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빙’, 자식 가진 부모들을 초능력자로 그린 건

무빙

“아 아 아빠 어 엄마 데리러 그 금방 갔, 갔다 올게. 강훈이 자, 자기 전에 올 게. 아빠 야 약속 꼭 지켜. 지, 진, 진짜 강훈이 자기 전에 올게. 저지지 진짜 약속 꼭 지킬게.”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무빙>에서 재만(김성균)은 아들 강훈에게 재차 약속한다. 꼭 자기 전에 돌아온다고. 

 

재만은 바보다. 정신 지체를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도 또 아들 밖에 모른다는 의미에서도. 밤이 늦었지만 돌아오지 않는 아내가 걱정된 재만은 그토록 아끼는 아들을 혼자 집에 두고 아내를 찾으러 나간다. 자기 전 꼭 돌아온다는 약속을 연거푸 하면서.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노점상 강제철거 반대 시위에 나섰던 아내가 경찰에 끌려가는 모습을 본 재만이 폭주하기 시작한 것. 

 

그는 초능력의 소유자다. 전경 1개 소대를 혼자서 때려 부술 정도로. 결국 이 사안이 보고되고 국정원의 민용준(문성근) 차장은 재생 능력을 가진 장주원(류승룡)을 부른다. 아내가 사망한 후 홀로 딸 희수를 키우고 있는 싱글 대디 장주원은 딸을 두고 작전에 나가는 게 영 내키지 않는다. 잠든 딸이 혹여나 깰까 어둠 속에서 군화끈을 맬 때 틱 하고 현관 불이 켜진다. 잠에서 깬 딸이 아빠를 위해 현관문 불을 켜준 것. 그리고 “잘 다녀와”라고 말한다. 그런 딸을 아빠는 꼭 껴안는다. 

 

초능력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무빙>이 14회 ‘바보’라는 부제로 그리고 있는 건 아빠들의 이야기다. 아빠들이 출퇴근길에 느끼는 감정들이 이 회차에서는 반복적으로 담겨진다. 아들 바보 재만도 딸 바보 주원도 현관 앞에서 발길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홀로 자식을 두고 일을 나가는 그 발길에 우리네 샐리러맨 아빠들의 소회가 묻어난다. 

 

일찍 돌아올게. 금방 갔다 올게. 아빠들이 그렇게 다짐하듯 자식들에게 남기는 말들은 번번이 지켜지지 못한다. 가족을 위해서 어떻게든 버텨내야 한다는 생각에 야근에도 또 일의 연장으로 벌어지는 회식자리도 빠지지 못한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파김치가 되어 돌아와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볼 때 갖게 되는 그 미안함과 쓸쓸함이 이 초능력을 가졌지만 바보 아빠들인 재만과 주원의 얼굴에 교차된다. 

 

아이러니한 건 가족을 위해 야밤에도 불러내면 일을 하러 나가야 되는 아빠들을 세상은 맞붙여 싸우게 만들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붙잡혀 가는 아내를 구하겠다는 일념에 폭주하게 된 재만도 그를 체포하기 위해 투입된 주원도 그 일에 서로에 대한 사적 감정 따위는 없다. 그저 가족을 위해 그 생계를 위해 싸우고 있을 뿐이다. <무빙>이 이 회차에서 포착하고 있는 건 바로 이런 현실이다. 저마다의 생계를 볼모삼아 사회의 전장에서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서로 싸워야 하는 현실. 

 

하지만 이 싸움은 한 아이로 인해 그 양상이 바뀐다. 맨홀에 빠져 살려 달라 애원하는 아이를 발견한 주원과 재만은 서로 싸우기 위해 날렸던 주먹을 아이를 구하기 위해 날리기 시작한다. 벽을 부수고 아이를 구해낸다. 결국 이 모든 일들이 누군가의 가족과 아이들을 위한 일이라는 걸 그들은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아이를 구해내고 각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다. 약속보다 늦게 귀가했지만 그들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아이들 앞에서 피투성이가 된 그들은 살아갈 힘을 얻는다. 

