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에서 멜로 코드는 어딘지 뜬금없다

JTBC 월화드라마 <라이프>도 어쩔 수 없이 멜로의 달달한 조미료가 필요했었나. 지난 회 이노을(원진아)에게 자신의 연정을 고백하는 예선우(이규형)의 이야기가 슬쩍 등장하더니, 이제는 예진우(이동욱)와 최서현(최유화)의 관계가 심상찮다. 최서현은 새글21 기자로서 영리를 추구하기 시작한 상국대학병원을 취재하다 예진우를 만나게 됐지만, 그를 바라보는 예진우의 시선은 설렘이 가득하다. 

일 때문에 약속을 깜박한 예진우에게 “그러니 여자친구에게 잘 하라”고 최서현이 말하자, 대뜸 “여자친구 없다”며 반색하는 모습이 그렇다. 이 정도의 멜로 코드는 사실 여타의 드라마라면 그다지 주목되지도 않았을 내용들이다. 하지만 워낙 밀도 있게 병원을 둘러싼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욕망을 들여다보던 드라마여서인지 이 작은 멜로 코드도 어딘가 긴장감을 흩트리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면 이 드라마도 관계의 구도 안에 멜로의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예진우와 이노을 그리고 구승효(조승우) 사장 사이의 관계가 그렇다. 예진우와 이노을은 친구사이로 스스럼없이 지내는 관계처럼 보이지만 그 속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역시 구승효에게 인간적으로 다가가 그 단단한 경영적인 마인드를 부드럽게 건드리는 이노을의 속내도 언제 어떻게 변화될지 알 수 없다. 구도로만 보면 이노을을 좋아하는 예선우와 최서현에 호감을 느끼는 예진우, 그리고 예선우와 구승효 그리고 예진우 사이에 서 있는 이노을의 관계는 멜로적 변화가 언제든 가능하다. 

그런데 아마도 이런 멜로는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를 통해 원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숨 쉴 틈 없이 속도감 있게 진행되던 이야기가 멜로의 틀로 슬쩍 들어오면서 긴장이 풀리고 너무 평이해지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멜로 코드가 무조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애초에 <라이프>가 그려나가려던 병원 내의 욕망과 욕망이 부딪치며 일으키는 항원-항체 반응의 예측 불가능한 전개에는 다소 뜬금없는 면이 있다. 

살짝 흩어지려는 긴장감을 다시 만들어낸 건 상국대학병원의 원장 투표를 두고 벌어지는 여러 인물들 간의 대결구도 덕분이다. 자신이 원장이 될 거라 자신했던 김태상(문성근) 부원장은 심평원 심사에 의해 과잉진료는 물론이고 비자격자에게 환자의 수술을 시킨 일이 드러나면서 추락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그를 따르는 듯 했던 이상엽(엄효섭) 암센터장과 오세화(문소리) 신경외과 센터장이 원장 자리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며 출마한다. 이들은 병원 복도에서 서로의 허물을 들춰내며 한바탕 말싸움을 벌인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여긴 예진우가 주경문(유재명) 흉부외과 센터장을 찾아가 원장 출마에 나서달라고 요구하고 그렇게 시작된 투표에서 오세화와 주경문이 동표를 얻어 재투표에 들어가게 된다. 그 순간 구승효는 투표장을 찾아 주경문에게 악수를 건네며 은근슬쩍 그가 상국대병원을 그만 두려 했다는 사실을 흘린다. 말 한 마디를 던진 것이지만, 그 한 마디는 주경문에게 제대로 물을 먹인 결과가 된다. 

<라이프>가 가진 드라마적 묘미는 바로 이런 병원 내에서 벌어지는 권력 구도와 팽팽한 대결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 대결이 사실상 우리네 사회의 축소판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그것은 재미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함의까지도 담겨진다. 그러니 괜스레 멜로 코드 같은 곁길에 눈길을 주기 보다는 꿋꿋이 이 가려던 길을 가는 드라마가 되어야 더 힘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라이프>의 멜로 코드는 어딘지 뜬금없게 느껴진다.(사진:JTBC)

‘라이프’, 조승우의 진짜 얼굴은 도대체 어떤 걸까

도대체 구승효 총괄사장(조승우)의 진짜 얼굴은 뭘까. 경영적자의 원인으로 지목된 응급센터,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를 지방병원으로 파견 보내겠다는 방침으로 의사들의 반발과 파업 결의까지 일으켰던 그는 돌연 그 방침을 뒤집었다. 지방병원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고 선언한 것. 그렇게 쉽게 결정을 번복할 거였다면 왜 그토록 강경하게 의사들을 몰아세웠던 걸까. 

