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회>, 연애도 사업으로 만들어내는 시스템의 놀라움

 

첫 연주를 마치고 CCTV 사각지대에서 격렬한 키스를 하다 자칫 무대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혜인(김희애)과 선재(유아인). 그리고 그 이상한 낌새를 따라 무대 위까지 올라온 혜인의 남편 강준형(박혁권). 그는 거기 어딘가에 분명 혜인과 선재가 밀회를 즐기고 있을 거라는 걸 감지하지만 쉽게 다가가지도 또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못한다.

 

'밀회(사진출처:JTBC)'

아내인 혜인과 제자인 선재가 보통 이상의 관계라는 걸 이미 눈치 챈 그지만 화를 내기보다는 한 발 물러선 게 그가 한 일이다. 그는 아내에 대한 사랑보다 자기애가 더 큰 남자다. 교수로서 번듯한 제자를 하나 키워내는 일이 자신의 그 어떤 것보다 큰 공적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사실은 아내의 탈선이 자신에게 고통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제자를 키워내는 행복보다는 약하다고 여긴다.

 

혜인과 선재의 심상찮은 케미스트리를 감지한 이사장 한성숙(심혜진)이 학장 민용기(김창완)에게 전화해 아예 두 사람을 엮어놓는 게 어떠냐고 묻고 민용기도 여기에 가담하는 에피소드는 의미심장하다. 민용기는 또 강준형을 불러 혜인이 선재를 전담하는 건 어떠냐고 묻는다. 누가 시킨 것인가 하고 의심하는 강준형에게 민용기는 혜인의 젊었을 시절 스타일과 선재가 잘 어울린다며 적임자라고 강조한다.

 

강준형 역시 이를 허용하는 과정은 남녀 간의 연애관계, 아니 나아가 불륜이라고 해도 그것이 사업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면 남편조차 허용하는 시스템의 견고함을 보여준다. 강준형은 그저 바보이고 쪼다이며 시쳇말로 찌질이처럼 보인다. 그는 선재를 내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아내에게 화를 내지도 못한다. 또 이 모든 시스템이 결국은 사업적 성공으로 이용되며 두 사람의 불륜을 지원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어떤 저항조차 해보지 못한다.

 

그는 시스템이 그를 위해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이 돈의 흐름을 위해서만 굴러간다는 걸 모르는 바보다. 아내를 허용해 제자를 얻을 것 같았지만, 그래서 사랑은 잃어도 자기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상황은 그리 흘러가지 않는다. 진짜 사랑에 빠진 아내의 달라져가는 모습은 그를 비참하게 만든다. 왜 자신이 아니라 어린 청춘에게서 그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아내의 밝은 미소와 웃음이 나오게 되었던가. 강준형의 고통은 이러한 끝없는 비교에서 비롯된다.

 

혜원이 우아한 노비라면 강준형은 그녀의 남편이 아닌 노비의 노비처럼 사는 인물이다. 그녀의 그늘 아래서 그녀가 노비 생활하는 대가로 주어지는 교수직을 허영처럼 누리면서 제자 하나를 얻기 위해서 또 그녀를 내주면서. 그가 그녀를 쥐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녀가 그를 쥐고 있는. 정확히 말하면 시스템에 의해 두 사람 모두가 쥐어져 있는. 집으로 돌아와 우아하게 위스키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여유란 사실 이런 굴종의 대가들로만 얻어지는 것들이다.

 

너 혜원이 찾는 대로 빨리 한남동 가라고 그래. 조사 들어왔대.’ 무대 위에서 혜원과 선재를 찾던 그에게 때마침 날라온 영우(김혜은)의 문자가 그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어떻게든 아내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지만 그렇게 드러내 놓는 순간 자신이 짐짓 모른 척 했던 아내의 불륜을 드러내놔야 한다. 무대에 선 그는 마치 햄릿처럼 고민한다. 찾느냐 마느냐. 그러다 그가 고작 선택한 것이 이렇게 어디에 대고 하는 지 모를 외침이다. “오혜원! 빨리 한남동 가! 검찰에서 나왔대! 당신 찾는대! 제발 가!”

 

그 목소리에는 분노와 동시에 더 이상 멀리 나가지 말라는 간절한 애원이 뒤섞여 있다. ‘제발이라는 말이 그 정조를 담아낸다. 물론 불특정한 관객에게 던지는 외침에 불과하지만 그 소리는 고스란히 밀회를 즐기던 오혜원의 귀에 닿는다. 화들짝 놀란 오혜원은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선재의 품을 벗어난다. 강준형은 무대 뒤쪽 어둠으로 사라진다.

