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수녀들’로 돌아온 송혜교, 더 멋있어졌다

검은 수녀들

2013년 대전에서 잠깐 배우 송혜교를 만난 적이 있다. 제2회 아시아태평양 스타 어워즈(APAN STAR AWARDS)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갖게 된 기회다. 당시 송혜교는 <그 겨울, 바람이 분다>로 대상을 받았다. 그 해에는 <직장의 신>의 김혜수, <여왕의 교실>의 고현정, <내 딸 서영이>와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이보영이 후보로 올라 송혜교와 치열한 경합을 벌였는데 결국 심사위원 모두의 만장일치로 그녀가 대상으로 결정됐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심사기준이 오로지 연기력 하나라는데 입장을 같이 하면서 그 같은 결정을 내렸다. 송혜교는 대상 수상자로서 간소하게 준비된 애프터파티에 참여했다. 스타라는 틀에 가둬져 있었지만 배우가 되기 위해 몸부림을 쳐온 송혜교의 면면을 유심히 봐왔던 나로서는 그 날의 수상이 남달랐다. 그래서 할 말도 많았지만 막상 송혜교를 만났을 때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건 그 상이 끝이 아니고 이제 배우로서의 시작에 해당될 것이어서, 샴폐인을 일찍 터트리는 괜한 상찬으로 혹여나 앞으로 가야할 길에 방해가 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가을동화(2000)>와 <올인(2003)>, <풀하우스(2004)>를 거쳐 톱스타의 반열에 올랐지만, 송혜교는 늘 갈증이 컸다. 반짝 스타가 아닌 롱런하는 배우로서의 길을 고민했던 거였다. 노희경 작가의 <그들이 사는 세상(2008)>을 거친 후, <그 겨울, 바람이 분다(2013)>에서는 깊고 쓸쓸한 내면이 느껴지는 그녀의 연기가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김은숙 작가와 만났던 <태양의 후예(2016)>를 통해 포텐셜이 터졌다. 멜로는 물론이고 액션부터 재난까지 다양한 장르가 겹쳐진 블록버스터였다. 도도하지만 뜨거운 가슴을 가진 강모연이라는 의사 역할로 송혜교는 <풀하우스>에 이어 또다시 아시아의 별로 떠올랐다. <풀하우스> 때와 달랐던 건, 그것이 그저 스타로서의 반짝임이 아니라 배우로서의 성장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송혜교의 갈증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멜로 퀸’이라는 수식어는 늘 따라다녔다. 실제로 멜로의 여주인공 역할을 대부분 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단순히 ‘멜로 퀸’이라는 한 마디로 정리한 건 어딘가 송혜교에게는 억울한 일이다. 같은 멜로라도 그녀가 해온 작품들을 따라가보면 여성의 성장사가 보여질 정도로 다채로운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을동화>나 <풀하우스>가 동화처럼 풋풋했던 사랑을 표현했다면, <황진이>는 절절한 시대적 질곡 앞에 선 여성의 강단 있는 삶이 있었고, <그들이 사는 세상>과 <태양의 후예>에서는 일과 사랑의 영역을 모두 주도하고픈 여성의 삶과 사랑이 있었다. 이 과정을 거쳐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에서는 유한한 삶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사랑할 수 있을까를 묻는 한층 성숙해진 멜로 연기를 선보였다. 

 

이러한 성장 과정들을 묵살한 채, ‘멜로 퀸’이라는 말로 가둬버리는 세간의 시선 앞에 송혜교는 새로운 선택을 시도한다. 마침 김은숙 작가가 의기투합했다. 그녀 역시 ‘멜로 장인’이라는 수식어에 가둬져 갑갑함을 느끼던 차였다. 그래서 나온 작품이 <더 글로리(2022-2023)>였다. 학교폭력이 소재였고, 송혜교는 피해자인 문동은을 연기했다. 멜로는 저 뒤편으로 사라졌고 대신 그 자리를 처절하면서도 처연한 복수극이 채웠다. 대중들은 열광했다. 문동은이 보여주는 거침없는 말과 행보를, 송혜교가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건 마치 억압된 자아가 드디어 바깥으로 나와 제 할 말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학교폭력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문동은은 그렇게 부활하여 제 할 말을 했고, 그 문동은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송혜교는 또 한 번 깨어날 수 있었다. 