JTBC 월화드라마 <라이프>의 구승효 사장이 가진 오리무중의 행보를 보다 보면 새삼 자본주의의 두 얼굴이 느껴진다. 그가 의사들을 몰아붙였던 건 실제로 지방 파견을 보내기 위함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숨겨진 노림수들이 들어 있었다. 첫째는 상국대학병원이 의사들만의 힘으로 굴러가는 곳이 아니고 이제 화정그룹의 경영 하에 움직인다는 걸 실력행사를 통해 보여준 것이다. 지방 파견이라는 한 마디에 병원 전체가 시끌시끌해지는 그 상황을 통해 의사들이 경영진의 존재를 확실히 느끼게 됐던 것.

둘째 노림수는 그 혼돈 과정을 통해 인물들을 파악하기 위함이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가 그 혼돈 속에서 드러나게 됐던 것. 예진우(이동욱) 응급의학센터 전문의는 조용히 지내던 모습에서 구승효와 대적하는 인물로 등장했다. 주경문(유재명)은 상국대학 출신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병원 내부에서도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의사라는 본분을 지키려 구승효와 맞서게 되었다. 

반면 김태상(문성근) 부원장은 간에도 붙었다가 쓸개에도 붙었다 하는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구승효와의 독대를 통해 자신이 원장이 되려는 일에 서로가 도움이 된다는 걸 확인시키면서, 동시에 병원의 실세들인 오세화(문소리) 신경외과 센터장, 이상엽(엄효섭) 암센터장, 서지용(정희태) 안과 센터장을 만나 자신을 밀어달라고 요구한다. 자신이 원장이 되어 사장을 몰아내겠다는 것. 그는 과연 사장 편일까 아니면 의사들의 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원장이 되고픈 욕망을 위해 어느 쪽이든 활용하는 인물일까.

김태상과 손을 잡은 듯한(?) 구승효는 슬쩍 약품을 독점적으로 납품하는 자회사를 설립할 거라는 걸 그에게 말한다. 사실상 불법이지만 비영리법인처럼 만드는 편법으로 그렇게 하면 화정그룹으로서는 큰 이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승효가 이 자회사를 통해 약품은 물론 건강보조식품까지 납품하게 만드는 과정은 굉장히 순차적이다. 

먼저 병원 각 부서들의 감사를 통해 약물 투약이 잘못되어 사망한 환자의 기록을 찾아내 의사들을 압박한다. 그리고 그 사건을 언론에 알려 공론화함으로써 의사들 역시 저마다의 욕망을 가진 폐쇄적인 집단이라는 걸 드러내면서 궁지로 몰아넣는다. 의사들도 반발한다. 그것이 너무나 인력이 부족한 시스템 때문에 생겨난 문제라는 것. 구승효 사장은 그것까지 염두에 둔 것인지 다음 단계를 진행한다. 이른바 바코드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다. 바코드로 찍기만 하면 환자가 어떤 약물을 투여받아야 하는지 또 약물 투여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가 쉽게 확인된다. 

그런데 그 바코드 시스템에 의해 의사와 간호사들이 그 편리함에 빠져들게 되자, 그 시스템을 제공한 제약회사의 약품과 건강보조식품이 들어온다. 의사들은 건강보조식품까지 영업해야 하는 상황에 반발하지만, 이미 바코드 시스템에 적응되어 이를 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구승효 사장은 반발하는 의사들에게 확실하게 자신들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각인시킨다. 그저 병원의 의사가 아니라 화정그룹이라는 기업에 돈을 받고 일하는 의사들이라는 것. 

구승효의 종잡을 수 없는 행보에 이노을(원진아)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는 그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궁금해한다. 소아병동에 데려갔을 때 아기들을 보던 그 모습이 진짜인지, 아니면 돈벌이를 하려 병원 내에서 벌인 일련의 조치들이 진짜인지 헷갈리는 것. 갑자기 유기견을 위한 봉사활동에 나서는 일도 마찬가지다. 수행비서인 강경아(염혜란)가 우연히 반려견의 보험적용이 되지 않아 엄청났던 병원비용을 얘기한데서 구승효는 이것이 돈이 될 거라는 걸 직감했던 터다. 

