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 컨츄리>와 박계동 동영상

고급요정에 기자와 정치인들이 합석했다. 폭탄주가 왔다갔다하는 와중에 실수인지 정치인 한 분이 여기자를 성추행 했다. 사건이 터지자 그 정치인은 식당 주인인줄 알았다고 했다. 그 말은 식당 주인이라면 성추행해도 된다는 말이기도 했다. 이렇게 한나라당 최연희 의원 성추행사건은 시작됐다.

최연희 야설과 박계동 야동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 잊는다던가. 여기자 성추행으로 한바탕 사회적 물의를 빚었던 최연희 의원 사건은 정몽구 회장 비자금 사건으로 덮어지면서 대중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져갔다(사실 정몽구 회장 사건 역시 삼성의 문제를 덮어준 것이나 마찬가지!). 그러던 중 ‘금요일밤의 은밀한 소환’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게됐다. 내용인즉슨, 하필이면 국민의 관심이 온통 정몽구 회장의 구속영장 발부여부에 쏠려있던 4월28일 검찰이 최 의원을 소환해서 2∼3시간 조사한 뒤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검찰출신인 최 의원의 조사에 있어 검찰이 언론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따돌렸다는 얘기다.

최연희 의원을 두둔하는 이야기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한나라당 이계진 대변인은 스스로 사퇴권고결의안에 기권했다고 밝혔다. 이유는 같은 강원도 출신이기 때문이란다. 이 말은 같은 지역 출신이라면 뭘 해도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안상수 인천시장 후보는 최연희 의원의 행동이 여기자와 친해지려는 것이었는데 언론이 호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여기자와 친해지려면 성추행을 해도 된다는 말처럼 들린다. 놀라운 것은 최연희 의원을 옹호했던 인사들이 그의 영향력이 막강한 강원도 지역 비례 대표로 공천되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민중의 소리> 동영상에는 최 의원의 사무실을 방문해 사퇴반대서명용지를 받아간 사람들(그들 중 다수가 공천되었다)이 등장한다. 놀라운 것은 그 사람들 중에 성추행 사건에 민감해야할 한 여성 후보가 외치는 소리이다. “××차고 못 만지면 병신이지!”

그런데 최연희 의원의 야설이 여전히 귓가에 쟁쟁한 그 때, 때아닌 야동이 인터넷을 뒤덮었다. 약간 어두운 조명 속에 한 점잖은 분(?)이 여급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의 가슴을 파헤친다. 카메라는 대담하게 그 분의 얼굴을 향해 있고, 그 분은 카메라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듯 거침없이 여자의 가슴속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요즘 장안을 술렁이게 만든 동영상치고는 건전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문제의 동영상. 어떤 이들은 뭐 그렇게 시시한 걸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냐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분이다. 그 분은 한때 어느 행사장에서 자신을 홀대했다는 이유로 뒷풀이 자리에서 거침없이 맥주를 상대에서 쏟은 전력을 가졌을 정도로 박력있는 박계동 의원이었다. 영웅은 호색이라 그것도 술집에서 여급을 끼고 술 한 잔 마신 게 뭐 대수냐고 하는 분들 많겠다. 그런데 신문지면에서는 이 사건을 이렇게 부른다. ‘박계동 성추행 동영상 파문.’ 이 사건이 성추행인지 추태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여전히 국회의원들이 잘못된 성 의식과 남성주의 술 문화에 젖어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스 컨츄리나 사우스 컨츄리나
이 정도 되면 한나라당은 성추행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왜 같은 국회의원들이면서 유독 한나라당만 이런 성추행 파문이 도는 걸까.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과연 절대로 룸싸롱 같은데 출입하지 않고 서민적인 삼겹살집에만 갈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한나라당이 상대적으로 오랜 세월동안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 관성적으로 배어온 습관들이 열린우리당보다는 많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 관성적인 술자리와 성 의식은 이제 죄의식조차 마모시킬 정도가 된 건 아닐까. 상식적으로 ‘여기자를 성추행하는 국회의원’이 말이 되는가.