 

기막힌 한국적인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자식 가진 부모는 모두 초능력자가 된다는 서사가 이 ‘바보’라는 부제를 가진 14회에 담겨있다. 그들은 자식만 보이는 바보가 되고, 세상에 나가서는 ‘괴물’이 되기도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이가 안아주는 것만으로 모든 걸 위로받는 아이 같은 존재가 된다. 지금껏 그 어떤 작품이 이만큼 짠한 초능력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적이 있을까. <무빙>이라는 한국적 슈퍼히어로의 이야기가 특별한 이유다.(사진:디즈니+)

‘무빙’, 재생 능력자 류승룡의 피, 땀, 눈물에 빠져드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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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짝에 칼이 수십 개씩씩 박혀도, 총알이 팔뚝을 뚫고 심지어 얼굴을 관통해도 툭툭 털고 일어나 본래 상태로 되돌아가는 재생 능력자 장주원(류승룡). 하지만 이 초능력자도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는 오열하며 무너져 내린다. 모든 걸 재생시키고 회복시키는 능력을 가졌지만, 한 사람 앞에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는 이 초능력자는 그것으로 자신이 결국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증명한다.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무빙>이 국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의 대중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는 건 바로 이런 지점이다. 초능력자가 가진 인간적 상처와 고뇌. 물론 이건 슈퍼히어로물의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슈퍼맨도 배트맨도 스파이더맨도 인간적 고뇌는 모두 갖고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무빙>이 다루는 초능력자들의 인간적 고뇌는 그 서사의 깊이도 다르고, 보다 현실감이 부여되어 있다. 

 

<무빙>의 초능력자들이 저 할리우드 초능력자들과 달리 슈트를 입지 않는 건 그런 현실성을 더 반영한다. 폭탄 테러를 막기 위해 비행기를 향해 날아가는 공중부양 능력자 김두식(조인성)이나 북한에서 남파된 무장공비(북한 능력자가 포함된)를 막기 위해 작전에 투입된 장주원 역시 특별한 슈트를 입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지극히 평범한 점퍼 하나를 걸치고 총칼이 난무하는 작전에 투입된다. 

 

초능력자가 등장하는 슈퍼히어로물이면서, 그 서사에 실제 벌어졌던 역사적 사건들을 굳이 연결해 놓은 것도 이런 현실감을 살리기 위해서다. <무빙>은 안기부가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했던 시절부터 권한이 축소되고 국정원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다시 힘이 커지는 그 변화의 과정을 북한과 관련된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과 연관지어 풀어낸다. 칼기 폭파사건, 김일성 사망, 남북정상회담, 강릉 앞바다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 등등이 그것이다. 남북 간의 치열한 대결구도 속에서(미국의 간섭도 포함해), 국가 간 힘의 대결에 대한 이야기를 초능력자들의 서사로 풀어낸 것이다. 

 

이러한 현실감 위에 초능력자들을 세워 놓은 건, <무빙>이 진짜 하려는 이야기가 세상을 구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이러한 능력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마주하고 있는 비정한 현실을 그리기 위함이고, 그래서 이들의 대결상대는 북한이나 미국의 초능력자라기보다는 저들과 맞대응한다는 명분으로 이들을 인간이 아닌 괴물처럼 마음대로 이용하는 안기부 특별부서의 민용준(문성근) 차장 같은 인물이다. 

 

재생 회복 능력을 가진 장주원의 서사가 더 절절한 현실감을 주는 이유는 이 초능력자의 능력이 그저 깔끔하게 상대를 처리하는 그런 방식으로 발휘되는 게 아니어서다. 이 캐릭터는 한 마디로 ‘가진 건 몸뚱어리 하나밖에 없는 자’가 살벌한 현실에서 생존해가는 서사를 담고 있다. 지극히 서민적이고, 피와 땀과 눈물이 서려있다. 그래서 그가 작전에 투입되어 발휘하는 능력의 과정은 멋있다기보다는 짠한 느낌을 준다. 뭐든 온 몸으로 받아내고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제 살갗을 찢는 그런 모습이기 때문이다. 

