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하고 소신 지키며 자기 삶에 충실한 청춘들의 등장

 

청춘들이 달라졌다. 드라마에서 청춘들은 주로 두 부류의 캐릭터로 소비되곤 했다. 그 하나는 청춘멜로의 대상. 청춘들의 풋풋한 사랑이야기는 시대가 바뀌어도 변함없이 사랑받는 소재 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사회 현실의 어려움에 직면한 청춘들이다. 현재의 사회 현실을 담은 드라마들이 청춘들을 등장시킬 때 그들이 실제로 겪곤 하는 취업 현실이나 만만찮은 조직의 적응기가 그것이다.

 

최근 드라마 속 청춘들의 초상을 보면 현실을 벗어나 사랑이라는 판타지에 빠져 있거나, 혹은 만만찮은 현실과 사투를 벌이던 청춘들과는 사뭇 다른 면모들이 발견된다. 물론 사랑과 현실 이야기가 빠지진 않지만 이걸 대하는 이들의 면면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드라마는 역시 최근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JTBC <이태원 클라쓰>다. ‘청춘 복수극’이라는 새로운 틀을 가져온 이 드라마에서 박새로이(박서준)는 기성사회의 부정하고 잘못된 시스템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성공하는 것이 진정한 복수라 말하는 청춘이다. 그는 갖가지 갑질과 핍박에 시달리지만 시간이 오래 걸려도 정해놓은 목표를 향해 한 걸음씩 나간다.

 

전과자라는 설정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 청춘은 취업이 아닌 창업을 택한다. 그리고 조금씩 가게를 성장시켜 국내 최고의 요식업 회사를 꿈꾼다. 가진 것 없는 그에게 기성관념이 허황되다고 말할 때 그는 일갈한다. “내 가치를 네가 정하지마. 내 인생 이제 시작이니까. 원하는 거 다 이루면서 살 거야.”

 

청춘들은 이제 기성 사회가 만들어놓은 시스템 안에서 참고 적응해내려 했던 <미생>의 장그래와는 많이 달라졌다. 대신 작아도 자신의 일을 추구하고, 거기서 성공과 행복을 찾으려 한다. 종영한 드라마 KBS <동백꽃 필 무렵>의 황용식(강하늘) 같은 청춘은 옹산이라는 자그마한 마을에서 순경으로 살아가면서도 소신을 지켜가며 나름의 행복과 사랑을 실천해가는 인물이다. 시청자들이 이 청춘에 매료됐던 건, 순박하고 소박하지만 타인의 시선이나 기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는 그 면모 때문이었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JTBC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의 임은섭(서강준) 같은 인물도 이러한 달라진 청춘의 색깔을 보여준다. 북현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자그마한 책방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청춘이지만, 지역 사람들과 독서모임을 통해 정을 나누고 단단한 자기만의 소신을 갖고 있다. 추운 겨울 속에 서 있는 사람들을 그 책방처럼 따뜻하게 품어주는 인물. 서울살이에 지쳐 내려온 목해원(박민영)과 그의 사랑이야기가, 사랑의 차원을 넘어서 우리를 힐링시켜주는 건 이 청춘의 묵묵히 타인을 배려하며 소신 있게 살아가는 삶이 따뜻한 온기를 전하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소신을 가진 청춘들의 등장은, 이제 달라진 젊은 세대들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누군가 세워놓은 기준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평가받는 것보다는 자기 스스로 세운 소신을 갖고 큰 성공은 아니더라도 확실한 나의 행복을 추구하겠다는 청춘들. 그들의 당당함이 우리 사회의 어떤 희망처럼 느껴지는 이유다.(사진:JTBC)

'이태원' 박서준이 오늘을 사는 청춘들에게 전하는 말

 

“괜찮아. 옛날에 우리 같은 공방에서 일할 때 내가 했던 말 기억하나? 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용감한 사람이야. 누가 뭐래든 가장 용감하고 예쁜 여자야.” 단밤을 나와 장가로 간 장근수(김동희)가 TV 음식 오디션 프로그램인 <최강포차>에서 이기기 위해 단밤의 메인 셰프인 마현이(이주영)가 트랜스젠더라는 걸 폭로하자 쏟아진 차별적 시선에 박새로이(박서준)는 그렇게 위로한다.

