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어느 별에서 왔니> vs <봄의 왈츠>

<넌 어느 별에서 왔니>를 보고 있으면 정말 묻고 싶어진다. “너희들 외계인이니?” <소림축구>에서 주성치가 만두가게 처녀 아매에게 했던 말을 빌려, “네 별로 돌아가”라고 농담이라도 걸고 싶어진다. 그리고 진짜 묻고 싶은 건 드라마 제목처럼 “도대체 넌 어느 별에서 온 거니?”하는 질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묻고 싶은 또 한 사람이 있으니 같은 별에서 왔으나 지금은 서로 다른 입장에 서서 경쟁하고 있는 다니엘 헤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이 핸섬가이는 떠듬떠듬 서투른 우리말 몇 마디로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외계인으로 돌아간 정려원과는 정반대로 한국인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그들이 온 별은 어디?
정려원이 처음 그 몸을 숨긴 곳은 27살 유희진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맑게 웃는 모습이 아름다운 스마일페이스였지만, 그 속에는 끔찍스러운 아픔이 남아 있었다. 암으로 인해 위를 절제했던 것처럼 그의 첫사랑 진헌과의 관계도 도려내졌고, 다시 돌아온 자리에는 김삼순이라는 어마어마한 공력의 소유자가 떡 하니 앉아있었다. 김삼순의 엉뚱함과 서글서글함에 맞서는 인물로, 정려원은 다소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얼굴의 화장을 해야했다.

그때 그녀의 무거움을 덜어주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같은 별에서 온 다니엘 헤니라는 인물이다. 김삼순과 진헌을 두고 경쟁한다는 절망적인 설정에서 그녀를 끄집어내준 다니엘 헤니는 여러모로 그녀와 같은 과였다. 유창한 외국어에, 이국적인 쿨한 이미지, 보고만 있어도 마냥 기분이 좋아지는 맑은 얼굴... 그들은 진헌을 두고 김삼순과 경쟁한다는 드라마 속 구도에서 자꾸만 벗어나 같은 별 출신 특유의 더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별에서 정려원은 본래 호주의 맑은 하늘같은 이미지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그녀가 나온 그리피스 대학이 있는 골드코스트의 파란 하늘과 따뜻한 햇볕, 그 볕에 적당히 달구어진 바다의 열정을 고스란히 갖고 있었다. 아무리 무거운 얼굴의 화장이라 해도 그걸 숨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두 번째로 그 몸을 숨긴 <가을 소나기>의 박연서라는 인물은, 유희진이었을 때보다 더 심각했다. 다니엘 헤니도 없던 그녀는 절친한 친구를 사랑하는 남자를 옆에서 짝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 드라마를 통해 정려원은 그저 대책 없이 맑기 만한 것이 아닌 눈물을 펑펑 흘려도 잘 어울리는 새로운 이미지 하나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좀더 심플하면서도 강력한 명랑함, 그 명랑함의 뒤편에 남는 우수... 마치 찰리 채플린의 슬랩스틱에서 한껏 웃은 뒤에 남는 애잔한 감정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다시 자기 별로 돌아가 망원경으로 새로운 얼굴을 찾던 정려원은 이제 제대로 된 얼굴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복실이의 얼굴이다.

웃겨야 산다
<넌 어느 별에서 왔니>에서 정려원은 먼저 혜수(김래원의 옛 애인)라는 과거의 이미지를 교통사고로 지워버린다. 그리고 복실로 태어난다. 착하게도 자신의 사고로 죽은, 과거 이미지를 가진 정려원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김래원은 차츰 복실로 다시 태어난 정려원의 이미지에 빠져든다. 처음 몇 번은 과거와 현재를 혼동하지만 이제 과거는 묻혀지고 현재의 모습에 더 빠져드는 것이다. 복실을 만난 정려원은 제 물 만난 고기처럼 거침없이 순수한 모습(심지어는 바보스러운)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사실 제 별에서 놀던 그 모습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모습은, 어른들의 세계인 도시에 와서 오히려 빛을 발한다. 그녀의 거칠 것 없이 터져 나오는 촌스러움에 그녀를 바라보는 이들은 웃음이 터진다. 하지만 그 웃음은 이상하게도 웃을수록 마음에 애잔함을 남기는데, 그것은 그녀가 비판하고 있는 대상, 그녀가 웃음을 만들어내는 원천이 바로 우리네 도시인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한참 웃다가 한숨이 나온다.

