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의 배종옥과 김태우, 악역에도 격이 있다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이하 그 겨울)>에서 왕비서(배종옥)과 조무철(김태우)은 미스테리한 인물들이다. 누가 봐도 악역이지만 그 속내를 좀체 알 수가 없다. 왕비서는 눈 먼 오영(송혜교)의 뒷바라지를 하며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마치 엄마처럼 오영을 걱정하고 챙기지만, 그녀가 사실 오영의 눈을 멀게 방치했다는 사실은 그것이 모성이 아니라 모성에 대한 괴물 같은 집착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녀는 오영을 평생 옆에 두고 챙기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려 했던 것.

 

'그겨울 바람이 분다(사진출처:SBS)'

왕비서가 자신의 집착이면서도 그것을 모성으로 꾸몄다면, 조무철은 정반대 악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조무철은 오수(조인성)로 하여금 오영에게 거짓 오빠 노릇을 하게 만드는 장본인이다. 100일 안에 78억을 갚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위협은 이 드라마의 가장 강력한 장치가 된다. 이 드라마는 자본의 문제와 동시에 죽음의 문제를 겹쳐서 돈을 무화시키는 죽음의 힘,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인간애 같은 것을 다루고 있는데 조무철은 오수에게 바로 그 죽음을 드리우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겨울>에는 그래서 세 명의 시한부 인생이 등장한다. 뇌종양이 재발해 죽어가는 오영이 그렇고, 말기암 판정을 받은 조무철이 그러하며 그로 인해 100일이라는 시한부인생을 선고받은 오수가 그렇다. 죽음이라는 명제와 78억이라는 돈은 늘 같이 병치되어 나오면서 동시에 삶과 사랑, 사람에 대한 가치가 부각되는 게 이 드라마의 핵심구조다. 조무철이라는 악역은 그래서 겉으로 보면 악역이지만 사실상 오수라는 탕자에게 진짜 삶을 부여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박진성(김범)과 오수를 죽이려는 김사장에게 100일을 채울 동안 기다리라 오히려 협박하는 조무철의 행동은 그래서 그가 실제로는 악역이 아닌 존재라는 걸 감지하게 해준다.

 

마치 엄마처럼 행동하고, 모성마저 가장하는 왕비서라는 존재와, 악역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오수에 대한 애증을 갖고 있는 조무철이라는 존재는 <그 겨울>이 가진 격이 다른 악역의 결을 보여준다. 심지어 오영의 눈을 멀게 방치하는 왕비서라는 인물은 점점 그 밑바닥을 드러내면서 악역이라기보다는 측은한 마음까지 들게 만드는 인물이 된다.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모성에 집착하게 했던 것일까 하는 마음.

 

'그겨울 바람이 분다(사진출처:SBS)'

반면 가장 비열한 것처럼 보였던 조무철은 그 이면에 깔린 오수와의 애증이 드러나면서 점점 상처받은 짐승 같은 동정심을 유발한다. 어쩌면 조무철의 죽음은 오수를 구원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마도 악역이 이 정도의 구원자 역할을 해낸 캐릭터는 지금껏 우리네 드라마에서 흔치 않았을 게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이 특별한 악역들을 연기하고 있는 배종옥과 김태우의 연기력이다. 배종옥의 오영을 바라보는 눈은 엄마처럼 자애롭다가도 갑자기 치켜떠지면 공포영화의 그것처럼 보는 이들을 소름끼치게 만든다. 김태우의 오수에 대한 증오심은 한없이 폭발하다가도 어느 순간 언뜻언뜻 그 내면의 애정이 묻어난다. 눈가의 흉터는 잔인한 악마의 모습과 동시에 쓸쓸한 상처의 흔적을 담아낸다. 이들은 눈빛 하나만으로도 이 양가감정을 가진 캐릭터를 넘나들고 있는 셈이다.

 

악역조차 인간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은 아마도 노희경 작가가 가진 휴머니즘과 닿아 있을 것이다.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악마 같은 존재들이 그저 드라마의 극성을 만들기 위해 기능적으로 활용되는 <야왕>이나 <백년의 유산> 같은 드라마의 악역들과는 그래서 확연히 다른 격을 보여준다. 악역에게조차 어떤 온기를 부여하는 것. 이것은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이해에서나 가능한 법이다.


