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콘텐츠 파워, 실감케 한 러시아 한류 그 현장에 가다

문화는 막힌 길도 에둘러 뚫고 나간다고 하던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필자가 느낀 건 전쟁으로 인해 막힌 한국과 러시아의 외교적 국면들 속에서도 한류는 오히려 더 뜨거워졌다는 것이다. 현재의 러시아 청년들이 보여주는 한류 열풍 그 현장을 다녀왔다. 

전 러시아 대학생 한국어 올림피아드에 참여한 대학생들

러시아인이 사도세자 뒤주 이야기를 하는 진풍경

“여기서 뒤주는 사도사제가 가둬져 죽은 뒤주를 떠올리게 합니다.” 방탄소년단의 멤버 슈가(Agust D)가 낸 ‘대취타’ 중 ‘과건 뒤주에 가두고’라는 가사를 설명하는 한 러시아 대학생이 그렇게 말한다. 한국어를 한국인처럼 말하는 러시아인들도 놀랍지만, 그들이 단지 언어만이 아니라 ‘사도세자’ 같은 한국역사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건 더더욱 놀랍다. 지난 4-5일 양일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한국국제교류재단 모스크바 사무소의 주최로 열린 ‘전 러시아 대학생 한국어 올림피아드’의 풍경이다. 이 행사의 백미는 둘쨋날 마지막 테스트로 치러진 ‘주제발표를 통한 말하기 시험’. 다뤄지는 주제들을 보면 한국의 명절 같은 전통문화는 물론이고, 현재 가부장제를 벗어나 변화하는 한국의 젠더의식, 퓨전화되고 있는 국악, 한복 등등 다양했다. 그런데 이러한 한국의 문화를 소재로 주제를 발표하는 대목에 빠지지 않는 건 한류 콘텐츠들이다. 사도세자 이야기가 나온 건 ‘대취타’의 가사를 설명하면서고, 한국의 젠더의식 변화를 이야기하며 조남주 작가의 소설로 영화화되기도 했던 ‘82년생 김지영’이 등장한다. 퓨전 국악으로서 이날치가 소개되고 한복을 이야기하며 아이브의 ‘해야’ 뮤직비디오가 소재가 된다. 이런 방식은 현재 러시아의 한류가 K콘텐츠의 차원을 넘어 K컬처로 넘어가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이 행사에 초청받아 모스크바를 방문한 필자에게는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현재 한러 관계는 그리 좋지 못하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한국은 러시아에서는 비우호국이 됐다. 하지만 이 행사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러시아 청년들의 한국문화에 대한 애정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실제로 콘텐츠진흥원이 2023년 12월에 내놓은 ‘러시아 특화보고서-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한류 영향’을 보면 2022년 말까지 러시아는 전년 대비 39% 증가한 790만 명의 한류 팬을 보유해 한류 팬 증가율 세계 1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또 한국어는 2023년 가장 인기 있는 언어 중 하나로 한국어 교재 및 자습서 판매량은 전년 대비 32%가 증가했다고 한다. 

 

행사가 끝나고 한 식당에서 참가한 대학생들과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러시아의 한국어 교수님들(러시아인들)과 함께 이어진 뒷풀이 자리 역시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식을 연구한 러시아인 셰프가 직접 음식을 만들고 운영하는 그 식당에서는 김치전에 잡채 그리고 막걸리가 나왔고, 학생들과 교수들은 익숙하게 한국어로 환담을 나누며 한식을 즐겼다. 그 풍경은 모스크바가 아닌 종로 어디라고 해도 될법한 한국적인 분위기 그대로였다. 

 

막혀 있어 더 뜨거워진 러시아 한류

러시아의 K팝에 대한 인기는 전쟁 이후 유럽 투어에 러시아가 포함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여전했다. 러시아 팬들이 한국을 방문하거나(K팝 투어가 등장했다) 혹은 인접국에서 열리는 콘서트를 찾아가는 일도 생겼다. K팝 커버댄스 콘테스트가 올해만 해도 3월, 6월, 7월에 열렸고, 지난 7월에는 한국콘텐츠진흥원과 러시아의 스트리밍 플랫폼인 MTS가 주최하고 러시아 한국문화원이 후원한 K팝 콘서트에 걸그룹 라잇썸과 송원섭이 무대에 올라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다. 송원섭은 빅토르 최 노래를 커버하며 러시아어권 국가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싱어송라이터다. 