구승효에게는 두 가지 얼굴이 있다. 그 하나는 무심한 듯 친절해 보이는 모습이다. 서산의 땅 주인을 설득하는 과정에서도 그는 마치 그 분의 입장을 이해하는 듯 소탈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그를 통해 얻어가려는 자신의 이익이 존재한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가 처해있는 자본주의의 두 얼굴이 아닐까. 편리함이라는 부드러움으로 다가오지만, 거기에 종속되고 나면 이익이라는 진짜 얼굴을 드러내는. <라이프>가 구승효를 통해 보여주는 놀라울 만큼 치밀한 자본주의 시스템의 얼굴.(사진:JTBC)

병원의 두 얼굴, 벌써 팽팽한 ‘라이프’의 긴장감 

사람을 살리는 곳 혹은 엄연한 사업체. 병원의 두 얼굴이다. 인정하긴 싫지만 사람이 죽고 사는 건 단지 천명에 달린 일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명은 돈에 좌우되기도 한다. 물론 당장 생명 앞에서 의사는 최선을 다하려 한다 할지라도, 병원이라는 자본의 무생물은 시스템으로 삶과 죽음을 가른다. 이수연 작가가 <비밀의 숲> 이후 돌아온 JTBC 월화드라마 <라이프>는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메스로 갈라보는 드라마다. 

드라마는 옥상에서 떨어져 피투성이가 된 채 병원 응급실 앞으로 도착했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한 이보훈 원장(천호진)에서부터 시작한다. 구급차에서 이 원장에게 심폐소생술을 했던 듯 보이는 부원장 김태상(문성근). 카메라는 그 구급차에서 죽은 원장을 확인하고는 넋이 나가버린 예진우(이동욱)에서 조금씩 빠져나와 상국대학병원 건물을 훑으며 올라간다. 그리고 병원 저편으로 보이는 어둑한 도시를 비춘다. 

그건 마치 이 드라마가 담아내려는 이야기의 구조를 압축하는 듯 보인다. 처음에는 원장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에서 시작하지만 그 이야기는 이 병원을 감싸고 있는 새로운 시스템이 불러온 어떤 비극적인 사건을 예고하고 궁극적으로 이 병원의 시스템이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시스템을 고스란히 드러낼 거라는 예감이다. 

술에 취해 부원장의 집을 찾아와 술 한 잔을 더하다 담배를 피운다며 옥상에 올라갔다가 추락사했다고 했지만, 예진우는 그 날 원장과 다퉜다는 부원장을 의심한다. 그 의심을 확증이라도 하듯 곧바로 지역병원으로 산부인과, 소아과, 응급과가 파견을 가라는 지침이 내려온다. 당국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누가 봐도 병원에 채산성이 없는 과들을 치우겠다는 의도가 보인다. 

원장의 죽음이 단순한 추락사가 아니라고 의심하게 되는 건, 대학재단이 사기업으로 바뀌면서 병원에 내려진 성과급제 확대 시행 지침서에 원장이 극렬히 반발했기 때문이다. “환자가 돈줄로 보이기 시작하면 그 의사는 더 이상 갈 데가 없어. 배우려는 학생한테 돈 뜯어내기만 궁리만 하는 선생을 선생이라고 할 수가 있나? 학생은 선생이 푼 문제의 답이 잘못된 걸 알지. 우리가 하는 수술 우리가 내리는 처방 일반인들은 죽었다 깨나도 몰라. 그래서 의술이 무서운 거야. 그래서 우리가 더욱더 독하게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 근데 이딴 걸 지침이라고 내려보내? 아무리 사기업이 대학재단을 통째로 먹었다고 해도 이건 아니야. 이래선 안 되는 거야.”

원장의 이 말은 <라이프>가 담아내려는 병원의 두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병원도 자본의 시스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래도 생명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래서만은 안 된다는 것. 자본의 현실을 말하는 병원의 새로운 총괄사장 구승효(조승우)와 원장과 뜻을 함께 해온 예진우는 그렇게 대립하게 된다. 

역시 <비밀의 숲>이 스릴러 장르를 가져오면서도 검찰의 내부 시스템의 문제를 건드렸던 것처럼, <라이프>도 의학드라마이지만 그 안에 담겨진 시스템의 문제를 다룬다. 의술이 부족해서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라,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죽어나가는 그 구조를 지목하는 것. 역시 괴물 신인 작가로 불렸던 이수연 작가 특유의 진중한 색깔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그래서 <라이프>는 그 흥미진진한 원장의 죽음을 둘러싼 추리와 스릴러를 따라가다 보면 문득 보이게 되는 자본화된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만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될 전망이다. 만일 돈이 되지 않는다며 병원이 환자를 외면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또 자본이 밑받침이 되지 않아 병원 자체가 무너질 위기에 놓이게 된다면.