문득 영화 <노스 컨츄리>가 떠오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노스 컨츄리나 사우스 컨츄리나 비슷하구만.’ <노스 컨츄리>라는 영화를 보면서 내내 남자라는 것이 불쾌할 정도로 참담한 심정이었다. 1984년 미국에서의 최초의 직장 내 성폭력 승소 사건인 ‘젠슨 대 에벨레스 광산 사건’을 영화화한 <노스 컨츄리>. 하지만 답답한 현실은 지금 이 땅에서는 <노스 컨츄리>의 사건이 여전히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제불황과 굴욕적인 삶들
윗물이 저러할진대 아랫물은 오죽할까. 인터넷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성추행’이라고 쳐보면 안다. 지금 이 나라가 얼마나 미쳐 돌아가고 있는지를. 또한 이것은 거꾸로 말해준다.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굴욕적인 삶을 참아내고 있는가를. 직장내 성희롱에 대한 법정투쟁드라마로 실제 사건을 영화화한 <노스 컨츄리>가 지금 이 땅에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집을 뛰쳐나온 조시. 그녀 앞에 놓인 상황은 절망적이다. 두 아이들의 양육을 위해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으로 생각되던 광산 일을 하게 되는 조시는 힘겹지만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녀를 힘들게 하는 것은 고된 광산의 노동이 아니다. 그것은 여성 광부들을 대하는 남성 동료들의 집단적인 성추행이다. 많은 광산이 문을 닫아 대량실업사태가 벌어지던 1980년대, 남성 동료들은 여성 광부들을 동료가 아닌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한 적으로 간주했다. 그들에게 수치심을 유발하게 하여 스스로 떠나게 만들려는 심산이었다. 조시는 여기에 반기를 든다. 그러자 남성 동료들의 성추행은 점점 심해지고 다른 여성 광부들까지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굴욕을 선택한다.

우리에게도 이와 비슷한 뼈아픈 기억이 있다. IMF 시절 한 상담소에서는 고용불안을 악용한 직장 내의 성추행 상담이 크게 증가했다고 한다. 이것은 그 때 당시 갑자기 성추행이 늘어났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전에는 성추행을 저지르는 상사나 동료가 있다면 직장을 옮기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지만, 고용불안이 심해지자 굴욕을 감수하면서까지 직장을 고수했던 여성들이 많이 늘었다는 것이다.

사실 직장 내의 굴욕적인 생활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물론 많은 직장들이 민주적인 형태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그렇지 않은 곳들이 즐비하다. 성희롱이나 성추행의 문제는 단순히 남성 여성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권력의 문제이며 이에 대한 투쟁은 굴욕적인 삶을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권력에 맛을 들인 일부 직장상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일상화된 언어폭력, 혹은 직접적인 폭력에 무릎꿇고 살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다. 그러므로 <노스 컨츄리>가 던지는 성추행의 문제는 여성의 문제로만 볼 수 없고, 모든 권력의 상하관계 속에 있는 사람이라면 해당되는 문제가 된다.

그래도 <노스 컨츄리>는 순진하다
굴욕적인 삶이냐 투쟁이냐의 기로에서 투쟁을 선택한 조시는 법정에 서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지지해주는 단 한 명의 여성동료도 만들지 못한다. 대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가족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노조원들의 빗발치는 조롱 속에서 당당하게 말한다. 여러분들은 모두 내 형제 자매이고, 지금 당신들이 조롱하는 저 여자는 바로 내 딸이라고. 그 사실이 부끄럽다고. 여기서 부끄럽지 않은 건 내 딸뿐이라고.

자신이 희롱했던 한 여자가 내 가족이고 내 딸이라는 인식은 사람들을 바꾸어놓기에 충분하다. 우리네 직장내 성희롱 역시 이런 인식의 전환으로 어느 정도는 해결되지 않을까? 글쎄 의문이다. 한번 실수는 할 수 있다지만 그 실수 뒤에 따라오는 수많은 변명들은 권위주의에 물든 우리사회의 슬픈 자화상을 보는 것만 같다.

