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만인의 연인에서 전설로 돌아오다

"더 이상 속이고 살기 싫어. 그럴 자신 없어." "난 노래하고 기타 칠 때가 제일 즐거워." "나 이제 다시 사내놈 뒤에 숨어사는 비겁한 짓거리는 안할라구. 나 그냥 전설희로 살려구." '나는 전설이다'라는 드라마에서 김정은이 전설희라는 캐릭터로 분해 하는 일련의 대사들을 듣다보면 그것이 연기자로서 자신의 속내를 토로하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그녀가 지금 '나는 전설이다'라는 드라마를 통해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은 지금껏 숨겨진 그녀의 진면목처럼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물론 파티에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일 때 그녀는 우아하다. 하지만 그 화려함이 그녀의 진짜 얼굴은 아닌 것 같다. 그녀는 오히려 그 자리를 벗어나 노래방에서 맘껏 소리 질러 노래를 부르고, 기타를 들고 무대 위에 올라 전에는 몰랐던 카리스마를 뿜어낼 때 더 진짜 같은 자연스러움을 보여준다. 우아함과 털털함 사이에서 도도함과 반항기어린 모습 사이에서 그녀는 어느 쪽으로 흘러도 편안해지는 연기자의 얼굴을 얻었다.

김정은이 대중들에게 각인된 것은 '파리의 연인'에서 태영이라는 역할로 우리의 '만인의 연인'이 되면서부터이다. 물론 그 때 태영이라는 캐릭터도 전설희 못지 않게 괄괄하고 명랑했지만 우리의 기억에 남은 김정은의 이미지는 발랄하기 이를 데 없는 연인이었다. 그 후로 그녀는 우리에게 무슨 역할을 해도 계속해서 연인으로 자리해왔다. 김은숙 작가의 '연인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으로서 '연인'이라는 작품은 그녀가 가진 연인이라는 이미지를 끝까지 소비시키는 작품으로 남았다.

물론 '김정은의 초콜릿'은 그녀가 가진 연인의 이미지를 계속 이어간 방송 프로그램이지만 그녀는 다른 한편으로는 이 이미지를 넘어서 좀더 확장된 연기자로서의 변신을 꿈꾸었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혜경이라는 역할로 그녀가 보여준 강인한 면모는 그 가능성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그 후 '종합병원2'에서 환자의 입장을 더 생각하는 의사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영화 '식객-종합병원2'에서 성찬과 대결구도를 갖는 세계적인 요리사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 작품들이 그녀의 변신을 담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는 전설이다'는 그 연기자로서의 변신이 담겨지고 있다는 점에서 김정은에게는 중요한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이 작품에서 김정은은 상류층의 우아함에서부터 록 밴드의 털털함까지를 보여주고 있고, 이혼을 해주지 않으려는 남편 지욱(김승수)과 법정 대결을 벌이면서 동시에 마돈나 밴드의 리더로서 멤버들을 이끌어나가는 모습을 연기하고 있다. 현실의 갑갑함은 법정 대결이라는 극단적인 공간 속에서 그려지고, 그 갑갑함을 털어내는 무대라는 공간이 병치됨으로써 이 양극단의 세계는 작품 하나로 오롯이 담겨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양극단을 오가게 해주는 인물은 다름 아닌 김정은이다.

김정은은 이제 '만인의 연인'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연기자로 우리에게 돌아오려 한다. '나는 전설이다'는 그 변신을 가능하게 해주는 작품이 될 것으로 보인다. 쾌활한 얼굴 속에서 언뜻 우울함이 엿보이고, 그 우울함 속에 그것을 깨쳐버리는 강인함이, 또 그 강인함 옆에 자리한 부드러운 이미지가 그녀의 연기자로서의 다양한 면모를 감지하게 만든다. 어쩌면 이 작품은 훗날 그녀의 연기 인생에서 '전설'로 남을 지도 모를 일이다.

