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청춘>, 회고담 속에 담긴 청춘의 기억

 

윤상, 유희열, 이적이 함께한 <꽃보다 청춘>의 페루 여행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사실 중년의 나이에 어느 날 훌쩍 아무런 준비 없이 여행을 떠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중년이란 지극히 현실적인 나이라서 그렇다. 회사를 다니는 중년이라면 위로 아래로 챙겨야할 일들이 산적해 개인적인 시간이라는 것이 거의 없는 게 현실이다. 이것은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도 그렇다. 가족을 챙기기 위해서라면 자신 따위는 살짝 희생시켜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나이가 바로 중년이다.

 

'꽃보다 청춘(사진출처:tvN)'

<꽃보다 청춘>은 바로 이 현실에 꽉 막혀 있는 중년들을 어느 날 납치하다시피 비행기에 태워 그것도 남미 페루에 떡 하니 갖다 놓는다. 황당한 일이지만 이상하게 그것은 그들을 설레게 만든다. 유희열은 남녀가 함께 혼숙하는 도미토리에서의 불편한 하룻밤조차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며 계획에 없던 여행을 하나하나 계획하기 시작하고, 이적은 영어는 물론이고 스페인어부터 일어, 중국어 등등 각종 언어들을 급조해 섭렵(?)하며 여행의 소통을 책임진다. 갑작스런 출발에 부대끼는 몸을 달고 온 윤상은 그러나 그 와중에도 동생들을 배려하며 짐이 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여행 자체를 싫어하던 윤상은 동생들과 여행에서 여행의 묘미를 찾아낸다.

 

여행의 목적지인 마추피추 앞에서 그들은 왜 눈물을 흘렸을까. 그것은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그 성취감과 현실에 묻혀 꿈도 꾸지 못했던 그런 역사적인 문명 앞에 서 있다는 감흥이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시간은 그 무구한 세월을 버텨온 유적 앞에서 다시금 의미를 되찾는다. 그저 하루하루를 채워가듯 일에 쫓겨 살아가던 중년들은 세월이 무상한 유적 앞에서 자신들이 보낸 현실의 안간힘이 마치 먼지처럼 가벼워지는 걸 느꼈을 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이들의 여행은 결코 호락호락한 것만은 아니었다. 비행기를 타고 미국을 거쳐 남미까지 들어가는 데만도 20시간이 꼬박 걸린다. 거기서부터 또 마추피추까지 가는 여정은 버스로도 하룻밤 이상을 더 가야 하는 거리다. 그러니 중년의 그들에게 이동거리만으로도 도전이 됐을 터다. 하지만 그 여행을 통해 이들은 동료로서 선후배로서의 끈끈한 관계를 재확인한다. 아픈 윤상을 무심한 척 살뜰히 챙기는 유희열의 마음이 보이고, 그런 윤상의 사연을 들으며 왈칵 울어버린 이적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리고 동생들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표시하는 윤상이 보인다.

 

중년 남자 셋이 마음을 통해 가까워지니 이제 그들은 소년이 된다. 마치 어린 시절의 개구쟁이로 돌아간 듯, 현실 바깥으로 나와 적응된 그들은 점점 청춘이 되어간다. 이것은 이 프로그램이 왜 중년들의 여행을 소재로 하면서 <꽃보다 청춘>이라 이름 붙인 이유가 될 것이다. 여행은 우리 모두를 청춘으로 되돌린다. 그리고 그 곳에서의 기억은 영원한 청춘의 기억으로 남게 된다.

 

여행에서 돌아온 이들은 다시 그들이 납치되듯 여행을 시작했던 자유로 김치찌개 식당에서 후일담을 나눈다. 그 후일담에는 세 사람의 여행에 대한 아련한 추억과 그리움이 묻어난다. “다시 가고 싶다는 말은 여행과 청춘에 모두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여행이든 청춘이든 다시 가고 그 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꽃보다 청춘>이라는 특별한 여행은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었다. 청춘이 그리운가. 그렇다면 떠나라. <꽃보다 청춘>은 그런 말을 전하고 있다.