 

K팝은 물론이고 드라마, 영화 같은 K콘텐츠의 인기를 견인하는 건 역시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서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해 러시아 내 스트리밍 서비스는 대부분 제한되고 있다. 넷플릭스도 유튜브도 보기가 어렵지만 러시아의 스트리밍업체들이 등장해 이를 대체하고 있다. 다른 루트가 막혀 있기 때문에 이들 스트리밍업체들을 통한 K콘텐츠 소비는 오히려 늘고 있는 추세다. MTS 같은 현지 스트리밍 플랫폼의 K팝 관련 조회수는 20% 가량 늘었다고 한다. 또한 드라마나 영화의 경우는 전쟁 이후 제한된 유럽과 미국 콘텐츠의 자리를 한국 콘텐츠가 채워나가는 형국이다. 공식적인 러시아의 OTT들을 통한 정식 수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지만, SNS를 통한 비공식적인 K콘텐츠의 확산도 적지 않다. 마치 과거 한국에서 있었던 미드 열풍 때 팬들이 자막을 붙여 올렸던 것처럼 지금 현재 러시아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공식채널을 통해 ‘기황후’, ‘구미호뎐’, ‘마우스’, ‘도깨비’ 같은 예전 작품들이 소개되고 있다면 비공식채널을 통해서는 한국에서 현재 방영되고 있는 최근작들(이를 테면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같은)도 거의 실시간으로 소개되고 있다. 

 

한국영화의 경우도 최근작들까지 극장에서 방영되고 있는데, 지금까지 최고 수익을 낸 작품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으로 약 4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러시아에서는 ‘영화제 영화’로 한국영화가 많이 알려져 왔지만 지난 2022년과 2023년 사이에는 러시아 영화관들이 한국영화를 많이 소개해 보다 대중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이 시기 ‘부산행’이나 ‘비상선언’, ‘범죄도시3’ 같은 작품들이 특히 큰 인기를 끌었다. 

 

어려울수록 문화 교류는 지속되어야

이러한 K콘텐츠의 인기가 한국어나 한식, 패션 등의 K컬처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2020년 모스크바에 문을 연 한국 길거리 음식 체인점 치코(CHICKO)다. 떡볶이, 라면, 김밥, 핫도그 같은 한국 분식을 제공하는 이 음식점은 세르게이 레베데프가 한국의 양념치킨 맛에 반해 창업을 한 곳으로 현재 모스크바 안에만 9개점, 러시아 전역에 40여개의 매장을 가진 대박 프랜차이즈다. 한식을 팔지만 그보다는 한국문화를 판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연일 줄이 이어진 매장에는 한국드라마와 K팝 관련 사진들과 벽면 가득 한국어들로 채워져있다. 그만큼 러시아 안에서 한국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 체인점은 한국 인플루언서들과 협업해 한국에서 유행하는 메뉴를 도입하기도 하고, 직원들의 한국방문을 통해 한국문화를 경험하게 한 후 메뉴에 스토리텔링을 더하는 식의 홍보 마케팅도 한다고 한다. 러시아 내에서의 한식에 대한 수요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데, 실제로 김이나 커피, 음료, 라면, 소스 등 한국 농식품의 러시아 수출액은 매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전 러시아 대학생 한국어 올림피아드 행사를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이도훈 주 러시아연방 대사는 “어려운 시국일수록 특히 학술, 문화 교류가 지속되어야 한다”고 강변했다. 또 필자에게 그 행사에 참여한 대학생들의 한국문화에 대한 열의가 결국은 “한러 관계의 상호 발전적인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전쟁으로 인해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사뭇 소원해졌지만, 이 현재의 상황이 바뀔 거라 낙관하는 건 바로 미래를 이끌 러시아 청년들의 모습을 통해서라는 이야기다. 

