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진실, 요즘 대중들의 갈망

 

센 놈들 잡으려면, 뭐가 필요한지 아냐. 다른 힘센 놈의 허락이다.” <오만과 편견>의 문희만(최민수) 부장검사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사를 강행하려는 구동치(최진혁)에게 이렇게 일갈한다. 이 대사 속에는 우리네 검찰이 처한 쓰디쓴 현실이 묻어난다. 정의를 구현해야할 검찰이 사실은 권력에 의해 휘둘리는 모습을 <오만과 편견>의 문희만(그래서 이름이 의미심장하다) 부장검사는 보여준다.

 

'오만과 편견(사진출처:MBC)'

검사는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해 외부에 공표할 수 없다. 죄송하다.” <펀치>에서 검찰총장의 인사청문회에 서게 된 신하경(김아중)은 결국 눈물을 머금고 총장의 비리를 폭로하지 못했다. 전 남편이 자신이 데리고 살고 있는 딸 예린이(김지영)의 양육권을 갑자기 들고 나오며 그녀를 협박했기 때문. 이 장면 속에는 검찰이라는 조직이 가진 권력적인 속성이 묻어난다. 쟁취하기 위해서는 딸까지 볼모로 내세우는 것.

 

누군가 그러더군요. 사람들은 피노키오가 진실만 말할 거라고 생각한다고, 또 사람들은 기자들도 피노키오처럼 진실만을 전한다고 생각합니다. 피노키오도 기자들도 사람들이 자기 말을 무조건 믿는다는 걸, 그래서 자기 말이 다른 사람들 말보다 무섭다는 걸 알았어야죠. 그걸 모른 게 송기자님의 잘못입니다... 13년 전 그런 일을 겪고도 아직도 임팩트를 운운하시는 걸 보니 송기자님은 13년 전과 똑같은 기레기시네요.”

 

<피노키오>에서 국민의 알권리 운운하며 자신은 기자로서 할 일을 했다 말하는 송차옥(진경)기자에게 그녀의 딸인 최인하(박신혜) 기자는 기레기라는 강한 표현을 쓴다. 여기에는 과잉 취재 경쟁 속에서 팩트보다 임팩트가 더 중요해진 우리네 언론의 현실이 묻어난다. 바로 그 임팩트는 어떤 경우에는 한 가족을 풍비박산 내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하다.” <힐러>의 정의로운 기자 김문호(유지태)는 노조파업 현장에서 분신한 노동자의 병원을 찾아 그렇게 말했다. 귀 기울여주지 않는 세상에 분신이라도 해서 자신들의 말을 들어달라고 했던 것이지만 아무도 병원을 찾지 않았다는 노동자의 이야기에 김문호가 기자로서 사과한 것. 물론 김문호라는 인물은 판타지에 가깝다. 그 판타지 속에는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는 서민들의 갈증이 느껴진다.

 

최근 주중 드라마들은 왜 이렇게 연달아 검찰과 기자를 드라마의 소재로 다루고 있을까. 드라마가 대중들의 정서를 반영한다고 보면 이 두 직종이 환기하는 건 정의와 진실에 대한 서민들의 갈망이다. 언젠가부터 정의를 구현하기보다는 권력기관처럼 받아들여지게 된 검찰에 대한 서민들의 감정은 그다지 좋지 않다. <오만과 편견>이나 <펀치> 모두 검찰의 비리 척결을 주요 주제로 다루는 건 그래서다.

 

한편 검찰만큼 믿지 못하게 된 것이 바로 언론이다. 팩트보다는 임팩트를 강조하고, 때로는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권력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언론을 대중들은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니 <피노키오><힐러>가 다루는 언론의 문제는 자기반성으로 가득 차 있다. 잘못된 언론의 뉴스나 조명하지 않는 사건들이 누군가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자각이 그 밑바닥에는 깔려 있다.

 

검찰과 기자를 소재로 하는 드라마에서 대중들이 기대하는 건 정의와 진실의 승리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이들 드라마들이 과거와 달리 손쉽게 정의와 진실의 손을 들어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현실은 더 변하기 어렵다는 것을 이미 대중들이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같은 허구 속에서나마 카타르시스를 느끼기에도 버거운 현실이다.