 

마치 연극무대의 한 장면 같은 이 짧은 시퀀스 속에는 이 사회 시스템에 대한 날카로운 고발을 담고 있는 이 드라마의 전체 구조가 들어가 있다. 피아노가 있고 장중한 음악이 깔리지만 그것은 이 비극적인 무대에 올려진 혜원과 선재 그리고 강준형이라는 세 인물이 처한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사랑을 꿈꾸지만 사업으로 이용되는 불륜이 있고, 그런 허겁지겁 순간의 불륜조차 시스템의 부름에 의해 모두가 이끌려 간다.

 

놀라운 건 이 강준형이라는 인물을 연기하는 박혁권이라는 배우의 존재감이다. “대사가 박혁권의 입에만 들어갔다 나오면 파닥파닥 살아있는 생선이 된다. 놀랍도록 리얼한 연기를 보여준다.”고 극찬한 김희애의 말처럼 그의 연기는 독특하리만치 확실한 그만의 아우라를 담고 있다. <하얀거탑>에서 장준혁(김명민)과 같은 팀 닥터 역할로 등장했을 때부터 어딘지 남다른 느낌을 주던 그였다. <하얀거탑>에 이어 <아내의 자격>, <세계의 끝>, 그리고 <밀회>까지 안판석 감독의 사람이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박혁권에 의해서 이 찌질한 강준형이라는 인물을 동정적으로 들여다본다는 점은 중요하다. 그것은 단지 강준형을 벗어나 선재에게 간 혜원이라는 설정이 아니라 강준형도 혜원도 모두 시스템에 포획된 존재로서의 비극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그 공감이 바탕이 될 때 비로소 이 드라마를 단순 불륜극이 아닌 사회극으로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밀회>의 불륜, 사회극보다 더 신랄한 까닭

 

그 사람들 기분 좋게 돈 쓰게 하고 또 돈 벌고 그런 걸 두루 돕는 게 내 일이야. 먹이사슬. 계급 그런 말 들어봤어?” 상류사회에서 혜원(김희애)이 당하는 갑질을 보고는 분노하는 선재(유아인)에게 그녀는 자신이 우아한 노비라고 말한다. 혜원을 하인처럼 막 대하는 서영우(김혜은)가 제일 꼭대기냐는 선재의 질문에 혜원은 이렇게 말한다. “꼭대기는 그 여자가 아니라 돈이다. 아니구나. 진짜 꼭대기는 돈이면 다 살 수 있다고 끝도 없이 속삭이는 마귀.” 도대체 이 마귀란 뭘까.

 

'밀회(사진출처:JTBC)'

중년 여인과 청춘 사이에 벌어지는 불륜을 소재로 다루지만 <밀회>를 단순한 불륜 치정극으로 바라보면 이 작품이 가진 다양한 결들을 놓치게 된다. 혜원이 조금씩 선재에게 허물어지고 결국 그의 품에 안기게 되지만, 사실 그 결과보다 중요한 건 과정이다. 혜원은 왜 선재를 만나면서부터 자신의 안온해 보였던 삶에 균열을 느끼게 되었을까.

 

<밀회>의 영우는 혜원의 친구지만 그녀의 뺨을 때리고 마작패를 집어던져 얼굴에 상처를 내는 인물이다. 친구사이지만 이런 짓을 버젓이 할 수 있게 만드는 건 뭘까. 그건 바로 혜원이 말한 그 마귀. 마귀는 돈이면 뭐든 다 될 수 있다고 속삭임으로써 그 어떤 친구사이의 패악질조차 서슴없게 만든다. 흔히 말하는 상류층의 갑질을 하는 영우도 그렇지만, 우아한 노비로 그 갑질을 감당해내는 혜원도 그 마귀의 희생자들이다.

 

선재는 모차르트 역시 마귀의 희생자가 아니냐고 묻는다. “모차르트가요. 어느 날 갑자기 난 이제부터 귀족들한테 주문 안 받는다. 내가 쓰고 싶은 것만 쓸 거다. 그러다가 일찍 죽은 거라면서요. 그러다 미치고 병들고.” 혜원은 애써 부정한다. “부자들 돈으로 먹고 살면서도 얼마든지 제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어!” 그녀는 선재라는 인물을 통해 자신을 본다. 그녀가 선재에게 하는 말은 실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다 까불지 말라 그래! 음악이 갑이야!”

