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스런 멜로와 대결구도가 ‘베토벤 바이러스’를 망친다

‘베토벤 바이러스’가 주목받게 된 것은 강마에(김명민)의 출연과 함께였다. 그가 수면제를 먹고 쓰러진 애완견 베토벤을 향해 “토벤아!”하고 외치는 순간, 드라마의 호감도는 급상승했고, 그가 늦깎이 아줌마 챌리스트 정희연(송옥숙)을 향해 거침없이 “똥.덩.어.리.”라고 얘기하는 그 순간 우리는 그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베토벤 바이러스’는 사실상 강마에, 아니 김명민 바이러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긴장감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확히 강마에와 두루미(이지아)와의 멜로 라인이 구축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사실 이 삼각관계, 즉 강마에-두루미-강건우(장근석)의 멜로 구도는 애초부터 그 무리함을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많았다. 두루미에게 어떤 식으로든(그것이 겉으로는 독설이라도) 애정표현을 하기 시작하는 강마에는 그 캐릭터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버럭 대며 사랑하는 캐릭터는 이제 좀 식상해진 경향이 있다.

게다가 멜로는 그저 애정관계만을 드라마에 짐 지우지 않는다. 거기에는 대결구도가 예고되어 있다. 강마에와 강건우가 두루미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애정대결은 드라마 속 사건의 대결로 연결된다. 강마에와 강건우는 곡 해석을 가지고 부딪치지만 그 기저에는 두루미의 그림자가 꿈틀거린다. 하지만 이 강마에와 강건우의 대결구도는 초반부에 보여주었던 이 드라마의 대결구도보다 참신하지 못하다.

초반의 대결구도는 강마에와 오합지졸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대결이 있었고, 또 그 위에 결국 강마에가 맡게 되는 오케스트라와 세상과의 대결구도가 있었다. 이 구도 속에서 강마에는 살아 움직일 수 있었다. 즉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압제자이기도 하지만 세상과의 대결 속에서 단원들의 보호자가 되기도 하는 것. 강마에는 그 스스로 현실이 되어 단원들에게 자신을 넘어보라고 도발하는 존재로 서게 된다.

하지만 강마에와 오케스트라를 대변하는 강건우의 대결은 너무 멜로 중심과, 천재와 비천재의 대결로 흐르고 있다. 강건우가 천재이고 그 천재를 질투하는 강마에의 이야기는 모차르트와 살리에르를 다루던 ‘아마데우스’에서는 재미있었을지 모르지만 이 드라마가 하려던 이야기와는 너무 벗어나 있다. 그것은 이 드라마를 열광케 만들었던 서민들의 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에게 성큼 다가왔던 클래식이라는 소재는 이 천재와 비천재의 대결구도로 가면 다시 저 멀리 달아나 버린다.

또한 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이제 몇 달 클래식을 접하게된 강건우를 강마에가 스스로 질투한다고 밝히는 것은 현실성 자체가 떨어진다. 강건우는 사실상 강마에라는 망치질이 있어서 그 천재성이 발휘되는 존재로 기능할 때, 좀더 현실적인 면모를 띄게 된다. 특히 많은 오케스트라 단원들 속에 천재이면서도 평범하게 존재하고 있어야 그 캐릭터는 다른 캐릭터들을 가리지 않고 드라마의 주제를 끌어가면서도 재미를 주게 된다.

강마에와 강건우의 대결구도 속에서 만들어진 타 캐릭터들의 극단적인 설정 또한 문제가 있다. 두루미는 청력을 잃게 된다는 극단적 설정이 없었던 시기에는 능동적인 캐릭터였지만 지금은 그 무거움에 갇혀 캐릭터가 잘 드러나지 않게 되었다. 청력을 상실한 베토벤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하더라도 이 이야기를 너무 무겁게 만들어버리는 두루미 설정은 드라마의 발랄함을 상쇄시킨다. 이것은 또한 치매를 앓고 있는 김갑용(이순재)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이들 캐릭터들은 질병이라는 지나친 설정에 갇혀 능동성을 잃어버렸다.

‘베토벤 바이러스’가 살려면 먼저 강마에를 살려내야 한다. 그러려면 멜로 구도를 끝내야 하고, 강마에와 강건우의 1대1 대결구도를 버리고 강마에와 단원들의 대결구도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고 그 애증관계 위에서 사회적인 편견과 싸우는 모습들이 그려져야 한다. 이것이 ‘베토벤 바이러스’가 가진 중독적인 바이러스를 힘겹게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대중들과 나눌 수 있는 길이다.