 

현재 러시아 관련 우리네 뉴스들은 대부분 전쟁의 양상에만 집중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어딘가 전운이 감도는 모스크바를 상상하지만 현장에서 경험한 건 완전히 다르다. 특히 한러 관계가 경색되어 있는 현 상황에서도 더더욱 열기를 띠고 있는 한류는 문화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오히려 실감케 한다. 한러 교류의 민간외교로서 한류가 그 밑거름을 마련하고 있는 한, 향후 상황이 바뀌었을 때 한러 관계의 변화는 한류를 타고 봇물처럼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글:시사저널, 사진:한국국제교류재단)

한석규의 고통 가득 인간적인 얼굴에 대책없이 빠져든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어두운 밤 구불구불한 도로 위를 차 한 대가 달려나간다. 부감으로 비춰지는 그 광경 속에서 이 차는 어떤 방향으로 갈 지를 전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헤드라이트의 불빛만이 거기 차가 있고 길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 차가 한 참을 지났을 때 저 편에 온통 불빛들이 모여 있는 광경이 펼쳐진다. 그건 딱 봐도 사건 현장이다. 어둠 속을 뚫고 그 차들이 모여 빛이 겹쳐져 있는 사건 현장을 향해 달려가는 차의 모습은 앞으로 이 드라마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펼쳐 나갈 것인가를 가늠하게 해준다.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진실을 향해 어둡지만 계속 나아가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MBC 금토드라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첫 회의 오프닝 시퀀스다. 그 차를 몰고 진실을 향해 가는 인물은 바로 베테랑 프로파일러 장태수(한석규)다. 현장을 슬쩍 훑어 보기만 해도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척척 알아보는 이 인물은 어딘가 이 일이 고통스러운 모습이다. 도움을 요청하는 오정환(윤경호) 강력1팀 팀장이 투덜대게 만들 정도로 퉁명스럽게 현장을 훑어본 후 곧바로 귀가한다. 그의 마음에는 아내가 죽고 하나 남은 유일한 가족인 딸 장하빈(채원빈)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이 담겨 있다. 딸이니 챙겨야 한다는 부성애가 존재하지만, 동시에 그는 딸을 의심한다. 

 

장태수가 딸을 의심하게 된 건 하빈이 어려서 겪은 비극적인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캠핑을 갔다가 남동생과 함께 산으로 들어간 어린 하빈이 동생의 시신과 함께 발견된 것이다. 벼랑에서 떨어져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남동생과 피투성이로 나타난 하빈. 장태수는 하빈이 하는 말들이 거짓말이라는 걸 프로파일러라는 직업적 감각으로 알아차린다. 그래서 왜 거짓말을 했냐고 닦달하지만 끝내 하빈은 자기가 죽이지 않았다고 말하고, 이 일로 장태수는 아내 윤지수(오연수)와 틀어지게 된다. 결국 이혼하고 윤지수는 자살하고 마는데, 그렇게 남겨진 장태수와 장하빈은 결코 원만한 부녀 관계가 어려워진다. 

 

그리고 마침 산 속의 어느 허름한 집에서 발견된 2리터에 가까운 피로 사체 없는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그 곳에 무슨 일인지 장하빈이 왔다 간 흔적들이 발견된다. 마지막 핸드폰이 켜졌던 위치가 바로 그 사건이 발생한 대화산 부근으로 찍혔고, 현장에서 발견된 빨간 섬유가 장하빈이 가방에 매달고 다니던 팬던트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다시 장태수는 딸을 의심하게 된다. 그 곳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마지막으로 만난 인물이 바로 딸이었다는 증언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이처럼 프로파일러인 장태수가 사건을 추적하면서 그 용의자가 자꾸만 딸 장하빈으로 좁혀지는 상황을 마주하면서 갖게 되는 복잡한 심리를 다루고 있다. 공적으로는 프로파일러로서 진실을 추적하는 것이 그의 일이지만, 그 화살이 자신의 가족을 향할 때 갖게 되는 고통이 그것이다. “범죄자 마음을 귀신 같이 읽으면서 애 마음을 그렇게 몰라?” 아내 윤지수가 아들의 죽음에 딸을 의심한 장태수를 나무란다. “무조건 믿어야지. 그게 그렇게 어려워?” 아내는 그렇게 말했지만 장태수는 도무지 모르겠다며 괴로워한다. 