 

<최강포차>에서 우승을 하는 조건으로 부동산 거물이었던 김순례(김미경) 할머니로부터 투자를 받기로 한 단밤으로서는 마현이가 처한 이 상황은 커다른 위기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순간 박새로이가 걱정하는 건 투자가 아니라 사람이다. 전정되면 단밤으로 돌아가자는 말에 마현이는 도망치지 않겠다며 용기를 낸다. 하지만 박새로이는 말한다. “도망쳐도 돼. 아니지. 도망이 아니지. 잘못한 거 없잖아. 그치? 저딴 시선까지 감당해야할 만큼 중요한 일이 아니야. 네가 너인 것에 다른 사람을 납득시킬 필요 없어. 괜찮아.”

 

JTBC 금토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에서 박새로이가 마현이에게 하는 이 말은 이 ‘청춘복수극’이 궁극적으로 대결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드러낸다. 그는 힘이 있다고 갑질하는 세상, 또 자신과 다르다고 차별하는 세상과 맞서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박새로이가 당해왔던 세상이면서 동시에 그가 품은 단밤 식구들이 저마다 당해왔던 세상이기도 하다.

 

전과가 있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거라 여겨온 최승권(류경수)이 그렇고 트랜스젠더의 삶을 선택한 마현이가 그러하며 아프리카 기니 출신의 혼혈아인 토니(크리스 라이언)가 그렇다. 박새로이는 함께 장가의 뒤통수를 치기로 했던 강민정(김혜은)이 목표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제가 원하는 건 자유입니다. 누구도 저와 제 사람들을 건들지 못하도록 제 말 행동에 힘이 실리고 어떠한 부당함도, 누군가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제 삶의 주체가 저인 게 당연한, 소신에 대가가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박새로이의 이 말은 이들의 삶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에둘러 말해준다. 이들이 처한 세상은 힘이 없으면 말도 행동도 맘대로 할 수 없고 부당함을 당하고 누군가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또한 자신의 삶의 주체가 자신이 아닌 게 당연시 여겨지고, 소신에는 그만한 대가가 치러지는 현실이다. 박새로이는 이런 세상과 맞서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목표는 단순한 복수가 아니다. 저들이 사는 방식과 저들의 엇나가고 부조리하고 부정한 시스템에 맞서 자신만의 올바른 방식으로 정당하게 맞서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그의 진정한 복수다. 이 부분은 <이태원 클라쓰>가 흔한 복수극의 차원을 넘어서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그와 같은 처지를 겪었지만 다른 선택을 한 장근수라는 인물은 그래서 이 드라마가 단지 기성세대와 청춘들 간의 세대 대결이 아니라는 걸 잘 보여준다. 장근수 역시 서자라는 이유로 핍박받아 왔던 인물이다. 그는 단밤에 들어와 박새로이를 통해 새로운 삶을 꿈꾸지만 결국 단밤으로 돌아가자 장대희(유재명)가 해왔던 그 방식의 삶을 선택한다. ‘약육강식’이 삶의 모토인 장대희처럼 이기기 위해서는 하지 말아야 할 비열한 수단까지 동원하는 것.

 

장근수의 선택과 단밤 식구들의 선택은 그래서 이 드라마의 대결구도가 단순한 신구 세대의 대결이 아닌 신구의 생각과 가치관의 대결이라는 걸 보여준다. 우리는 어째서 스스로가 주체인 삶을 선택하지 못하고 세상이 던져놓은 문제집 속에서 허우적대며 살아야 할까. 그걸 벗어나기 위해 소신을 갖는 일에 어째서 대가를 치러야 할까. 박새로이의 일갈에 청춘들이, 아니 이 부조리한 세상을 버텨내는 모든 이들이 속 시원해지는 이유일 게다.(사진:JTBC)

'이태원' 안보현 빠지니 어딘지 허전한 건

 

장근원(안보현)이 빠지니 어딘지 허전하다? 아버지 장대희(유재명)로부터 철저히 버림받고 감옥에 간 장근원이 이 드라마에서 얼마나 중요한 악역이었는가가 그가 빠지자 더 절실히 느껴진다. 시청자들을 뒷목 잡게 만드는 빌런이면서도, 동시에 연민이 느껴질 정도로 적당히 당하고 무너지는 악당. 그래서 장근원은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를 보는 맛을 만들어준 캐릭터였다.

