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name is 가브리엘’로 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간 박보검

My name is 가브리엘

누구나 낯선 세계에 첫 발을 딛던 순간들을 기억할 게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어 느껴지는 두 가지 감정.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던 순간들을 말이다. 특히 처음 보는 타인들과 마주할 때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어 긴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 긴장의 경계를 넘어서 대화를 통해 조금씩 그 사람을 알아가게 될 때, 그 두려움은 설렘으로 바뀌기도 한다. 아마도 JTBC ‘My name is 가브리엘’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박보검이 마음이 그렇지 않았을까. 

 

‘My name is 가브리엘’은 한 마디로 타인의 삶을 대신 살아보는 콘셉트의 예능 프로그램이다. 박보검이 살아볼 타인의 삶은 아일랜드 더블린에 사는 루리라는 인물의 삶이다. 나라도 도시도 낯선 그 곳에 뚝 떨어진 박보검은 루리가 사는 집을 주소 하나 달랑 들고 찾아가고, 루리의 방에 있는 물건들이나 해야할 일을 적어놓은 체크리스트 같은 걸 통해 그가 누구인가를 유추한다. 그리고 체크리스트에 있던 약속된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해 루리가 더블린에서 꽤 큰 규모의 합창단 단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또한 그가 이끄는 합창단으로 며칠 후 길거리에서 벌이는 합창 버스킹을 해야 한다는 것 또한 알게 된다. 합창단 지휘라는 걸, 말도 낯선 더블린이라는 곳에서 해야 하는 상황, 만일 그런 일을 내가 해야만 한다면 나는 어땠을까. 머리가 하얘지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 불가능해보이는 미션 앞에 선 박보검을 안심시키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루리의 친구들이다. 20대에서 40대까지 있는 그 친구들은 하나 같이 프로그램 콘셉트에 맞춰 박보검을 오랜 친구인 루리처럼 대한다. 친구들 이름조차 몰라, “기억을 잃었다”는 핑계를 유머로 꺼내놓으며 애써 이름을 묻고 기억하려하는 박보검에게 친절하게 자기소개를 하나씩 하고 또 루리가 그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친구였는가를 알려준다. 낯선 상황의 당혹감에 머리를 쥐어뜯던 박보검은 차츰 편안해지며 그 상황에 적응해간다. 

 

하지만 이들 친구들과 함께 수십 명의 합창단원을 만나러가고 거기서 바로 이뤄진 연습 과정은 박보검으로서는 또다른 멘붕의 연속이다. 하지만 자신이 과거 군 시절에서 군악대를 하며 익혔던 경험들을 꺼내와 단원들의 합창에 대해 나름의 코멘트와 아이디어를 주고, 거기에 단원들이 “너무나 좋은 코멘트”라는 리액션을 해주면서 그 긴장은 풀려나간다. 그리고 박보검이 솔로파트를 부르고 단원들이 백코러스로 화음을 넣어주는 ‘Falling Slowly’를 부르다 결국 울컥해 눈물을 보인다. 박보검은 그 감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잘하고 있고 잘 해낼 수 있다고 저를 다독이는 것만 같았어요.”

 

‘My name is 가브리엘’에서 박보검이 보여준 이 감동적인 장면들은, 먼저 이 배우가 가진 특별한 몇 가지를 끄집어낸다. 그 첫 번째는 낯선 상황에서 낯선 이들과 만남에도 불구하고 늘 열린 자세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프로그램 콘셉트가 그래서 그런 점도 있었겠지만, 사실 보통 사람이라면 도망치고 싶었을 그 상황에서도 그는 루리의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여줬다. 또 합창단을 지휘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처음에는 망설이고 어려워했지만 금세 마음을 다잡고 해내야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면서 설혹 틀린다 하더라도 자신이 아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건 어쩌면 박보검이라는 배우가 지금껏 다양한 역할들 속으로 들어가며 가졌던 자세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2011년부터 영화, 드라마에 다양한 조역, 단역을 거친 박보검이 드디어 대중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건 2015년 방영됐던 ‘응답하라 1988’로 바둑기사 최택 역할을 연기하면서다. 어남류(어차피 남편은 류준열)다, 어남택(어차피 남편은 택이)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화제가 됐던 박보검은 그 후 ‘구르미 그린 달빛’, ‘남자친구’를 거쳐 ‘청춘기록’으로 확실한 ‘청춘의 초상’으로 떠올랐다. 웃는 얼굴에도 우수가 가득한 눈빛을 가진 이 배우는 밝은 청춘들에 깃든 현실적인 어려움을 표상하는 듯한 연기로 호평받았다. 또한 영화 ‘서복’과 ‘원더랜드’를 통해서는 심지어 로봇이나 AI 역할에서도 특유의 감수성이 빛나는 눈빛으로 한층 깊어진 연기의 세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데 박보검을 여러 작품에서 볼 때마다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건 바로 ‘감수성’이다. 이 인물은 아주 작고 소박한 일에도 금방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감수성의 폭발을 보여준다. 최근 상영된 ‘원더랜드’에서 오랜 시간을 깨어나지 못했다 깨어난 태주의 혼란스런 정체성을 박보검은 특유의 감수성으로 가능했을 희비극이 교차하는 눈빛을 통해 연기해내기도 했다. 물론 다른 역할에 몰입해야 하는 배우들이라면 감수성은 누구에게나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박보검이 보여주는 감수성은 특유의 세상에 대한 열린 자세와 적극성까지 더해져 더 깊이있게 인물의 감정을 전달하는 힘이 있다. 