진실이 엄마가 온 몸으로 전한 위대한 모성의 진정성

'휴먼다큐 사랑'(사진출처:MBC)

이렇게 고통스런 삶이 있을까. '휴먼다큐 사랑'에 얼굴을 보인 고 최진실씨의 엄마 정옥숙씨. 힘겨운 결혼생활에 논일, 밭일, 뜨개질, 외판원, 심지어 포장마차까지 하며 살아보려 했지만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아 스스로도 죽자 결심을 했던 그녀. 그 때 그녀의 손을 잡아준 건 어린 최진실의 손이었다. 최진실은 훗날 한 인터뷰를 통해 그 때 가장 힘들었던 건 가난이 아니라, "이러다 엄마가 떠나버리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었다고 술회했다.

가난이 엄습해 급식비는 못내기 일쑤에다 학비를 못내 불려 다니고, 휴학으로 돈 벌기 위해 구로공단에 간 동생은 다리를 다친 채 며칠을 굻고 빵 한쪽으로 끼니를 때우며 "이렇게 사느니 죽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자식들을 보는 엄마의 마음이 오죽했을까. 그래도 뿔뿔이 흩어져 지내다가 거미줄까지 쳐진 동네 연탄광에 모여 살면서도 그들을 살 수 있게 해준 것은 세 식구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었다. "연기자가 되어야겠다. 돈 벌어서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겠다." 이 말이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건, 그녀의 선택이 그녀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가족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성공해 돈을 벌어 그렇게 꿈같은 나날들을 보내지만 갑자기 찾아온 불행들. 자식들만큼은 아빠 없이 살게 하지 않겠다는 고집으로 이혼만은 안 하겠다 버티며 힘겨워했던 딸을 보는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졌을까. 세상이 나쁜 말들을 만들어내고 결국 사지로까지 딸을 몰아세울 때 무기력하게 울 수밖에 없는 딸을 보는 엄마의 마음은 또 어떻고. 그 서로의 버팀목이던 수족 같은 자식들을 하나하나 먼저 떠나보내며 겪었을 엄마의 찢어지는 가슴은 뭐라 표현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다. 엄마의 갈라진 손마디 마디가 못내 가슴이 아픈 것은 자식을 따라가고 싶지만 남은 아이들이 있어 살아내야 하고, 그래서 죽어라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던 세월을 그 거친 손마디가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매일을 눈물로 살아가는 고통 속에서도, 먼저 고인이 되어버린 최진실과 최진영을 고스란히 닮은 환희와 준희를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버틴다는 엄마는 마흔 두 번째 딸의 생일날 묘소를 찾아서도 하늘에 있을 딸 걱정뿐이다. "네 아들 딸 잘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너한테 받은 거만큼 내가 너에게 많은 사랑을 못해줘서 마음이 아프다. 사랑한다 진실아." 그러면서 이 엄마는 그래도 "우리 딸하고 아들이 효녀 효자"라고 말한다. 자식들 없이 갔으면 자신이 저희들을 따라갈 줄 알고 자식들을 놓고 갔기 때문이란다. 또 먹고 살라고 재산을 남겨놓고 갔기 때문이란다. 거기에 대해 심지어 너무 감사하고 고맙다고 한다.

이 모성이 놀랍고 위대한 것은 심지어 자신 속에 가시처럼 박힌 한마저 지워내며 먼저 아이들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혼으로 힘겨웠을 딸을 생각하면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아이들 아빠. 그래도 그녀는 그를 받아들인다. 아이들 아빠이기 때문이다. "그런 한을 남겨주지 말고 다 잊어버리고 아빠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갖게 해줘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은 모성이 아니라면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내 딸이 그렇게 사랑하던 두 아이를 나한테 이렇게 선물로 주고 갔으니까 최선을 다해서 돌보고 내 생명이 다 할 때까지 나는 견뎌야지 하면서도 정말 너무 딸하고 아들이 보고 싶어요. 세월이 빨리 흐르면 우리 환희, 준희도 빨리 클 것이고 나는 또 그만큼 우리 딸이 있고 아들이 있는 하늘나라로 다가가는 거니까."