 

아들의 죽음이 딸 때문이라고 의심하고, 그것 때문에 이혼한 아내가 자살하게 된 것까지 장태수는 모두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자책감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에게 또다시 딸을 의심하게 만드는 사건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다. 딸을 믿고 싶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이 너무나 잘 보이는 프로파일러라는 직업 앞에서 장태수는 괴로워한다. 

 

“팀장님은 피곤하시겠어요. 남들보다 많은 게 보이는 사람은 모른 척 할 게 그만큼 많아지는 거잖아요.” 신입으로 들어온 프로파일러 이어진(한예리)가 하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보다 객관적으로 사건을 들여다보고 진실을 보기 위해 의심하는 게 일이 되어버린 장태수는 범죄 현장에서는 베테랑이지만 가족까지 의심하게 되는 사건을 마주하면서 가족은 물론이고 자신마저 파탄지경의 고통 속으로 빠져든다. 

 

하지만 또 한 명의 신입으로 들어온 구대홍(노재원)은 장태수와도 또 그를 롤모델로 삼는 이어진과도 다른 따뜻한 성품의 프로파일러다. 사람보다 사건을 우선시하는 저들과 달리, 그는 피해자들의 마음을 들여다봐야 제대로 진실을 알 수 있다고 말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이 사건에 장태수와 그 딸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도 쉽게 그 일을 발설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사건 이면에 무언가 저들이 겪었을 아픔이나 고통을 들여다보려 한다. “가출한 아이들이요. 어떻게든 범죄에 노출될 수밖에 없어요. 열악한 환경에 피해자가 되거나 아니면 가해자로 생존하려는 거죠.” 가출팸을 그저 잠재적 범법자로 보는 시선과 달리 그는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들여다보려 한다. 

 

그래서 장태수는 그의 신입들인 이어진과 구대홍의 서로 다른 사건에 대한 접근방식을 통해 자신 또한 변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사건 현장의 증거들이나 정황을 통해 합리적으로 딸을 의심하지만, 딸이 어떤 일을 겪었고 그로 인해 어떤 심리적 고통이나 아픔을 갖고 있는가는 아직 잘 모르고 있다. 그건 장하빈이 아버지 장태수를 한 집안에서 함께 있는 것조차 힘겹게 만드는 이유가 아닐까. “하준이 말야 정말 사고였을까? 엄마는? 엄마가 정말 자살했다고 생각해?” 장하빈의 그 말은 장태수에게는 마치 그들의 죽음에 장하빈이 연루된 것처럼 들리지만, 그건 어쩌면 장하빈에게는 그들의 죽음이 아빠의 가족에 대한 소홀함이 만든 것이라는 토로일 수 있다. 

 

깜깜한 어둠 속에 헤드라이트 하나를 켜고 달려나가는 자동차처럼, 장태수는 막막한 어둠 속에 놓여 있다. 그건 도무지 진실을 알 수 없는 범죄현장 앞에 서 있는 모습이면서, 동시에 도무지 알 수 없는 딸의 마음을 마주하고 그 문앞에 서서 문을 열까 말까 고심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서도 끝내 진실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장태수의 모습은 그래서 인간적이고 숭고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일그러져 있지만 고통을 감내하면서 앞으로 걸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어두운 공간 속에 놓여진 장태수의 모습을 연출적으로 보여주는 건 그의 심리를 이만큼 정확하게 담아내는 미장센이 없어서다. 여기에 그 역할에 힘을 불어넣어주는 한석규의 내면 연기가 묻어난 얼굴과 표정이 대책없이 시청자들의 시선을 빨아들인다. 음영에 도드라진 고통스러운 얼굴이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다. 과연 이 인물은 가시덤불 가득한 그 어둠의 길들을 헤치고 끝내 진실을 향해 나아가 그걸 마주하게 될까. 그것이 어떤 고통과 두려움을 줄 거라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갈까.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가 가진 매력적인 힘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사진:MBC)

‘정년이’, 완벽 빙의된 김태리, 그 성장서사에 시청자도 빠져든다

정년이

우리 소리가 이토록 힙했던가. tvN 토일드라마 ‘정년이’는 먼저 채공선이 부르는 ‘남원산성’으로 눈과 귀를 매료시킨다. 눈 내리는 어둑한 밤, 유려한 한옥집의 풍광 위로 낭낭하게 울려 퍼지는 ‘남원산성’은 듣는 이들의 마음을 이상하게 애절하게 만든다. “소리를 하면은 속이 뻥 뚫리는 거 같아 갖고 좋던디요.” 소리꾼이 되고 싶다는 공선에게 명창 임진(강지은)이 화려함 때문이냐고 묻자 공선이 하는 그 말은 소리가 가진 진짜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한 마디로 꺼내놓는다. “이 가슴에 뭐가 탁 맥힌 것맨치 답답하고 외롭고 할 때마다 소리를 하다 봉께는 그리 되었구만이라.” 

