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지고 있는 드라마 트렌드, 로맨틱하거나 발칙하거나

 

KBS <함부로 애틋하게>가 종영했다. 이 드라마는 100% 사전 제작에 김우빈, 수지 주연, 스타작가인 이경희 작가가 참여하는 것으로 KBS 측도 최고의 기대작이라는 말을 아끼지 않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100% 사전 제작은 오히려 작품을 중도에서라도 수정할 수 없는 한계로 드러났고, 김우빈과 수지라는 최고의 캐스팅은 그럼에도 안 좋은 결과라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너무 옛날 드라마 같은 설정들과 코드들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함부로 애틋하게(사진출처:KBS)'

물론 <함부로 애틋하게>가 완성도가 떨어지거나 주제의식이 약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염치없는 세상에 대한 젊은 청춘들의 한판 대결구도가 이경희 작가 특유의 절절한 멜로로 연결됐다는 건 작품의 완결성으로는 나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의 시청자들이 원하는 코드들이나 정서와 이 드라마가 너무나 달랐다는 점이다. 성패는 결국 거기서 비롯됐다.

 

<함부로 애틋하게>가 방영될 때 등장한 경쟁작들을 보면 이 사전제작 드라마가 지금의 대중정서에 어떤 한계를 갖고 있었는가가 명확히 드러난다. 먼저 <W>를 보라. 어찌 보면 이 드라마는 지상파에는 어울리지 않는 드라마라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만화적이고 나아가 한치 앞을 예측하기 어려운 기상천외한 전개로 이어지고 있다. <함부로 애틋하게>가 그 시한부 설정만으로도 마지막 새드 엔딩을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 시도다.

 

<함부로 애틋하게>KBS라는 그래도 보수적 시청자들이 존재하는 채널에서 방영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호응이 없었다는 건 지금의 시청자들이 달라지고 있다는 걸 잘 보여준다. <함부로 애틋하게><W>가 가진 그 발칙한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작품의 완성도야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의 결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시청자들이 열광할만한 도발적이고 발랄한 상상력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뒤늦게 합류한 SBS <질투의 화신>은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 장르. <함부로 애틋하게>가 눈물 가득한 비극적 정조를 끊임없이 보여줬던 것과는 사뭇 다른 유쾌하고 웃음이 빵빵 터지는 전개를 보여준다. 가슴에 집착하는 여자 주인공과, 유방암에 걸린 남자 주인공, 그리고 그들이 한 병실에서 만들어가는 상황들은 웬만한 코미디보다 훨씬 더 우습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작품이 가볍기 만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질투의 화신>은 지독한 현실을 담아내기도 하고, 또 가족의 해체와 한 가장의 죽음을 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 비극성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그 비극과 함께 존재하는 희극적인 면들 또한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인물의 심정 속으로 들어가면 눈물 날 정도로 가슴이 아프지만,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그 상황은 눈물 날 정도로 웃기는 희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함부로 애틋하게><질투의 화신>이 현실을 다루는 방식과 비교해보면 너무나 무겁고 어떤 면에서는 비장함까지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런 접근방식은 지금의 시청자들에게는 그다지 호응을 얻기가 어려워졌다. 드라마 한 편조차 잠시 간의 휴식이나 위안으로 기능하길 바랄 정도로 지금의 시청자들은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힘든 현실을 힘들게 드라마 속에서조차 보는 건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 된다.

 

<함부로 애틋하게>라는 작품이 보여준 결과들은 지금의 시청자들이 적어도 두 가지를 요구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발칙하거나 아니면 로맨틱하거나. 발칙한 상상력을 끝없이 질주해나간 <W>, 비극성조차 웃음의 코드로서 전하는 <질투의 화신>으로 변한 트렌드 속에서 <함부로 애틋하게>는 사전제작이라는 족쇄에 묶여 힘을 발휘하기가 어려웠다

떡밥 넘치는 <배트맨 대 슈퍼맨>의 약한 메시지

 

사실 배트맨이니 슈퍼맨이니 하는 슈퍼히어로들에게 대단한 세계관과 메시지를 요구하는 건 과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기왕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배트맨으로 그려냈던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세계가 슈퍼히어로물이 더 이상 아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심지어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어른들의 세계일 수 있다는 게 드러난 마당에, 꼭 이런 세계관과 메시지에 대한 요구는 절대로 과한 것이 아닌 게 되었다.