 

‘My name is 가브리엘’에서 박보검이 루리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보여준 힘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루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친구와 동료들을 통해 보다 깊이 이해하려 했고, 어느 순간 루리가 합창단을 이끌며 느꼈을 그 감정들을 자신도 공유하게 됐던 거였다. 박보검의 이 사례는 우리가 낯선 상황에 들어갔을 때 그 두려움을 설렘으로 바꿔줄 수 있는 하나의 단서를 제시한다. 그건 타인은 어떻게 느낄 것인가를 미루어 알아차리는 특유의 감수성이 전제되어야 하고, 동시에 타인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되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My name is 가브리엘’에서 박보검이 애쓰는 모습에 합창단 단원들이 하나같이 보여주는 ‘환대’하는 모습은 그것이 열린 마음으로 다가오는 사람에 대한 인지상정이라는 걸 드러낸다. 그러니 낯선 상황을 만났을 때, 미리 두려워하고 그 상황을 모면하려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타인도 느끼고 있을 똑같은 낯섦을 공감하고 자신의 마음을 열어보일 때 그 두려움은 설렘으로 바뀔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글:국방일보, 사진:JTBC)

‘눈물의 여왕’, 울지 않는 마녀 이미숙과 우는 남자들 김수현, 홍수철

눈물의 여왕

홍만대(김갑수) 회장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휠체어를 몰아 계단 끝에서 자신을 죽음을 향해 내던지기 전, 그는 마지막으로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자신이 죽어야 모슬희(이미숙)라는 마녀의 손아귀에 들어간 퀸즈 그룹의 모든 것들을 다시 가족들에게 되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왜 미소를 지으며 끝을 맺었을까. 복수의 의미도 담겨 있을 테지만, 가족들에게 보내는 따스한 마음의 의미도 있지 않았을까. 극단적인 선택을 결행하기 전, 그가 홍해인이 두고 간 녹음기에 남겨뒀을 메시지가 궁금해진다. 거기에는 아마도 그 미소의 의미를 이해하게 해줄 그의 마음이 담겨 있을 테니. 

 

tvN 토일드라마 ‘눈물의 여왕’은 제목에서도 느껴지지만 한 편의 ‘동화’ 같은 로맨틱 코미디다. 퀸즈가라는 왕궁에서 살아오던 공주 홍해인(김지원)은 온갖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시한부 판정을 받았고, 사랑했지만 그걸 표현하지는 못했던 남편 백현우(김수현)와 이혼한 데다, 모든 걸 모슬희라는 마녀에게 빼앗겼다. 하지만 그 위기는 홍해인에게 그간 잊고 있던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퀸즈가에서 쫓겨난 백현우는 그걸 알게 해주는 흑기사 같은 인물이다. 그는 이혼했지만 홍해인 옆에 끝까지 남아 그의 행복을 위해 노력한다. 저 마녀가 장악한 퀸즈가를 되돌려 놓으려 한다. 그런데 이 흑기사 캐릭터는 우리가 동화에서 봐왔던 그 모습과는 사뭇 다른 면이 있다. 툭하면 눈물을 흘리는 흑기사다.