 

<더 글로리>로 송혜교는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거머쥐었다. 또 제2회 청룡시리즈어워즈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마침 백상예술대상을 심사하게 된 나는 감회가 새로웠다. 2013년 대전의 한 시상식 뒷풀이에서 잠깐 얼굴을 본 후 10년이 지난 송혜교는 그 때 꿈꿨던 배우, 아니 대배우의 길 위에 서 있었다. 

 

최근에 그녀는 <검은 수녀들>이라는 영화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찍은 영화였다. 사실 영화 자체로는 그다지 새로운 재미요소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작품이다. 하지만 오컬트 장르에서 구마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사제가 아니라, 수녀가 전면에 나선다는 것만으로도 남다른 의미를 가진 작품이다. 게다가 송혜교가 연기하는 유니아 수녀는 담배를 피우고 관습에만 머물러 있는 사제들에게 욕을 하며 마치 휘발유를 뿌리듯 성수를 통에 담아 부마자들에게 들이붓는 파격 그 자체를 보여주는 수녀다. 그런데 이 수녀는 절차나 규정보다 악마가 깃들어 죽을 위기에 처한 소년을 구하기 위해 뭐든 하는 그런 ‘열혈수녀’다. 사제들 중심으로 이뤄진 사회 속에서 소외된 구마하는 이 수녀는, 무병을 앓고 무속인이 될 운명이었지만 수녀가 되어 이를 거부하고 있던 미카엘라 수녀(전여빈)와 함께 소년을 구하기 위해 나선다. 모두 소외된 자들이고,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처럼 보이는 이들의 연대가 오컬트 특유의 구마의식보다 더 전면에 나와 있는 듯한 작품이다. 

 

작품에 대한 평가는 호불호가 갈리지만, 적어도 송혜교의 이 작품 속 연기에 대한 이야기는 호평 일색이다. <더 글로리>에 이어 거침없는 수녀의 말과 행보를 보며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는 관객들이 적지 않다. 그저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 아니고, 또 그저 ‘멜로 퀸’이라는 수식어 하나에 가둬지지 않는 거침없는 송혜교의 연기 변신에서 느껴지는 시원함이다. 송혜교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빛을 내기보다는 차라리 그 빛을 떠나 다크해짐으로써 더욱 매력적인 ‘검은’ 언니가 되어 있었다. 혹여나 시상식장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번에도 입다물 생각이다. 그녀의 성장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니.(글:국방일보, 사진:영화'검은 수녀들')

‘슬기로운 감빵생활’부터 ‘스위트홈3’까지, 이도현의 연기도전사

스위트홈3

도대체 군백기가 있기는 한 걸까. 이도현은 지난해 8월 입대했지만 그가 찍은 작품들은 계속 쏟아져 나왔고 또 좋은 반응들을 얻었다. 영화 ‘파묘’가 천만 관객을 동원하며 큰 성공을 거두면서, 이도현은 MZ세대 무당 윤봉길 역할로 관객들을 열광케 했고, 최근에는 넷플릭스 시리즈 ‘스위트홈3’에 신인류 캐릭터로 등장해 사실상 이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했다. 이게 가능했던 건 그가 입대 전 출연한 마지막 작품으로 드라마 ‘나쁜 엄마’를 찍으면서 동시에 ‘파묘’, ‘스위트홈3’까지 소화했기 때문이다. 말이 쉽지 세 작품을, 그것도 서로 다른 장르의 다른 캐릭터를 오가며 동시에 연기를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열일’을 한 결과는 달콤한 과실로 돌아왔다. 군대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도현이라는 배우에 대한 대중적 신뢰감이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도현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현재 같은 믿고 보는 배우로 등극하기까지 너무나 그 기간이 짧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그의 연기 필모는 약 7년 정도다. 2017년 신원호 감독이 연출한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 정경호가 연기했던 이준호라는 인물의 청년 시절을 연기했다. 고교 야구선수로 주목받았지만 교통사고로 결국 꿈을 포기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특히 스포츠를 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는 청년 역할을 자주 맡은 바 있다.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는 야구선수였고, ‘18어게인’에서는 농구를 하는 모습을 선보였다. 스포츠와 그의 이런 인연은 과거 그가 농구선수로서의 꿈이 있었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결국 그 꿈을 접고 연기의 길로 들어섰지만 그 때의 경험들이 연기에도 도움을 줬다는 것이다. ‘슬기로운 감빵생활’로 짧지만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이도현은 ‘호텔 델루나’에서 장만월(아이유)이 좋아했던 호위무사 고청명 역할로 사극 연기에 도전하면서 대중들의 눈도장을 확실히 찍었다. 그 후 이도현은 ‘위대한 쇼’에서 송승헌이 연기한 위대한이라는 인물의 10대 시절 역할을 했는데, 송승헌 같은 연기 베테랑의 젊은 시절을 이도현이 맡았다는 사실은 드라마업계가 그에게 가진 신뢰가 분명했다는 걸 말해준다. 주인공의 젊은 시절은 그 서사의 결을 좌우한다는 점에서 그만큼 중요한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18어게인’에 와서는 드디어 이 배우의 진가가 발휘된다. 고등학생 고우영 역할로 홍대영이라는 중년 아저씨가 그 몸으로 빙의되는 판타지로, 겉으론 고등학생이지만 속은 아저씨인 역할을 잘 소화해 ‘고저씨’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딸하고 같이 학교를 다니는 상황이 벌어지고 그래서 딸이 학교에서 하는 행동에 못마땅해하는 아빠의 모습이 슬쩍슬쩍 등장하기도 하며, 나아가 아들이 왕따를 당하는 걸 알고 이를 가만히 보지 못하는 아빠의 마음이 표현되기도 한다. 게다가 김하늘과의 멜로 연기도 들어 있었는데 이것까지도 이도현은 별다른 이물감없이 소화해냈다. 이 작품으로 이도현은 그 해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남자 신인 연기상을 받았다. 올해 ‘파묘’로 영화부문 남자 신인 연기상까지 받았으니 이도현은 백상에서 TV와 영화 부문 모두 신인상을 받은 연기자가 됐다. 