‘종합병원2’보다 ‘하얀거탑’에 끌리는 이유

‘종합병원2’의 정하윤(김정은)이란 캐릭터에 대해 말들이 많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인데다가, 어떠한 끌리는 면모도 발견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당연히 그 역할을 연기하는 김정은에게도 화살이 날아간다. 실제로 ‘종합병원2’의 김정은이 연기하는 정하윤이라는 옷은 잘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다.

드라마 초반의 정하윤이란 캐릭터는 좀 과장된 성격으로 김정은이 지금껏 빛을 발해왔던 코믹 연기와 잘 어울리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 캐릭터가 초반부의 발랄함에서 어느 순간 진지해지는 시점에서부터(바로 이 시점부터 캐릭터에 대한 매력도 떨어졌다) 연기자와 캐릭터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도대체 왜 주인공이 매력이 떨어지는 이런 상황이 생긴 걸까.

정하윤은 의사이면서 변호사의 마음을 갖고 있는 복합적인 성격의 캐릭터다. 변호사로 일해왔으나 아버지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의사가 되는 이 인물은, 병을 고치는 의사이면서도 그 의사의 의료행위를 감시하게 되는 변호사의 입장을 동시에 갖게 되면서 동료 의사들과 대립하게 된다. 이 드라마가 제시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 캐릭터를 통해 명확해진다. 의사들의 의료사고 문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동시에 의사의 입장까지도 포착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의학드라마의 계보 속에서, 또 우리네 고질화된 집단적 사회 풍토 속에서 이 낯선 정하윤이라는 인물은 그다지 환영받을 만한 캐릭터는 아니다. 집단주의에 경도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내부고발자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차갑다. 분명 이런 주제의식을 드라마로 풀어내겠다는 시도 자체는 대단히 신선한 것이다. 하지만 이 대중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캐릭터를 어떻게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들 것인가 하는 고민은 이것과는 다른 문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금껏 ‘종합병원2’가 그려낸 정하윤이란 인물은 그다지 매력적이지가 않다는 점이다.

이미 의료사고에 대한 메시지를 건드렸던 드라마가 있다. 그것은 ‘하얀거탑’이다. 여기서는 장준혁(김명민)과 최도영(이선균)이 부딪친다. 사실 최도영은 의료정의를 구현하려는 인물이었지만 대중들은 오히려 장준혁에 더 열광했다. 그것은 이 드라마가 정의를 구현하는 내부고발자인 최도영보다는 집단주의의 희생양으로 그려지는 장준혁에 더 집중한 이유다. 장준혁에 포커스를 맞췄지만 결과적으로 이 드라마는 의료사고에 대한 메시지를 충분히 얘기했다. ‘종합병원2’가 가진 대중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캐릭터의 문제를 거꾸로 뒤집어 접근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하윤을 연기하는 김정은이라는 배우가 가진 아우라가 여전히 코믹쪽에 더 기울어 있다는 것도 이 드라마로서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이 복잡한 심리상태를 이해시키는데 적어도 배우가 어떤 틀에 갇힌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다. 물론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무언가 다른 내면연기를 보여주었던 김정은이지만, TV 속에서 우리에게는 여전히 ‘파리의 연인’의 태영으로 더 남아 있는 게 사실이다. 어딘지 상큼 발랄한 이미지를 기대했던 시청자라면 정하윤이라는 매력이 떨어지는 캐릭터의 옷을 입은 김정은에게 실망감을 느꼈을 수 있다.

‘종합병원2’는 ‘하얀거탑’과 비교하면 착한 드라마다. 거기에는 의료사고에 대해 고민하고 후회하는 의사들이 자기반성의 과정을 거치는 장면들을 보여준다. 이것은 ‘하얀거탑’과는 정반대의 행보다. ‘하얀거탑’은 대신 강력한 욕망을 가진 한 인간의 질주에 더 집중하고, 그 추락의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거꾸로 의료사고에 대한 문제의식을 끌어낸다. 차이는 그 과정을 보여주는 캐릭터에 대한 대중들의 매력도다. 우리는 아직은 ‘종합병원2’의 정하윤보다는 ‘하얀거탑’의 장준혁에 더 끌린다. 어쩌면 그것이 대중들에게는 더 리얼하게 의사집단을 그려낸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실제 현실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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