 

<피노키오>, 장르가 멜로를 쓰려면 이 정도는 해야

 

네가 혹시 기하명이야? 너 진짜 이름이 기하명이야?” 최인하(박신혜)는 결국 최달포(이종석)가 자신의 어머니 송차옥(진경)의 악의적인 오보에 의해 희생당한 가족의 한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사실을 알고 흘리는 최인하의 눈물은 어떤 의미일까. 그건 불행한 일을 겪은 최달포에 대한 연민일까, 아니면 그 일에 자신의 어머니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 예감케 하는 두 사람의 비극적인 관계에 대한 슬픔일까.

 

'피노키오(사진출처:SBS)'

아마도 둘 다 아닐 것이다. 그것보다 더 큰 것은 최인하가 송차옥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최달포가 그녀에게 보여준 사랑에 대한 눈물일 것이다. 최달포에게서 멀쩡히 웃고 있어도 마음 한 구석이 아련해지는 이유는 바로 그 복수심조차 눌러버린 사랑의 위대함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최인하가 이 진실 때문에 받을 상처를 걱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감추고 싶은 진실을 가장 알면 안 되는 사람이 알아버렸다고 그는 말한다.

 

이것은 <피노키오>라는 장르물이 멜로를 활용하는 방식이다. <피노키오>는 그저 양념으로서의 멜로가 아니라 장르적 상황을 더 극적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멜로를 사용한다. 기자와 언론의 세계를 다루는 드라마이니만큼 <피노키오>진실의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하지만 진실이라는 것은 양면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피노키오>는 멜로라는 틀을 가져와 보여준다.

 

거대담론으로서의 진실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어쩌면 드라마로서는 그다지 효과가 없을 지도 모른다. 그것은 다큐나 르뽀의 영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피노키오>는 그래서 이 진실의 문제에 최달포와 최인하의 사랑이라는 코드를 깔아놓음으로써 지극히 사적인 영역으로 공적인 이야기까지를 보여준다. ‘진실의 문제는 지극히 이성적일 수밖에 없겠지만, 이렇게 멜로로 엮어놓으면 지극히 감성적이고 가슴 아픈 이야기로 재탄생된다.

 

최달포와 최인하의 멜로는 어찌 보면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피노키오>라는 드라마에 가벼움을 만들어주는 장치로서도 활용되었다. 즉 두 사람이 툭탁대며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알콩달콩한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들은 로맨틱 코미디가 주는 소소한 재미들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하다. 물론 이 소소한 관계들의 축적은 숨겨진 진실과 맞닥뜨리게 되면 거대한 비극으로 돌변하기도 하지만.

 

흔히들 장르물에 멜로가 들어가면 왠지 장르물을 망치는 것처럼 얘기되지만, 사실 멜로가 무슨 죄가 있을까. 다만 그 멜로를 어떻게 장르와 잘 붙여서 운용하느냐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 이어 복합장르를 연달아 선보인 박혜련 작가는 이 부분에서는 베테랑이라고 할 수 있다. <피노키오>가 멜로를 끌어들여 장르물의 극적 긴장감과 이완을 적절히 풀어내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박혜련 작가의 공이다.

 

긴박감 넘치는 언론의 기막힌 이면들을 보여주면서도 그 속에 사랑하는 남녀의 때론 코믹하고 때론 달달하며 때론 절절해지는 멜로를 이물감 없이 봉합해내는 것. 멜로를 쓰려면 이 정도는 해야 되지 않을까. <피노키오>는 그걸 잘 보여주고 있다.

 

<오만>, <미생>, <피노키오>가 꺼낸 칼끝이 향하는 곳은

 

멀리서 보면 그럭저럭 살만해 보인다. 아니 심지어 아름다워 보인다. 하지만 그건 본질이 아니다. 한 걸음만 다가가면 온갖 뒤틀어진 욕망과 부조리들이 눈앞에 현실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것이 바로 직업의 세계. 이런 의미로 보면 지금껏 대충 직장을 하나의 배경으로 다루고 그 위에 멜로 같은 이야기를 덧붙인 드라마들은 실수의 차원을 넘어서 심각한 오류를 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누가 막연히 직장인의 로망을 말하는가.

 

'오만과 편견(사진출처:MBC)'

이제 전문직 드라마라는 표현은 구태의연해진 지 오래다. <오만과 편견>의 검찰, <미생>의 종합상사, <피노키오>의 언론사. 지금 현재 직업을 다루는 드라마들을 들여다보면 과거 전문직 드라마라고 불리던 드라마들의 호칭 자체가 무색해진다. 과거 이들 전문직 드라마들은 직업의 세계를 표방하기는 했으나 그 디테일을 담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보면 직업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만을 만들어냈던 것이 사실이니.