 

‘18어게인’ 이후 이도현은 하는 작품마다 도전의 연속이었지만, 그 하나하나 성공시키는 놀라운 성과들을 보여줬다. 넷플릭스 시리즈 ‘스위트홈’으로 크리처물에 도전했는데, 거기서 이도현이 맡은 이은혁이라는 인물은 다른 캐릭터들과는 사뭇 차별화된 존재였다. 괴물들이 여기저지 출몰하는 그린맨션에서 모두가 공포에 질려 있을 때 이 인물은 흔들리지 않는 차분한 모습으로 오히려 주목받았다. 그 흐름을 이어받아 시즌3에서는 죽은 줄 알았던 그가 신인류로 부활해 돌아와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알리는 엔딩을 그려냈다. 

 

‘5월의 청춘’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작품으로 그 시대의 아픔과 더불어 청춘들의 풋풋한 사랑이야기를 소화했고, ‘멜랑꼴리아’에서는 자폐를 가진 수학 천재로 역시 임수정과의 멜로 연기를 풀어냈다. ‘18어게인’에서는 김하늘과 ‘멜랑꼴리아’에서는 임수정과의 멜로 연기로 연상연하 커플의 남자주인공 역할로 급부상한 이도현은 ‘더 글로리’로는 송혜교와의 멜로 연기를 펼쳤다. 물론 ‘오월의 청춘’에서는 고민시와 또 ‘나쁜 엄마’에서는 안은진과 멜로 연기를 했지만 상대역과의 나이차에 있어서 이도현에게는 장벽이 별로 없었다.

 

이 이도현이 걸어온 7년 간의 짧다면 짧은 연기 여정을 들여다 보면 그 하나하나가 마치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도전의 연속이었다는 게 느껴진다. 고등학생과 아저씨를 오가는 연기는 물론이고(18어게인), 나이 차이가 훌쩍 나는 연상과의 멜로 역할(18어게인, 멜랑꼴리아, 더 글로리)도 자연스럽게 풀어냈고, 장르적으로는 멜로에서 판타지(18어게인), 크리처물(스위트홈), 복수극(더 글로리), 시대극(오월의 청춘), 회귀물(이재, 곧 죽습니다)까지 거의 모든 장르의 영역들을 경험했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했을까. 