 


사진출처:영화<배트맨 대 슈퍼맨>

하도 오랫동안 예고편을 통해 떡밥을 던져놔서인지 <배트맨 대 슈퍼맨>에 거는 기대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제목대로만 보면 배트맨과 슈퍼맨이 대결하는 이 구도가 마치 아이들이나 좋아할 법한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같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 슈퍼히어로물에 대해 철학적 세계관을 투영시켜 바라보는 시각이 생긴 지금, 이 대결구도는 다양한 의미와 메시지의 도출을 기대하게 만든다.

 

알다시피 배트맨은 인간이고 슈퍼맨은 외계인이다. 아니 슈퍼맨은 그저 외계인이 아니고 배트맨과 비교하면 거의 신적인 존재다. 그러니 이 대결은 인간과 신의 대결로 보일 수 있고, 나아가 인간과 이종족이라는 타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배트맨 대 슈퍼맨>은 실제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신격화되어 있는 슈퍼맨은 과연 인간을 보호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위협하는 존재인가. 슈퍼맨과 그를 쫓아 지구를 침공한 조드 장군과 일당과의 대결로 초토화되어버린 도시 속에서 배트맨은 그런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의 문제로까지 나아간다. 과연 슈퍼맨은 믿을만한 존재인가. 아니 인간이 아닌 신은 과연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인가.

 

<배트맨 대 슈퍼맨>이 그리는 신과 인간의 대결구도가 저 성서의 이야기를 따왔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지구를 산산조각낼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슈퍼맨은 신적 존재이지만 그는 인간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 위대한 사랑은 지구로 떨어진 아기를 키워준 어머니로부터 나온다. 이런 인물 캐릭터에서 우리는 성서의 많은 인물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철학적인 이야기의 구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그 진지한 질문보다는 간단한 해결과 블록버스터 볼거리에 더 치중한다. 물론 그 볼거리는 잭 스나이더 감독의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충분히 관객들의 시선을 잡아 끌만큼 매력적이다. 게다가 향후 쏟아져 나올 DC 코믹스의 히어로들 이야기에 대한 떡밥들도 넘쳐난다. 아마도 이 작품으로 인해 앞으로 나올 저스티스 리그의 슈퍼히어로 각각의 이야기들 역시 관심을 끌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도입부분의 진중한 메시지가 후반부에서 흐지부지되는 과정은 기대한 만큼 큰 실망감을 남긴다. 그래서 <배트맨 대 슈퍼맨>이 차용한 신과 인간의 이야기 같은 철학적 주제가 앞부분에 강조된 것은 후반부의 말도 안 되게 기막힌 볼거리들을 그저 만화가 아닌 것으로 여겨지게 하기 위한 장치 정도로 여겨지는 면이 있다. 만일 앞부분의 진중한 질문들이 없었다면 영화 후반부의 많은 장면들은 너무 과도해 실소가 나왔을 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영화는 재밌다. 적당히 진지하고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시각적 즐거움이 넘쳐난다. 하지만 <다크나이트 라이즈> 같은 진중한 메시지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지도 모른다. 이것은 어쩌면 그만큼 큰 기대감 때문일 수 있다. 어차피 철학적 질문을 던졌다면 그만한 메시지를 담아냈어야 한다는 그 기대. 혹평이 쏟아진 건 이제 슈퍼히어로물에서도 철학적 주제를 기대하게 된 그 달라진 시선 때문이다

<사도>에 이어 <육룡>에서도, 어른들과 맞서는 유아인의 청춘

 