 

장근원이 감옥에 가자 그 자리를 대치할 악역이 좀체 보이지 않는다. 장대희가 그 역할을 해줘야 하지만 그는 궁극적인 악으로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을 보여줘야 하는 캐릭터다. 장가의 서자로 단밤에서 일했던 장근수(김동희)가 단밤을 그만두고 장가로 들어갔지만 어떤 역할을 할지 아직 예측하기가 어렵다. 그가 단밤과의 대결을 벌일지 아니면 단밤과는 계속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목표인 장가를 가질 것인지 알 수 없다.

 

장근수는 아직까지 악역이라기보다는 조이서(김다미)를 짝사랑하며 그 사랑 때문에 엇나가는 모습을 보이는 중이다. 그래서 대놓고 진실게임 벌칙에 걸린 박새로이(박서준)에게 조이서를 여자로 생각한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도무지 돌려 말할 줄 모르는 박새로이는 그런 적이 없다고 단칼 발언을 함으로써 조이서를 울린다. 장근수의 이런 역할은 박새로이와 조이서 간의 멜로를 끄집어내는 것일 뿐, 이 드라마가 가려는 ‘청춘 복수극’의 핵심 서사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드라마에 동력을 만들어내는 절대적인 악역이 뒤로 물러나고 대신 그 자리에 멜로로 인한 갈등이 등장하면서 <이태원 클라쓰>는 숨 가쁘게 달려오던 걸 잠시 멈춰 숨고르기를 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지금껏 <이태원 클라쓰>가 지속적인 힘을 갖게 됐던 건 이 드라마가 가진 ‘복수극 서사’ 때문이다.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라 박새로이라는 인물이 기성세계의 방식이 아닌 자신만의 방식(청춘의 방식)으로 하나하나 해나가는 복수극. 성공을 통한 복수는 창업 판타지와 맞물리며 이 드라마에 힘을 부여한 바 있다.

 

복수극에서 악역이 중요한 건, 사실상 악역의 그 행동들이 그 복수극이 궁극적으로 하려는 주제의식을 끄집어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장근원의 그 지질함과 비겁함은 태생으로 갖게 된 권력을 휘둘러 잘못을 저질러도 덮혀지고 승승장구하게 만드는 엇나간 사회 현실을 끄집어낸다. 장대희가 장가를 이끄는 그 수직적인 명령 구조는 상명하복으로 자행되는 폭력과 불통이라는 시대착오적 시스템을 꼬집는다.

 

이런 악역이 세워지기 때문에 그의 정반대편에 선 박새로이의 복수극은 의미를 갖는다. 그는 단순히 부모와 자신의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사회현실과 맞서는 것이고, 시대착오적인 시스템과 대결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열광한다. 복수극의 짜릿한 사이다도 있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건드리는 비판적 지점들을 공감하기 때문이다.

 

잠시 숨 돌리기를 하는 것이라 여겨지지만, 강력하고 매력적인 악역이 순간 사라진 듯한 느낌은 <이태원 클라쓰>에는 그다지 좋은 게 아니다. 시청률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태원 클라쓰>는 지난 1월 31일 첫 방송을 4.98%(닐슨코리아)로 시작한 이래 단 한 회도 빠짐없이 자체 최고시청률을 경신하며 15%를 목전에 뒀으나 장근원이 사라진 이후 첫 방송에서 급제동이 걸렸다. 비록 소폭이지만 방송 11회 만에 처음으로 시청률이 떨어진 것.

 

이 드라마가 다시 가속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좀 더 장대희가 전면에 나서야 하고, 장근수는 확실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야 한다. 그런 명백한 적수의 위협이 스토리를 통해 계속 전개되고 있을 때만이 간간히 양념처럼 들어간 멜로 또한 빛날 수 있다. 물론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간 장근원이라는 캐릭터가 얼마나 이 드라마에 힘을 부여했는가를 실감하게 되지만.(사진:JTBC)

'이태원 클라쓰', 안보현이 보여주는 모지리 악역의 진가

 

어디서 이런 ‘악역 복덩이’가 들어왔을까. 드라마의 실질적인 동력을 악역이 끌고 간다고 봤을 때 JTBC 금토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에서 장근원 역할을 연기하는 안보현은 고공비행하는 이 드라마의 힘의 ‘근원’이 아닐까 싶다. 그의 악역 연기에는 뒷목 잡게 만드는 갑질 허세에 심지어 연민이 갈 정도의 지질함, 게다가 시청자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하는 제대로 무너지고 깨지는 처참함까지 발견된다. 놀라운 악역 연기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악역이라면 드라마가 안 될 턱이 없을 정도로.