 

두 가지 장점이 결합한 결과다. 그 하나는 이도현이 이미 갖고 있는 자질이다. 그가 가진(이것도 연습에 의해 만든 것이라고 하지만) 중저음 보이스는 연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할 수 있는 신뢰감을 주고, 명쾌한 딕션은 대사전달력에 있어서 탁월한 그의 장점을 드러내준다. 또 그와 같이 작업을 한 감독들이 자주 말하는 ‘좋은 눈빛’도 빼놓을 수 없고, 입꼬리에 따라 다정하게도 보이지만 때론 악마적인 서늘함을 주는 입매도 연기자로서의 장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자질들이 힘을 발휘하게 된 건 두 번째 장점으로 꼽히는 ‘도전정신’이 만들어낸 성장이다. 매번 새로운 영역에 뛰어들어 그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확장시키는 과정들이, 7년이라는 결코 길지 않은 시간에 이도현이 이토록 급성장하게 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심지어 군복무 중에도 전혀 공백이 느껴지지 않는 성장에는, 그만한 도전과 노력들이 숨겨져 있었을 테니 말이다. (글:국방일보, 사진:넷플릭스)

‘더 글로리’, 통쾌하고 먹먹하고... 이토록 완벽한 인과응보가 있을까

더 글로리

“아우 얘 맨발로 괜찮니? 왜 하필 니트를 입었어? 젖으면 무거울 텐데. 물이 너무 차다. 그치. 춥다. 우리 봄에 죽자 응? 봄에.” 절망 끝에 어린 문동은(정지소)이 죽기 위해 물 속에 들어갔을 때 저 편에 또 다른 사람이 죽으려 한다. 그걸 보고는 문동은 그 사람을 구한다. 그런데 그렇게 구해진 사람이 자신을 구한 이가 어린 소녀라는 걸 알고는 그렇게 맨발에 니트를 입고 물에 들어온 걸 걱정하는 엉뚱한 말을 한다. 그러면서 너무 추우니 봄에 죽자고 한다. 지금 말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글로리> 파트2에 등장하는 이 시퀀스는 웃프다. 절망의 끝을 보여주지만 그 곳에서 희망을 전한다. 결국 그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현실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만이 이 고통을 해결해줄 거라 생각했던 그들의 마음은 못내 아리고 아프다. 하지만 그 순간 그들을 구하는 건 다름 아닌 자신과 같은 사람이 있고, 그래서 그 누군가를 구하고픈 마음이라는 걸 이 시퀀스는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웃게 만든다. 유머가 들어 있는 이야기지만, 그건 우리 삶의 진실을 담고 있지 않은가. 혼자서는 버텨내기 어려운 삶이지만 그걸 공감함으로써 웃음으로 넘어서고 기대며 살아갈 수 있는 것. 

 

<더 글로리> 파트2가 드디어 공개됐다. 파트1이 끝나고 너무나 기다리던 시청자들에게는 단비와 같은 나머지 내용들이 전개됐다. 과연 문동은은 이 지난한 복수극을 어떻게 마무리할까. 그 끝은 제목처럼 ‘영광스러운’ 빛으로 가득할까. 시청자들은 기대감과 더불어 어떤 마무리가 될 것인가에 대해 파트2를 그 어느 때보다도 목 놓아 기다렸다. 그리고 공개된 파트2는 이러한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준다. 통쾌한 인과응보에 먹먹한 생존자들의 온기가 더해지며 더할 나위 없는 엔딩을 통해 진짜 희망과 위로를 전하고 있어서다. 

 

“왜 없는 것들은 세상에 권선징악, 인과응보만 있는 줄 알까?” 이렇게 말했던 박연진(임지연)이고, 그건 안타깝게도 가진 자들이 죄를 지어도 벌 받지 않는 우리네 현실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지만, 문동은은 그런 말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그들을 지옥 끝까지 몰아붙인다.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자세한 그 과정을 말하긴 어렵지만, 놀랍게도 문동은이 짠 계획은 공고하게만 보였던 저들의 벽에 균열을 일으키고 결국 그들끼리 치고받는 파멸로 그들을 이끌어간다. 

 

그 복수의 과정은 ‘인과응보(因果應報)’, 즉 ‘선을 행하면 선의 결과가 악을 행하면 악의 결과가 반드시 뒤따른다’는 그 뜻 그대로 이뤄진다. 예를 들어 가진 자들의 개가 되어 저들이 시키는 대로 폭력을 일삼다가 이제는 주인을 물려했던 손명오(김건우)가 결국 저들에 의해 자신이 했던 것 같은 폭력으로 최후를 맞이하는 식이다. 약에 취한 이는 약으로 끝을 마주하고, 입을 잘못 놀린 이는 말을 못하는 형벌에 취하며, 부모 잘 만나면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는다 여겼던 이는 바로 그 부모로부터 배신당해 벌을 받는다. 