 

회복 능력을 가졌다는 건, 단번에 이 고통이 끝나지 않고 연거푸 계속 피를 흘리고 땀을 흘리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는 ‘천형’의 의미가 담겨있다. 조직에 배신당하고, 안기부에서 이용당하면서도 그가 원한 건 단 하나, 아내와 함께 하는 행복이었다. 안기부 특별부서가 해체되고 하루하루를 생활고를 걱정하며 살게 된 이 평범해진 샐러리맨이 버틸 수 있었던 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꼭 안아주던 아내 때문이었다. “행복하다, 이러면 되는 거다. 이렇게 살자.”고 그는 생각한다. 

 

류승룡은 장주원이라는 재생 회복 능력을 가진 이가 겪는 피, 땀, 눈물을 공감시키는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어딘지 계산되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이 캐릭터는 류승룡을 만나 액션과 멜로에서 일관성을 느끼게 해준다.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계속 직진하는 액션과 멜로라니. 초능력자라도 이토록 인간적인 냄새가 느껴지게 된 건, 이 캐릭터의 독특한 현실은유와 더불어 이를 구현하고 표현해낸 류승룡의 공이 적지 않다고 여겨진다. 

 

특히 이 캐릭터는 <무빙>이 그리려 하는 세계, 즉 초능력자라는 판타지를 가져와 그들이 마주한 비정한 현실을 그리려는 그 세계를 납득시키는 존재라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 장주원에 설득되면 <무빙>이 가진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 속에서는 초능력자들이 날아다니고 총에 맞아도 재생되는 그런 장면들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보다 더 깊은 이들의 내면에 공감했으니 말이다. 류승룡의 미친 연기는 바로 이런 점에서 <무빙>의 든든한 반석 같은 역할을 해내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사진:디즈니+)

‘카지노’, 최민식의 인생 도박 모험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

카지노

역시 최민식은 최민식이다. 3회까지 첫 공개된 디즈니+ <카지노>는 한 마디로 최민식의 아우라가 전편을 장악하고 있는 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함과, 깡패들 사이에서 보여주는 살벌함과 더불어, 최민식 특유의 쓸쓸하고 처연한 정서가 더해져 <카지노>의 주인공 차무식(최민식)은 종횡무진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툭하면 사고를 치고 교도소에 들락거리는 깡패 아버지와 그에게 돈도 뜯기고 연일 두드려 맞으면서 기구한 일생을 살아온 어머니 사이에서 거친 삶과 동시에 인간적인 연민도 가진 인물, 차무식. 그의 80년대와 2000년대를 넘나드는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카지노>의 서사다. 그는 어쩌다 필리핀까지 가게 되어 그 곳에서 카지노를 운영하며 대부가 되는 인물로, 그 과정은 마치 인생이라는 도박판 위에서 그가 순간순간 던지는 레이스에 가깝다. 

 

시청자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이 인생 도박 모험의 롤러코스터를 바로 이 차무식이라는 인물을 통해 체험하는 짜릿함을 경험하게 된다. 당시에 수백억씩 되는 돈을 주무르는 욕망의 레이스도 있지만, 돈과 연결된 범죄의 어두움과 거기서 나올 수밖에 없는 살벌한 누아르적 분위기도 빠지지 않는다. 최민식이 대단하다 여겨지는 건, 이 차무식이라는 인물에 입체적인 얼굴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건 친구들에게는 끈끈한 친구의 얼굴이지만, 여지없이 살벌한 범죄자의 얼굴이기도 하고 때론 어머니를 한없이 가엾게 바라보는 아들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대를 뛰어넘어가며 이 여러 얼굴을 프리즘처럼 보는 와중에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그 모험의 여정에 참여하게 된다. 여기에 그의 과거에 깃들인 복고적 풍경들과 사건들이 향수를 자극하고, 이미 그 시대를 겪었던 이들이라면 차무식이 하는 어떤 선택들이 일으킬 결과를 어느 정도는 예감하면서 보게 되는 기대감도 커질 수밖에 없다. 도박, 폭력이라는 소재 자체가 자극적이지만 <카지노>에 감성적인 요소를 부여하는 건 차무식의 이런 다차원적인 얼굴이다. 최민식의 아우라가 <카지노>를 쥐락펴락하며 끌고 가는 힘이 되는 이유다. 