혜원이 한 사이트에서 막귀형이란 이름으로 선재에게 던지는 말은 그래서 고스란히 다시 혜원에게 되돌려진다. “제가 가끔 가는 사이트가 있는데요. 거기 어떤 형이 그러더라구요. 스펙따위 필요 없고 그냥 막 즐기면서 살라고. 저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끝까지 즐겨주는 거요. 저는 이 곡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비트 16, 32 막 쪼개갖고 그래서 어깨 빠지게 연습하고 변주 8번 스타카토 더럽게 맘에 안 들다가 어느 날 갑자기 뻥 뚫려서 기분 째지고 그게 최고로 사랑해주는 거죠. 라흐마니노프랑 파가니니가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그게 장땡이잖아요. 먹이사슬이고 먹이고 뭐.”

 

어쩌다 여신이라 믿었던 그녀는 실상 노비의 삶을 살게 되었을까. <밀회>가 그리는 상류사회의 이면은 실로 더럽다. 혜원은 그 더러운 것들을 우아하게 처리해주는 일을 한다. 아트센터라는 우아함 이면에는 아트는 없고 온갖 비리들만 넘쳐난다. 갑질은 일상이고 오입질 또한 스스럼없다. 그것은 심지어 당연시된다. 마귀 덕분이다. 돈이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속삭이는. 혜원은 그 더러운 것들을 치워주는 대가로 살아가는 마귀의 포로다.

 

선재는 그래서 혜원에게는 자신을 마귀로부터 구원해줄 존재로 여겨진다. 그가 짱땡이니 짱난다는 식의 우아한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을 던져줄 때 혜원은 그것을 순수로 읽어낸다. <밀회>가 가진 진짜 힘은 이 불륜의 과정이 마치 마귀에 의해 잘 굴러가던 선으로부터의 탈출처럼 그려지는데서 나온다. 혜원의 밀회는 그래서 아찔하면서도 슬프다.

 

<밀회>가 이런 불륜의 과정들을 통해 상류사회의 추악한 얼굴을 이끌어냄으로써 공감의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데는 피아노 같은 예술적인 장치가 한 몫을 차지한다. 그들의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있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무수히 많은 예술가들의 삶이 결코 늘 행복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거기에도 역시 마귀가 존재했다는 것을.

 

좁은 계단을 지나 그녀는 남루한 선재의 방을 찾는다. 그 방은 마치 겉으로는 우아해도 속으로는 한없이 남루해진 자신의 처지 같다. 선재와의 첫 번째 정사가 온전히 이 남루한 집안을 찬찬히 둘러보는 장면과 두 사람의 소리로만 채워진 것은 이 장면이 가진 아픔과 슬픔을 제대로 전해준다. 그 속에서 그녀는 흐느낀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자신으로 돌아갔던 그녀가 제복 같은 하얀 셔츠를 입고 잠든 선재를 둔 채 나가면서 누군가의 전화를 받는다. “예 이사장님 지금 출발합니다.” 다시 마귀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삶의 신산함. <밀회>의 불륜은 그 어떤 사회극보다 더 신랄한 면이 있다.

<밀회> 유아인, 순수함과 안타까움 사이

 

선생님께서는 내가 제일 힘들었을 때, 내 자신이 죽고 싶다고 했을 때 피아노를 다시 치라고 권하셨고 내 마음이 흔들리는 걸 읽어주셨어요.” <밀회>의 이선재(유아인)가 오혜원(김희애)에게 키스를 하게 됐던 이유에 대해 말하는 장면에서는 청춘의 순수함과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그의 사랑은 단지 육체적인 이끌림도 아니고, 그저 남녀 간의 사랑 그 자체도 아니다. 거기에는 그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이 청춘의 아픔을 알아봐준 오혜원이란 존재에 대한 고마움이 들어 있다.

 

'밀회(사진출처:JTBC)'

얼마나 힘겨웠으면 그랬을까. 갖고 있는 재능을 그 누구도 알아봐주지 않는 세상에서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낸다는 것.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야 할 손이 퀵서비스 오토바이 핸들을 붙잡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 그런 그를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세상의 무심함. 그리고 이 돈과 태생과 권력으로 구획되어 스펙 없는 이들은 절대로 들여보내주지 않는 그 현실의 벽 앞에서 느껴질 막막한 절망감.

