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스'는 과연 공익이 될 것인가

농작물 피해를 입은 농민들을 위해 멧돼지 포획은 허가되어야 하는 것일까. 뉴스를 통해 도심에 출현한 멧돼지 소식을 종종 접하다 보면, 멧돼지의 '유해조수 지정'과 포획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농민들의 피해는 물론이고, 도심으로 뛰어든 멧돼지가 자칫 인명 사고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새 코너 '헌터스'의 기획 의도는 바로 이 멧돼지 문제를 공론화해보겠다는 김영희 PD의 의욕이 엿보인다.

하지만 이 멧돼지 문제는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환경부에서 이른바 '도심 출현 야생 멧돼지 관리대책'을 발표했고, 이로써 전국 19개 시·군의 수렵장에서 총기 등을 활용해 멧돼지를 포획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러한 대책이 전체적인 생태를 고려하지 않은 미완의 대책이라는 불씨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유해조수' 지정은 전체 생태계를 위해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말한다. 유해조수로 지정되어 멸종의 위기에 처하게 되는 동물들(늑대가 대표적)은 다양한 종의 보존을 어렵게 하고 결국 부메랑처럼 전체 생태계에 또 다른 문제를 양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밤의 새 코너 '헌터스'에 대한 우려 섞인 시선은 자칫 이 프로그램이 지나치게 멧돼지가 만들어내는 피해상황과 거기에 대응하는 포획의 정당성만을 부각시키지 않을까 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렇게 멧돼지 대 인간의 대결구도로 프로그램이 짜여지게 되면 그 다음에는 '멧돼지 사냥'이라는 자극적인 오락거리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다.

하지만 김영희 PD는 이것이 이 프로그램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헌터스'는 멧돼지를 잡는 프로그램이 아니며, 멧돼지 학살 운운하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 프로그램은 아직 방영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동물단체나 환경보호단체에서 주장하는 것이 이른 감이 있다. 결국 프로그램은 그 제작을 맡고 있는 김영희 PD가 만드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지금껏 일련의 공익을 내세우는 프로그램을 보여주었던 김영희 PD라면, 이 민감한 소재 역시 잘 풀어낼 거라는 기대감을 주기도 한다.

어쩌면 이 프로그램은 김영희 PD의 말대로, 오히려 멧돼지의 생태와 공존에 대해 좀 더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될 지도 모른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환경단체들이 우려하는 상황은 거꾸로 뒤집어질 가능성이 있다. 예능 프로그램이 갖는 접근방식(이 방식은 토론이 아니라 공감의 방식을 취한다)이 이 복잡한 문제에 대한 해법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프로그램이 김영희 PD가 이 공익과 볼거리 사이에 제대로 균형을 맞춰줬을 때의 일이다. 결국 이 어느 것이 공익이고 어느 것이 아니냐는 문제는 전적으로 6일 방송되는 첫 회에서 판가름이 날 것으로 보인다. 모쪼록 김영희 PD 특유의 공익 버라이어티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오락기화 되가는 TV, 그 매체의 힘 평가절하 말아야

‘!느낌표’가 폐지된다고 한다. 이유는 당연하게도(?) 시청률 부진이다. 시청률이 TV 프로그램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던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깊은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이 프로그램이 의미 있는 도전을 했고 그 도전에서 TV의 어떤 가능성 같은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TV의 오락기능과 공익은 서로 상충되는 개념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물론 그것은 노동과 생산성이 지고선이 되고 즐기는 문화가 별로 없던 시절의 얘기다. 즉 ‘논다’는 것과 ‘의미 있는 노동’은 함께 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었다. 하지만 ‘느낌표’는 보기 좋게 이 편견을 뒤집어 버렸다. 사회의 공익적인 부분을 소재로 가져가면서도 거기에 충분한 오락기능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느낌표’가 이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설정한 아이템들은 ‘공공선’이었다. 즉 누구나 고개가 끄덕여질 수 있는 공감 가는 아이템을 선정함으로서, 그것을 추구하고 실현하는 과정에서 억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진정한 즐거움을 대리충족 시켜주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자 이 프로그램은 재미와 즐거움을 넘어서 감동을 선사하게 되었다.

또한 공공선을 추구한다는 이 가치는 실제 사회의 변화까지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전국에 어린이 도서관을 짓고, 의료의 사각지대에 놓인 오지에 의료봉사를 가고, 사람들이 꺼려하던 장기기증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만드는 등의 일들은 하나의 오락프로그램이 한 성과로 보기엔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느낌표’는 정부의 관계부처 사람들조차 하기 힘들어하는 이런 일들을 해낼 수 있었을까.

그것은 우리가 한편으로 매일 보면서도 그토록 폄하하고 있는 TV라는 매체의 힘 때문이다. 사회 곳곳에 숨겨져 있는 어려운 문제들을 카메라가 담아낸다는 것은 사실상 그 문제를 공론화 하는 기능을 한다. 이것은 TV가 기본적으로 가지는 보도의 기능이면서 그만한 힘을 가진 자의 사회적 책무이기도 하다. 사회문제를 고발하는 르뽀 프로그램들이 부정적인 코드, 즉 비판적 코드를 활용했다면, ‘느낌표’는 긍정의 코드를 활용했다.

따라서 르뽀 프로그램들이 문제제기를 하는 물음표(?)의 프로그램들이었다면, ‘느낌표’는 마음을 움직여 참여를 하게 만드는 느낌표(!)의 프로그램이었다. 부정보다 긍정이 나은 점은 좀더 참여를 적극적으로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느낌표’는 무엇보다도 TV가 가진 긍정적인 힘을 제대로 알고 활용했던 프로그램으로서 그 가치가 있다.

시청률 부진으로 폐지되는 ‘느낌표’는 또한 지금의 TV 프로그램들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단초가 된다. 감동보다는 즉각적이고 말초적인 재미가 우선이 된 요즘, 우리는 점점 TV를 오락기로 대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물론 TV는 사용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용도가 달라지는 도구다. 오락과 재미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TV가 가진 전부라고 평가절하 하는 건 문제가 있다. TV의 그 또 다른 힘을 ‘느낌표’가 충분히 보여주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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