 

처가살이를 토로하며 술에 취해 흘리던 눈물은 어딘가 찌질해 보였지만 그의 눈물은 깊은 공감의 발현이라는 게 갈수록 드러난다. 홍해인을 너무나 사랑하고 그래서 그 도도하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얼굴 이면에 담긴 아픔이나 상처를 공감한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린다. 로맨틱 코미디에서 이토록 우는 남자가 주인공인 경우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그런데 그 눈물은 약해서 흘리는 게 아니다. 오히려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는 능력의 눈물이다. 그와 정반대 위치에 서 있는 모슬희나 그의 아들 윤은성(박성훈)이 눈물 한 방울을 보여주지 않는 모습과 대비해 보면 그 가치가 무엇인가가 드러난다. 자신이 원하는 걸 갖기 위해 아들마저 보육원에 보내버리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모슬희는 괴물처럼 그려진다. 비뚤어진 모성을 가진 이 괴물은 아들을 학대한 양부모를 죽인 건 자신이라며 그것이 아들을 위한 자신의 마음이라 말하는 자다. 어찌 보면 윤은성에 대한 연민의 감정마저 들게 만드는 괴물 모성의 모습이 아닌가. 

 

‘눈물의 여왕’에는 또 한 명의 우는 남자가 있다. 그는 홍수철(곽동연)이다. 모슬희와 함께 사기를 치고 도망쳐버렸지만 그는 아내 천다혜(이주빈)와 아들 건우를 그리워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바보처럼 윤은성의 사기에 넘어갔고 능력자인 누나 홍해인에 대한 열등감에 눈이 멀어 그런 사건을 만들었지만 이 남자가 사랑하는 방식은 순정 그 자체다. 돌아와 용서를비는 천다혜 잘못을 저질렀지만 홍수철에 의해 구원받는다. 가짜 얼굴로 연기하던 그의 눈에는 눈물이 피어난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같은 문구가 여전히 화장실에 붙어 있을 정도로 남자의 눈물은 여전히 흘리지 말아야 할 어떤 것으로 치부되는 세상이지만, ‘눈물의 여왕’은 정반대로 그 눈물이 가진 가치를 꺼내놓는다. 그래서 처음에는 ‘눈물의 여왕’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눈물 흘리는 홍해인을 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차츰 그 의미가 새로워진다. ‘눈물 흘리는 남자 백현우의 여왕 홍해인’이라는 뜻으로. 그러고 보면 모든 걸 되돌리기 위해 마지막 최후를 맞이하며 보였던 홍만대의 희미한 미소는 또 다른 눈물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 이어령 선생님은 ‘눈물 한 방울’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우리는 피 흘린 혁명도 경험해봤고, 땀 흘려 경제도 부흥해봤다. 딱 하나,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눈물, 즉 박애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는 타인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 인간의 따스한 체온이 담긴 눈물. 인류는 이미 피의 논리, 땀의 논리를 가지고는 생존할 수 없는 시대를 맞이했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눈물이란 없다. 그것만큼 가치 있는 것도 없다는 것을 이 드라마 속 새로운 남자들인 백현우나 홍수철 같은 인물들이 보여주고 있다.(사진:tvN)

tvN 토일드라마 ‘작은 아씨들’, 여성 서사의 정점 보여줄까

작은 아씨들

드라마 <마더>와 영화 <헤어질 결심>의 정서경 작가. <왕이 된 남자>, <빈센조>의 김희원 감독. 그리고 김고은, 남지현, 박지후 세 여성 배우들이 중심 롤을 맡은 작품. tvN 토일드라마 <작은 아씨들>은 대본, 연출, 연기 모두에서 여성 서사에 대한 기대감을 높인다. 

 

