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로 가는 '트랜스포머', 시골로 가는 우리영화

'트랜스포머-패자의 역습'의 바람몰이가 심상치 않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집계에 따르면 개봉 첫날 '트랜스포머2'는 53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고 한다. 실제로 영화를 접해보면 그 이유를 실감할 수 있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빠져보았을 변신로봇에 대한 로망은, 주인공의 말 잘 듣는 오토봇들의 휘리릭 뚝딱 변신 CG가 주는 짜릿함으로 우리의 시선을 압도해버린다. 게다가 1탄에 비해 2탄은 그 시공간의 스케일이 더 커졌다. 원시시대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시간과, 미국의 한 동네에서 전지구로 확장되고 거기서 또 우주까지 펼쳐지는 공간은 마치 지구라는 별을 하나의 장난감 놀이하는 공간처럼 여겨지게 만든다. 영화의 압도적인 스케일이 가져온 결과다.

특히 주목해야할 것은 이 영화가 주는 감각적인 만족감이다. 거의 두 시간 반 동안을 쉬지 않고 달리는 그 속도감은 거기에 편승한 관객들을 짜릿한 롤러코스터의 세계로 인도한다. 달려 나가는 자동차들, 오토봇과 디셉티콘의 현란할 정도로 빠른 변신, 끊임없이 뛰고 또 뛰는 주인공들, 출격하는 전투기들, 탱크들, 긴박한 국방성의 움직임까지, 그 속도 있는 전개는 스토리의 앞뒤 맥락과 상관없이 어딘가 거대한 일이 벌어지고 있고 그걸 막기 위해서는 무조건 달려야 한다는 강박을 가져온다. 스토리가 주는 맥락의 재미는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엔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키는 효과로서의 영화가 자리한다. 이것은 사실 블록버스터가 추구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이 엄청난 물량이 투입된 판타지의 극점이며, 시각과 음향으로서의 영화 효과가 가져다주는 롤러코스터적인 감각적 만족감의 정점을 달리는 '트랜스포머2' 앞에 우리네 영화가 가진 면면은 언뜻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진짜 그럴까. 우리 영화는 이제 이 거대한 블록버스터 앞에서 여름 영화 시장을 온전히 내주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영화가 이 거대 블록버스터에 대처하는 자세가 꽤 의미 있고 효과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거북이 달린다'는 충청도를 배경으로 한 시골형사의 탈주범 추적기를 다룬다. 영화 속에서 시골형사와 탈주범이 취하고 있는 대결구도의 뉘앙스는 이 영화가 블록버스터와 취하고 있는 그것과 유사하게 보인다. 즉 탈주범은 혼자 몇 명의 형사들을 상대할 정도로 싸움에 능하고 두뇌회전도 빠르며 대담한 반면, 시골형사는 거북이처럼 굼뜨기 그지없고 싸움도 잘 못한다. 그런 그가 탈주범을 추격하고 결국에는 잡을 수 있는 것은 돌봐야할 가족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조금은 황당해 보일 수 있는 이 설정은 그러나 장르적 문법 속에서 우리 사회가 가진 독특한 가족중심주의와 맞아 떨어지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새로 개봉할 영화, '킹콩을 들다' 역시 이야기는 중심이 아닌 시골 변두리로 향한다. 88올림픽 동메달리스트였지만 부상으로 운동을 그만두고, 시골여중으로 내려간 역도부 코치와 역도선수로 커나가는 시골소녀들의 눈물겨운 한 판 들어올리기가 그 주 내용이다. '거북이 달린다'가 지칭하는 거북이가 토끼를 상정하는 것처럼, '킹콩을 들다'의 킹콩은 이 자그마한 시골소녀를 상정하게 한다. 즉 '거북이 달린다'의 대결구도가 마치 블록버스터와의 대결구도로 그려지는 것처럼 '킹콩을 들다'의 킹콩 역시 이 영화가 영화관에서 대적해야할 블록버스트의 뉘앙스를 풍긴다.