영화 <노스 컨츄리>는 언제 개봉했는가 싶게 막을 내렸다. 이처럼 우리사회의 성과 권력에 대한 불감증을 에둘러 꼬집는 영화에 대해 사람들은 아무런 논의가 없었다. 일련의 정치인 성추행 사건들도 어쩌면 <노스 컨츄리>가 슬쩍 기억 속에 사라진 것처럼 잊혀질 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 잊는다고 하지만 그건 사실과 다르다. 다만 이 사회에 사건사고들이 너무 많은 탓이다. 더 큰 사건사고들이 계속 벌어지다간 자칫 이런 생활이 일상화되어버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렇게되면 사람들은 아예 무관심해질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그걸 조장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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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기봉이>와 농민문제

KBS <인간극장>이 보통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평범한 사람들을 다루지는 않는다. 이 ‘인간’이라는 단어에 ‘극장’이 붙는 것은 그 출연자의 이야기가 드라마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평범하고 싶지만 평범할 수 없는 장애우라면 드라마는 2배의 강도를 가진다. 2002년 <인간극장>에 소개된 배형진 군의 이야기가 <말아톤>이라는 영화가 되어 대성공을 하고, 그 바톤을 이어받아 엄기봉씨의 이야기가 <맨발의 기봉이>로 영화화된 것은 바로 그런 인간드라마의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이 장애우의 이야기가 정상인이 우리들에게 울림을 주는 것은, 이 땅에 몸은 성하지만 상황은 기봉이와 다를 것 없는 수많은 소외된 인물들이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바보는 어떤 의미일까
『바ː보[명사]. 1.지능이 부족하여 정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 2.‘어리석고 멍청한 사람’을 얕잡아, 또는 욕으로 이르는 말. - 네이버 국어사전』
하지만 이 시대에 ‘바보’라는 단어는 아마도 한 가지 의미를 더 추가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너무나 착한 사람’이다. 어려서 열병을 앓아 나이는 40살이지만 지능이 8살에 머문 한적한 시골마을의 기봉이는 ‘바보(1번 뜻의)’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바보(2번 뜻의)로 놀리면서 허드렛일을 시킨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일을 해주고 얻어오는 음식을 빨리 엄마에게 가져가고 싶은 마음에 맨발로 뛰어다닐 정도로 효자인 ‘너무나 착한 사람, 바보’이다.

약삭빠르고 이해득실을 따지는 현대인들에게 바보가 제 3의 의미를 추가하는 것은 ‘바보만도 못한’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인간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자기는 고급외제차를 끌고 골프에다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정작 자신의 노모는 산골 기도원에 버리는 작금의 상황은 기봉이의 ‘바보행각(?)’을 숭고하게까지 만든다. <맨발의 기봉이>가 가진 감동의 실체는 장애우라는 소외된 인물이 바보라고 불릴 정도로 착하다는 점에 있다.

왜 그들은 달리는가
<말아톤>에서 초원이가 그랬듯이 기봉이도 달린다. 평범한 사람들에게야 달리기란 누구나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평범하지 못한 이들에게 달리기는 어찌 보면 무모한 도전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들을 보는 사람들은 생각한다. 사실 초원이가 달린 것은 엄마의 집착적인 노력 때문이며, 기봉이가 달린 것은 엄마의 틀니를 해주기 위한 효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혼자 서기 어려운 이들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그만큼 크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에 가서는 알게된다. 이들이 달렸던 것은 사실 그 누구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 존재를 알리기 위한 스스로의 노력이었다는 것을.

초원이는 마지막 순간에 엄마가 마라톤 대회에서 늘 묻곤 하던 질문을 엄마에게 되던진다. “초원이 다리는?”이라는 질문이 초원이의 입에서 나왔을 때, 그것은 엄마의 힘이 아닌 자신 스스로 달리기를 선택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같은 의미로 “서라면 서고 달리라면 달리라”던 동네 이장님인 임하룡의 말을 무시하고, 달려나가는 기봉이의 모습은 스스로 서는 한 인간의 감동적인 모습을 잡아낸다. 그들이 달리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일이며 한 인간으로서의 자기존재를 알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라톤이라는 길 옆에 선 사람들
정상적이지 못한 몸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마라톤이라는 긴긴 인생길을 달려나갈 수 있게 하는 힘은 단지 엄마의 노력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편견도 존재하지만 그들 주위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따뜻한 손길들이 있다. 초원이 옆에는 그를 믿어주고 이끌어주는 코치 선생이 있고, 기봉이 옆에는 아들처럼 그를 아끼는 이장님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이 있다. 상대적으로 기봉이 주변에 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은 아마도 그 살아가는 배경이 시골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바보인 기봉이와 정상이지만 비뚤어진 마음의 탁재훈을 비교해나가면서 정상과 비정상의 문제를 꼬집는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이장님댁 아들 탁재훈은 사실 모든 것을 기봉이에게 빼앗긴다. 아버지나 사진관 주인 김효진이 “기봉씨를 배우라”고 하는 말은 사실 탁재훈에게 하는 말이 아니고 관객에게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탁재훈은 그 스스로도 소외된 인물이다. 작품에서는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그가 가진 상실감은 ‘시골 촌구석’이라는 답답한 현실과 일맥상통한다.