정서경 작가, 김희원 감독의 만남만으로도

tvN 토일드라마 <작은 아씨들>은 그 제작진의 면면만 봐도 어떤 기대감을 갖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최근 박찬욱 감독에게 칸 영화제 감독상을 안겨준 작품 <헤어질 결심>을 쓴 정서경 작가에, <빈센조>로 대중적이면서도 완성도 높은 연출을 보여줬던 김희원 감독의 만남이 그것이다. <친절한 금자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아가씨>로 박찬욱 감독과 꾸준히 작업해온 정서경 작가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더 알려져 있지만, 드라마업계에서도 그가 쓴 <마더>는 일본 원작의 아우라를 지울 만큼 탁월했던 작품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니 <작은 아씨들>이라는 다소 여성 서사의 고전을 제목으로 가져와 새롭게 우리 식으로 해석한 드라마를 선보인다는 사실만으로도 시청자들의 기대감은 커진다. 이미 <아가씨>나 <헤어질 결심> 같은 작품을 통해서도 보여진 것처럼 그가 가진 남다른 여성 서사에 대한 매력이 이 작품에서는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가 자못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여성 감독으로서 최근 몇 년 간 주목받고 있는 김희원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는 사실이 더해지자 기대감은 더 커졌다. <돈꽃> 같은 어찌 보면 막장드라마가 될 수 있었던 작품을 유려한 연출로 그 색깔을 바꿔 놓았던 김희원 감독은 그 후 <왕이 된 남자>를 통해 여성 감독 사극의 시대를 열었다. 섬세한 연출이 돋보이는 여성 감독들이 연출한 사극의 흐름은 <옷소매 붉은 끝동>의 정지인 감독, <붉은 단심>의 유영은 감독으로 이어졌다. 또 김희원 감독은 <빈센조>를 통해 액션 느와르에도 탁월한 연출 능력을 증명했다. 이번 <작은 아씨들>에서도 자매들이 겪게 되는 일련의 충격적인 사건들이 그려지는데, 이 부분에 담겨지는 액션 느와르적인 색깔은 다분히 김희원 감독의 이러한 폭넓은 연출의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성 작가가 쓰고 여성 감독이 연출한 작품에 타이틀 롤을 맡은 세 자매 역할의 김고은, 남지현, 박지후 여성 배우들이 포진했으니, 이 작품에 ‘본격 여성서사’를 기대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 같다. 실제로 <작은 아씨들>은 첫 2회 분량에 오인주(김고은), 오인경(남지현), 오인혜(박지후) 세 자매가 대결하게 되는 부조리한 세상에 박재상(엄기준) 같은 절대 빌런을 세워 두었다. 이러한 대결구도는 자연스럽게 이 세 자매의 자매애를 통한 여성들의 연대를 드러내면서 저 박재상으로 대변되는 비뚤어진 남성 중심의 권력화되고 부패한 시스템과의 파열음을 예고한다. 정서경 작가가 그리고 있는 <작은 아씨들>의 큰 그림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작은 아씨들> 무슨 이야기일까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의 모티브는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자전적 소설 <작은 아씨들>에서 따왔다. 물론 20세기 들어 중요한 여성 문학으로 재조명되었지만 1800년대에 쓰인 이 작품은 한동안 가부장적인 문학의 전통 속에서 무시되어 왔던 게 사실이다. 여성들의 성장소설에 담겨진 새로운 여성상이나 그들 간의 연대는 지금껏 세대를 뛰어넘는 독자들을 확보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2022년 한국드라마로 재해석된 <작은 아씨들>은 여기에 현재적 의미와 한국적 현실이 담겨졌다. 

 

오키드 건설에서 경리로 일하는 오인주는 회사에서 같은 왕따 취급을 받는 언니 화영(추자현)이 자신에게 20억 현금을 남기고 집에서 자살한 채 발견되자 큰 충격에 빠진다. 그런데 오인주는 화영이 15년간이나 신현민 이사(오정세)와 함께 회사의 불법 비자금을 운용해왔고, 죽기 직전 700억의 불법 비자금을 빼돌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화영 이전에 비자금을 운용하는 일을 했던 여직원이 화영처럼 똑같이 죽었다는 걸 알게 된 오인주는 신현민 이사가 화영을 죽였다고 의심하지만 그 역시 의문의 자동차 사고를 당하면서 비자금을 둘러싼 배후가 존재한다는 게 드러난다. 한편 오인주의 동생으로 사회부 기자인 오인경(남지현)은 정치인을 꿈꾸며 청년들을 위한 재단까지 만든 박재상(엄기준)이 과거 보배저축은행 사건의 배후라 의심하며 과거사를 파고 들지만 그 과정에서 역시 의문의 자동차 사고로 제보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겪는다. 화영과 신현민 이사 그리고 제보자까지 이들의 죽음 옆에는 모두 동일한 꽃이 놓여있다. 그들의 죽음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암시다. 여기에 오인경은 막내 동생으로 예고에 다니는 오인혜(박지후)가 박재상의 딸 효린(전채은)의 그림을 대신 그려줘 상을 받게 해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즉 <작은 아씨들>의 서사는 세 자매가 모두 저마다 박재상이라는 인물과 대결구도를 그려내고 있다. 오인주는 화영과 신현민 이사의 죽음 앞에서 비자금을 둘러싼 거대한 비리를 마주하게 될 것이고, 오인경은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박재상의 실체를 기자로서 파헤쳐나갈 것이다. 그리고 오인혜 역시 돈을 받고 효린의 그림을 대신 그려줬다는 사실이 언니들이 마주한 사건들과 연결되면서 저들과 대결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즉 과거사로부터 이어진 부조리한 권력 시스템과 그 시스템을 유지시켜주는 검은 자본의 흐름에 휘말리게 된 세 자매가 이를 헤쳐 나가며 진실을 파헤치고 정의를 그려내며 성장해가는 이야기가 <작은 아씨들>이 될 거라는 점이다. 