욕심이요? 왜 제가 가진 꿈만 욕심이라고 하십니까? 왕이 된 것은 아바마마의 꿈이 아니었습니다. 의안대군 역시 꿈을 꾼 적이 없을 것이나 세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 그런 꿈을 꾸어왔습니다. 헌데 왜 제 꿈만 욕심입니까?” SBS <육룡이 나르샤>에서 이방원(유아인)은 세자가 되려는 욕심을 버리라는 아버지 이성계(천호진)에게 그렇게 울분을 토로한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역사적 사실만 두고 보면 이성계가 그 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또 정도전(김명민)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 않고 조선을 건국해 모든 권력을 틀어쥔 채 새나라라는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이방원이 정몽주(김의성)의 폭주를 막아서다. 이성계도 정도전도 정몽주를 끌어안기 위해 그들이 죽을 위기에 처하고 패업마저 수포로 돌아갈 상황에 이르렀을 때조차 그저 손을 놓고 있었다.

 

그 때 이방원만은 이념이 아니라 실행으로써 이 신조선의 꿈이 가능하다는 걸 간파하고는 정몽주를 선죽교 위에서 죽였다. 물론 그 행위를 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 기반 위에 새로운 조선을 세워놓고는 아들이자 제자이면서 사실상 새 나라를 세우는데 일등공신이랄 수 있는 이방원을 희생양으로 내모는 이성계와 정도전의 행위 또한 정당하다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모든 건 이 젊은 청춘의 행동으로 이뤄졌지만 어른들은 그를 희생해 실리와 명분 모두를 가져가려 한다. 이 얼마나 잔혹한 일인가.

 

조선 건국이라는 패업을 달성하는 과정을 그리는 <육룡이 나르샤>가 막상 그걸 이룬 후 어떻게 이 육룡의 사분오열을 그려낼 것인가는 우려와 기대가 섞이는 대목이었다. 즉 육룡이 한 데 힘을 모아 구악을 밀어내고 꿈을 이뤄가는 그 과정은 가슴 설레는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에 벌어지는 권력 투쟁의 이야기는 육룡 간의 대결 구도를 만들면서 자칫 구심점을 잃을 위험성도 있었다. 물론 조선 건국까지는 육룡이 저 마다 등가의 위치를 확보해왔다면 이제부터는 그 여섯 용들 중 이야기의 흐름을 위해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육룡이 나르샤>가 선택한 건 이방원이다.

 

여러 차례 여말 선초의 이야기들이 사극으로 다뤄지면서 그 주인공으로 이성계를 선택하기도 하고 또 정도전을 선택하기도 했다. 물론 이방원을 선택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특히 <육룡이 나르샤>가 젊은 이방원을 선택한 건 왜일까. 거기에는 다분히 이 사극이 현재와 조우하는 면들이 드러난다. 결국 이 사극은 고려라는 구악을 물리치고 조선을 세우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중심에 청춘으로서의 이방원이 서 있다.

 

그는 아버지 이성계, 스승 정도전이라는 어른들과 함께 패업을 꿈꾸고 실행해오지만 그 결과로 돌아온 건 그 욕심을 접으라는 얘기뿐이다. 심지어 그들은 이방원을 죽을 자리가 될 지도 모르는 명나라의 사신으로 보내버린다. 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그려진 이야기의 구도는 다분히 현재의 우리네 현실과 무관할 수 없다. 지금 우리 시대에 희생양은 다름 아닌 청춘들이 아닌가.

 

이미 영화 <사도>에서 유아인은 아버지 영조(송강호)와 맞서다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하는 비운의 사도세자 역할을 한 바 있다. 그 사도세자가 꿈꾸던 건 단지 떳떳하게살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그 좌절된 청춘의 이야기를 유아인은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원을 통해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방원은 그 꿈을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여 실행에 옮긴 인물이다.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를 향해 던지는 그 질문, “헌데 왜 제 꿈만 욕심이냐고 묻는 그 질문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어째서 이 부조리한 시스템은 지금의 청춘들의 꿈을 번번이 좌절시키고, 심지어 그것이 욕심이라고까지 느끼게 만드는 것일까. 과연 이래도 되는 걸까. 이래서 그 사회의 더 좋은 미래는 가능한 일일까.