울어야 산다
한편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같은 과라는 것을 확인했던 또 다른 별에서 온 다니엘 헤니는 정려원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정려원은 시골소녀로 환골탈태, 웃다가 울리는 진정한 개그의 길을 가고 있는 반면, 다니엘 헤니는 <봄의 왈츠>를 통해 절대로 울 것 같지 않던 조각 같은 얼굴에 조금씩 슬픔을 담아낸다. 아직 그 얼굴이 완전히 드러난 건 아니지만 “이러다가 다니엘 헤니가 우는 걸 보게 되는 거 아냐?”하고 생각할 정도로 드라마의 분위기는 그의 아픔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기구한 운명의 장난으로 정려원은 웃겨야 살고, 다니엘 헤니는 울려야 사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다니엘 헤니가 그 외계인의 이미지에서 점점 우리네 정서에 맞는 한국인의 모습(정스러운)으로 다가가는 반면, 정려원은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외계인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그러자 드라마는 땅과 하늘의 모습으로 진전되었다. 땅에는 봄이 만연하고, 하늘에는 별이 반짝였다. 땅을 보나 하늘을 보나 쳐다보기만 해도 즐거운 그 얼굴들이 있기에 월화가 아름답다.

<봄의 왈츠> 상처에 대한 변주곡

한 사람의 마음 속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상처와 그 아문 흔적들이 있는 걸까. 지금 웃고 있는 저 얼굴 뒤에는 얼마나 많은 아픔들이 숨어있을까. 상처들에 의해 만들어진 나의 얼굴은 또 얼마나 많은 걸까. <봄의 왈츠>는 이제껏 보여줬던 트렌디한 등장인물들이 사실은 그렇게 단순한 인물들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긁을수록 점점 커져만가는 딱지처럼 이 치유가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상처들은 윤재하, 박은영, 필립, 송이나는 물론이고 그 주변인물들, 윤재하의 어머니와 아버지, 박은영의 어머니와 필립의 어머니에게까지 번지고 있다. 이제 상처들은 조금씩 몸을 간질이며 봄을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봄의 왈츠를 추기 전에 먼저 해야될 일이 있다. 마음 속 깊숙이 너무나 깊이 숨겨두어서 마치 애초부터 없었다고 믿고 있었던 과거의 상처, 그 상처와 마주하는 일이다.

윤재하, 나는 누구인가
윤재하가 가진 상처는 마치 인간 존재 깊숙이 내재된 원죄의식에 가깝다. 윤재하는 본래 이수호였다. 그런데 그 이수호의 아버지는 그의 삶은 물론이고 그가 사랑하는 박은영의 삶을 송두리째 뽑아버렸다. 이수호는 그 깊은 죄의 공모자라는 원죄의식과 함께, 그것이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였다는 것에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게된다. 그는 박은영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죽이는 길을 선택한다. 그는 이수호를 죽이고 윤재하로 태어났다.

윤재하는 피아노를 닮아버렸다. 어쩌면 그가 피아노를 두드리며 자라온 그 세월은 이수호의 흔적을 지우고 윤재하라는 새로운 인물을 자신 속으로 박아 넣는 아픔의 세월이었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그런데 자신이 스스로 죽였다고 생각했던 이수호가 깨어난다. 그의 눈앞에 박은영의 실루엣이 자꾸만 어른거리는 것이다. 그가 다시 대면하게된 상처에서 그는 머뭇거린다. 박은영을 사랑하지만 그녀에게 지워질 수 없는 상처를 입힌 이수호로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그 상처를 덮고 자신을 윤재하로 믿고 사랑하는 송이나를 받아들일 것이냐.