 

물론 의학드라마는 예외다. 무수히 반복되어오면서 디테일 역시 깊어진 게 의학드라마다. 하지만 검사나 기자 혹은 직장인을 다루던 전문직 드라마들의 디테일은 요즘 방영되고 있는 MBC <오만과 편견>이나 tvN <미생>, 혹은 SBS <피노키오>를 따라잡기는 어렵다. 이들 드라마들은 좀 더 심층적인 취재가 아니라면 도무지 나오기 어려운 직업의 디테일들을 다룬다.

 

과거라면 이런 디테일은 시청률을 가로막는 저해요소가 됐을 것이다. 적당한 디테일에 조미료처럼 처지는 멜로가 드라마의 흥행공식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적당한 디테일은 이제 대중들에게는 리얼리티의 부족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그러니 거꾸로 깊어진 디테일은 실감으로 공감을 만들어낸다. 디테일이 깊어진 이들 세 드라마가 시청률도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건 그래서다.

 

<오만과 편견>이 다루는 검찰은 막연히 떠오르는 그런 이미지를 깨는 디테일들이 들어가 있다. 문희만(최민수)같은 부장검사를 보다보면 전형적인 비리 검사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가도 검찰이라는 시스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름대로의 안간힘을 쓰는 현실적인 검사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검찰의 일원이 될 것인지 개인으로 남을 것인지를 구동치(최진혁) 수석 검사에게 묻는 문희만의 모습에는 시스템과 개인으로서 검사의 소신이 어떻게 부딪치는가를 잘 보여준다.

 

<미생>은 지금껏 우리가 종합상사라고 하면 해외에서 물건 떼다 파는 정도로 생각했던 그 이미지를 여지없이 깨버린다. 또 직장인하면 떠오르는 막연한 샐러리맨의 애환 같은 통상적인 이야기를 던지지 않는다. 어찌 보면 일중독자들처럼 보이는 <미생> 상사맨들의 깊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네들의 삶이 가진 아픔과 기쁨을 모두 함께 느껴볼 수 있다. 공감의 폭은 바로 이 디테일로 인해 커질 수밖에 없다.

 

<피노키오>는 그저 기레기로 치부되던 드라마 속 기자들의 모습을 새롭게 조명한다. ‘진실을 두고 고민하는 기자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 보도경쟁이 만들어내는 폭력적인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단독을 잡기 위해 별의 별 짓을 다하는 현장 이야기가 들어간다. 기자가 나오면 으레 등장하는 클리쉐들은 디테일 속에서 무색해진다.

 

흥미롭게도 이렇게 디테일에 승부하는 이들 직업 드라마들 속에는 한 가지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이 드라마들이 모두 이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청춘이 주인공이라는 점이고, 그 사회 초년생에게 어떤 지침을 알려주는 직장의 멘토가 또한 존재한다는 점이다. <오만과 편견>의 한열무(백진희)라는 초년생을 이끌어주는 수석 구동치가 그렇고, <미생>의 장그래(임시완)라는 계약직을 끌어주는 오차장(이성민)이 그렇다. <피노키오>의 신입 기자 최달포(이종석)에게는 YGN 사회부 시경캡인 황교동(이필모)이 있다.

 

사회 초년병들과, 현실을 알지만 그래도 초심을 잃지 않은 멘토들은 함께 힘을 합쳐 부조리한 현실과 맞선다. 그 현실은 다름 아닌 조직 시스템이다. 그래서 <오만과 편견>의 적은 검찰시스템이 되고, <미생>은 샐러리맨들의 직장 시스템이며, <피노키오>는 보도 경쟁에 내몰려진 방송 시스템이 된다.

 

이렇게 보면 이 직업을 다루는 세 편의 드라마는 다른 것 같아도 비슷한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직업이 갖는 부조리한 시스템과 대항하는 청춘과 멘토의 공조체계가 그것이다. 어째서 서로 다른 직업을 다루면서도 이렇게 비슷한 이야기 구조가 나오게 된 걸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접하는 직업의 세계가 갖고 있는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되는 건 아닐까.