 

그 복수는 단순하지 않고 결코 쉽게 전개되지도 않는다. 문동은의 평생에 걸친 치밀한 계획이 있고 그를 돕는 주여정(이도현)과 강현남(염혜란) 같은 이들이 있는데다, 죄를 지은 자들이 가진 저마다의 엇나간 욕망들이 결합되어 파멸의 불꽃이 타오른다.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어째서 저들의 엇나간 욕망이 자신들을 나락으로 이끄는가 하는 그 사필귀정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그려낸다. 

 

게다가 복수만이 이러한 끔찍한 폭력 앞에 무너졌던 피해자들에게 끝이 아니라는 것 역시 드라마는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피해자들은 복수로 저들의 파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과 명예를 되찾는 것이 그 목적이라는 걸 주여정의 목소리를 통해 전한다. “피해자들이 잃어버린 것 중에 되찾을 수 있는 게 몇 개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나의 영광과 명예 오직 그것뿐이죠. 누군가는 그걸 용서로 되찾고 누군가는 복수로 되찾는 거죠. 그걸 찾아야만 비로소 원점이고 그제야 동은 후배의 열아홉살이 시작되는 거니까요.”

 

<더 글로리>는 그래서 복수극의 끝장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피해자들이 어떻게 서로를 의지하고 그래서 “봄에 죽자”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내는가를 그 단단한 연대를 통해 그려낸다. 실로 김은숙 작가는 기꺼이 이 땅의 폭력으로 인한 피해자들을 위해 칼춤을 추는 망나니가 되기를 자처한 듯 대사 하나하나에도 공을 들였다. 멜로에서 그토록 달달했던 김은숙 작가의 대사들이 이토록 살풍경한 저주로도 바뀔 수 있다는 걸 이 작품은 보여준다. 

 

김은숙 작가가 피해자들의 망나니를 자처했다면 배우들은 그 대본 위에서 기꺼이 김은숙 작가의 망나니가 되었다. 극의 중심을 끝까지 잃지 않고 잡아낸 송혜교의 연기 변신은 그 스펙트럼을 확장시켜 향후의 작품들을 기대하게 만들었고, 여기에 이도현, 임지연, 염혜란, 박성훈, 정성일, 김히어라, 차주영, 김건우, 정지소, 신예은 등등 모든 연기자들이 마치 작두를 탄 듯 신들린 연기를 보여줬다. 특히 임지연과 김히어라의 미친 악역 연기와 이 복수극에 따뜻함과 간절함을 더해준 염혜란 그리고 배우로서의 남다른 존재감을 드러낸 정성일, 박성훈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더 글로리>의 훌륭한 망나니들이었다. 

 

누군가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자신 또한 구하는 일이 아닐까. <더 글로리>는 피해자 문동은이 어떻게 생존해내는가를 통해 그런 이야기를 전한다. “한때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누가 됐든 뭐가 됐든 날 좀 도와줬다면 어땠을까. 그렇게 열여덟 번의 봄이 지났고 이제야 깨닫습니다. 저에게도 좋은 어른들이 있었다는 걸. 친구도 날씨도 신의 개입도요. 그리고 봄에 죽자던 말은 봄에 피자는 말이었다는 걸요. 저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잘 크진 못했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어느 봄에는 활짝 피어날게요.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그렇게 김은숙 작가와 송혜교는 문동은의 목소리를 통해 피해자들에게 진심어린 위로와 희망을 건네고 있다. (사진:넷플릭스)