아이들에게 소원을 하나씩 말하라는 질문에 아이들은 "죽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진실이 엄마는 "하나님이 세상에 죽지 않게 하는 건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 어쩌면 이것은 그 받아들이기 힘든 절망 속에서 위대한 모성이 찾아낸 한 줄기 긍정이 아닐까. '휴먼다큐 사랑-진실이 엄마' 편이 보여준 것은 절망의 끝단에서도 보살필 가족이 있어(어쩌면 그 희망과 기쁨 때문에) 삶을 살아가게 하는 모성의 위대함이다. 그리고 이 온 몸으로 전한 위대한 모성의 진정성은 연예인들을 사지로 내모는 루머에 대해 그 어떤 것보다 강한 경각심을 일깨워주었다.

식모가 판타지가 된 모성 없는 세상

'지붕 뚫고 하이킥'의 신세경은 엄마가 없다. 빚쟁이들을 피해 산골에서 아빠와 동생 신애와 살다가 그마저 쫓겨나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찾아오겠다는 아빠의 말 한 마디를 가슴에 품고 동생 신애와 서울로 무작정 상경한 그녀는 가족 간의 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이순재의 집에서 얹혀살게 된다. 그러니까 그녀는 한창 공부를 해야할 고등학생이지만 학교도 가지 못하고 동생을 돌보기 위해 식모살이를 하며 살아가야 하는 소녀 가장이다.

엄마가 없어 엄마 자리를 대신하는 삶을 살아오던 그녀가, 살기 위해 타인의 집에서 엄마 역할(식모)을 대신하며 살아간다는 설정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이것은 사실 개발시대에 시골에서 가족들을 위해 무작정 상경한 처자들이 식모살이를 하면서 살았던 그 시절의 이야기와 중첩되는 부분이 있다. '지붕 뚫고 하이킥'이라는 시트콤은 바로 이 식모의 이야기를 주변부로 다루곤 하는 여타의 드라마들과는 다르다.

그런데 이 신세경이라는 식모는 수상하다. 물론 이 식모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에 등장하는 한 가정을 파멸로 이끄는 가정부도 아니고, 박진규의 '수상한 식모들'이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호랑아낙(신의 뜻으로 인간이 된 곰과 달리 스스로 동굴을 뛰쳐나가 여자가 된 호랑이의 후손)의 후손도 아니다. 하지만 2010년의 한 평범해 보이는 도시의 가족 속으로 들어온 신세경이라는 식모와 이 가족이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은 수상하기 이를 데 없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이순재의 집안사람들이 함께 모여 밥을 먹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정보석이 뭔가 얘길 하려하면 이순재는 거기에 면박을 주고, 그러면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듯 딸인 해리(진지희)는 "갈비나 먹어"라고 말한다. 이순재의 아들인 이지훈(최다니엘)은 먹는 둥 마는 둥 서둘러 출근하기 바쁘고, 준혁 역시 가족과 함께 밥 먹는 게 그다지 즐거운 표정은 아니다. 이 식탁에는 엄마의 온기가 없다. 직접 밥을 챙겨주어야 할 이현경(오현경)은 엄마라는 위치보다는 열심히 사회생활을 하는 맹렬여성에 가깝다.

그 한쪽 귀퉁이에서 그것이 단지 일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는 듯, 진심을 담아 정성스레 밥을 챙기는 여자가 있다. 바로 신세경이라는 식모다. 그녀는 언감생심 이 집안의 아들인 이지훈을 짝사랑하지만 그렇다고 '하녀'의 가정부처럼 그를 유혹해 이 권력구조의 전복을 꿈꾸지 않는다. 다만 멀리서 바라보고, 늦은 밤 잠을 설쳐가며 목도리를 손수 짜주고, 늦게 식탁으로 돌아온 그에게 따뜻한 밥을 다시 내오는 정도가 그녀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지훈이라는 IQ는 높아도 EQ는 낮은 전형적인 도시의 남자가 그것을 알아챌 리 만무다.