 

때는 1931년 일제강점기다. 춥디 추운 겨울 눈 내리는 한데서 달달 떨며 문 열어주길 기다리는 공선네 부녀처럼 서민들의 삶이 고달플 수밖에 없던 시절이다. 가슴 한 가운데 꽉 막힌 무언가 하나쯤은 누구나 갖고 살 수밖에 없던 시절, 소리는 그 막힌 걸 뚫어주고 풀어주는 힘이 되는 어떤 것이었다. 그로부터 25년이 흐른 1956년 목포로 화면이 전환되면서 먼저 들려오는 건 “어기야 디야 어기야 어야 디야-” 하는 노동요를 부르며 뻘밭에서 조개를 채취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이다. 전쟁이 끝나고 피폐해진 삶에 그 때라고 가슴 한 가운데를 꽉 막아세우는 답답한 현실이 없었을까. 

 

시장 통에서 잡은 생선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가는 정년이네 가족은 번번히 자릿세를 내라며 행패를 부리는 무리들 때문에 힘겨워 한다. 그렇게 현실에 짓밟혀 꿈이라는 건 가져보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를 노동으로 살아가면서 정년이의 가슴에도 무겁디 무거운 돌덩이가 생겼던 모양이다. 엄마가 그토록 반대하는 소리를 자꾸만 하고 싶고, 그래서 시장통에서 ‘남원산성’을 부른 게 그의 삶에 변곡점을 만들어줬다. 그 소리를 듣고 단박에 천재성을 타고 났다는 걸 간파한 매란국극의 스타 문옥경(정은채)이 그에게 자신이 하는 국극 ‘자명고’의 티켓을 주며 보러 오라고 한 것이다. 그 국극을 보고 난 후 정년이는 드디어 꿈을 갖게 된다. 자신도 문옥경 같은 국극의 스타가 되겠다고. ‘정년이’는 바로 이 청춘이 꿈을 향해 성장해가는 과정을 담은 드라마다. 

 

워낙 인기 웹툰으로 잘 알려진 ‘정년이’는 드라마로 리메이크된다고 했을 때 그게 가능할까 싶은 몇 가지 난점들이 보였던 게 사실이다. 그 첫 번째는 웹툰의 생명력 넘치는 정년이라는 캐릭터를 과연 누가 싱크로율을 맞춰 연기해낼 수 있을까 하는 점이고, 두 번째는 국극이라는 소재의 특성상 소리를 해야 하는데 그것 역시 시청자들이 설득될 수 있을만큼의 수준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또한 원작이 가진 퀴어적 색깔을 좀더 보편적으로 만들어내는 게 가능할까 싶은 면도 난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제 막 방영을 시작한 ‘정년이’를 보니 이런 난점들이 기우에 불과했다는 걸 단박에 알게 된다. 그건 마치 저 첫 장면에 등장하는 명창 임진이 공선의 소리를 듣고 그 진심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 같은(혹은 문옥경이 정년의 재능을 단박에 알아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세심하게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한 대본과 연출 위에서 완벽하게 정년이라는 캐릭터에 빙의된 김태리의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얹어져 시청자들을 곧바로 설득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원작이 가진 퀴어적 요소들을 드라마는 직접적인 캐릭터를 통해 그려내기보다는 드라마 전체의 서사 안에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방식을 선택했다. 즉 문옥경과 윤정년의 관계는 마치 새내기를 이끌어주는 선배 같은 관계로 그려지지만 어딘지 그 이상의 애정이 묻어나고, 또 정년에게 애정을 주는 문옥경을 바라보는 서혜랑(김윤혜)의 시선에는 동료 이상의 질투 같은 게 느껴진다. 남성 주인공이 없다는 사실만 봐도, 이 작품이 가진 온전한 여성서사의 색깔을 이해하게 된다. 굳이 퀴어적 요소를 전면에 드러내지 않아도 여성들 간의 우정과 애정 혹은 애증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우리네 소리가 가진 멋과 아름다움을 유려한 연출과 극적인 대본 그리고 실감나는 연기를 통해 꺼내놨다는 점이다. 국악에 별 관심이 없던 이들도 아마 ‘정년이’를 보게 되면 판소리 심청가에 한 대목인 ‘추월만정’ 같은 곡을 다시금 찾아보게 만들지 않을까 싶다. 국극이나 국악이라고 하면 어딘가 고리타분하지 않을까 싶었던 분들조차 매료시키는 연출, 대본, 연기의 삼박자가 아닐 수 없다. 