소외된 자들의 대표주자, 기봉이
기봉이가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는 날, 기봉이의 엄마를 엎고 달리는 탁재훈은 저 스스로도 그리 잘난 것 없는 소외된 인물이라고 느꼈을 지도 모른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게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상경한 시골사람들이 기봉이가 이기길 바라는 것은 어찌 보면 이 시대의 소외된 계층의 한 면을 보는 것만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기봉이와 정상인들의 마라톤 대회는 마치 힘없는 시골사람들과 늘 기득권을 갖고 살아가는 도시인들과의 대결처럼 쓸쓸하다. 무장한 전경들을 향해 보잘 것 없는 무기를 들고 달려드는 농민들처럼 무모해 보인다.

그러나 소박하고 따뜻한 시골사람들이 맨발인 그에게 운동화를 준 것처럼 영화는 따뜻한 시선으로 소외된 이들의 맨발에 운동화를 신겨준다. 사진관 주인으로 나온 김효진은 기봉이의 신발끈을 매주면서 말한다. “달리다가 힘들면 걸어도 된다”고. 그 말은 마치 “말은 안 했지만 당신의 힘겨운 노력을 알고 있다. 빨리 가지 못해도 가기만 하면 된다.”는 말처럼 들린다. 지금은 힘들지만 언젠가는 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들린다.

물론 이 영화는 실제 사실을 극화했기 때문에 이런 보다 확장된 의미망을 갖추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웃다가 울리는 휴먼 드라마에서 굳이 저 농민들과 같은 소외된 계층의 모습을 떠올리는 건, 그만큼 삶이 팍팍하기 때문일까. 수많은 이 땅의 ‘기봉이’들은 왜 여전히 맨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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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나도열들의 1인 시위

수퍼맨, 원더우먼, 배트맨, 스파이더맨, 엑스맨, 캣우먼, 엘렉트라... 헐리우드가 가진 수퍼 히어로들을 보면 주눅이 든다. 우리는 왜 저런 영웅이 없을까. 하지만 진짜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때 우리는 김청기 감독이라는 불세출의 천재에 의해 <로봇 태권 V>와 <똘이장군>, <수퍼 홍길동>을 가진 적이 있었다.

일본 만화가 온통 우리네 TV를 장악하던 시절, 우리의 캐릭터는 애국심이라는 지상가치와 함께 했던 것 같다. 특히 <똘이장군>은 당대 반공이라는 불행한 시대적 상황을 전적으로 보여주며 간첩을 잡거나(간첩잡는 똘이장군), 땅굴(똘이장군과 제3땅굴)을 발견하기도 한다.