 

스타일로 보면 <카지노>에는 여러 결들이 겹쳐져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수리남> 같은 누아르적 분위기가 묻어나고, 마치 <나르코스> 같은 다큐 영상을 보는 듯한 실감나는 연출이 더해져 있다. 또 80년대와 2천 년대를 오가며 당대의 시대적 풍경을 담아내는 지점에서는 <파친코>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카지노>를 <카지노>로 만드는 건 역시 최민식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거칠면서도 감성적인 정조가 <카지노>만의 차별적인 색깔을 부여한다. 

 

물론 최민식 이외에도 <카지노>에는 벌써부터 존재감을 제대로 보여주는 배우들이 즐비하다. 무식의 아버지 역할의 김뢰하는 물론이고 무식의 청년시절을 연기한 이규형, 필리핀에서 무식과 카지노 동업을 시작하는 민석준 역할의 김홍파, 국세청 조사 팀장 강민정 역할의 류현경, 무식의 진정한 은사로 짧지만 강력한 존재감을 보여준 진선규 등등 조연들의 활약이 빛난다. 그 누구보다 무식이 필리핀에서 만난 상구 역할의 홍기준은 <카지노>가 발견해낸 보석같은 배우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진짜 본 게임에 들어올 배우들은 아직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이동휘, 손석구, 허성태, 김주령 같은 향후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기대되는 대목이다. 

 

3회만 먼저 공개되었지만 이미 서사의 몰입감은 다음 주를 못내 기다리게 만들 정도로 촘촘하게 쌓였다. <범죄도시>를 연출한 강윤성 감독은 액션 연출만 잘 하는 줄 알았는데, 인물의 감정을 촘촘히 그려내면서 서사를 쌓아가는 실력도 만만찮다는 게 느껴진다. 이 정도면 작품으로서는 분명 모두가 기대할만한 수작이다. 과연 디즈니+가 가장 기대했던 만큼, 그만한 파장과 화제를 불러일으킬 작품이라는 건 분명해졌다. 그간 좋은 작품을 내고도 생각만큼 주목받지 못했던 디즈니+가 이번에는 다른 결과를 낼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사진:디즈니+)

디즈니+ ‘커넥트’, 멜로 대신 판타지 스릴러로 돌아온 정해인

커넥트

정해인은 자신에게 오래도록 드리워져 있는 멜로의 이미지를 떨궈버리고 싶었던 걸까. 만일 그런 의도가 있었다면 그가 디즈니+ <커넥트>를 선택한 건 좋은 시도였다고 보인다. 멜로와는 거리가 먼 살풍경한 이 판타지 스릴러는 먼저 ‘멜로 눈’으로 정평이 나 있는 정해인의 그 눈부터 뽑아버리고 시작하니 말이다. 

 

‘뽑아버린다’는 살벌한 표현으로 이야기했지만, 실제로 <커넥트>는 신체 훼손과 장기 적출 등의 폭력 수위가 상당히 높은 18세 이상 시청가 콘텐츠다. 여기에 판타지가 섞였다. 신체가 잘리거나 장기가 손상되는 심각한 상해를 입어도 다시 잘라진 신체가 달라붙어 이어지고 원상 복귀되는 불사의 몸을 갖게 된 ‘커넥트’라는 존재가 바로 주인공 동수(정해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수는 이러한 불사의 몸을 능력이 아니라 ‘천형’으로 여기며 살았다. 어려서 나무에서 떨어져 뼈가 뒤틀어지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곧바로 회복되는 모습을 본 친구들이 “괴물”이라고 부르는 걸 경험한 후 그는 세상에 없는 존재인 것처럼 살았다. 하지만 장기밀매 조직에 의해 납치되어 장기가 적출되는 수술을 받는 과정에서 그의 이런 능력이 조직에 알려지고 조직은 동수의 몸이 ‘돈’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흥미롭게 이어지는 또 한 가지 사건은 장기밀매 조직으로부터 도망치는 와중에 한 쪽 눈을 챙기지 못했고, 그 눈이 회복능력을 갖고 있는 걸 알게 된 불법 시술을 하는 의사가 마침 자신에게 시술을 받은 연쇄살인마 진섭(고경표)에게 그 눈을 이식하는 실험을 한 것이다. 이로써 동수와 진섭은 그 눈을 통해 연결된다. 