리더십 부재의 시대, 강마에 신드롬이 말해주는 것

‘베토벤 바이러스’가 심상치 않다. 클래식이라는 마니아적 소재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시청률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는 이 드라마는 어쩌면 ‘시청률을 잡은 유일한 마니아 드라마’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이 바이러스를 우리 사회 깊숙이 퍼뜨리고 있는 걸까. 그 중심에는 절대 카리스마, 신드롬 조짐까지 보이고 있는 강마에(김명민)가 있다. 그 캐릭터가 시청자들의 열광을 얻어내는 바로 그 지점을 보다보면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속살이 살짝 드러나는 걸 목도할 수 있다.

현실성 있는 강력한 리더십의 부재
강마에가 오케스트라를 하기 위해 모여든 단원들에게 제일 먼저 하는 작업은 그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게 하는 것이다. “실력도 없는데 노력도 안 하면서 대접을 받으려” 하는 그들에게 그는 거침없이 “똥 덩어리”라는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그 충격은 단원들뿐만 아니라 드라마를 보던 이 땅의 잠재적 똥 덩어리들(?)에게도 고스란히 미쳤다. TV를 켜면 어디서나 흘러나오는 이 “생각대로 하면 되는” 긍정의 사회에 그는 강한 부정을 했다. TV가 전파하던 거짓의 희망은 그의 말 한 마디로 깨지고 우리는 거기서 진짜 냉정한 현실을 보게 되었다.

대선 때면 반짝 나타나는 리더십들은 대부분 허황된 수치를 내세우면서 장밋빛 사회를 얘기하지만 사실상 사회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을 얘기하기보다는 먼 미래의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혹은 일어나기 어려운) 꿈만을 이야기했다. 까칠하고 째째한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현실을 솔직히 말하는 그는 이 사회의 ‘부드럽고 한없이 너그러운 얼굴’로 거짓된 ‘핑크빛 미래’를 말하는 자들과 대비를 이루며, 이 사회에 부재한 현실성 있는 강력한 리더십을 대리충족 시키게 만들었다.

소수집단이 지배한 꿈이 없는 사회
이 드라마가 강마에식으로 표현하면 ‘귀족을 위한 것으로 천민들은 꿈에도 꿀 수 없는’ 클래식이라는 소재를 사용하면서 사회에서 누락된 서민들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이 드라마만의 강력한 반어법이다. 주부로서 꿈을 접고 살아온 정희연(송옥숙)은 가정이라는 집단에 발목이 잡혀 있고, 앞서나간 후배에게 굴욕을 당하면서도 회사에서 꿈을 갉아먹고 사는 박혁권(정석용) 역시 회사와 가정에 발목이 묶여 있다. 가난한 형편 때문에 클래식을 하려면 으레 해야만 할 것으로 생각되는 개인레슨 같은 투자(?)를 받지 못해 거리를 전전하는 하이든(쥬니)은 이 사회라는 집단에 발목이 잡혀 있다.

이들의 상황은 현실 그대로이다. 이 사회에서는 누구든 현실이라는 걸림돌에서 생존하기 위해 꿈을 버린다. 아니 어쩌면 도전조차 하지 못하게 사회는 일찌감치 그들에게 꿈을 버리는 연습을 시켜온 지도 모른다. 강마에가 말한 귀족과 천민을 나누는 클래식은 이 사회의 상류층이 가진 특권의식과 서민들이 가지도록 강요받는 천민의식을 단번에 드러내준다. 몇 프로 되지 않는 소수 집단이 사회 전체 집단을 굴러가게 하는 구조 속에서 저네들은 클래식 같은 문화를 누릴 때, 다수의 서민들은 꿈을 버리도록 강요받는 사회. 강마에의 까칠한 말 한 마디 속에는 그것이 숨겨져 있다.

환타지가 환타지에서 끝나지 않도록
하지만 이 드라마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꿈을 이루라는 게 아니라 한번 꿔보기나 하라는 것이다. 꿔보지도 않으면서 꿈이라고 하면 그건 꿈이 아니라 그냥 별이다.” 강마에의 이 말처럼 현실을 보지 못했던 서민들에게 잔인한 현실을 보여준 후, 꿈꾸지 못하는 소외된 이들을 꿈꾸게 만든다. 이 드라마가 강력한 환타지를 갖추는 지점은 바로 이 곳이다. 드라마 속 단원들이 강마에라는 지휘자를 통해 오케스트라를 하는 그 꿈을 향해 매진할 때, 그걸 바라는 시청자들은 자신 속에 오래도록 묻어두었던 꿈 한 자락을 꺼낼 수도 있을 것이다.