자꾸만 거울 앞이나 유리창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볼 때의 애잔함, 피아노 건반 위에서가 아니라 가끔씩 허공을 두드리는 그의 손가락의 절망감, 마치 어떤 얘기도 꺼낼 수 없다는 듯이 악다문 입술, 고개를 가로젓거나 방을 뛰쳐나갈 때의 쓸쓸한 어깨... 그것들은 모두 그의 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이수호의 그림자를 보이지 않기 위한 위장술이다. 박은영이 과거의 박은영으로 드러나는 그 지점이 윤재하 속의 이수호가 깨어나는 날이다. 그것이 봄의 왈츠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박은영과 필립, 그 대책 없는 미소 뒤의 아픔
도무지 참아낼 수 없는 깊은 상처는 오히려 얼굴에 행복의 가면을 씌우는가. 참기 어려운 충격적인 사건들을 겪은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다못해 맑기까지 한 대책 없이 발랄하고 명랑한 현재의 얼굴을 한 그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우는’ 캔디와, 씩씩함의 대명사 김삼순의 캐릭터가 반쯤 섞인 박은영의 얼굴은 그래서인지 웃는 순간, 한숨을 내쉬는 순간에 저릿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자신이 사랑했던 이수호의 아버지로 인해 죽게된 자신의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병 때문에 스스로의 존재를 포기해야 했던 그녀가 사랑한 이수호, 그럼에도 다시 나타난 이수호의 아버지의 꾀임에 넘어가 겪게되는(그녀는 어느 여관에 버려진 것이다. 혹은 팔렸거나.) 지울 수 없는 상처... 윤재하가 그녀 앞에 다시 나타남으로 해서 그 묻어두었던 상처들이 다시 떠오른다. 저 외딴 섬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던 소녀는 이제 낯선 서울까지 너무나 멀리 오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와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

그녀 옆에 강력한 환상, 행복에로의 몰핀이 자리하고 있으니 그가 바로 필립이다. 이 유쾌한 친구는 드라마 전체의 무거움을 일순간 날려버릴 만큼 가볍다. 하지만 저 밀란 쿤데라가 말했듯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그 자체로 무거움을 내포한다. 그의 과거는 철저히 가려져 있으나 그가 은영 모의 무덤가에서 자신의 어머니도 돌아가셨다는 말을 할 때 그 어둠이 얼핏 드러난다. 굳이 혼혈의 아픔 운운하지 않더라도 그 쾌활한 웃음이 어린 시절의 어떤 상상하기 어려운 아픔을 예고하게 한다. 그는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보려고만 한다. 그런 그가 은영을 사랑한다. 윤재하(과거)와 필립(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은영은 갈등한다. 아프지만 진정한 사랑인 과거로 갈 것인가, 환상일지도 모르지만 아름답고 행복하기 만한 현재와 미래로 갈 것인가. 허공에 발이 1센티 정도 떠 있는 듯한 필립과 은영의 만남, 사랑의 드라마는 그래서 유쾌하면서도 아련한 여운을 남기는 것이다.

송이나와 현지숙, 자기기만이 불러오는 아픔
어느 날 사랑했던 이가 떠났을 때,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랑하는 이가 돌아올까. 송이나와 현지숙이 잡고 있는 과거 한 자락의 추억은 그래서 안타깝다. 그 둘은 똑같이 과거의 윤재하(죽은 실제 윤재하)의 영혼을 붙들고 놓지 않는다. 그러나 과연 그들은 모르고 있는가. 송이나는 다시 오스트리아에서 윤재하를 만났을 때부터 그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너 어딘가 달라 보여. 하지만 그게 더 좋아”라고 말하는 송이나 속에는 자신이 그리워했던 그가 아니지만, 그를 지금 눈앞의 윤재하와 묶어두려는 강력한 소망이 자리하고 있다. 송이나가 그럴진대 윤재하의 어머니인 현지숙은 오죽할까. 20년의 세월을 살면서 그녀의 환상은 과연 한번도 깨지지 않았을까. 그는 진짜로 지금의 윤재하를 죽은 자신의 아들로 생각하고 있을까.