 

취업도 어렵지만, 막상 들어가면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시스템의 현실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세상의 비극들이 어떤 직업 속에서도 상존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이들 드라마들의 디테일들을 보고 있으면 도대체 이런 세상에서 젊은이들이 청운의 꿈을 꾼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인지 궁금해진다. 주마간산으로 대충 덮어버리고 갔을 때는 좀체 정체가 드러나지 않던 막막하고 먹먹한 현실이다.

 

<피노키오>, 이종석의 말, 윤균상의 칼

 

자신의 실제 이름을 숨긴 채 기자가 되어 억울한 아버지의 죽음과 거짓보도를 한 기자들을 밝히려는 최달포(이종석). 그리고 거짓말을 한 자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처단하는 그의 형 기재명(윤균상). 이 두 사람의 교차편집으로 이뤄진 <피노키오> 5회의 마지막 몇 분은 팽팽함과 절절함이 극에 달한 시간들이었다.

 

'피노키오(사진출처:SBS)'

거짓말로 자신의 가족을 파탄 낸 세상에 대한 복수를 위해 한 사람은 펜()을 들었고, 다른 한 사람은 칼을 들었다. 그토록 증오하던 기자라는 존재는 최달포에게는 결국 진실을 밝히기 위해 반드시 되어야 하는 그런 존재가 되었다. 한편 아버지의 허망한 죽음을 알게 된 그의 형 기재명에게 남은 건 복수뿐이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헤어진 형제라는 사실은 이들의 또 다른 비극을 예고한다. 최달포가 사회부 기자라는 점은 그가 앞으로 기자가 되기 위해 진실을 파헤치는 그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범죄자가 된 자신의 형을 만나게 될 거라는 걸 예상케 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세상에 칼을 꺼내든 형 앞에서 과연 최달포는 진실의 말만을 전할 수 있을까.

 

<피노키오>가 세상에 문제의식을 던지는 방식은 이처럼 새롭다. 이 드라마는 한 가족의 비극을 처절하게 바닥까지 보여줌으로써 왜 누군가의 거짓말이, 또 그것을 받아 제 멋대로 과장한 언론의 거짓말이 얼마나 큰 폭력인가를 드러낸다. 억울하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저 세상으로 보내고 형마저 복수의 삶을 살아가게 된데다 자신은 신분조차 숨기며 살아야 하는 최달포라는 주인공은 아마도 최근 드라마 속 주인공 중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 아닐까 싶다.

 

<피노키오>는 현실의 비극을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을 보여준다. 신문 사회면 사건을 보면 가해자와 피해자로 단순히 구분되어 보이지만 <피노키오>는 그 겉으로 보이는 면이 아닌 그들이 왜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됐는가를 보여준다. 따라서 가해자와 피해자 이면에 숨겨진 진짜 부조리한 현실이 무엇인가를 파헤친다.

 

이것은 박혜련-조수원 콤비가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세계이기도 하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역시 사건 이면의 이야기를 듣는 주인공을 통해 비극의 진짜 실체에 다가가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았던가. <피노키오>는 그래서 그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피노키오>의 기저에 깔린 감정이 분노라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왜 이들은 이렇게 분노하는가. 그들이 분노하는 그 이유를 찾아가다보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잘못 흘러가는 시스템의 현실과 마주한다. 그 현실은 MSC의 송차옥(진경) 같은 인물로 드러나기도 하고, 이 가족을 한 순간에 파탄으로 몰고 간 거짓말을 한 화재현장의 작업반장의 얼굴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분노라는 감정은 어쩌면 지금 현재 대중들이 세상에 막연히 품고 있는 어떤 정서일지도 모른다. 왜 그저 열심히 살려고 했던 것뿐인데 이런 지독한 지옥에서 허우적거리는 삶을 살게 되었던가.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마치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는 것처럼 <피노키오>는 우리 앞에 그 감춰진 부조리의 얼굴들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리고 던져지는 질문. 과연 이 시대의 말과 칼은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 말과 칼은 정의라고 이름 붙여질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정의는 진실을 통해 실현되고 있을까. 이 드라마가 그토록 절절하게 우리의 마음에 닿고 있다는 것은, 세상에 난무하는 말과 칼이 거꾸로 아무 죄도 없는 서민들을 향해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 말과 칼은 다시 제 방향을 찾을 수 있을까. <피노키오>의 복수극이 그 어느 드라마보다 흥미진진해지는 대목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