‘더 글로리’ 파트2, 송혜교를 괴롭히는 새 고데기에 담긴 참혹한 현실

더 글로리 파트2

“성공했네. 박연진. 나를 상대할 새 고데기를 두 개나 찾았어.”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글로리> 파트2에서 문동은(송혜교)이 던지는 그 대사는 이 드라마의 후반전의 뜨겁게 타오를 화력을 예감케 한다. 고데기와 문동은의 온 몸에 남아있는 지워지지 않는 화상자국은 이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폭력의 시스템의 중요한 상징들이다. 머리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쓰는 고데기를 저들은 약자들의 온 몸에 상처를 내는데 쓰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난 잘못한 게 없어 동은아. 왜 없는 것들은 세상에 권선징악, 인과응보만 있는 줄 알까?” 박연진의 대사로 등장하는 이 말이 바로 저 가해자들의 뻔뻔한 입장이다. 하지만 문동은의 온 몸에 남은 화상자국이 그러하듯이, 피해자들은 그 상처를 평생 지고 살아간다. 심지어 죽고 싶을 만큼. 문동은은 그래서 저들을 향한 복수의 길을 마치 바둑을 두듯 차근차근 상대의 집을 무너뜨려가며 걸어가지만, 박연진도 만만하지 않다. “네 X을 상대할 고데기를 찾을 것”이라고 했던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박연진이 찾아낸 두 개의 새 고데기는 문동은의 엄마와 그의 든든한 조력자 현남(염혜란)이다. 이미 어린 문동은을 박연진의 엄마가 준 돈 몇 푼에 합의서를 써준 후 버렸던 문동은의 엄마다. 그런 그를 이제 박연진이 찾아와 돈을 주며 문동은을 학교에서 떠나게 만들라고 한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끔찍한 엄마가 다시 찾아오자 문동은은 분노한다. 과거의 상처와 악몽이 또 다시 현재에 되살아난다. 

 

또한 박연진은 현남을 찾아와 그의 딸을 빌미로 협박한다. 딸의 인생을 망가뜨리겠다는 것. 그러면서 현남을 회유해 문동은을 배신하라고 획책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문동은은 괴롭다. 자신이 믿고 함께 하는 조력자가 자신의 복수 때문에 위협받는 상황에 놓이게 됐기 때문이다. 두 개의 새 고데기는 그렇게 다시 박연진의 손에 들려 문동은을 향해 드리워진다. 

 

온라인 시사회를 통해 미리 공개된 파트2의 2회분 내용을 보면 <더 글로리>의 후반전이 문동은과 박연진의 치고받는 대결로 치열해질 것인가를 예감케 한다. 여기서 가장 소름 돋는 설정은 가해자의 ‘새 고데기’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학교폭력 같은 과거의 폭력 전과가 어떻게 사라지지 않고 계속 다시 새로운 고데기가 되어 피해자를 괴롭히는가에 대한 서사가 들어 있어서다. 

 

물론 <더 글로리>에서 새 고데기는 박연진이라는 최강 빌런이 끝내 찾아내는 ‘악의 성실함(?)’에서 등장하는 것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가해자들의 새 고데기는 그들이 처벌받지 않고 심지어 버젓이 잘 살아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피해자들을 괴롭힌다. 최근 자녀의 학교 폭력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가수사본부장에서 사퇴한 정순신 변호사의 아들은 단적인 사례다. 

 

생활기록부에 학교폭력 사실이 기재되어 있었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서울대에 입학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얼마나 부조리한가를 드러낸다. 서울대생들의 분노가 폭발한 건 그래서다. 당시 피해자가 자살 시도에 이르게 할 만큼 심각한 피해를 입었는데, 학교폭력에 대해 경각심이 없는 입시, 인사 시스템은 그 자체로 또 다른 고데기가 아닐까.

 

최근 MBN <불타는 트롯맨>에서 과거 폭력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하차하지 않고 활동을 강행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였다가 쏟아지는 비판 속에 결국 하차를 결정한 황영웅과 제작진에 쏟아졌던 공분도 같은 것일 게다. 피해자는 여전히 상처를 잊지 못하고 있는데, 이러한 처사는 새로운 고데기를 드리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말이다. 

 

<더 글로리>는 학교폭력을 소재로 가져왔지만, 그 폭력의 이면에 존재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시스템과 그래서 돈과 권력을 가진 가해자가 더 잘 살고, 약자인 피해자는 더 힘겹게 살아야 하는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저격하는 드라마다. 성실한 악은 아니라고 해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정의는 그 자체로 피해자들에게는 새 고데기가 될 수 있다는 걸 <더 글로리>는 에둘러 말해준다. 

 

만일 죄지은 자들이 처벌받는 정의가 작동했다면, 문동은 같은 피해자가 왜 스스로 나서서 사적 복수를 하려하겠는가. 그건 복수가 아니라 새 고데기가 여전히 드리워진 삶으로부터의 생존의 몸부림이 아닐까. 오는 10일 후반부 전편이 공개되는 <더 글로리> 파트2는 이 첨예한 새 고데기와 맞서 싸우는 피해자들의 연대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박연진의 말과 달리 이 세상에는 권선징악과 인과응보가 있다는 걸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보여주길.(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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