 

<밀회>가 그리는 이선재라는 청춘은 그래서 한 개인이라기보다는 현재 우리 사회의 청춘들을 대변하는 듯하다. 공고하게 굳어져버린 저들만의 세상에 툭 던져져 출구도 입구도 없는 그 세상의 언저리에서 근근히 삶을 버텨내는 청춘. 그래서일까. 이선재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는 오혜원과 그의 남편 강준형(박혁권)은 그 청춘들을 현 기성세대들이 소비하는 두 가지 방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혜원에게 이선재는 자신의 지나가버린 청춘의 꿈을 되새겨주는 존재. 이것은 현재 중년들이 청춘들을 소비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 흔히 청춘의 풋풋함을 가진 아이돌들 앞에서 열광하는 중년들은 거기서 자신들의 삶을 청춘으로 되돌리고픈 욕망을 갖기 마련이다. 오혜원에게 피아노는 자신의 잃어버린 청춘의 꿈이다. 그러니 이선재와 함께 피아노를 치는 오혜원은 그 순간 청춘과 소통하는 아찔한 경험을 하는 셈이다. 최근 복고라는 이름으로 떠오르는 수많은 문화현상들의 중심에는 바로 이 청춘에 대한 회귀와 갈망이 들어있다.

 

한편 강준형은 청춘을 하나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현 기성세대들을 표상하는 인물이다. 이선재는 그의 신분상승을 공고하게 해줄 존재다. 그래서 그는 이선재를 자신의 집에 가둬두고 자신만을 위해 키워내려 한다. 학교 재단의 입시 비리를 숨기기 위해 이선재를 방패막이로 사용하려는 것처럼 강준형 같은 이들은 진심으로 이선재의 성공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들의 욕망뿐이다.

 

이 막막한 현실 앞에서 청춘들의 삶이란 비참하게까지 느껴진다. 자신을 알아봐주는(사실은 이것 또한 착각일 가능성이 높지만) 오혜원에 대한 이선재의 집착은 그 소통의 출구가 막혀버린 청춘을 점점 강하게 그려낸다. 청춘들은 어떻게든 이 기성사회의 한 귀퉁이를 붙잡아 살아가려 안간힘을 쓴다. 이선재가 그렇고, 그의 여자친구인 박다미(경수진)가 그러하며 그의 절친인 손장호(최태원)가 그렇다.

 

박다미는 오혜원을 비롯한 상류층 자제들이 오는 샵에서 수모를 당하면서도 그들의 머리를 만져주는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살아간다. 그녀가 버틸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이선재라는 남자친구 하나지만 그가 점점 오혜원의 집을 드나드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불안해진다. 자신의 세계에서 점점 그가 멀어지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혜원의 집에서 지내는 이선재에 대한 박다미의 과도한 반응 속에는 그녀의 전부가 사라져가는 듯한 극도의 불안감이 묻어난다.

 

손장호는 서한그룹 회장의 딸이자 서한예술재단 산하 아트센터 대표, 그리고 오혜원의 직장상사이자 친구인 서영우가 들락거리는 호스트바에서 일한다. 공허한 삶을 위로받고자 돈을 주고 청춘을 사는 서영우 같은 부류에게 돈을 받고 팔려지는 가진 건 몸뚱어리 하나밖에 없는 청춘. 돈의 논리로 철저히 구축된 시스템 속에서 청춘의 몸은 가진 자의 쾌락과 위안을 위해 소비된다.

 

<밀회>의 이선재라는 청춘은 그래서 아프고 안타깝다. 이 시대의 청춘들이 기성사회에 소비되는 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선재를 연기하는 유아인이 새롭게 보이는 것은 그간 엇나간 청춘의 욕망을 주로 연기해오던 그가 <밀회>에서는 대책 없는 사랑을 연기하기 때문이다. <패션왕>에서 가진 자들과 전쟁하듯 살아가던 강영걸이라는 청춘을 연기한 유아인은, 이제 <밀회>의 이선재를 통해 청춘의 순수함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 순수함은 그 어떤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순수해서 더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피아노 건반 하나하나의 선율처럼.

<밀회>, 유아인과 김희애의 멜로가 절절한 까닭

 

퀵 배달 하다 보니 매일매일 많은 사람들을 만나거든요... 근데 선생님께서는 제 연주를 더 듣겠다고 하셨고... 어떻게 사는지도 물어보시고, 저와 함께 연주도 해주셨어요. 그래서 전 그 날 다시 태어난 거나 마찬가지예요. 제 영혼이 거듭난 거죠.” <밀회>에서 선재(유아인)라는 가난한 청춘의 이 한 마디에는 자신을 알아봐준 혜원(김희애)에 대한 절절한 마음이 담겨져 있다. ‘영혼운운하는 것에 대해 혜원이 과하다. 말하고 나니까 너도 오글거리지?”하고 묻자 선재는 정색하며 아닌데요. 진심인데요.”라고 말한다.