 

<이태원 클라쓰>에서 박새로이(박서준)와 단밤 식구들이 상대해야 하는 최대 빌런은 장대희(유재명)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키우는 인물은 장대희의 장남 장근원(안보현)이 맞다. 생각해보라. 이 드라마에서 박새로이가 비극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 그 방아쇠를 당긴 인물이 누구인지. 그는 바로 장근원이다. 장근원은 같은 반 친구 이호진(이다윗)을 괴롭혔고, 박새로이는 그걸 막기 위해 주먹을 들었다가 바로 퇴학당했다.

 

박새로이의 아버지를 뺑소니쳐 죽게 만든 인물도 장근원이다. 그래서 그를 향해 주먹을 날린 죄로 박새로이는 감옥에까지 들어간다. 전형적인 재벌2세로 갖가지 사고를 치지만 장대희는 돈과 권력으로 이를 덮어준다. 박새로이는 궁극적으로는 장대희가 평생을 일궈놓은 장가를 무너뜨리려 하는 것이지만 그건 결코 쉽게 이뤄지는 일이 아니다. 장대희가 서 있는 곳과 박새로이의 현실 사이에 괴리가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드라마는 자칫 박새로이가 끝없이 무너지는 답답함에 빠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답답하지 않고 속 시원하게 그려질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장근원이라는 찌질한 모지리 악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악역은 여러모로 특별한 면들을 갖고 있다. 갖가지 갑질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하는 짓마다 모지리라 그것이 오히려 박새로이에게 큰 도움으로 작용한다는 점이 그렇다. 장대희는 끝없이 장근원의 모지리 짓에 발목을 잡힌다. 그래서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장근원이 ‘단밤’의 숨겨진 식구, ‘장가의 X맨’이라 부르기도 한다.

 

조이서(김다미)의 유도심문에 걸려들어 장근원이 과거 자신의 뺑소니 사실을 털어놓게 된 장면이 큰 화제와 사이다가 됐던 것도 이 캐릭터가 가진 힘 덕분이다. “내가 진짜 살다 살다가 너같은 모지리는 처음 본다.”며 “버러지 같은 새끼”라고 조이서가 일갈할 때, 장근원의 바보 같은 표정에 당혹감과 분노가 뒤섞이는 모습은 이 장면의 통쾌함을 배가시킨다. 장근원은 악역 중에서도 ‘두드려 맞는’ 통쾌함까지 선사하는 악역이다.

 

이 역할을 200% 소화하고 있는 안보현이라는 배우가 이제 겨우 4년 차의 연기 경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그는 2016년 영화 <히야>와 드라마 <태양의 후예>로 연기를 시작했다. <태양의 후예>에서는 극중 유시진(송중기) 대위가 이끄는 알파팀 특전사 중사 역할을 연기한 바 있다. 그 때의 ‘번듯한’ 모습을 보면 <이태원 클라쓰>의 장근원 역할을 연기하는 안보현이 같은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다.

 

올백에 수트 차림으로 초점 풀린 눈과 비열함이 묻어나는 입매로 얄미운 갑질 연기를 보여주면서 아버지 장대희 앞에서는 벌벌 떠는 지질함으로 연민까지 자아내게 만든다. 결국 아버지로부터 고육지책으로 버림받고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서 안보현의 악역 연기는 극점을 보여준다.

악역이 분노 유발을 넘어서 불쌍하게까지 느껴지게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건 이 캐릭터가 가진 힘이기도 하지만, 이를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 표정 하나 말투 하나까지 세심하게 표현해낸 안보현의 잠재력이기도 하다. 악역만이 아니라 좀 더 다양한 역할에서도 이 배우의 활약이 기대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사진:JTBC)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