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전투’, 유해진이 외치는 독립에는 남다른 울림이 있다

 

영화 <봉오동전투>에 대해 주인공 유해진은 “반일감정보다 영화의 힘으로 굴러가길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그가 그렇게 말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 영화는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 부대가 일본군을 대패시킨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그걸 담는 방식에서 마치 <삼국지>의 한 대목을 보는 듯한 전략과 전술이 등장하고, 이를 구현해내는 액션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봉오동전투>는 만일 일제라는 부분을 떼놓고 보면 하나의 액션영화로 볼 수도 있을 게다. 일단 주인공 3인방이 액션영화에 등장하는 저마다 다른 능력을 가진 히어로들이다. 황해철(유해진)은 항일대도를 휘두르며 총으로 공격하는 적진에 들어가 일본군들을 추풍낙엽처럼 쓸어버리는 영웅이고, 독립군 분대장 이장하(류준열)는 빠른 발로 종횡무진 적들을 교란시키는 영웅이며, 해철의 오른팔인 마병구(조우진)는 백발백중의 저격수다.

 

그러니 이들 3인방의 캐릭터는 그 자체로 <봉오동전투>가 보여줄 액션의 스타일들을 담아낸다. 즉 황해철이 대도를 휘두를 때는 마치 중국 무협영화를 보는 듯 하고, 이장하가 산 속을 달려 나가는 풍경은 추격 액션이 더해진다. 마병구의 저격 장면은 스나이퍼들이 대결하는 총기 액션을 보는 것만 같다.

 

이처럼 액션이 분명한 <봉오동전투>지만, 이런 3인방의 캐릭터는 그냥 설정된 건 아니다. 그것은 실제 역사에 기록된 <봉오동전투>가 어떻게 화력으로 무장한 일본 정규군을 아군의 손실을 거의 최소화한 채 무너뜨렸는가 하는 대목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봉오동전투는 화력에서도 군대의 수에 있어서도 절대 열세였던 독립군이 봉오동이라는 지형지물을 제대로 이용하는 전력과 전술을 써 대승하게 된 전투다.

 

그런데 그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방식이 이들 세 캐릭터가 가진 능력과 연관된다. 즉 일본군 주력부대를 항아리처럼 생긴 봉오동이라는 지역으로 유인해내는 것이 이 전투의 승패를 가르는 일이 되고, 그래서 발 빠른 이장하가 적들을 계속 자극하면서 퇴각해 그들을 봉오동으로 끌어 들이며, 그 과정에서 숨어 적을 사살하는 저격수와 결국 맞붙게 됐을 때의 백병전에서 항일대도를 휘두르는 인물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래서 그 특이한 봉오동 주변의 지역을 마치 지도처럼 찍어내 보여주며 그 능선과 협곡을 오르내리며 벌이는 전투 장면들은, 그것이 독립군이 일제에 맞서 거둔 성취라는 걸 빼놓고 봐도 충분히 흥미롭다. 하지만 유해진이 “반일감정보다”라고 표현했어도, 지금의 대중들에게 이 감정을 빼놓고 영화를 보기는 어려울 게다. 영화 속에서 독립군들이 외치는 “대한독립만세!”에서 ‘독립’의 의미가 지금 상황과 겹쳐져 ‘경제 독립’으로 들리는 건 그래서다.

유해진의 말처럼 꼭 “반일감정”만으로 이 영화를 볼 필요는 없다. 거기에는 충분한 액션 서사가 주는 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치밀어 오르는 ‘반일감정’을 억누를 필요도 없을 게다. <봉오동전투>를 통해 보이듯 독립군들의 그런 숭고한 희생들이 있어 지금 대등하게 경제 전쟁을 벌이는 우리가 있는 것이니.(사진:영화'봉오동전투')

DMZ부터 서대문형무소까지 ‘어서와’, 독일친구들이 준 먹먹함

왜 이들은 한국을 여행하며 굳이 DMZ와 서대문형무소를 찾아갔을까. MBC 에브리원의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에서 다니엘 린데만의 독일친구들은 하고 많은 여행지 중 우리네 아픈 역사가 깃든 곳을 먼저 찾았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들 역시 겪었던 분단과 홀로코스트의 아픈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우리네 역사의 현장들이 그만큼 궁금했기 때문이었을 게다.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사진출처:MBC에브리원)'

사실 우리들에게는 너무 가까이 있어 오히려 잘 가지 않고 또 기억해내지 않는 곳이 그 곳이었을 게다. 그래서인지 이 독일친구들이 DMZ에서 새삼 분단국가의 현실을 다시 드러내주고, 자신들의 통일된 국가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는 장면들은 우리에게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로 다가왔다. 연일 긴장 구도가 팽팽한 작금의 현실 속에서조차 너무 오래도록 지속 반복되다 보니 우리들은 조금 분단의 현실에 둔감해져 있었던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그렇게 DMZ를 새벽부터 출발한 투어로 땅굴까지 들어가 체험한 그들이 피곤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서대문형무소로 달려간 것 역시 시청자들로서는 감동일 수밖에 없었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 투쟁을 벌이다 투옥되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던 많은 분들의 정신들이 깃든 그 곳을 이 독일청년들이 찾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스튜디오에서 이를 지켜보는 MC와 패널들은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아픈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고 일본은 아직도 아무런 사과를 하지 않고 이를 기억에서 지워버리려 한다는 것에 대해 그 부당함을 얘기하는 독일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시청자들 또한 먹먹해졌을 게다. 우리가 얼마나 이 역사적 아픔을 세계와 공유하려 했던가.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된 사과로 이어져야 한다는 걸 얼마나 국제사회에 강변해왔던가. 독일친구들의 행보는 그래서 그 자체로 우리들에게는 위로의 의미로 다가왔다. 