송이나와 현지숙이 붙들고 있는 윤재하의 영혼은 그러나 박은영이 나타남으로 해서 조금씩 위기를 맞고 있다. 그들은 절망적으로 윤재하의 영혼에 매달리지만 그것은 사실 끝없는 자기기만일 뿐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윤재하의 존재론적 고민의 끝은 그들에게 끝없는 절망이 될 수도 있다. 윤재하가 윤재하를 포기하고 이수호가 되는 순간, 그들이 잡고 살아왔던 20여 년의 세월은 무화되고 마는 것이다. 온통 윤재하로 채워왔던 그 나날들 속에서 그가 빠져나간 후, 남게되는 커다란 공백을 그들은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매달림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아픔과 치유의 변주곡
피아노는 자신을 두드림으로 해서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우리 모두가 살아가면서 겪는 아픔은 그래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피아노곡으로 흐르는 ‘클레멘타인’이 아프면서도 승화와 치유로 변주되는 것처럼, <봄의 왈츠>는 인물들이 부딪치면서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소리들의 변주곡이다. 작고 가녀린 영혼들이 내는 작지만 반짝이는 그 소리들을 들어보자. 혹 우리들 삶 속에서 숨겨왔던 우리네 상처들을 거기서 만날지도 모르니까.

시청률이라는 이름의 파시즘

흔히들 “예술영화는 졸리다”는 자조적인 농담처럼, 잘 만들어진 드라마와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는 항상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최근 <봄의 왈츠>, <굿바이 솔로> 같은 뚜렷한 메시지를 갖고 ‘생각하게 만드는’ 웰 메이드 드라마의 낮은 시청률은, ‘TV는 바보상자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꺼내게 만드는 씁쓸함이 있다.

조기 종영되거나 연장 방영되는 드라마가 나오는, 시청률이 지고선이 된 작금의 현실은 한편으로 ‘한류의 종주국’이라는 호칭을 무색케 한다. ‘시청률이 몇%’라는 애매한 잣대로 작품을 난도질하는 대부분의 연예기사들도 시청률이라는 바벨탑을 쌓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한류라는 힘으로 전 세계 컨텐츠 비즈니스의 중심에 서겠다는 포부에 맞는 일일까.

물론 시청자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 문제는 시청률에 올인 하는 방송사와 그런 시류에 밀착하는 제작자들,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수많은 매체들이 문제다. 그저 재밌으면 됐지. 뭐가 그리 거창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지금 우리네 드라마가 문화계 전체에서 갖는 비중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얘기일 것이다. 드라마는 이제 그냥 드라마가 아닌, 우리네 문화의 견인차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지적인 시청률과 범아시아적 시청률
한류는 모든 상황들을 바꾸어 놓았는데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바로 드라마였다. 한류의 성공은 드라마 제작에 범아시아적인 투자자들을 끌어 모았다. 드라마 제작은 붐을 이루었다. 게다가 케이블을 비롯해 위성방송, DMB 등 다양한 채널들은 더 많은 컨텐츠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과거 방송사에서 하던 드라마 제작은 대부분 외주 프로덕션으로 넘어갔다. 그것이 경쟁력도 있고 비용측면에서도 유리했기 때문이다. 성공한 제작사들의 위상은 높아졌다. 드라마 제작이 활기를 띄면서, 웰 메이드 드라마에 대한 수요도 높아졌다. 쪽대본으로 상징되는 기존 드라마제작 관행은 사전제작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쪽대본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영화 제작인력들은 사전제작에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영화를 찍는 날보다 찍지 않는 날들이 많았다. 게다가 HDTV라는 환경변화에서 드라마 제작에 영화용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 역시 영화 제작인력들에게 유인이 되었다.

감독은 물론, 촬영감독, 의상, 조명 등등 영화계 현장인력들은 물론이고, 이제 드라마 제작 현장은 각계 각층의 문화계 인물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조악한 현실 여건 속에서 고군분투하던 만화가, 시나리오 작가, 소설가 등은 이런 분위기를 타고 드라마 제작이라는 뜨거운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다. 드라마 홍보 역시 영화 홍보 대행사들이 나설 만큼 전문화되었고, 선 마케팅은 드라마가 제작되기 이전에 제작비를 모두 끌어 모았다. 유통 채널은 이제 전 세계를 향해 뻗어있다. 이것이 지금의 우리네 드라마가 갖는 힘이다. 그런데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 ‘좀더 잘 만들어진’,  ‘우리네 것이 분명하면서도 보편적인 정서를 담는’, 그래서 ‘누가 봐도 재미있으면서 의미도 있는’, 그런 드라마가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숨어서 복사된 일본 드라마를 보던 우리가, 일본 본토에서 한류 열풍을 일으키는 힘을 가지게 한데는 윤석호 PD라는 국제적 안목을 갖춘 연출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최근 인터뷰를 통해서 “한류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최근 한국 드라마나 영화들이 자극적으로 흘러가는데 반해 정작 해외에서 인기를 얻는 작품들은 <대장금>과 <겨울연가>처럼 건강하고 부드러운 작품”이라고 했다. <봄의 왈츠>에 대해 범아시아적인 시청률(?)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말해주는 대목이다.