탈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영웅들과 결별했다.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노력이 있었지만(이것 역시 김청기 감독이 주도한 것 같다. 그는 태권V를 부활시켰고, 박중훈 주연의 바이오맨이라는 영화도 만들었다.) 어찌 보면 시대착오적인 무모한 발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점점 맹위를 떨치는 헐리우드 수퍼 히어로들
반공시대는 지났지만 여전히 헐리우드에서는 수퍼 히어로들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그 종류도 점점 다양해지고 캐릭터도 좀더 복합적인 인물로 변신해갔다. 대표격인 수퍼맨이 바른 생활 사나이라면, 배트맨은 좀 더 어두운 면이 많은 영웅이며, 스파이더맨은 보다 인간적으로 고뇌하는 영웅이라는 탈을 썼다. 이 수퍼 히어로들은 만화에서 영화로 만들어져 블록버스터라는 이름에 걸맞게 세계 영화 시장을 박살냈다. 그들은 사라질만하면 계속 재생산되면서 미국의 정책과 힘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반면 우리네 영화 속에서 수퍼 히어로들은 애초부터 만들어지지 않았다. 당시 자본이 일천하고 기술이 일천한 우리네 영화계에서 영웅들은 헐리우드 보다는 중국식 영웅을 따라갔다. 소위 이소룡, 성룡, 주윤발, 이연걸 하는 중국식의 히어로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도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들은 초능력을 가진 무협영웅을 만들어 아시아 시장과 헐리우드 시장까지 파고들었지만, 우리네 영웅들은 하늘을 날아다니지도 않고 괴력을 갖고 있지도 않은 우리의 이웃 같은 인물들이었다. <돌아이>의 전영록이나 <인간시장>의 장총찬, <장군의 아들>의 김두한 같은 서민들이 사회 불의와 맞서 싸우는 정도였다. 그 계보는 최근의 류승완 감독까지 그다지 변하지 않은 우리네 영웅상이다. 세계를 대상으로 하기엔 스케일이 작았거나 그만큼 현실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열 받아야 힘을 쓰는 우리네 영웅
그런 면에서 보면 <흡혈형사 나도열>은 한국형 수퍼 히어로(?)의 그 첫 번째 타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평범한 비리형사 나도열이 드라큘라의 피를 흡혈한 모기에게 물려 초인적인 능력을 갖게된다는 황당한 설정에 걸맞게, 영화는 애초부터 수퍼 히어로 영화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 흥분해야 변신하는 안쓰러운 우리네 수퍼 히어로, 나도열은 적과 맞서 싸우기 위해 야한 여자를 보거나 심지어는 PMP에 저장해 갖고 다니는 포르노를 봐야 한다. 그러니 우아하고 멋진 등장 따위는 잊어야 한다.

적이라고 해봐야 세계적인 악당이나 악의 무리들이 아닌 동네에서 성인오락실을 하는 조폭이다. 그러니 이들을 상대하는데 엄청난 괴력(지구를 거꾸로 돌리거나 날아다니는 등)은 필요 없다. 단지 싸움을 좀 잘하고, 힘이 남보다 조금 센 정도면 된다. 실제로 나도열이 가진 남다른 능력이라고 해봐야 천장에 붙는 정도가 아닌가. 그 정도 실력이면 K-1이나 프라이드에 나가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니 미국의 수퍼 히어로들, 액스맨이나 스파이더맨, 수퍼맨 등과 싸운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우리네 나도열이나 미국의 <헐크>나 똑같이 열 받아야 힘을 쓰는 건 마찬가지지만 나도열은 헐크가 가진 존재론적인 고민을 갖고 있지 않다. 가볍게 촐랑거리면서 기꺼이 변신하기 위해 야한 것들을 찾는다. 괜스레 존재론적 고민을 담는 척 하지만 사실은 돈을 벌어들이겠다는 목적을 가진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음흉함보다야 순수하지만, 그래도 “왜 우리네 수퍼 히어로는 이다지도 왜소한 걸까”하는 탄식은 남는다. 그것은 아마도 미국과 일본, 중국, 러시아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우리네 국제정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수퍼 히어로에 대한 풍자
힘이 곧 법인 세상. 현실적인 힘이 없으니 그 잘못된 세계에 대해 풍자라도 할밖에. 다행히도 <흡혈형사 나도열>은 코미디영화다. <나도열>은 잘난 체하고 폼잡는 수퍼 히어로들에 대한 강렬한 풍자 그 자체이다. 그 막강한 힘과 선인인 척 가장하는 얼굴 뒤에는 사실 힘의 논리가 들어있고, 이긴 자가 곧 선이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 여지없이 무너지는 나도열은 수퍼 히어로 이면에 숨은 속물근성을 고발한다.

블록버스터 헐리우드 영화들이 전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려는 점에서 보면 그들 역시 미국이 만들어낸 수퍼 히어로의 행동과 다를 바가 없다. 수퍼 히어로들의 틈바구니에 낀 서민들은 언제까지 그들의 쇼를 보고만 있어야 할까. 서민들의 공격은 수퍼 히어로가 현실성 없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걸 폭로하는 것이다. 실로 블록버스터 속에서는 불가능한 미션(mission impossible)이 가능한 일이 되고, 얼굴만 인간으로 바꾼 수퍼맨과 배트맨이 즐비하게 등장한다. 그 우스꽝스런 이야기가 먹히는 것은 그 자극적인 롤러코스터 효과 때문이다. 영화라기보다는 놀이기구를 타는 듯한 기분, 그것이 블록버스터의 실체다.