 

그런데 동수와 진섭이 눈을 통해 연결되는 과정이 의미심장하다. 그건 동수가 만든 노래 ‘나의 노래’라는 곡을 통해서다. 그 노래가 들리면 진섭에게 이식된 눈이 반응을 하고 동시에 동수의 눈도 반응을 한다. 동수는 노래가 들리는 동안 고통스럽게 진섭이 하는 살인행각들을 보게 되고, 그 연쇄살인을 막고 자신의 눈을 되찾기 위해 진섭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신체가 절단되어도 다시 연결되고, 장기 이식을 통해 동수와 진섭이 연결된다는 설정은 섬뜩하면서도 신박한 판타지 스릴러의 양상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단지 피가 튀고 살이 잘려나가는 자극적인 스릴러에 ‘연결’ 즉 ‘커넥트’라는 은유적인 의미망이 더해지면서 생겨나는 신박함이다. 도대체 이 살벌한 소재는 어떻게 ‘커넥트’라는 은유와 연결되는 것일까. 

 

그것은 동수가 몸이 부러져도 금세 원상태로 돌아가는 특별한 몸을 가진 이유로 친구들에게 ‘괴물’이라 불렸던 것과 관련이 있다.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세상 바깥으로 밀려났고 스스로 세상과 단절한 채 살아간다. 하지만 그런 삶에 그가 유일하게 세상과 연결되는 건 자신이 만든 노래를 통해서다. ‘나의 노래’는 사람들에게 회자되며 유명해지고 결국 유명 음악인인 Z(양동근)에 의해 리메이크되어 더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다. 동수는 Z와 음악적 교감을 나누고 그를 통해 자신의 노래가 세상과 연결된 것에 감사해한다. 

 

이것은 암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되면서 삶에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된 진섭이 연쇄살인마가 되는 선택과는 사뭇 다르다. 진섭은 결국 누구나 죽게 되고 그래서 그 죽음을 ‘아름답게’ 전시한다는 명목으로 연쇄살인을 벌인다. 사람을 죽여 그 신체를 활용해 조각 같은 작품들을 만들어 세상 사람들이 다 보이는 곳에 전시하는 것. 그 역시 자신이 만든 작품(사실은 잔혹한 살인일 뿐이지만)을 통해 그렇게 세상과 연결되려 한다. 

 

동수와 진섭은 그래서 닮은 듯 다르다. 그들은 모두 괴물 같은 존재이고, 모두 세상과 단절되어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연결되고 싶어 한다. 그 매개는 둘 다 ‘예술’을 통해서다. 동수는 음악을 통해 진섭은 미술 전시(?)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 한다. 물론 보는 것과 듣는 것에 대한 의미를 단적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이 작품 속에서 보는 것은 폭력적인 것으로 묘사되는 반면, 듣는 것은 상대의 마음과 연결되는 공감으로 표현된다. 

 

보는 것에 의해 다른 존재임을 알게 된 이들은 심지어 그간 가족, 친구처럼 지내온 이들조차 “괴물”이라고 피하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다시 연결시키는 건 그들이 살아온 삶의 아픔과 상처를 들어주려는 누군가의 마음이다. <커넥트>는 그래서 단지 눈에 보이는 살풍경한 스릴러의 자극으로만 얘기될 수 없는 작품이다. 뒤로 갈수록 동수와 이렇게 살아가게 된 이들의 아픔이 느껴지고 그들을 향한 폭력적인 시선과는 정반대의 따뜻하게 그 이야기를 들어주려는 이들의 마음 또한 느껴진다. 

 

다시 정해인 이야기로 돌아오면 <커넥트>는 그런 점에서 정해인이 기존의 이미지와의 절단과 동시에 다시 연결되어 또 다른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보인다. 일단 정해인 하면 늘 따라붙던 ‘멜로 눈’부터 떼놓고(?) 시작하는 점이 그렇고, 그렇게 치열한 내면의 아픔을 안대를 찬 채 벌이는 스릴러를 통해 보여주면서 그 상처에 공감하게 만드는 연기의 과정이 그렇다. <커넥트>는 그래서 정해인의 또 다른 가능성을 대중들에게 연결해준 작품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진:디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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