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력 논란보다는 캐릭터 논란

도무지 드라마 속 캐릭터에 몰입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연기력의 문제인가 아니면 캐릭터 자체의 문제인가. 이것은 언뜻 보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처럼 들린다. 그만큼 판정하기가 애매모호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캐릭터라도 연기자가 소화해내지 못하면 그 캐릭터는 살지 못한다. 거꾸로 아무리 좋은 연기자라도 캐릭터가 좋지 못하면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얻어낼 수 없다. 그 캐릭터를 살려낼 수 없다는 말이다.

‘에덴의 동쪽’에서 이다해는 꽤 괜찮은 연기력을 보였다. 이다해의 전작들이 조금은 코믹한 가벼운 캐릭터들이었던 반면, 이 작품 속의 민혜린은 꽤 진지한 정극의 연기를 필요로 한다. 이다해가 갑자기 더 이상 작업을 함께 할 수 없다는 의사를 표하기까지 그 누구도 그녀의 연기력을 가지고 문제를 삼은 이는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다해 자신이 더 이상 극중 캐릭터인 민혜린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사의를 표했다.

이것은 어쩌면 애초부터 예고되어 있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민혜린이라는 캐릭터는 면밀히 살펴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걸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녀는 극 초반에 한세일보 회장 딸이지만 천덕꾸러기 신세로 아버지에게 돌팔매질을 하듯 반항하던 인물이었는데, 지금은 거꾸로 그 한세일보의 실질적인 주인 역할을 하고 있다. 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민혜린의 언니인 혜령의 남자 백성현(박성웅)이 왜 그녀를 짝사랑하고, 그로 인해 언니는 정신병원까지 가게 됐느냐는 점이다. 이 설정은 극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제 백성현이나 혜령 같은 캐릭터는 극중에서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또 민혜린은 함께 노동운동을 하면서 만난 이동욱(연정훈)과 연인관계가 되는 듯 보였으나 어느 순간 친구관계로 돌아섰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형인 이동철(송승헌)을 짝사랑을 하게 된다. 우연이 겹치는 것도 이해할 수 없지만 이처럼 사랑을 남발하는 민혜린이라는 캐릭터는 그 사랑에서 어떠한 결실도 얻지 못한 존재다. 혼자 사랑하고 혼자 떠나 보내주며 또 혼자 짝사랑하는 식이다. 사랑의 결실이 아니라면 이러한 관계 자체가 극의 진행과 어떤 연관을 가져야 하는데 그 마저도 발견하기가 어렵다. 민혜린이라는 캐릭터는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다해의 그 같은 행동이 잘한 것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그 행동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죽은 캐릭터를 뒤집어쓰고 연기를 하다가는 자칫 그 연기를 하는 연기자까지도 (이미지가) 죽을 수 있다. 흔히들 말하는 연기력 논란은 실제로 연기자가 연기를 못해서 생기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궁극적인 실체는 캐릭터에 문제가 있어서 발생하는 것이다. 연기력 논란의 근본 원인은 캐릭터 논란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연기력이 부족해도 작가는 좋은 캐릭터로 그 부분을 메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때 연기력 논란에 휩싸였으나 좋은 캐릭터를 만나 그 자체를 불식시킨 사례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윤은혜는 출연작품마다 연기력 논란이 있었지만 ‘커피 프린스 1호점’의 고은찬을 만나면서 그 논란을 훌훌 벗어버렸다. 이연희는 늘 그 발음 문제 때문에 연기력 논란의 도마 위에 오르지만, 이명세 감독의 영화 ‘M’에서는 그래도 괜찮은 캐릭터 몰입을 보여주었다. 연출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최지우는 ‘에어시티’에서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를 만나 고전했지만 ‘스타의 연인’을 만나서는 꽤 괜찮은 멜로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노희경 작가의 일련의 드라마를 통해 배우로 거듭난 연기자들, 예를 들면 유호정, 한고은, 김민희 등도 그 범주에 포함된다. 즉 좋은 캐릭터는 연기력 논란 자체를 불식시킬뿐더러 오히려 스타에게 연기자로서의 길까지 열어준다.