 

정서경 작가가 자본화된 세상과 맞서는 방식

영화 시나리오를 주로 써왔던 작가라서 그런지 정서경 작가가 쓴 <작은 아씨들>의 전개 속도는 거침이 없다. 그 흔한 드라마 공식을 따르는 질질 끄는 느낌이 없다. 1회 만에 화영의 죽음이 주는 충격으로 열린 세계에 2회 만에 신현민 이사의 죽음이 만든 반전이 더해지며 향후 벌어질 대결구도를 더 팽팽하게 만들었다. 

 

흥미로운 건 이러한 자본화된 세상과 대결하는 정서경 작가의 방식이다. 그건 오인경이나 오인주라는 인물을 통해 담아내는 남다른 ‘감수성’이다. 이들은 자본화된 세상이 굴러가는 그 익숙한 방식들을 그저 익숙하게 바라보지 못하는 남다른 감수성을 가진 인물들로 그려진다. 즉 오인주는 죽은 화영이 말하듯, “경리는 (의사가 환자 몸을 보는 것처럼) 돈을 숫자로만 봐야 된다”는 그 말을 실천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에게 돈은 숫자가 아니라 현실이다. 그래서 20억이 갑자기 생긴 일에 결코 초연해하지 못한다. 그가 그저 20억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사건의 진실이나 내막을 궁금해 하는 이유다. 오인경은 기자로서 무감하게 사건을 리포트해야 하지만 결코 아픈 비극을 겪은 이들을 리포트하며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그래서 술을 조금씩 마시게 되고 알코올 중독 판정까지 받지만, 그건 거꾸로 이야기하면 그런 알코올 중독이 되어야 비로소 감정을 숨길만큼 독하디 독한 부조리한 세상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모두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무감하게 자본화된 세상을 살아가지만 오인경과 오인주 같은 남다른 감수성으로 그걸 바라보는 이들은 그걸 결코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바로 이 지점이 정서경 작가가 세상과 대결하는 방식이다. <작은 아씨들>이 가진 여성 서사가 보다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도 바로 이 지점에서 생겨난다. 부조리가 일상화된 세상에서 그걸 달리 볼 수 있는 눈이란 그 세상이 배제한 이들의 시선일 수 있어서다. 자매들은 그래서 더 확장되어 세상이 배제한 사회적 약자들의 연대로까지 나아가는 여성서사를 그려나갈 작정이다.(글:매일신문, 사진:tvN)

‘유미의 세포들’, 김고은과 안보현에 더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

유미의 세포들

‘윰며들다’라는 표현이 생길만큼 tvN 금토드라마 <유미의 세포들>이 유발하는 ‘과몰입’은 기분 좋게 시청자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어딘가 <인사이드 아웃>의 아이디어가 떠오르지만, <유미의 세포들>은 더 다양하게 캐릭터화된 세포들이 등장하고, 남녀 관계에서 벌어지는 감정들에 따라 세포마을에서 벌어지는 판타지급 사건들이 <인사이드 아웃>보다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 전개된다. 그래서 일단 이 ‘세포들’과 공존하는 유미(김고은)의 세계에 발을 디디면 마치 그 세계의 세포 일부분이 된 것처럼 그 감정을 공유하며 ‘시간순삭’을 경험하게 된다. 

 

<유미의 세포들>에서 평범한 재무부 대리인 유미에게 벌어지는 일들은 사실 여타의 멜로드라마들과 비교해보면 그다지 드라마틱하지는 않다. 어려서부터 이어진 인연의 운명적인 재회도 아니고, 그렇다고 관계의 틀 속에서 벌어지는 밀고 당기는 로맨틱 코미디의 사건들도 그리 많지 않다. 이것은 첫 회만 봐도 단박에 드러난다. 첫 회 이야기는 유미의 어느 평범해 보이는 하루를 담는다. 