수많은 나도열들의 1인 시위
지금 우리네 극장가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공격을 막아주던 스크린 쿼터라는 방패막이 뚫린 채, 미국산 수퍼 히어로들이 극장가를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션 임파서블3>가 연휴 극장가를 평정했고, 그 뒤를 <다빈치 코드>가 준비하고 있다. 이 절대절명의 시기에 <엑스맨 3>와 <수퍼맨 리턴즈>가 들어온다는 것은 실로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류 바람을 타고 조금씩 그 덩치를 키워가던 우리네 영화는 이제 우리만의 블록버스터를 키워야할 때다. 우리에게는 <올드보이>가 있고, <태극기 휘날리며>가 있으며, <왕의 남자>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각광받는 이 한류 영화가 우리네 블록버스터이다. 방패막이 없어졌다면 이제 우리도 저 적지로 파고들어야 한다.

하지만 걱정되는 것은 전 세계의 영화가 블록버스터들의 격전장이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렇게 덩치 큰 영화들만 자꾸 극장에 걸리다가는 덩치는 작지만 보석 같은 영화들은 상대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다. 특히 지금처럼 극장이 체인화되어가는 마당에는 잘 나가는 영화들만 대접받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왕 받은 열, 식히지나 말자
왜소하고 서민적인 영웅, <흡혈형사 나도열>은 우리네 영화계의 현실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스크린 쿼터 일수가 축소되고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들이 일제히 융단폭격을 준비하고 있는 지금, 많은 영화인들의 1인 시위는 마치 <흡혈형사 나도열>을 보는 듯해 마음이 아프다. 끝없이 비판하고 풍자하고 있지만 정작 관객은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말이다.

이 상황은 중국식 무협영웅들처럼 이런 사태가 오기 전에 미리 준비해왔다든가, 미국식 수퍼 히어로들처럼 본래부터 힘이 세거나 특별한 약을 먹었다든가 하는 것 없이, ‘열 받아야’ 그제서야 힘을 쓰는 우리네 정서하고도 어쩌면 그리 닮아있는가. 부디 받은 열이라도 쉬 식혀 잊혀지는 사태는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디 1위 시위하는 나도열들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못할망정, 지네들 밥그릇 찾기라는 오명을 씌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신문사 국장으로 하여금 스파이더맨과 수퍼맨을 악당으로 몰아가게 했던 저네들의 전술에 말리는 격이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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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뱀> 저주받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

깊은 상처를 겪어본 사람들은 말한다. 상처 없이 사랑할 수는 없을까. 하지만 그들 스스로 알고 있다. 상처 그 자체가 사랑이라는 것을.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안전했던 경계를 포기하고 침범을 허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계를 포기했기에 사랑할 수 있지만, 또한 그 사랑은 상처를 전제로 한다. 결국은 헤어질 수밖에 없는(사람은 누구나 홀로 죽는다) 운명을 타고난 우리들은 그래서 꿈꾼다. 저 멀리 있는 저 별에, 사라진 내 님이 살고 있다고.

저주받은 인간
불치병이나 시한부 인생에 대한 영화 드라마가 관심을 받는 것은 그것이 바로 유한한 우리 인간들의 운명을 다룬 것이기 때문이다. 길거나 짧은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우리는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저 세상으로 떠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사랑에는 반드시 이별이 따른다는 말은 어디에나 해당된다.

<도마뱀>은 바로 그 헤어질 수밖에 없는 저주받은 인간의 사랑과 운명에 대한 이야기다. 노란 우비를 보호막처럼 입고 다니는 저 맹랑한 아이, 아리가 저 스스로를 ‘저주받은 아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저 ‘저주받은 인간’의 운명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보호막 치기, 혹은 경계 긋기
날카로운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아리는 자기 주변에 보호막을 친다. 노란 우비가 그렇고 입만 열면 쏟아내는 거짓말이 그렇다. 땅바닥에 금을 그어놓고 그 선을 넘지 말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의 보호막 치기이다.