또한 그들 역시 과거 나치즘이라는 아픈 역사를 겪었고 그래서 그걸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사과 없는 일본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 역시 그 아픈 역사에 대한 청산에 “많은 시간이 걸렸고” 지금도 “청산 중”이며 그러니 “일본도 시작해야 된다”는 말에는 이런 아픈 역사의 청산에는 시효가 없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시선으로는 그저 지나쳤던 것들이 저들의 시선으로는 새롭게 다가오는 것. 그것이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가 가진 놀라운 흡입력이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말하는 우리의 역사보다 저들이 말하는 우리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것도 자신들 또한 비슷하게 겪은 일들을 통해 우리네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니 더 남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독일청년들이 이토록 호감을 줄 수 있었던 건 단지 우리네 아픈 역사를 돌아봤다는 그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다만 거기서 타국의 문화와 역사를 제대로 알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 씀씀이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정으로 우리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시카고 타자기’에는 먼저 간 청춘들의 넋이 어른거린다

“니가 틀렸어. 너 때문에 내가 죽을 뻔 한 게 아니라 내가 죽을 뻔 한 위기의 순간마다 니가 날 살려줬던 거야. 니가 없었으면 나는 사제 총에 맞아죽고, 차 사고로 죽고, 오토바이에 치어서 죽었을 지도 몰라. 당연히 작가로서의 생명도 끝났을 지도 모르고. 우리가 만난 건 우연이 아닐 거라고 했잖아. 내가. 그 이유 이제 알 것 같아. 전생에 못 지켰으니까. 이번 생에 지키라고. 그리고 또 아마도 전생에 내가 너를 사랑했던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닫았던 것 같은데 내가. 해방된 조국에서 만나 마음껏 연애하라고. 죗값이 아냐. 면죄야. 그래서 내가 오늘 조국을 위해 뭔 짓 좀 해보려구.”

'시카고 타자기(사진출처:tvN)'

tvN 금토드라마 <시카고 타자기>에서 한세주(유아인)가 전설(임수정)에게 하는 이 말은 자못 비장하고 절절하다. 전생과 후생으로 얽힌 인연. 아마도 자신이 전생에 그를 쐈을 거라는 자책감으로 인해 현생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 역시 그 악연이 이어지고 있는 거라 믿는 전설. 하지만 그녀에게 한세주는 그것이 악연이 아니라 인연이고, 그 때 지켜주지 못한 걸 이번 생에 지키라는 뜻이며 따라서 죗값이 아니라 면죄라고 말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그들은 죽음을 맞이했다. 전설이 보게 되는 전생의 장면들은 자신이 그를 향해 총을 쐈을 거라는 믿음을 갖게 만든다. 그게 어떻게 된 것인지는 나중에 밝혀질 것이지만, 생각해보면 그 비극적인 사건은 그들의 의지에 의해 비롯됐다기보다는 누군가의 조작이나 함정에 의해 빚어진 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모두 독립운동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 있었고, 그래서 사적인 사랑의 감정조차 그 대의 앞에 접어두고 있었다. 

그러니 한세주와 전설, 그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당시 밀정으로 활동했던 백태민(곽시양)이나 전생에 카르페디엠의 마담이었던 현 전설의 엄마(전미선)와 관련된 어떤 사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의 비극적인 삶은 그래서 일제강점기 그 시대의 총칼에 맞서 싸우다 스러져간 이름 없는 청춘들을 떠올리게 한다. 한세주와 전설의 멜로가 그저 현대식 사랑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훨씬 절절해지고 비장해지는 이유는 이처럼 전생으로서 일제강점기의 청춘들의 넋이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즈음에서 한세주와 가까워진 걸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고 전설이 말하자 친구인 방진(양진성)이 독립운동을 한 이들은 오히려 더 어렵게 살게 된 현실을 꼬집으며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라고 농담처럼 던지는 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은 지금까지도 그 후손들이 떵떵 거리며 살고 있지만 젊은 청춘을 희생해 독립운동을 하던 그들은 곤궁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현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전생에 이어 후생까지도 죗값을 받고 있다고 자기 탓으로 돌리는 삶이라니. 

이러한 시대적 안타까움과 비장함이 담겨있기 때문일까. <시카고 타자기>에 깔리는 OST 중 SG워너비가 부르는 ‘우리의 얘기를 쓰겠소’라는 곡은 마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듣는 것처럼 듣는 이들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든다. ‘여기 우리의 얘기를 쓰겠소. 가끔 그대는 먼지를 털어 읽어주오.’로 시작하는 그 목소리는 그대로 <시카고 타자기>라는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를 말해주는 듯하다. 