 

'밀회(사진출처:JTBC)'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운명적으로혜원이 선생님으로 정해졌다는 선재의 말은 이 불쌍한 청춘이 얼마나 타인의 관심에 목말랐던가를 말해준다. 그는 황송하게도 가난한 자신의 거처까지 찾아와 준 혜원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쥐를 잡기 위에 놓았던 끈끈이가 혜원의 발에 붙어버리자 콩기름으로 직접 닦아주려 하고, 그녀의 신발을 가지런히 해 입구쪽으로 돌려놓는다. 거기에는 진심에서 우러나는 고마움과 가녀리고 순수한 청춘의 떨림이 느껴진다.

 

인터넷 메신저로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막귀형과 나천재로 대화하는 혜원과 선재는 서로에 대한 끌림과 설렘을 몇 줄의 글귀로 드러낸다. 선재는 혜원에 대해 심지어 발도 예쁘다고 말한다. 그러자 혜원은 괜스레 자신의 발을 확인한다. ‘뻑이 간 거지?’하고 막귀의 목소리로 선재의 속내를 묻는 혜원에게 선재는 몸과 마음, 영혼을 사로잡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슈베르트 환타지아를 쳤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절정 그 자체. 나 아직 동정이라 그 딴 거 모르지만. 실제로 한다 해도 그 이상일 수 없을 거야.”

 

하지만 타인의 관심에 목마른 선재와 그런 선재의 관심에 괜스레 자신의 발톱에 페티큐어를 바르고는 지워버리는 혜원의 마음과는 달리, 이 두 사람을 이어주는 건 선재를 이용해 이미지를 격상시키려는 아트센터의 검은 속내다. 재능 있고 스토리 좋은(?) 선재는 돈을 받고 상류층 자제를 입학시키는 학교의 비리를 덮어버리고 대신 인재를 발굴한다는 명목으로 내세워진다. 이들의 표현대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그렇지만 시험 당일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선재는 절망한다. 선재를 입학시키지 못한 재단측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 하지만 선재의 절망을 목도한 혜원은 차마 그의 앞에 나서지도 못한다. 피아노를 칠 때는 흑심, 잡심, 사심을 버리라고 했지만 자신 또한 바로 그 흑심, 잡심, 사심을 갖고 선재에게 접근했던 인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혜원은 그렇게 사심과 진심 사이, 현실과 꿈 사이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녀에게 선재는 잊고 있던 진심과 꿈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걸 포기하고 일에만 빠져 사는 선재에게 혜원이 보낸 리흐테르의 전기는 실로 엄청난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어디를 가든 잠자리가 불편하지 않았다... 나는 피아노 밑에서 잤다.’ 혜원이 밑줄을 쳐 놓은 불우했던 리흐테르의 삶의 이야기는 선재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책을 읽으며 하염없이 흘리는 선재의 눈물은 그래서 재능은 있지만 현실이 받쳐주지 못해 날개도 펼쳐보지 못하고 숨죽이고 있는 이 땅의 청춘들을 떠올리게 한다.

 

돈 주고 사는 애인이 뭐가 그리 좋다고.” 혜원이 그녀의 친구이자 상사인 영우(김혜은)가 호스트바를 전전하는 삶에 대해 질책하자 영우는 이렇게 말한다. “나도 좋지 않아. 근데 위로는 돼.” 혜원도 영우도 이미 현실 속에서 허우적대며 예전의 꿈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자포자기 하고 있는 영우와 달리 혜원은 이 지친 현실 속에서도 누군가 자신을 구원해주기를 원한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가까스로 집에 돌아온 그녀의 귀에 선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책을 읽고 한 걸음에 달려온 그에게 혜원이 묻는다. “책은 읽어봤니?” 그러자 선재는 흔들리더라구요. 끊었었는데.”라고 말한다. 재주가 아까워 보냈다는 혜원에게 선재는 짐짓 자신은 너무 잘 지내니 그런 거 보내지 말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걸 알아차린 혜원이 거짓말 하면 못쓰지라고 질책하자, 선재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요. 거짓말예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어차피 다 지옥이니까.”

 

선재의 절망과 혜원의 공감. 두 사람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그 장면 속에는 그래서 그저 남녀 간의 사랑 그 이상의 사회적 의미가 담겨진다. 피아노를 함께 연주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개인적 설렘과 동시에 사회적 공감을 드러냈던 것처럼. 이들의 허락되지 않는 멜로가 더 절절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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