하지만 정반대의 상황도 생긴다. 김정은은 ‘파리의 연인’에서는 코믹한 멜로 연기를, 또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는 좀더 진지한 연기를 펼쳐 보였지만, ‘종합병원’의 정하윤이란 공감을 얻기 힘든 캐릭터를 만나면서 연기력 논란까지 감수하게 됐다. 이다해가 연기라고 있는 민혜린이라는 캐릭터 역시 어쩌면 이 길로 가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연기력 논란과 캐릭터 논란은 완전히 그 문제의 주체가 다르다. 연기력 논란은 연기자의 문제이고 캐릭터 논란은 작가의 문제다. 이다해의 발언은 자칫 연기자의 문제로 튈 지도 모르는 자신의 상황을 작가의 문제 때문이라고 밝힌 것이다. 즉 연기력 문제가 아닌 캐릭터 문제라고 선을 그은 것이다. 이다해의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이제 연기력 논란을 얘기할 때, 단순히 연기자만의 문제에서 국한될 것이 아니라, 그 연기자가 입고 있는 캐릭터라는 옷까지도 염두에 두어야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흔히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를 보면서(이런 캐릭터는 베테랑도 연기몰입이 안될 것이다) 그 어설픈 연기력을 욕하지만, 그런 캐릭터를 창조해낸 작가는 시청률이라는 방패막 뒤에 안전하게 앉아 있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실제로 문제를 만들어낸(심지어 시청률을 위해 의도적으로 문제를 만들기도 하는) 작가는 웃을지 몰라도 그 작가의 손에 이끌려 인형처럼 조종되는 연기를 해야하는 연기자는 자칫 연기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너는 내 운명’의 발호세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욕하면서 보는 프로그램이 대세인가. 최근 일일드라마 ‘너는 내 운명’의 발호세(?)라는 인물이 화제다. 드라마상 이름은 본래 강호세인데, 흔히들 말하는 발연기(발로 하는 연기 같다는 뜻으로 연기력 부재를 비하하는 말)의 ‘발’자를 붙여 발호세라 불리고 있다. 발호세의 연기력은 지탄의 대상에서 이제는 격상되어 “연기의 신기원을 열었다”는 식으로까지 오히려 인기(?)를 얻고 있다. 손바닥에 맞지도 않았는데 어색하게 쓰러지는 장면은 드라마 속에서는 그저 지나가는 장면이었을지 몰라도 인터넷 세상으로 오면 하루에도 수만 번씩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발연기의 끝장을 보여준다.

발호세의 백미는 이른바 ‘붕가시리즈’에서 압권을 이룬다. 대사가 되지 않아 “저희 분가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묘한 뉘앙스로 들리자, 네티즌들은 이 장면을 떼어 붙인 후, 밑에 자막으로 “저희 붕가하겠습니다”라는 설명을 덧붙여 놓았다. 댓글들은 내용은 없고 대부분 “ㅋㅋ” 같은 웃음소리만 가득 차 있다. 이 정도면 어설픈 연기를 보면서 화가 났던 시청자들도 그저 박장대소할 수밖에 없다. 이른바 정극의 연기가 너무나 어설퍼 그 자체가 개그처럼 희화화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분명 욕이지만, “그래서 안 본다”는 식의 욕이 아니다. 오히려 “그래서 기대된다”는 의미까지 들어가 있다. “그래 막장드라마야 끝까지 한번 해봐라”는 식의 적극적인 체념적 대응이다.

만일 ‘너는 내 운명’이 꽤 괜찮은 주제와 스토리, 그리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캐릭터를 세워둔 드라마였다면 어땠을까. 몇몇 발연기는 그저 웃어 넘겨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설정으로 가고 있는데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은 40%에 육박한다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욕하면서 다 본다는 얘기다. 한편에서는 드라마 속 비현실적 캐릭터를 욕하면서 보고, 또 한편에서는 이 비현실적인 드라마를 욕하면서 본다는 말이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의 역사는 너무나 깊어서 어디서부터 그것이 비롯되었는지 찾기가 어렵다. 어쩌면 저 신파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갈등이고, 그 갈등에는 대립하는 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한쪽에서 문제를 만들면 다른 쪽은 거기에 대한 대응을 하면서 드라마가 만들어진다. 이것은 드라마의 기본 얼개다. 그러니 어찌 보면 심정적으로 자기 편인 주인공을 핍박하거나 대립하는 대상을 욕하면서 드라마를 보는 건 정상적인 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나 캐릭터가 등장할 때다. 대부분 드라마를 보면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핍박하는데 요즘 같은 상황에 그런 시어머니가 있을 리 만무며 그렇게 한다고 당하는 며느리도 있을 턱이 없다. 그런데 그 비정상적인 상황이 드라마로 나왔을 때, 그 상식을 뛰어넘는 캐릭터는 오히려 힘을 발휘한다. 비현실적일수록 보는 시청자들의 어처구니없음은 더 커지고, 거기에 대한 분노, 혹은 적개심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그 상태를 느꼈다면 이건 그 드라마에 낚였다는 얘기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중독이라는 것이다. 중독은 자신에게도 그다지 좋은 것이 아니고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바로 그것 때문에 빠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비정상적이라 빠지는 것이다. TV의 주 시청층의 연령대가 높아지면서 그러나 이 중독적이고 퇴행적인 드라마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그 시청층에 환영을 받는다. 욕? 그것은 인터넷에서나 회자되는 것들이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라는 말에는 두 주체가 나뉘어져 있다. ‘욕하면서’는 그 드라마를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지만 그저 볼 수밖에 없어 보게된 시청층들이 인터넷에서 주로 하는 행위이며, ‘보는’은 이런 상황과 전혀 상관없이 그것의 문제를 인식하지 않고 보는 고정 시청층의 행위를 말한다. 이 두 주체는 나뉘어져 있고, 이 드라마를 보는 두 시선 또한 점점 갈라져가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TV가 점점 올드 미디어화되어 가고 있거나, 뉴미디어의 세대들의 감성을 끌어안지 못하고 있다는 징후로도 볼 수 있다.
(이 글은 스포츠칸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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