작가주의 드라마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평가들
<봄의 왈츠>와 <굿바이 솔로>의 시청률이 그다지 높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다. 소위 ‘작가주의’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평가가 그 첫 번째이다. 윤석호 PD나 노희경 작가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열어놓았다. 윤석호 PD의 작품들이 절제된 대사와 감성을 자극하는 뛰어난 영상으로 그 세계를 만들었다면, 노희경 작가는 직설적이면서도 역설적인 대사들, 인물에 대한 끝없는 탐구 혹은 애정, 러브스토리 같지만 한 꺼풀 들여다보면 그 속에 숨어있는 강한 사회적 메시지들로 굳건한 세계를 구축했다. 비평가들은 그들을 작가라고 호칭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작가주의라고 한다면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막상 새로운 드라마를 개봉하면 단 첫 회를 보고도 비평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역시 작가적 면모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전작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이것은 다시 말해, 한껏 작가로서 추앙해서 풍선을 부풀려놓은 다음, 한번에 바람을 빼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영화가 한번 시작되면 끝날 때까지 어쨌든 다 보아야 뭐라 얘기할 수 있는 반면, 드라마는 몇 달에 걸쳐 방영되기 때문에 이러한 초기의 평가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봄의 왈츠>의 경우 초기의 설정과 흐름이 과거 윤PD의 드라마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아직 방영되지 않은 나머지 회의 드라마들까지 그럴 것이라는 짐작들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봄의 왈츠>는 사실 전반부 설정보다는 중반 이후에 드러나는 극중 인물들의 깊은 상처, 그리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중요한 부분이다. 이것이 윤PD가 이 드라마를 통해 새롭게 선보이려 했던 ‘휴머니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아직 본 게임에 들어가지도 않은 것이다.

<굿바이 솔로>는 마치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노희경 매니아’라는 한 단어로 집약된다. ‘좋은 드라마지만 매니아들이나 보는’, 이라는 평가는 우리네 드라마계가 가진 보수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기계적인 설정과 판에 박은 대사, 선남선녀의 주인공들에 화려한 외관을 씌우는 과거의 방식만으로도 예상할 수 있는 20% 이상의 시청률을 확보할 수 있는 마당에, 주인공들이 무려 7명이나 되는 이런 형식 파괴적인 드라마는 도발이 아닐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과거를 답습하며 연장방영에 들어간 드라마들은 30%대의 시청률을 끌어 모으며 잘 나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여기에 시청률 놀음이 가진 함정이 있다. 윤PD가 말했듯 ‘자극적인 설정’은 눈앞의 시청률을 높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보편적인 정서를 말해주지는 않으며, 또한 ‘끊임없이 좀더 자극적인 설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앞으로 나가야할 드라마가 땅을 파고 들어가는 형국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한류라는 거대한 흐름으로 우리네 드라마계가 확고한 문화의 견인차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작가들의 ‘새로운 시도’로서 가능했던 것이지, ‘전통적인 드라마들의 답습’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청률에 연연하지는 않는다고 했으나
윤석호 PD나 노희경 작가의 작품들이 그다지 시청률이 대단했던 것은 아니다. 대체로 윤석호 PD의 작품은 초기에 10%대의 시청률에서 시작해서 끝에 가서 30%에 도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다지 높은 시청률이 아니었다. 일본에서는 마의 시청률이라는 3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달성했다지만 그것이 국내에서도 그랬던 것은 아니다. 또한 노희경 작가는 알다시피 시청률 안나오기로 유명한 작가이다. 가장 시청률이 높았던 것이 <꽃보다 아름다워>로 약 27% 정도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윤PD나 노희경 작가나 모두 “시청률에는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드라마를 방영하는 방송국과 드라마를 만드는 프로덕션이 이원화된 상황에서 시청률은 미묘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직ㆍ간접적인 압력을 받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잣대로 방송국은 시청률이란 카드를 내밀 것이다. 안 본다는 데야 어찌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시청률이란 것이 정말 그렇게 공정한 것이고, 의미가 있는 것인지 반문해보고 싶다.