 

'두근두근 내 인생', 죽음이 대수인가 두근대는 가슴이 있는 한

 

조로증에 걸려 몸은 이미 팔십 세 노인이 다 된 아름이의 나이는 열여섯 살. 공교롭게도 그의 부모인 대수(강동원)와 미라(송혜교)가 아름이를 갖게 된 나이도 열여섯이다. 열일곱에 낳았지만 그들이 만나 서로에게 두근대는 마음을 가졌던 건 열여섯. 이른바 우리가 흔히 이팔청춘이라고 말하는 나이다.

 

'사진출처:영화<두근두근 내인생>'

왜 하필 이팔청춘일까. 부모는 그 나이에 사랑을 했고, 한 번도 이성과의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아름이는 그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바로 이 이팔청춘이라는 설정은 <두근두근 내 인생>이라는 영화에 중요한 메시지와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팔청춘의 나이에 맞닥뜨리는 죽음이라니.

 

대개 병동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그것도 아이가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는 이야기는 전형적인 신파 구조가 될 가능성이 높다. 마음만 먹는다면 영화는 관객들을 눈물 쏙 빼는 경험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하지만 <두근두근 내 인생>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이웃집 할아버지 장씨(백일섭)에게 조로증 소년이 같이 늙어가는 처지잖아요라고 말하듯이, 울기보다는 웃으려는 노력을 더 많이 보여준다.

 

어린 나이에 일찍 죽음을 실감하기 때문일까. 아름이는 어찌 보면 부모와 어르신들까지 오히려 다독이는 어른의 심성을 보여준다. 엄마가 일하는 것을 덜어드리기 위해 자신은 싫을 수 있는 방송을 선선히 하겠다고 나서는 아이다. 영 상태가 안 좋아져 언제 죽을 지도 모른다는 걸 스스럼없이 토로하는 아이에게 오히려 아이처럼 발끈하는 건 칠순의 이웃집 장씨다.

 

영화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나이에 대한 선입견을 기분 좋은 훈훈함으로 깨버린다. 아직도 게임기에 집착하는 대수는 여전히 아이 같고, 그 앞에서 아름이는 부모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웃집 장씨에게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PD가 아름이가 어떤 아이인가를 묻자 친구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수십 년의 나이를 순식간에 훌쩍 뛰어넘는 뭉클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아름이 앞에서 짐짓 아이인 척 구는 대수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여전히 이팔청춘의 목소리로 대하는 미라나 모두 아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참을 수 없는 눈물을 흘린다. 어쩔 수 없는 부모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하지만 이들이 아름이 앞에서 눈물을 숨기는 것은 신파 구조로 눈물샘을 더욱 자극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이 영화의 주제와도 맞닿아 있다. 다가오는 미래의 슬픔보다 더 중요한 건 지금 함께 하는 순간의 즐거운 기억들이다.

 

김애란 작가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인지 영화는 이야기가 가진 힘에 대해 역설한다. 나이 열여섯에 죽음을 맞이하든 아니면 팔십에 죽음을 맞이하든 결국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중요한 건 그 열여섯 이팔청춘에 가슴 설렘을 마음 한 구석에 품고 편안히 누울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대수와 미라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는 장면은 그래서 마치 동화 같은 이야기로 재구성된다. 단 한 번도 이성과의 두근대는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던 아름이는 아마도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부모가 느꼈던 그 이팔청춘의 설렘을 처음으로 공유했을 지도 모른다. 이것은 소설 같은 이야기의 힘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사라져도 이야기는 영원히 남는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결국 이 영화가 신파로 흐르지 않고 잔잔하게 우리네 삶을 얘기해줄 수 있었던 건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눈물이 아닌 웃음의 기억으로 채워주려 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름이의 기억 속에는 부모의 모습이 여전히 아이 같은 아빠 대수와 당찬 엄마 미라의 이팔청춘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죽음? 그게 대수인가. 당장 두근대는 가슴이 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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