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 서야 가족도 행복, ‘황금빛’의 새로운 가족 제안

“난 이 집 가장 졸업하겠다.” KBS 주말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에서 서태수(천호진)는 아들 서지태(이태성)에게 그렇게 말했다. 과거 노모의 병환 때문에 아들에게 진 빚을 집 보증금을 빼서 갚겠다고도 했다. 집 나가서 어떻게 혼자 살 거냐는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코웃음을 쳤다. 혼자서였다면 더 행복하게 잘 살았을 거라고.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가장이었기 때문에 희생하며 살아왔다고.

서태수의 ‘가장 졸업’ 선언은 그간 겪은 일들로 인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 결과였다. 사업을 망하기 전까지 그토록 노력해왔던 그의 삶들은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망한 후 힘들었던 일들만 가장의 책임으로 치부하는 가족들에게 그는 실망했다. “사업 망해서 지금까지 10년 동안 양미정 당신 나 한 번이라도 위로해준 적 있냐. 지태 지안이 지수 네들이 나 한 번이라도 안아준 적 있어?...그래. 나 못난 애비다. 무능한 아버지야. 서태수 너 인생 실패했다.”

서태수는 그래서 하나하나 정리해나가고 있었다. 지수(서은수)를 찾아가 그는 25년 전 그를 데려와 자식으로 키운 걸 사과했다. 부모의 사과. 그것은 더 이상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이어가지 않겠다는 의미다. “네가 믿든 안 믿든 넌 항상 내 딸이었고 사랑했다. 하지만 훔친 딸이니까 내 딸이 아닌 거다.” 

가족을 위해 살아왔던 그는 그것이 허망했다는 걸 깨닫는 중이다. 나이 들면 시골로 내려가 조촐하게 농사나 지으며 살아가겠다던 소박한 가장의 꿈은, 대학을 나와도 여전히 자식들을 부양해야 하는 현실 앞에서 무너졌고, 부모가 금수저냐 흙수저냐에 따라 자식의 미래도 결정되는 현실 앞에서 흙수저 부모이기 때문에 부정당하는 절망감을 느끼게 했다. 그의 가장 졸업 선언이 공감 가는 이유다.

<황금빛 내 인생>은 금수저 흙수저로 나뉘는 수저 계급의 사회 속에서 가족이, 핏줄이 족쇄가 되어 개개인의 삶을 불행하게 하는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 아버지 서태수가 느끼고 있는 절망감처럼, 재벌가의 딸인 줄 알고 들어갔다가 사실은 엄마의 거짓말이었다는 걸 알고는 그 집에서 쫓겨나고 자신의 가족으로도 돌아가지 못하는 서지안(신혜선)도 같은 절망감을 느낀다. 그래서 죽을 결심까지 하지만 친구 덕분에 돌아와 조금씩 일상을 되찾아가던 중 그는 새삼 부모 탓을 하며 희생을 감수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깨닫는다. 

“자기 삶은 자기가 사는 것”이라는 하우스 메이트의 말 한 마디에 서지안은 문득 그간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떠올린다. 부모의 지원을 마치 당연히 해줘야 할 것처럼 여겼고 그래서 그것이 현실적으로 되지 않자 스스로 꿈을 접고 희생하는 삶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건 부모의 탓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이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심지어 재벌가 딸 이야기가 나왔을 때 바로 그 집으로 들어가겠다 했던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그는 새삼 깨닫는 중이다.

가족이 따뜻한 둥지가 아니라 족쇄가 되는 사정은 서지수가 들어간 재벌가 최도경(박시후)의 집도 마찬가지다. 재벌가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 서지안처럼 위장해 공식석상에 서야 하는 걸 거부한 서지수는 할아버지 노양호(김병기)의 냉혹한 진짜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네까짓 게” 자신의 얼굴에 똥칠을 했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노양호는 “황금 물고 태어나면” 해야 할 것들이 있다며 서지수를 집밖에 내보내지 말라고 한다. 서지수는 이 재벌가의 핏줄에 황금빛 족쇄가 채워져 버린 셈이다. 