드라마 시청률은 현재 10대와 4, 50대가 주축이라고 한다. 얼핏 생각해도 가벼운 만화 같은 드라마와 전통적인 문법의 드라마들이 현재 시청률 1, 2위를 다투고 있는 걸 보면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그 중간에 있는 20대 30대 시청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TV 이외의 다른 매체들이 많이 생겨서 그렇다고 하는 건 핑계일 뿐이다. 혹시 그들을 위한 드라마들은 ‘시도조차 되지’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청률이라는 이름의 파시즘
과거에 TV가 국민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는 바보상자의 역할을 했을지 모르지만, 이제 TV는 더 이상 바보상자가 아니다. 인터넷이라는 창을 통해 시청자들은 끊임없이 TV에 의견을 전한다. 이러한 다양한 의견들은 건강한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밑거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 의견들이 파시즘이 돼서는 안 된다. 자칫 이러한 파시즘은 제작자들의 마음 속에 ‘이건 되고 저건 안 되는 식의’ 자기검열의 족쇄를 채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의견들을 이용해 파시즘으로 활용하려는 어떠한 시도들이다. 시청률이 지고선이 됐다는 것은 마치 그것이 인터랙티브한 사회를 보여주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 지고선이 된 시청률에 동참하라는 심리적인 압박일 수도 있다.

시청률이라는 순위경쟁의 껍데기를 벗어내야 다채로운 드라마들의 스펙트럼이 TV를 장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방송국의 입장에서는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묶어두고 싶겠지만 어느 한 드라마의 독식보다는 골라먹는 재미가 있는 TV가 됐으면 좋겠다.


<브로크백 마운틴>이 말해주는 고단한 삶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러 가기 전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동성애 영화란다. 그것도 서부의 사나이들이 사랑하는 이야기란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면 알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오는 그런 영화란다. 한 번 본 사람은 두 번 세 번 보게되는 영화란다. 한편으로는 미국판 <왕의 남자>라면서 동성애 코드가 요즘 유행이냐고 묻는 이들도 있단다.
머릿속에 있는 서부의 사나이들이라면 존 웨인이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광활한 황야를 누비던 총잡이들뿐이었던 내게 카우보이들의 러브스토리가 그다지 끌리지 않았던 건 당연한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상념에 젖어있을 즈음 불이 꺼지고 영화는 시작되었다.

영화는 담담했다. 1963년 Cowboy State라고 불리는 와이오밍에서 만난 에니스와 잭이 20여 년 간 겪는 안타까운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였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브로크백 마운틴의 풍경과 파란 하늘이 가슴에 박혀왔지만 그저 그런 영화인 줄 알았다. 역시나 영화 흥행도 그다지 주목할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그 그저 그런 영화가 내내 가슴속에서 울림을 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혹시 영화를 잘못 본 건 아닐까. 다시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알게 됐다. 왜 내가 보지 못한 것들이 있었는지, 왜 그 울림은 내 속에서 계속되었던 것인지, 카우보이들의(그것도 남자들 간의) 사랑 따위 얘기가 왜 한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내게 깊은 감명을 준 것인지 알게 되었다.

