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정하고 센 <태후>의 소재들, 이러니 안 될 수가 있나

 

전쟁과 재난에 이어서 이번엔 전염병이다. 아주 작정하고 센 소재들을 총동원 하겠다 마음먹은 기색이 역력하다. 이러니 시청률이 안 오를 수가 없다. KBS 수목드라마 <태양의 후예>9회에 30%를 훌쩍 넘겨버리더니 거기에 멈추지 않겠다는 듯 이제 31,6%(닐슨 코리아)로 순항중이다.

 


'태양의 후예(사진출처:KBS)'

멜로는 약하다? 극성이 약한 건 사실이다. 생각해보라. 멜로의 갈등들을 통해 인물들이 겪게되는 결과란 고작 사랑이 이루어지거나 헤어지거나가 아닌가. 물론 그 사랑이 죽음을 담보로하기도 하지만. 사극 같은 장르가 극성이 강한 건, 늘 죽음을 옆에 달고 다녀서다. 알다시피 전쟁, 재난, 전염병 같은 모든 소재가 활용되는 장르가 바로 사극이다.

 

그런데 <태양의 후예>는 현대극이면서도 이 모든 소재들을 다 사용하고 있다. 이게 가능해진 건 우르크라는 가상의 지역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르크가 아닌 어떤 현실 공간이었다면 이처럼 다양한 소재들이 한꺼번에 벌어지는 공간으로 활용하기가 어려웠을 게다. 하지만 우르크는 저 사극이 시간의 거리를 통해 뭐든 벌어질 수 있는 사건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처럼, 막연한 공간의 거리를 만들어 전쟁이든 재난이든 전염병이든 발생시킨다.

 

물론 그 공간에는 유시진(송중기)이나 강모연(송혜교), 서대영(진구), 윤명주(김지원) 같은 현실감을 부여하는 인물들이 들어간다. 그들이 군인 혹은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인물들이라는 건 <태양의 후예>가 하나의 가상극 같은 뉘앙스를 갖게 만든다. 마치 <헝거게임>처럼 이들은 가상의 공간에서 갖가지 벌어지는 사건들을 마주하고 그 문제들을 해결해나가야 한다. 물론 그 사건들은 모두 목숨을 담보로 한다는 저에서 게임이지만 살벌하다.

 

멜로드라마는 어디든 지뢰가 깔려 있고 누구든 총을 꺼내 들며 때론 지진이 일어나 건물을 통째로 삼켜버리고 게다가 치명적인 전염병에까지 노출되어 있는 이 살벌한 공간 위에서 피어난다. 강모연이 유시진이라는 위험한 남자에게 우리는 서로 맞지 않는다며 이별을 통보하지만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 건 그녀가 우르크라는 뭐든 가능한 가상공간으로 들어오면서부터다. 그 공간은 위험하지만 그만큼 달콤한 유시진이라는 로맨스의 인물이 있는 곳이다.

 

위험과 로맨스. 상극인 것 같지만 이만큼 잘 어울리는 조합도 없다. <로맨싱 스톤>이나 <크로커다일 던디> 같은 전통적인 로맨스 영화들을 보라. 위험한 정글이나 늪지대에서 모험을 펼치는 위험한 남자 주인공과 도시에서만 살아와 그런 곳이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여 주인공의 로맨스는 더 달콤하다. 그것은 어찌 보면 안전한 도시에서 살아온 여성들이 상상으로 꿈꾸는 거친 로맨스일 것이다.

 

<태양의 후예>의 우르크는 그래서 모든 위험한 상황들이 다 벌어지는 곳이지만 실제 공간이 아니라는 점에서 여성들이 꿈꾸는 로맨스의 공간으로서 기능한다. 그 곳은 마치 현실에서는 유시진이라는 인물을 밀어냈던 강모연이 상상을 통해 만들어낸 가상공간 같은 느낌을 준다.

 

물론 이런 장르적 설정들은 이미 많은 로맨스물에서 무수히 활용되어 왔던 장치들이다. 하지만 <태양의 후예>가 절묘하게 여겨지는 건 여기에 군인이라는 어찌 보면 우리식의 클리셰들이 가능한 인물들을 집어넣어 우리의 색깔로 채색했다는 점이다. 가상공간에 마치 강모연의 상상에 의해서 창조된 듯한 유시진 같은 이상화된 군인들. 이를 현실과 비교해 리얼리티 운운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로맨스물의 판타지일 뿐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의 후예>가 대단하다 여겨지는 건 늘 현실 공간에만 붙잡혀 그 상상의 한계를 스스로 지우고 있던 드라마를 우르크라는 가상공간을 세우고 그 안을 뭐든 벌어질 수 있는 이야기로 채워 넣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고 또 그 사랑을 누군가 반대하고 그래서 그걸 넘어서기 위해 안타까운 안간힘을 벌이는 식의 현실의 멜로가 식상하게 느껴진 건 로맨스물 특유의 판타지가 거기에서는 더 이상 발견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태양의 후예>는 적어도 그 한계를 뛰어넘고 있다. 우르크라는 공간은 그래서 김은숙 작가가 상상으로 구현해낸 멜로의 실험실 같은 느낌마저 준다. 뭐든 가능한 로맨스의 공간. 이러니 안 될 수가 있나