그러면서 '지붕 뚫고 하이킥'은 '하녀'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 주인과 현대판 하녀의 권력적인 관계를 전복시킨다. 웃음의 코드로 역전시키는 것. 즉 신세경은 식모이지만 몇몇 남성들의 판타지가 되기도 한다. 준혁(윤시윤)의 친구인 세호(이기광)는 친구들과 팬클럽을 조직할 정도로 신세경의 추종자가 되기도 한다. 신세경과 황정음의 퀸 자리를 두고 벌이는 묘한 대결구도는 그래서 낮은 자들의 판타지를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신세경에 대한 준혁의 마음은 첫사랑에 대한 설렘이 분명하지만, 또한 이 이순재의 집이 가진 모정 없는 풍경 때문에 그것은 부재한 모정에 대한 갈구로도 보인다. 찬바람이 쌩쌩 도는 집안사람들에게 퉁퉁대면서도 세경의 말 몇 마디에 뭐든 할 것처럼 뛰어다니는 준혁의 모습은 모정 없는 도시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외로움이 담겨져 있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신세경은 아마도 식모라는 직업으로 대중들을 매료시킨 최초의 캐릭터가 아닐까.

사회적으로는 안정되었지만 집안의 어른이 되지 못하는 이순재, 가장이지만 늘 구박만 받고 살아가는 정보석, 한 가족의 엄마이지만 사회생활 때문에 늘 부재한 이현경, 자기 일에만 바빠 가족을 돌아볼 틈이 없는 이지훈, 입시 교육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는 준혁, 그리고 한창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야할 나이에 사랑 없는 세상을 느끼고 '빵꾸똥꾸'를 외치는 해리. 이 푸석푸석한 도시의 캐릭터들 사이에서 따뜻함을 전하는 신세경이란 캐릭터는 그래서 하나의 판타지로 보인다. 이 캐릭터에 대한 열광은 단지 '청순 글래머'라는 배우 신세경의 외모적인 측면 때문만은 아니다.

‘돌아온 일지매’, 그 모성 부재의 세계

‘돌아온 일지매’에서 심마니의 딸로 살아가던 달이(윤진서)는 우연히 만나게 된 일지매(정일우)에게 대뜸 이렇게 말한다. “자식. 너 예쁘게 생겼다. 계집애 같애... 일지매. 무슨 이름이 계집애 같애... 눈썹이랑 코, 입 모두 여자 애 같애.” 그녀의 아찔한 도발에 일지매는 진짜 계집애(?)처럼 답한다. “놔라. 부끄럽다. 멋쩍다.” 그런데 다음 시퀀스로 일지매는 아예 달이의 옷을 입고는 마을로 내려가 닭을 훔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여장한 일지매는 어찌 보면 이 사극에서 생뚱맞아 보인다. 왜 굳이 여장까지 해 보일까. 재미있어서? 일지매가 본래 꽃미남의 원조라서?

고우영 원작의 ‘일지매’를 보면 그 얼굴은 고우영 화백이 즐겨 그리던 여성 캐릭터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달이가 지적한 것처럼 ‘일지매’라는 이름 또한 여성적이다. 훗날 일지매가 일을 치르고 나서(?) 사라지며 남겨놓는 매화 한 가지도 이 활극에 어울리지 않게 자못 여성적이다 못해 미적이기까지 하다. 왜 일지매라는 특별한 영웅은 굳이 여성의 얼굴을 고집하고 있는 것일까.

일지매, 그 모성부재의 세계
‘돌아온 일지매’가 그리는 세계에는 모성이 삭제되어 있다. 일지매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고, 결국 버려지게 되었다. 저자거리의 걸인인 걸치(이계인)는 버려진 일지매를 데려다 젖동냥을 해가며 키운다. 이 모성 없는 세상에 버려진 일지매와, 그를 키워낸 걸인 아버지 걸치라는 설정은 이 드라마가 그리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을 압축한다.