 

또 매란국극에 들어가 수련을 받는 일련의 과정들은 마치 K팝 아이돌들이 거치는 연습생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오디션 과정을 거쳐 뽑히고, 그리고 나서 연구생이라는 이름으로 소리부터 춤, 연기를 배우고 무대에 서는(데뷔하는) 그 일련의 과정들이 담겨 있어서다. 천재적 재능을 가진 정년이가 그를 시기하는 동료들과 경쟁해가며 그려낼 쌍방 성장서사는 그래서 현재의 K팝 한류의 기원이 꽤 오래 전부터 태동해왔다는 걸 말해준다. 

 

하지만 무엇보다 상찬받아 마땅한 건 김태리라는 배우의 존재감이다. 웹툰에서 곧바로 튀어나온 것 같은 김태리의 연기는 정년이 그 자체처럼 보일 정도로 동작 하나 대사 하나가 살아 있는 느낌이다. 웹툰으로 보며 저랬을 것 같다는 그 모습을 김태리는 연기를 통해 공감하게 꺼내 보여주고 있다. ‘미스터 션샤인’과 ‘스물다섯 스물하나’, ‘악귀’를 거치며 청춘의 초상 같은 그만의 아우라를 계속 그려냈던 김태리는 이번에도 ‘정년이’를 통해 인생캐릭터를 또 한 번 경신할 모양이다. 정년이라는 인물이 그려낼 꿈을 향한 성장서사에 시청자들의 시선이 쏠리는 이유다.(사진:tvN)

“너가 너인게 왜 약점이야?” - 이언희 ‘대도시의 사랑법’

대도시의 사랑법

세상이 뭐라 하든 생각대로 밀고 나가고 행동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재희(김고은)와 성소수자라는 비밀을 숨긴 채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흥수(노상현). 이언희 감독의 ‘대도시의 사랑법’은 등장하는 남녀의 캐릭터만으로도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엮어져갈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만든다. 어느 날 우연히 흥수의 비밀을 재희가 알게 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된다. 흥수가 “약점이라도 잡은 것 같냐?”고 자기보호 본능에 가까운 화를 내자, 재희는 흥수에게 말한다. “너가 너인게 왜 약점이야?”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 청춘들은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방법을 찾아낸다. 그건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인 척 하는 것. 이로써 흥수는 성소수자가 아니냐는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고, 재희 역시 이 남자 저 남자 밝히고 다닌다는 소문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들은 동거하지만, 각자의 취향대로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아파한다. 남녀 간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일종의 동지애 같은 게 적어도 두 사람 사이에서는 피어난다. 세상의 편견을 벗어난 두 사람만의 자유지대랄까. 물론 그들 역시 사회 초년생이 되면서 취업과 결혼 같은 세상이 요구하는 틀 속으로 들어가며 평범해지지만 그 때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말한다. 진짜 네가 되어 살라고.

 

부커상과 국제 더블린 문학상 후보에 오른 박상영 작가의 동명 소설집에 실린 ‘재희’를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보다시피 퀴어 영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게 된 건, 세상이 요구하는 무수한 ‘다움’이 주는 상처가 성소수자들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에 치여 나다움을 잊고 살게 된 이들에게 잠시나마 나답던 청춘의 한 때를 떠올리게 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는 작품이다.(글:동아일보, 사진: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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