<위탄3>의 감동을 해친 추가탈락 시스템

 

실력 있는 참가자가 너무 많은 것도 고민이다. <위대한 탄생>의 지난 시즌에 비해서 시즌3는 확실히 자기 색깔이 확실한 참가자들이 넘쳐났다. 그러니 오디션 프로그램의 성격상 누구를 합격시키고 누구를 탈락시키는 일은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심사위원들이 참가자들의 무대를 그저 즐길 수만은 없는 건 그 때문일 게다.

 

'위대한 탄생3'(사진출처:MBC)

하지만 이건 시청자도 마찬가지다. 예선에서부터 주목해서 봐온 참가자라면 더욱 그렇다. 어떤 그룹은 달랑 한 명만 합격되고 어떤 그룹은 그래도 몇 명이 합격되는 과정을 보면서 그 날의 컨디션 때문에 자신이 주목해온 참가자가 떨어진다면 시청자로서도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쩌랴. 어차피 최종 무대까지 올라갈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어 있으니 말이다. 아무리 다양성의 관점으로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해도 어느 정도의 희생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미 합격시킨 참가자를 아무런 추가 테스트도 거치지 않은 채 연령별 6명(팀)씩을 뽑기 위해 추가탈락을 시키는 건 너무 잔인해 보인다. 이미 뽑혀서 합격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참가자들 중 탈락통보를 받은 이들은 어찌 보면 더 아픈 경험을 하게 된 셈이다. 이 룰로 인해서 10대 합격자 7명 중 김지원이 탈락했고, 20대 초반 남자 그룹에서 이재민, 김대연, 서영무가 탈락했다. 물론 어떤 연령그룹에는 인원이 부족해서 생긴 추가합격자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추가로 탈락자를 낸다는 결정은 너무 심한 것 같다.

 

도대체 왜 이렇게 굳이 연령별 그룹으로 나눠야 했고 그 인원이 꼭 6명이어야 하는 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 건 당연하다. 애초부터 그런 룰을 제시했다면 참가자들이나 이 과정을 바라보는 시청자들도 용납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전에 이러한 룰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었다. 시청자로서는 추가 탈락이라는 룰이 프로그램에 맞추기 위해 자의적으로 내려진 결정으로밖에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김대연 같은 참가자는 이전 미션에서 전원합격이라는 통보를 받은 후에 추가 탈락 발표로 자신만 탈락하게 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아예 애초부터 탈락을 시켰다면 그 상실감은 덜 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런 과정이 방송으로서는 더 자극적이고 효과적이라고 볼 수 있다. ‘전원합격’이 주는 강도가 강한 데다, 거기서 또 추가 탈락하는 인물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방송의 측면일 뿐이다. 이 과정에서 그 대상이 되는 참가자는 결과적으로 방송에 그저 활용되고 폐기되는 인물이 되고 만다.

 

물론 이것을 의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다 보니 인원이 더 뽑히게 됐을 것이고, 그래서 본래 계획에 맞추려다 보니 무리하게 추가 탈락자가 발생하게 됐을 것이다. 즉 이것은 애초에 고안했던 시스템의 결함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일 게다. 그래서 그 탈락자를 뽑아야 하고 또 통보해야 하는 심사위원들이 그들 한 명 한 명에게 진심어린 위로의 말을 건넨 것은 그것이 진짜로 미안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최소한 시청자들에게 제작진은 왜 그런 연령별 팀 구성이 필요했는지 설명해줄 필요가 있다. 그것이 혼신의 힘을 다해 누구보다 절실하게 오디션에 임해온 참가자들에 대한 예의이고 그들을 응원해온 시청자들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프로그램의 목표에 맞추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한계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목표에 희생된 이들과 시청자들에게 그 과정을 설득하고 납득시켜야할 필요는 있지 않을까.

 

그 어느 때보다도 기량이 뛰어난 참가자들이 많은 <위대한 탄생3>다. 그래서 시청자들도 그 한 명 한 명의 당락에 대해 더 민감해질 수 있다. 이전 시즌들보다 훨씬 큰 재미와 감동을 전하고 있는 <위대한 탄생3>이기 때문에 이번 추가 탈락자를 갑작스럽게 만들어버린 융통성 없는 룰은 더욱 안타깝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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