모성 부재의 세계 속에는 두 개의 아버지 모습이 중첩되어 있다. 하나는 아들을 눈앞에서 부정해버리는 비정한 아버지이고 다른 하나는 피 한 방울 안 섞였어도 간 쓸개까지 다 내어줄 정도로 지극 정성인 걸치라는 아버지다. 비정한 아버지는 어머니를 내치면서(혹은 방조했고) 일지매 앞에 모성부재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일지매는 그 부재한 모성을 야성처럼 품고 있는 달이를 만나지만 그녀 역시 아버지들의 세계 앞에 목이 떨어진다.

일지매가 찾는 것은 바로 그 아버지로 인해 잃어버린 모성의 세계다. 반 미쳐 짐승이 되어버린 일지매를 굴(이 드라마 속에는 굴, 즉 자궁의 이미지를 많이 사용한다. 달이와 만나던 동굴 같은)에 가둬버리며 열공스님은 “그 곳이 바로 네 어미 뱃속이다”라고 말한다. 열공스님은 일지매를 가둔 것이 아니라, 그가 그토록 원하던 모성의 세계로 되돌려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다. 그가 밖으로 나오게 될 즈음, “너는 누구냐”고 묻는 열공스님의 질문에 일지매는 말한다. “저는 이입니다. 어미를 찾아 옷섶을 헤매던 더러운 이.”

모성부재의 세계, 서민 아버지들의 모습은?
이 사극에는 모성을 빼앗아버린 아버지와 상반되는 걸치와 열공스님 이외에도 또 존재하는 아버지들이 있다. 그것은 구자명(김민종), 배선달(강남길) 같은 서민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은 권력의 핵심에는 근접하지 못하지만 그럭저럭 살아가며 문득문득 부성애를 끄집어낸다. 구자명은 포도청의 냉철한 수사관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힘없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따뜻함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일지매 앞에서 그는 마치 아버지와 같은 걱정을 해준다.

한편 배선달과 차돌이(이현우)는 일지매의 모성부재 상황을 또 다른 버전으로 반복한다. 차돌이는 부모가 없는 천애고아에 동네 왈패들에게 약취를 당하던 아이. 배선달은 차돌이를 자신이 데려다 키우겠다며 아버지의 정을 보인다. 그런데 이 아버지의 상을 보이는 구자명과 배선달 같은 캐릭터는 어딘지 고개 숙인 모습들이다. 구자명은 법을 집행하는 위치에 있지만 법보다 우위에 있는 권력 앞에서 무기력하고, 배선달은 화려한 무예의 세계에 빠져있지만 자신 하나 지켜낼 힘이 없는 소시민이다.

일지매, 여성의 얼굴로 서민들을 품에 안다
모성이 삭제되어있고, 자궁의 이미지가 강조되며, 일지매라는 캐릭터가 여성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이 사극이 지향하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부재한 모성의 회복이다. 일지매는 바로 여성의 얼굴로 굶주린 서민들에게 먹을 것을 챙겨다 주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그러니 이 일찌감치 어머니 없는 세계에 내던져진 일지매가 그 먼 길을 돌아 스스로 품게 되는 것이 바로 모성이다.

국가를 흔히 어머니에 비유하는 것은 그 백성들을 자식으로 여기는 마음을 꿈꾸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온 일지매’의 세계 속에서 국가는 백성을 착취하는 아버지(당대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아버지는 종종 권력을 좇는 욕망의 화신으로 그려진다)의 이미지로 표상된다. 그 아버지는 일찍이 어머니(의 마음)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며, 따라서 일지매는 소년기 그 어머니를 찾아다니다 결국에는 서민들의 어머니를 자처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가부장적 세계와는 거리가 먼, 서민들의 아버지들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측은한 마음으로 서민들의 삶을 바라본다. 그들에게 어머니는 이미 살해된 존재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지매를 통해 그 모성 회복의 가능성을 확인한 그들도 변하게 된다. 이것은 일지매가 왜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실마리를 전해준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모성을 형상화한 영웅 일지매가 여타의 영웅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인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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