'트랜스포머'가 우주로 날아갈 때, 우리 영화는 시골로 내려간다. '트랜스포머'가 전 지구적인 이야기를 건넬 때, 우리 영화는 우리 이야기로 승부를 건다. '트랜스포머'가 감각적인 영화 효과에 기댈 때, 우리 영화는 감성적인 영화의 스토리와 영상에 기댄다. 과연 그 결과는 어떨까. 거북이는 토끼와 대적할 수 있을 것인가. 또 이 순박하기 그지없는 시골소녀는 킹콩을 번쩍 들어 올릴 수 있을 것인가. 화려한 '트랜스포머'의 멋진 변신 앞에서 이들이 그 성공을 쉽게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 대처하는 자세만큼은 상당히 다부진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트랜스포머'와 거북이의 대결, 누가 이길까

'트랜스포머 : 패자의 역습'의 졸속으로 치러진 월드 프리미어 행사가 가져온 파장이 만만치가 않다. 80분이나 늦게 도착해 별다른 사과도 없이 대충대충 치러진 행사에 취재진이 보이콧하는 이례적인 사건까지 벌어졌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행해진 졸속 행사와는 달리 화려하게 지극히 정상적으로 치러진 일본의 행사와 비교되면서, 국가적인 무시로 비화돼, 극장 보이콧을 하자는 네티즌들의 의견마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항간에는 이러한 논란 자체가 관심을 만들어 국내의 '트랜스포머' 흥행에 오히려 불을 지를 것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이 사건은 때 아닌 한일 감정으로까지 비화되는 양상이다. 이 우리의 반응에 대한 기사가 나가자 일본 네티즌들은 노골적으로 한국의 태도를 유치하고 치졸한 대응이라는 식으로 비난하고 나섰고, 이것은 다시 우리 네티즌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트랜스포머'의 원작이 일본 것이라는 의식은 그 한일 감정의 바탕을 제공하고 있다.

물론 21세기에 대중문화에 있어서까지 애국주의라든가, 한일 감정 같은 양상으로 비화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트랜스포머'의 행사가 보여준 태도는 어쩌면 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견지하는 태도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 같아 씁쓸하다. 강자의 논리 혹은 경제의 논리 그것은 또한 블록버스터의 논리이자 미국의 논리이기도 하다. 이 단순한 오락영화 속에서도 발견하게 되는, 미국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물론 이것은 일본 원작이지만 영화 속에는 이 미국적 정서가 그대로 녹아있다)이 저 졸속 행사에서의 단면처럼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이 돈의 위력이 만들어내는 현란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세계가 던져주는 유혹을 뿌리치기는 참 어려운 일이다. 극장이라는 공간 자체가 블록버스터의 롤러코스터 타기에 가장 적합하게 만들어져 있는 건, 어쩌면 농구가 미국선수들의 체형에 가장 적합한 운동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똑같은 전략으로 우리네 충무로에서 만들어진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할리우드의 그것과는 조금씩 다른 체형과 개성을 갖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우리 식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이 게임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일 테니까.

그런 면에서 '거북이 달린다'는 할리우드 액션에 맞서는 우리 식의 대안처럼 보인다. 전 지구적인 배경 대신에 충청도의 한 조그마한 마을을 배경으로 삼고, 엄청난 힘을 보유한 로봇들 대신에 탈주범에게 매번 깨지고 터지는 시골 형사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 영화는 바로 그 토속적인 선택들 때문에 오히려 할리우드 액션보다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폼생폼사 하는 도시의 형사들이 보여주었던 외형을 벗어내자, 그 안에는 때론 배꼽 잡게 웃기고 때론 눈물 나게 먹먹한 한 인간으로서의 형사의 모습이 고개를 들고, 그것은 불황 정서와 맞닥뜨리며 서민들과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거북이 달린다'는 바로 이 작은 몸체의 느리기만 해보이는 거북이도 달린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고, 그 달리는 것이 꽤나 흥미진진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영화이며, 때론 그 거북이 걸음이 토끼 걸음을 앞지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의 영화다. '트랜스포머'의 졸속 행사로 인해 우리가 보게 된 할리우드로 대변되는 블록버스터의 실체를 목도한 현재, 거북이와 트랜스포머의 대결은 그 어느 때보다 흥미진진해졌다. 거북이는 먼저 달리기 시작했고, 곧 트랜스포머도 경주를 시작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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