마초 사회와 동성애 영화
우리가 머릿속에 갖고 있는 미국인 = 카우보이 = 서부의 사나이 = 마초맨의 이미지는 대부분 헐리우드가 각색한 것임에 틀림없다. 본래 서부 상황은 그렇게 낭만적인 것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날 것의 풍광이 의미하는 것은 그 속에 사람들이 극히 적으며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외롭게 고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자주 비춰주는 파란 하늘과 브로크백 마운틴의 절경, 초록의 녹원은, 그 속에 있는 인간을 너무나 왜소하게 만들어버린다. 카우보이니 로데오니 하는 것들은 서부극에서 각색한 것처럼 멋지다기보다는, 외로움과 권태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기껏해야 몇 초간’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위한 목숨을 건 절규로 보인다. 가부장적인 사회구조가 가진 마초적인 강박은 사실 저 고립무원의 자연과 그로 인해 갖게된 두려움과,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자초한 자기고립으로부터 생긴 자기방어본능일 뿐이다. 상처받은 짐승들은 사회가 제공하는 보수적인 안전에 집착한다. 그걸 위협하는 자들을 공격하는 것 또한 용인되는 그 극단적 마초 사회의 두려움은 끊임없이 그 구성원들의 자기검열을 요구한다. 에니스는 그 속에서 자신의 한 평생을 “견디며” 살아간다.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마초적 본성도 다르지 않다. 서부의 사나이들이 했던 강박적인 자기방어본능은 우리네 군인문화와 보수문화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가끔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군대에서의 동성애자 인권문제를 보면서 우리는 ‘민주화되지 않은 군대문화’를 비판하기보다는, 나와 다른 그들의 상황을 묵인하는 마초적 태도를 갖곤 한다. 남자들의 마지노선은 여전히 굳건하다. 조작된 이미지이지만 서부의 사나이들과 조상의 얼과 군인들은 사회가 제공하는 보수적인 안전망이라는 점에서 믿어진다. 진실과 믿음은 다른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믿음이지 진실이 아니다.

이 잘 만들어진 영화가 그다지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던 것은(물론 많은 매니아층이 형성되기는 했지만) 바로 이런 사회적인 두려움에 대한 암묵적인 거부가 한 몫 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이제야 왜 동성애 코드라는 꼬리표를 달면 영화가 성공하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나오는지 알 것도 같다.

이건 동성애 영화가 아니다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버리자 이 영화의 다른 면모들이 보였다. 그런데 그렇게 보면 볼수록 이 영화는 동성애 영화가 아니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카우보이들의 러브스토리’라는 카피 제목은 너무나 표피만을 본 결과로 나온 것이었다. 동성애자도 아니고 동성애에 대한 관대한 입장을 가져왔던 사람도 아닌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 ‘알 수 없는’ 슬픔에 잠기는 것은 왜일까.

이 영화는 에니스와 잭의 사랑이야기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그들의 사랑이 절실해 보이는 것은 그들의 현실이 너무나 외롭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영화는 그들이 사랑하는 장면보다, 그들이 현실의 무게 속에서 얼마나 고립되어 살아가고 있는가를 더 많이 보여준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참을 수 없는 추위와 알 수 없는 성욕으로 첫 관계를 맺는 장면은 이 영화의 슬픈 정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들의 사랑은 사실 매서운 현실들과 극단의 외로움에서 겨우 한 자락 잡을 수 있었던 기쁨이었던 것이다. 20년이 넘도록 간간이 만나 얻는 그 기쁨은 마치 낡고 헤진 젊은 날의 한 자락 추억을 안고 책임과 의무로 가득한 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과 고스란히 닮아있다. 그런 이유로 에니스가 “바꿀 수 없는 것은 견뎌야 한다”고 말할 때 우리가 공감하게 되는 것이며,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잃어버렸던 셔츠가 잭의 셔츠 속에 안겨있는 걸 에니스가 발견했을 때, 그 슬픔에 공감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동성애 영화가 아니다. 대신 현실 속에서 보수화 되어가고 있는 우리네 감성에 둔중한 충격을 주는 영화다. 앞도 뒤도 알 수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어느 한 중년이 젊은 시절의 한 때를 떠올리며 ‘잠깐’ 미소짓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얼마나 처연한 일인가.
그러니 많은 사람들은 ‘동성애 영화’라는 꼬리표를 단 이 영화를 보고 난감해 했을 것이다. 나는 왜 이 ‘동성애 영화’에 감동하는가 하고 말이다. 그 조장된 동성애 코드는 그 관객에게 다시금 ‘두려움의 코드’를 끄집어내게 만든다.