 

3년 전 연애를 끝내고 그 후유증으로 사랑의 감정을 억누른 채 지내온 유미. 영업부 채우기(최민호)에게 관심이 가던 차에 그가 유미가 살고 있는 일산 갈 약속이 있어 같이 데려다 주겠다고 한다. 유미는 데이트를 기대하지만 역시 그에게 관심이 있는 루비(이유비)가 끼어들어 기대는 깨지고, 다음 날 초연해 보이려 했지만 루비가 채우기와 꽃 축제에 가기로 했다는 말에 흔들린다. 그런데 우기가 유미에게도 같이 가자고 제안하고 데이트가 무산된 루비가 남과장(정순원)까지 초대해 일을 키우면서 일정을 조율하다 꽃 축제 약속은 엉뚱하게도 유미와 채우기 둘의 데이트가 되어버린다. 

 

어찌 보면 유미의 이 첫 회 이야기는 직장인의 평범한 하루에 불과하지만, 시청자들은 이 평범한 하루를 눈을 뗄 수 없는 드라마틱한 반전의 반전의 이야기로 보게 된다. 그것은 전적으로 <유미의 세포들>이라는 드라마에만 존재하는 귀여움 한도초과 세포들의 세계가 있어서다. 빨리 일을 끝내고 채우기와 데이트를 하기를 기대하는 유미의 모습은, 맷돌을 열심히 굴리는 세포들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모든 감정과 생각을 무화시키는 직장인들의 출출함은 거대한 출출세포가 세포마을을 휘젓는 광경으로 묘사된다. 

 

3년 전 연애를 끝낸 유미의 상심은 사실상 이 세포마을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세포’가 겪는 좌절로 극화된다. 헤어진 이후의 슬픔은 세포마을을 홍수로 휩쓸어버린 비로 표현되고, 채우기에 의해 설레는 감정을 갖게 된 유미는 산소호흡기에 유지한 채 깨어나지 못했던 사랑세포가 3년 만에 눈을 뜨는 장면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중간에 루비가 끼어들고 그래서 다음 날 만난 루비 앞에서 표정을 관리하는 유미의 모습 역시 세포마을에서 표정관리 레버를 힘겹게 붙들고 있는 세포들로 그려진다. 이처럼 <유미의 세포들>은 로맨틱 코미디에서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으로 드러내던 감정과 생각들을 구체적인 캐릭터로 그려진 세포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풀어냄으로써 시청자들을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역시 멜로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일 게다. <유미의 세포들>에서도 채우기가 성 소수자라는 걸 밝히고 소개해준 구웅(안보현)과 유미가 다소 이상했던 첫 만남부터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고 나아가 첫 키스까지 하는 그 과정 역시, 유미의 세포마을에 어느 날 찾아온 개구리(사실은 구웅의 세포마을 사랑세포)가 마을을 복원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그 감동이 컸고, 첫 스킨십에 대한 욕망 역시 응큼이 세포와 응큼이 사우르스 세포라는 귀여운 캐릭터들로 그려져 빵빵 터지는 웃음을 만들었다. 

 

<유미의 세포들>은 멜로 단계에서 벌어지는 감정과 생각들을 세포마을에서 벌어지는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퓨전화된 작품의 훌륭한 성공사례가 아닐 수 없다. 감정과 생각이 구체화됨으로써 멜로는 더 생생해진다. 특히 주목되는 건 영상 위에 덧대진 애니메이션이나 자막 같은 구성물들이 실사 멜로의 몰입을 방해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몰입을 가능하게 하는 연출요소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마치 웹툰의 연출적 표현요소들이 이제는 드라마에서도 충분히 먹힐 수 있다는 걸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유미의 세포들>의 멜로가 효과적이라는 건, 유미와 구웅의 연기를 하는 김고은과 안보현이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마치 세포들이 이들의 연기를 든든히 지지해줘 200% 이 캐릭터들의 감정과 생각을 전해주고 있어서다. 시청자들은 유미의 표정 하나 손짓 하나가 그저 지나치지 않는 그의 감정과 생각을 담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건 또한 우리가 일상을 다시금 보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다. 누군가 한 마디를 했을 때 그 안에 어떤 세포들이 움직였을까를, 이 드라마를 본 이들이라면 한번쯤 떠올려 봤을 게다. 내 안을 다시 들여다보는 것뿐만 아니라, 나와 관계하는 타인들의 마음까지 ‘세포들 차원’에서 들여다보게 해주는 것. <유미의 세포들>은 그래서 유쾌하고 발랄한 로맨틱 코미디지만, 그것이 유발하는 ‘타자에 대한 감수성’은 그 이상의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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