주춤하는 <용팔이>, 초반 기세 이어가려면

 

11.6%로 시작해 단 6회만에 20.4%로 거의 두 배의 시청률을 돌파했던 <용팔이>의 그 기세는 왜 주춤해졌을까. 사실 시청률 20%는 최근 주중 드라마의 최대상한선처럼 굳어있다. 그 이상을 넘겨 30%까지 치고나가는 게 드라마 시청패턴 변화와 미디어 환경 변화로 인해 쉽지 않아진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용팔이(사진출처:SBS)'

하지만 <용팔이>20% 시청률에서 주춤하고 있는 건 이런 환경적 요인과 그리 상관이 없어보인다는 점에서 안타깝다. 초반의 기세를 생각해보면 30%는 힘들어도 25%까지의 시청률은 무난하게 돌파할 것이라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용팔이>는 지금 현재 우리네 대중들의 심중에 자리하고 있는 불편부당한 정서의 뇌관을 툭툭 건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VIP 병동에서 호화롭게 병원서비스를 받는 고객님(?)들과 일반병동에서 의사가 제때 돌봐주지 않아 죽어나가는 환자들. 같은 한신병원이라는 공간 속에 자리한 이 확연한 계급구조는 우리네 사회의 축소판처럼 여겨졌고, 그 안에서 속물을 가장한 휴머니스트 의사 김태현(주원)과 재벌 상속녀지만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병원에 감금되어 있는 가련한 여인 한여진(김태희)이라는 인물들은 부조리한 자본 시스템이 양산한 양극단의 희생자들처럼 보였다.

 

그러니 이들을 둘러싸고 자본 쟁탈전을 벌이는 한도준(조현재) 회장과 한신건설 고사장(장광) 같은 인물은 생명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자본이 부리는 하수인으로서 시청자들의 분노를 유발한다. 결국 <용팔이>의 파괴력은 이들과 김태현, 한여진이 벌이는 팽팽한 대결구도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VIP병실에 감금되어 누워 있던 한여진이 깨어나면서 <용팔이>의 이야기는 갑자기 김태현과 그녀의 멜로로 흘러간다. 그것도 자연스러운 멜로라기보다는 너무 급진전되는 양상으로서 흘러가는데다, 한 회 분량을 거의 이 멜로에 쏟아 붓는 바람에 자칫 지금껏 존재해온 팽팽한 대결구도가 흐려지는 결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실 <용팔이>에서 멜로는 독보다는 득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즉 김태현과 한여진 사이에 만들어지는 멜로의 강도는 이들을 다시 떼어놓으려는 한도준 회장 일파로 인해 드라마에 긴박감을 넣어줄 수 있다. 이미 사랑하는 남자를 잃게 됐던 트라우마를 가진 한여진에게 있어서 김태현에게 다가오는 위기는 분명 극의 긴장감을 높여줄 것이다.

 

하지만 그 멜로도 자연스러워야 한다. 너무 눈에 보이게 관계를 진전시키는 모습은 시청자들이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할 수 있다. 한신병원을 벗어나 한적한 시골마을의 성당에서 알콩달콩한 멜로를 키워가는 모습은 잠시간의 휴식처럼 다가오지만 한참 달려야할 드라마가 너무 한가롭게 흘러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현재 주춤하고 있는 <용팔이>는 아직도 더 달릴 수 있는 잠재력이 충분하다. 초반 쉴 틈 없이 돌아가던 사건과 액션을 다시 가동시켜야 한다. <용팔이>처럼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는 드라마에서 멜로는 극의 감미료가 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하기는 쉽지 않다. 빨리 제 궤도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서 김태현이 다시 저들과 팽팽하게 맞붙는 이야기를 통해 서민들의 판타지와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것이 초반의 기세를 계속 이어 용두사미가 되지 않는 길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