그런데 그런 아리의 보호막을 넘어오는 소년이 있다. 조강. 이름에서부터 풍겨나듯 그는 아리의 ‘조강지부’같은 인물이다. 노란 우비를 넘어서 살갗을 마주 대고, 아리의 거짓말을 진짜로 받아들이며, 바닥에 그어놓은 금을 어느새 넘어버린다.

그러자 자신을 보호하려던 아리의 보호막은 이제는 그녀를 사랑하는 조강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경계가 된다. 금 하나를 넘어오는 그 순간, 위협을 느끼면 꼬리를 자르고 사라져버리는 도마뱀처럼 그녀는 종적을 감춘다. 그녀가 느끼는 위협은 다름 아닌 누군가를 영원히 사랑할 수 없는 저주받은 자신이 조강을 사랑하게 될까 하는 점이며, 자신이 이미 사랑하는 조강이 사랑 받을 수 없는 저주받은 몸의 자신을 사랑하게 될까 하는 점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꼬리를 잘랐던 도마뱀은 이제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보호하기 위해 꼬리를 자른다.

죽음을 앞둔 연인, 별을 꿈꾸다
경계를 확실히 긋기 위한 몸부림으로 아리는 외계인이 된다. 외계에서 왔으니 저 별로 돌아가야 한다. 그 거짓말은 그러나 이제 다 큰 조강이 믿기엔 너무나 허황된 것이다. 하지만 절박한 연인의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에게 믿지 못할 것이 어디 있을까. ‘그녀는 죽은 것이 아니고 저 별에 잠시 먼저 간 것이다. 언젠가 돌아올 것이다.’

아픈 아리를 위해 미스테리 서클을 그리며 UFO를 부르는 조강의 마음 속에는 꼿꼿이 세워진 아리의 가시까지 껴안으려는 안간힘이 있다. 영원한 이별을 앞둔 연인에게 UFO가 나타난들 대수일까. 죽음 앞에서 우리는 유령을 만나기도 하고, 들꽃으로 별로 다시 살아난 연인을 만나기도 하지 않는가. UFO와 우주인은 이 시대의 들꽃이며 별이고 유령이다.

멜로인가, 미스테리인가
영화는 강혜정, 조승우라는 연기파 배우들의 힘으로 움직인다. 아이디어는 여기저기 번뜩이지만 유기적인 구성은 조금 산만한 편이다. 황인호씨의 원작, <아리조강 납치사건>과 <도마뱀>을 비교해보면 감독은 약간은 만화적인 이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면서, 그 만화적 색채를 최대한 줄이고 영화적인 공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아리조강 납치사건>은 저 코엔 형제의 <아리조나 납치사건>처럼 훨씬 더 비현실적이다. 멜로를 추구하고 있지만 이야기의 흐름은 공감을 일으킬 만큼 충분히 그럴 듯하지 못하다. 하지만 <도마뱀>에 와서 그런 색채들은 많이 줄어들었다. 굳이 붙이자면 ‘미스테리 멜로’를 어느 정도 완성한 셈이다.

하지만 공감은 단순히 남녀간 사랑의 이야기나 최루성 신파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보다 깊은 공감을 만들려면 저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그렇듯이 그 안에 인간의 운명이나 존재 같은 깊은 통찰력이 깔려 있어야 했다.

<도마뱀>은 좋은 소재에 좋은 아이디어에 훌륭한 연출까지 모두 괜찮은 영화의 틀을 갖추었다. 아쉬운 것은 ‘도마뱀’이라는 철학적인 제목을 가진 이 영화가, 그런 깊은 울림까지는 획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스테리와 멜로가 만나 휴먼 드라마로 연결됐더라면 오래두고 감동할 수 있는 영화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돋보이는 것은 기존 멜로 영화들의 천편일률적인 스토리와 모범답안 같은 연출을 조금은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인 우리들은 누구나 마음 속에 도마뱀 하나씩을 가지고 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혹은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 도마뱀은 번번이 꼬리를 잘라왔다. 영화 <도마뱀>은 우리 생애에서 자르고 도망쳤던, 그래서 기억 속에 서서히 버려진 그 꼬리를 기억하게 만든다. 혹은 그렇게 영원히 잘라내려 했지만 계속 돋아나기만 하는 꼬리를 가진 인간의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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