한 파트너>는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주인공인 노지욱(지창욱)과 은봉희(남지현)가 어린 시절 부모들로부터 얽힌 사건 이야기를 다루기 시작했다. 노지욱의 부모가 은봉희의 아버지의 보복 방화로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는 것이 당시 공식 보도된 내용이었다. 

'수상한 파트너(사진출처:SBS)'

서로 사랑을 확인하게 된 노지욱과 은봉희는 이 과거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별을 선택했다. 제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그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을 떨쳐낼 수는 없었던 것. 하지만 노지욱은 차츰 자신의 기억이 당시 조사관이었던 장무영(김홍파)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 채기 시작한다.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아이가 범인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해낸다는 건 어려운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되면서다. 결국 장무영이 은봉희의 부친을 범인으로 지목함으로써 어린 노지욱은 그렇게 믿고 증언하게 됐고, 결국 부친이 방화범으로 체포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은봉희의 부친과 은봉희는 똑같이 누명을 쓰는 운명을 반복했다. 그녀의 부친이 그러했던 것처럼 은봉희 역시 장무영의 아들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던 것. 하지만 그 누명을 풀어준 것이 바로 노지욱이다.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노지욱 자신은 검사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변호사로 살아가게 되지만. 

<수상한 파트너>는 지금껏 여러 사건들을 에피소드로 다뤄왔고 그러면서 노지욱과 은봉희 사이에 생겨난 사랑의 감정을 키워왔지만, 궁극적으로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는 이 과거에 얽힌 악연을 어떻게 두 사람이 극복해나가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기억의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다. 

그러고 보면 드라마 전편에 걸쳐 연쇄살인범으로 등장해 쫄깃한 긴장감을 만들어내고 있는 정현수(동하) 역시 그 살인의 저변에는 ‘기억의 트라우마’가 자리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도망치다 교통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게 된 그는 자신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 자신이 살인범이라는 걸 알게 된 그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졸업앨범을 통해 첫 사랑을 보며 기억을 되찾은 그는 눈물을 쏟아낸다. 그 역시 과거의 아픈 기억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현재는 과거가 모여 만들어진다. 그런데 그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건 과거에 대한 기억이다. 그 기억이 만일 행복이 아닌 불행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면 그것은 행복해지려는 현재의 발목을 잡을 수밖에 없다. 트라우마는 그래서 기억을 지워버리거나 왜곡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분노로 터져 나오기도 한다. 어떻게든 그 고통스런 기억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그래서 과거를 극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수상한 파트너>가 굳이 기억의 문제를 가져온 건 그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지금 처한 많은 현실들의 문제의 연원을 따라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것이 많은 과거의 아픈 기억들이니 말이다. 누군가는 전쟁의 기억을 트라우마로 안고 살아가고, 누군가는 개발독재시절 국가가 저지른 폭력의 기억을 트라우마로 안고 살아가며, 누군가는 안전불감증으로 인해 발생한 사건 사고의 기억을 트라우마로 안고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그런 것들을 직접 겪지 않았어도 늘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보며 살고 있는 우리들 역시 어떤 기억의 트라우마가 있을 지도 모른다. 

<수상한 파트너>가 건드리고 있는 기억이라는 지옥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노지욱과 은봉희도 넘어서야 하는 것이고, 연쇄살인범인 정현수도 극복해야할 문제다. 또한 아들을 잃고 폭주하는 장무영 검찰총장 역시 자신이 과거 누군가에게 저질렀던 사법적 폭력을 인정함으로써 그 기억의 문제들을 넘어서야 한다. 로맨틱 코미디의 외피로 덧씌워져 있지만 <수상한 파트너>가 하려는 진짜 이야기는 바로 이 우리 사회에 공기처럼 스며있는 기억의 트라우마가 아닐까.

'파수꾼'이 제시한 검찰이 신뢰를 회복하는 단순한 방법

사실 MBC 월화드라마 <파수꾼>이라는 드라마의 이야기는 현실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비리로 얼룩진 법 집행에 의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고통을 겪은 피해자들이 법망 바깥에서 ‘파수꾼’ 역할을 하며 법이 집행하지 않는 정의를 대신 실현해가는 이야기는 실제 벌어지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수꾼>의 이 판타지적 이야기는 현실을 건드리는 면이 있다. 검찰과 경찰이라는 사법 정의가 아직도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그 지점을 제대로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수꾼(사진출처:MBC)'

<파수꾼>이 그 문제의 중심으로 내세우는 인물은 이제 검찰총장 후보로 낙점을 받아 인사청문회를 치르는 윤승로(최무성)다. 그가 그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건 다름 아닌 무수한 피해자들의 고통이 밑거름 되었다. 모진 고문을 통해 간첩으로 몰아세운 장도한(김영광)의 아버지가 그렇고, 그를 위해 증인으로 나섰다가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된 공경수(키)의 어머니가 그러하다. 윤시완(박솔로몬)에 의해 어린 딸이 살해당했지만 그의 아버지 윤승로의 권력 앞에 오히려 도망자 신세가 된 조수지(이시영)도 마찬가지다. 

검찰총장 후보자가 되기까지 그 권력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며 만들어진 무수한 피해자들. 하지만 가해자는 바로 그런 비리를 통해 더 권력의 정점으로 오르고, 피해자들은 그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아이러니. 그래서 피해자들은 장도한을 중심으로 이 모든 걸 뒤집기 위해 스스로 파수꾼이 되기로 한다. 제대로 행사되지 않는 법 정의가 탄생시킨 것이 바로 윤승로라는 괴물이다. <파수꾼>은 윤승로라는 괴물을 통해 우리네 비극적 현실의 시작이 바로 법 정의가 권력으로 사유화되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걸 말한다. 