이름도 얼굴도 알려지지 못한 채 청춘의 그 어떤 즐거움도 유예하고 싸우다 스러져간 이들의 이야기를 다시 쓰고 기억해달라는 것. 심지어 전생과 후생을 이어 붙여서라도, 나아가 전생에 죽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청춘의 유령의 입을 통해서라도 그 먼지 덮인 얘기를 다시금 할 것이라고. 그러니 그 얘기를 들어달라고 <시카고 타자기>는 말하고 있다. 그것이 한세주와 전설이 엮어가는 사랑이야기가 특별한 무게감으로 가슴에 와닿는 이유다.

‘시카고 타자기’와 ‘도둑놈, 도둑님’이 담는 일제강점기

재작년 영화 <암살>이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끄집어낸 이후 이듬해 <밀정>, <덕혜옹주>, <귀향>, <동주> 등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이제 드라마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tvN 금토드라마 <시카고 타자기>가 그렇고 MBC가 새로 시작한 주말드라마 <도둑놈, 도둑님>이 그렇다. 도대체 일제강점기의 무엇이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로서 매력적인 걸까. 

'도둑놈 도둑님(사진출처:MBC)'

그 첫 번째는 그 시대가 가진 아픔이다. 일제강점기라는 특징은 그 안에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는 물론이고, 일제에 의해 고통 받고 희생됐던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그 시대의 상처들은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아물지 않았다. 일본은 그 때의 잘못들을 여전히 제대로 사과하지 않고 있고, 그 피해자들은 지금도 거리에 나와 투쟁중이다. 

이렇게 된 데는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음으로 해서 당대의 가해자들의 잘못들이 그저 덮여지고 잊혀지는 과정을 밟았기 때문이다. tvN <시카고 타자기>가 굳이 전생과 후생을 나누고 후생에 태어난 소설가가 일제강점기였던 전생의 기억을 되짚어 그 사건들을 소설로 기록한다는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는 건 그래서 대단히 의미심장한 설정으로 다가온다. 우리에게 일제강점기는 마치 전생처럼 아련한 기억이 되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다시 끄집어 기록해낸다는 건 그 역사를 잊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MBC <도둑놈, 도둑님>은 의열단원이었던 선조를 둔 후손들이 오히려 그 사실 때문에 겪는 지독한 가난과 핍박으로 이야기를 연다. 생계형 도둑이 된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이라는 아이러니. 그래서 제목이 <도둑놈, 도둑님>이다. 진짜 도둑은 따로 있다는 것. 일제강점기의 적폐들이 제대로 청산되지 않아 생긴 현재에 대한 문제의식을 이 드라마는 바탕에 깔고 있다. 결국 <시카고 타자기>도 <도둑놈, 도둑님>도 현재 당면하고 있는 우리의 문제들의 근원으로서 일제강점기를 연원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가 이처럼 영화에 이어 드라마의 매력적인 소재가 되고 있는 건 단지 이러한 의미적 차원만은 아니다. 두 번째 이유는 이 시대가 가진 드라마틱한 삶의 풍경들과 중국과 일본 그리고 서구의 문화들이 뒤섞인 혼종적 성격이 주는 매력이다. 사실 일제강점기라는 시기는 일제와의 대결구도로만 주로 다뤄지면서 실제적 삶의 풍경들이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면이 많다. 

<시카고 타자기>에 등장하는 일제강점기 시절의 극장식 카페 ‘카르페 디 엠’이라는 공간을 보면 그 혼종적 성격이 가진 매력이 드러난다. 그 공간은 마치 과거 마피아들이 운영했던 클럽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상하이의 클럽이 떠오르기도 한다. 기관총을 누군가 들고 들어와 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공간. 게다가 노래 부르는 가수의 모습은 우리 노래를 하고는 있지만 이국적인 느낌마저 준다. 콘텐츠 제작자라면 이런 다양한 문화들이 뒤섞여 있고 또 거기에 드라마틱한 삶이 보여지는 공간을 소재로 한다는 것에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런 느낌이 만들어지는 건 당시 외세에 의해 이뤄진 것이지만 문호가 열리며 생겨난 독특한 분위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그저 일제에 항거했던 기록으로만 기억하거나 나아가 아예 없었던 시간처럼 방치해 두었던 욕망들은 이 시기에 대한 다른 접근을 허용하지 않은 면이 있다. 

물론 이런 소재적 매력보다 더 큰 건 앞서 거론했던 ‘과거의 청산’문제일 것이다. <도둑놈, 도둑님> 같은 드라마는 그래서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어떤 비뚤어진 현재를 만드는가를 보여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것은 또한 현재 우리가 당면한 청산해야할 문제들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을 경우 후세들이 겪을 문제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흔히들 “과거의 총합이 현재”라고 말하는 것처럼, 현재의 총합은 또한 미래가 된다. 일제강점기의 문제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로 다가오는 건 그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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