없는 자들을 위한 따뜻한 시선들
러브스토리를 걷어내면 이 영화는 그 위대한 휴머니즘을 얻게 된다. 영화는 사랑에 빠진 인물들을 묘사하는 것보다는 ‘일하는’ 인물들을 묘사한다. 에니스와 잭이 만나는 것도, 금지된 것 투성이인 그 ‘빌어먹을’ 일 때문이며, 그들이 각자의 가정을 꾸미는 것도 생계를 위한 것이다. 어찌 보면 미칠 것처럼 살아가는 그들이 짧은 낚시여행을 떠나는 것도 다 이 지긋지긋한 삶을 버티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비단 에니스와 잭의 현실만은 아니다. 에니스의 아내 엘마는 등장에서부터 거의 끝날 때까지 일을 하고 있다. 부엌에서 직장에서 그녀는 죽어라 일을 하지만 상황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다. 잭의 아내 로린은 적어도 가난을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이제 돈의 노예가 된 상황으로 그 삶 역시 행복하지 않다.

그런데 이 현실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매일매일 일 중독에 살아가면서 가끔 쉬는 휴식조차 일을 위한 충전 정도로 치부되는 사회. 게다가 없는 자들이라면 그 노동은 희망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현재를 ‘버티는’ 절망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우리들은 어떤 식으로든 울기 바로 일보 직전 상태로 살아간다. 물론 얼굴은 웃고 있지만.
이 영화의 슬픔은 내러티브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 안 감독을 위대한 거장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얼굴 표정 하나, 손짓 하나로도 그 심리상태를 섬세하게 보여줬다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무언가 거대한 불행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바로 우리네 얼굴들이다.

이 영화는 러브스토리가 아니다. 산에서 내려온 후 잭이 떠나고 에니스가 길을 걷다가 갑자기 골목을 달려가 구역질을 해대며 우는 장면은 잭이 준 상처 때문이 아니다. 사실은 또다시 현실 속에 홀로 남은 자신에 대한 연민인 것이다. 에니스와 잭의 관계를 알게 된 상황에서 아기를 안고 울음을 터트리는 엘마는 버티고 있던 일상 속에 이제 자신 혼자만 남았다는 인식 때문이다. 에니스의 딸이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 머뭇거린 것은 그가 딸의 결혼을 반대하는 것 때문이 아니고, 또 딸을 떠나보내야 하는 그 자신에 대한 외로움 때문이다. 상처를 준 것은 사회와 현실이지 상대방이 아니다. 상처 입은 짐승들은 그것이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의 상처를 핥으며 살아간다. 이것이 이 영화가 던져주는 우리네 존재의 비극이다.

피묻은 셔츠로 남은 희망
낡은 컨테이너 하우스에 들어온 딸이 “가구를 더 사야겠다”고 말하자 에니스는 마치 달관한 사람처럼 말한다. “가진 게 없으면 필요한 것도 없는 법이야”라고. 가난과 외로움은 고립무원에 홀로 서 있는 컨테이너처럼 쓸쓸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어떤 희망과 감동을 주는 것은 피묻은 셔츠를 바라보는 에니스의 시선 때문이다. 에니스가 결국 인생을 통해 버티면서 얻은 것이라고는 셔츠 두 개가 고작이다. 방금 딸이 놓고 가버린 셔츠와, 옷장 속에서 자신의 옷에 감싸진 잭의 셔츠. 셔츠 옆에는 브로크백 마운틴의 풍경이 담긴 엽서가 꽂혀있다. 그리고 에니스는 말한다. “맹세할게...” 무엇에 대한 맹세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아마도 자신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다. 삶은 고단한 일상의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맹세한다.

에니스의 비천한 삶을 숭고하게까지 만드는 이 영화의 맹세는 그 어떤 저항보다 더 강력하다. 심지어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 속에 떨며 강박적인 자기보호본능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조차 끌어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도 생애 한번쯤은 브로크백에 오른 적이 있다. 그리고 거기서 가져온 셔츠 한 벌은 여전히 당신 가슴속에 있다. <브로크백 마운틴>이 우리네 가슴속 옷장에 걸어둔 셔츠 두 벌은, 현실에 치여 살아가는 우리에게 먹먹한 희망으로 남을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