하지만 제대로 서지 못하는 사법 정의가 만든 괴물은 윤승로 하나만이 아니다. 그로 인해 비틀어진 삶을 살아가게 된 인물들이 줄줄이 생겨난다. 그의 사주로 인해 수족이 되어 고문은 물론 살인까지 저지른 비리형사 남병재(정석용)가 그렇다. 그리고 어찌 보면 윤승로의 피해자인 장도한이나 그와 함께 하는 파수꾼들인 조수지, 공경수, 서보미(김슬기) 모두 또 다른 얼굴의 괴물들이다. 

장도한은 조수지를 움직이기 위해 그녀의 딸이 윤시완에 의해 살해되는 그 상황을 방조했다고 밝혔다. 물론 그것이 진실인지 아니면 모든 죄를 자신이 짊어지기 위해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윤승로를 잡기 위해 그가 ‘내부고발자’가 되면서까지 해온 일들은 정상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는 또한 사법 정의가 실현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한다는 명분으로 해킹과 도촬을 해온 공경수와 서보미도 마찬가지다. 

결국 사법정의가 제대로 서지 못한 공간에 점점 많아지는 건 괴물들이다. 제대로 된 공적 사안으로 처리되지 않는 사법정의는 비리와 사적 복수로 이어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파수꾼>이 사법정의 문제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지점은 바로 윤승로의 아들 윤시완이라는 괴물을 통해서다. 잘못을 저질러도 윤승로가 그 권력을 사적으로 유용해 덮어주곤 했던 아들이 바로 그것 때문에 괴물이 되어버린 것. 결국 윤승로에게 법의 단죄를 받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바로 괴물인 아들을 발견하는 일이 아닐까. 

윤승로는 말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검찰은 잘못을 하지 않았으며, 그것은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검찰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이 말은 모순이다. 신뢰를 지키기 위해 더 많은 비리들이 저질러질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거꾸로 보면 검찰이 신뢰를 회복하는 방법은 오히려 잘못은 인정하는 일이라고 <파수꾼>은 말하고 있다. 그것이 더 많은 괴물을 탄생시키지 않는 길이고, 거기서부터 겨우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쌈마이’, 무엇이 이 청춘들의 꿈과 사랑을 가로막나

“왜 짐이 이것 밖에 안 되냐?” 이젠 헤어져 자신의 짐을 챙겨달라는 백설희(송하윤)에게 김주만(안재홍)은 화가 났다. 그건 아마도 그녀에게 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화가 나는 것이리라. 무려 6년 간 사귀면서 그녀가 자신을 위해 산 물건들이라는 것이 한 박스도 안 되는 싸구려들뿐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그토록 살뜰히도 챙겼던 그녀가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돈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

'쌈마이웨이(사진출처:KBS)'

KBS 월화드라마 <쌈마이웨이>의 백설희는 결국 김주만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하지만 그렇게 빠져나간 백설희의 빈자리를 김주만은 톡톡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매 순간 자신에게 최선을 다했던 그녀가 아니던가. 그러니 그녀가 없는 자리가 마치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아프고 허전하고 멍할 수밖에. 

그들이 헤어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김주만이 자신을 따르던 인턴 장예진(표예진)의 집에서 어쩔 수 없이 외박을 하고 들어온 것이었지만, 그것만이 이별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미 이전부터 그들 관계는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지나치게 김주만만을 챙기고 자존감이 바닥인 백설희. 그녀의 사랑은 헌신적이지만, 그런 헌신은 김주만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온통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래서 어떻게든 그녀를 현실적으로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6년 간을 뛰고 또 뛰었지만 그다지 바뀌지 않는 현실. 최고는 아니어도 “중간” 정도를 해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 그녀가 말하는 ‘소소한 행복’은 그에게는 어떤 무력감을 주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김주만과 백설희의 이별은 서로를 지나치게 사랑하고 챙기려 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서로 사랑하고 챙기는 것이 행복으로 이어지겠지만, 그것이 무거운 현실 앞에 서게 되자 서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결과로 이어졌던 것. 백설희를 위해 김주만은 전셋집 한 칸이라도 마련하려 애써왔고, 김주만을 위해 백설희는 그를 챙겨도 자신은 돌보지 않았다. 이들의 이별이 남다른 아픔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쌈마이웨이>는 청춘들의 꿈과 사랑을 쉽게 부숴버리는 현실을 담고 있다. 그들은 그저 대단한 건 아니더라도 하고픈 일을 하는 것을 꿈으로 여기고, 최고는 아니더라도 중간 정도의 행복을 원하지만 그건 번번이 갑질 하는 현실 앞에 무너진다. 그 현실의 시스템이라는 것이 가진 것 없는 흙수저 청춘들에게는 기회조차 주지 않는 비열한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쌈마이웨이>는 이런 현실에 대한 청춘들의 ‘돌려차기 한 방’을 그리려 한다. 그래서 일찍이 가난한 현실 때문에 접었던 무도의 꿈을 고동만(박서준)은 다시 걸어가려 하고, 스펙이 없어 접었던 아나운서의 꿈을 최애라(김지원)는 다시 꿈꾼다. 그렇다면 김주만과 백설희는 이 현실 앞에 무너진 사랑 앞에서 어떤 ‘돌려차기’를 보여줄까. 그깟 현실 따위 훌훌 털어내고 다시 그들은 사랑할 수 있을까. 

고동만과 최애라의 꿈이 작게라도 이뤄지길 바라는 것처럼 시청자들은 김주만과 백설희의 사랑이 그 현실 앞에 꺾이지 않기를 바란다. 시스템이 요구하는 성공과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바깥에서 얼마든지 꿈을 꾸고 사랑할 수 있기를. 저 부조리하고 비열하기까지 한 시스템이 그들을 무릎 꿇게 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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