하지만 그렇다고 <라이프>는 단순한 선악구도로 이야기를 끌고 갈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이 작품이 기획의도에서 담아놓은 것처럼, 이 이야기를 우리 몸에 바이러스가 침범했을 때 벌어지는 ‘항원-항체 반응’의 구조로 풀어내려 하기 때문이다. 상국대학병원이 우리의 몸이라면 이제 구승효로 대변되는 항원이 침범한 그 몸에서 문득 깨어난 예진우라는 항체는 어떤 반응을 일으키며 이 병원이라는 몸의 상태를 변화시킬까. 첫 방이지만 벌써부터 기대되는 대목이다.(사진:JTBC)

'조작' 도드라진 문성근의 악역 연기, 쭉 볼 수 있기를

SBS 월화드라마 <조작>에서 사건을 조작하고 진실을 은폐한 대한일보의 구태원(문성근) 상무는 이 드라마의 악의 축처럼 등장한다. 그는 한무영(남궁민)의 형인 한철호(오정세)에게 조작 기사를 지시해 윤선우(이주승)를 해경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만들었다. 한철호는 이 일을 후회하며 진실을 되돌리려 했지만 결국 살해당했고, 윤선우는 5년 간 억울한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조작(사진출처:SBS)'

한철호가 소속되어 있던 대한일보의 스플래시팀을 와해시킨 장본인도 바로 구태원이다. 그 과정에서 스플래시 팀장이었던 이석민(유준상)은 한직으로 물러나고 팀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당시 담당 검사였던 권소라 역시 대한일보와 손이 닿아 있는 검찰의 수뇌부에 의해 좌천됐다. 결국 그 모든 핍박의 중심에 구태원의 ‘사건 조작’이 있었던 것. 

물론 그가 이 드라마에서 진정한 악의 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무영에 의해 윤선우의 무고가 밝혀지고 재심 청구 소송이 법원으로부터 받아들여지게 되면서 구태원이 궁지에 몰린다는 사실은 그가 축이 아니라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는 윗분의 지시를 그에게 전달하는 조영기(류승수)로부터 오히려 협박을 받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이 구태원이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평범함’이 흥미롭다. 그는 대한일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그것을 통해 국내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자유자재로 조작함으로써 권력에 유리한 방향으로 사태를 조종하는 인물이지만, 병원에 입원한 아내 앞에서는 지극히 아내를 사랑하는 평범한 남편의 모습을 보여준다. 심장 이식 수술을 받은 아내에게 거부반응이 일어나 새로이 이식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 

아내는 전혀 남편이 그런 악의 축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 보였다. 그녀는 대학시절 시위 중 자신을 숨겨줬던 젊은 시절의 그의 모습이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그녀가 실제로는 그의 실체를 알고 짐짓 하는 이야기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제 죽음을 준비하는 입장을 털어놓는 그녀 앞에서 구태원은 지극히 평범한 남편으로서의 절망을 드러낸다. 

하지만 역시 권력을 휘둘러온 그가 아내를 위해 하는 선택은 조영기를 찾아가 “장기 이식 센터를 움직여” 아내의 심장이식 수술을 위해 “대기자 순번을 움직여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간절한 부탁에 대해 조영기가 조건을 내세우자 구태원은 분노하며 “5년 전 먼저 손을 내민 건 그 쪽”이라고 했다. 하지만 조영기는 구태원이 하나의 ‘대안’일 뿐이었다며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카드라는 걸 명확히 했다. 

구태원이라는 조금은 특이한 악역이 보여주는 건 악이라는 것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괴물의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이른바 ‘악의 평범성’처럼, 누구나 악이 될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이런 면면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구태원이라는 악은 그 어떤 직접적인 범행을 저지르는 악당보다 더 끔찍하게 다가온다. 

<조작> 같은 사회문제를 드러내는 드라마에서 그 중심적인 힘을 이끌어내는 건 다름 아닌 악역이다. 그 악역이 사실은 거꾸로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 그런 점에서 보면 <조작>에서 오랜만에 드라마로 복귀한 문성근의 역할과 연기는 도드라진다고 볼 수 있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면을 이토록 자연스럽게 풀어낸다는 건 그가 어째서 그간 더 많은 드라마를 통해 시청자들을 만나지 못했는가에 대한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조작>이라는 드라마에서는 악역을 맡고 있지만, 문성근은 지난 10여 년 간 연기활동을 거의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특히 드라마 같은 보편적인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장르에 마지막으로 출연했던 것이 2008년 방영된 <신의 저울>이었다. 그리고 2017년으로 돌아온 문성근이 <조작>에서 ‘악의 평범성’을 드러내는 악역을 연기한다. 도저히 그러지 않았을 것 같은 인물에게서 블랙리스트 같은 말이 나온 것에 국민들 모두가 경악했던 그 평범한 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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