각자 사회의 구성원들이 꿈을 다시 꾸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 꿈을 꾸게 만드는 리더십이다. 강마에 같은 리더십은 드라마에서나 존재하는 것일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일까. 우리 사회가 지금 필요로 하는 리더십은 대중들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리더십이 아니라, 대중들에게 혹독할지라도 현실을 보게 만들고 또 그것을 꿈으로 연결시키는 리더십이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지만, ‘베토벤 바이러스’를 보며 환타지가 환타지에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건, 그것이 이 사회가 가면 뒤에 숨겨왔던 현실의 정곡을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강마에 김명민, ‘바람의 화원’의  신윤복 문근영

명작은 명캐릭터와 명연기로 만들어진다. 지금 수목드라마에서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김명민이 그렇고, ‘바람의 화원’에서 신윤복을 연기하는 문근영이 그렇다.

까칠한 듯 부드러운 강마에, 김명민
‘베토벤 바이러스’를 이끌어 가는 힘의 원천은 강마에라는 캐릭터에서 비롯된다. 고집불통에 따뜻한 표정이라도 하면 무슨 큰 일이라도 날 것처럼 늘 견지하는 퉁명스러운 얼굴, 게다가 빙빙 돌려 얘기하지 않고 면전에다 대고 쏟아 붓는 직설어법의 독설까지, 강마에는 까칠한 캐릭터의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동정심이 일어날 만한 아줌마 정희연(송옥숙)에게 거침없이 ‘똥 덩어리’라고 말하고, 이제 귀가 멀게 될 두루미(이지아)에게 ‘귀가 먼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낱낱이 말하며 절망을 끄집어내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 까칠함이 시청자들의 환호를 받는 이유는 무얼까. 그 첫 번째는 강마에가 지금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그 동안 외면하려 해왔던 자기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강마에는 현실이라는 핑계거리를 내세우며 꿈을 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특유의 독설로 깨우쳐 그 현실과 맞서게 만든다. 바로 거기서부터 변화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강마에의 까칠함은 표현의 문제일 뿐이다. 강마에와 정명환(김영민)이 천재 제자 강건우를 두고 나누는 뒷 얘기는 진정한 스승으로서의 그의 면모를 드러낸다.

이 명 캐릭터를 연기하는 김명민은 과거 ‘하얀거탑’의 장준혁이라는 카리스마와는 약간 결이 다른 새로운 카리스마를 선보이고 있다. 장준혁에서부터 강마에까지 현실에 대한 삐딱함을 표현하는 특유의 비뚤어진 입 꼬리는 이제 김명민의 트레이드 마크가 될 정도다. 하지만 강마에의 비뚤어짐은 조금은 과장된 연기와 맞물려 오히려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의 완벽에 가까운 지휘 연기와 까칠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는 야누스적인 연기는 강마에라는 캐릭터를 살리고, 또 드라마를 살리는 힘이 되고 있다.

순진한 듯 강인한 신윤복, 문근영
한편 ‘바람의 화원’을 이끌어가는 힘은 천재화가인 신윤복이라는 캐릭터다. 화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남장을 해야하는 천재 신윤복은, 그 설정 그대로 당대의 벽들과 마주선다. 그 첫 번째는 그림에 대한 장벽이다. 그가 그리고픈 여성성이 충만한 그림들은 춘화로 매도되고 장파형(손을 돌로 으깨는 형벌)의 위기에까지 몰리게 만든다. 도화서는 규율에 맞는 틀에 박힌 그림을 그에게 강요한다.

이 거대한 시대의 장벽 앞에 선 인물은 가녀린 도화서의 화원도 되지 못한 일개 제자인 신윤복이다. 하지만 신윤복은 겉보기처럼 약하지만은 않다. 자기 대신 장파형을 당하려하는 스승 김홍도(박신양)와 늘 맞서고, 가문을 위해 자신을 화원으로 만들려하는 아버지와도 맞선다.

문근영은 이 천재화가를 마치 어린아이 같은 특유의 해맑은 얼굴로 연기한다. 동그랗게 뜬 두 눈은 천재들이 가진 특유의 호기심을 잘 표현하고 거침없는 행동 속에도 아이 같은 순진무구함을 드러낸다. 하지만 장파형 앞에 격정적인 감정에 휘말리는 상황에서 문근영은 절정의 눈물 연기를 소화해낸다. 자신의 손을 돌로 내리치는 장면은 마치 그 동안 귀엽기만 한 국민여동생 이미지를 저 스스로 깨버리려는 듯한 몸부림처럼 보인다. 신윤복이 가진 캐릭터의 변화과정, 즉 남장여인에서 다시 김홍도에 의해 깨어나는 여성성이 드러나는 그 과정을 통해 문근영은 역시 그동안 갇혀있던 이미지를 깨고 새로운 여성 이미지로 거듭날 기회를 가지게 된 셈이다.

명작을 만드는 명캐릭터와 그 명캐릭터를 만드는 명연기. 지금 그 연기의 중심에는 김명민과 문근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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