최도경(박시후) 역시 재벌가의 이미 정해진 삶으로서 결혼할 가문과 상대가 있었지만 서지안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그걸 거부한다. 그 역시 이 재벌가의 핏줄 족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걸 포기하려 한다.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온전히 자신의 선택으로 결정하는 삶을 통해 행복을 찾겠다는 것. 

<황금빛 내 인생>은 그래서 지금의 가족드라마들이 내세웠던 것과는 다른 가족상을 내세운다. 그것은 서로 핏줄로 얽혀 끈끈한 가족상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가족상이다. 부모든 자식이든 그리고 서민이든 재벌가든 가족이 핏줄이라는 이유로 족쇄가 되는 삶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 서서 비로소 행복해질 때야말로 가족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제시한다. 

김수현 작가의 2008년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는 엄마의 휴업 선언을 다룬 바 있다. 그리고 10년 가까이가 지난 지금 <황금빛 내 인생>은 아빠의 가장 졸업 선언을 그리고 있다. 가족이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부모와, 그것을 당연시 여기며 자신의 삶이 부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 받아들이는 자식이라면 그 가족은 따뜻한 둥지가 아닌 서로를 옭아매는 족쇄가 아닐까. 각자 삶은 각자 개척해야 비로소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 <황금빛 내 인생>이 제안하는 새로운 가족상이다.(사진:KBS)

‘황금빛’, 가족드라마가 가족의 불편함을 보여주는 까닭

가족은 여전히 따뜻하고 포근한 안식처인가. 지금껏 KBS 주말드라마가 그려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면, 지금 방영되고 있는 <황금빛 내 인생>은 어딘가 수상하다. 이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가족의 양태는 결코 따뜻하고 포근한 안식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보통의 서민층 가족도, 또 돈 걱정 없는 재벌가 가족도 무엇 하나 따뜻하거나 부러워할만한 구석을 찾기가 쉽지 않다. 어째서 <황금빛 내 인생>은 그간 KBS 주말드라마가 그려왔던 그 가족의 면면을 완전히 뒤집어 보여주고 있는 걸까.

한 때는 잘 나가건 회사의 사장이었으나 부도를 맞고 전국의 건설현장 인부를 전전해온 서태수(천호진)는 그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숨겨왔던 마음의 응어리를 토해놓는다. 가족을 위해 뭐든 희생하며 살아왔던 그였지만 그토록 애타게 찾았던 집 나간 딸 지안(신혜선)에게서 “가족이면 다 함께해야 하냐”는 독한 말을 듣고 그는 모든 걸 놓아버린다. 아들 지태(이태성)에게 안하던 화를 쏟아내는 그는 이제 가족이 다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하는 듯하다. 

왜 그렇지 않을까. 아내 양미정(김혜옥)이 그간 잘 지내왔던 시절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지금의 힘겨운 시기만을 얘기하는 것에 화가 나고, 서지안도 서지수도 금이야 옥이야 키웠던 그 시절을 마치 모두 잊은 듯 그를 대하는 모습에 울분이 터져 나온다. 마치 아버지의 무능 때문에 결혼은 결코 안하겠다 소리쳤던 지태의 외침 또한 그에게는 비수 같은 말들로 남아있다. 도대체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그는 그것을 이제 스스로에게 묻고 그 답을 찾고 있다. 자신을 먼저 돌보지 않고 가족만을 챙기려 했던 그 삶이 어딘가 잘못됐었다는 걸. 그에게 가족은 이제 더 이상 따뜻하고 포근한 안식처가 아니다.

그렇다면 재벌가 최도경(박시후)의 가족은 어떤가. 가족이라기보다는 마치 회사 같은 느낌을 주는 그들은 마치 인형처럼 정해진 대사들을 말하고 정해진 틀 안에서 행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사람과의 결혼이 이미 결정된 사항이고, 그 당사자들 역시 그렇게 만나 그 날 약혼하고 결혼하자는 말을 꺼내놓는다. 그건 하나의 계약 사항 같은 것이니까.

그 속으로 들어간 뒤늦게 찾은 딸 서지수(서은수)는 그래서 이 재벌가 가족이 가진 위선적인 모습들을 드러내는 리트머스지 같은 역할을 한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거죠?”라는 질문에 이 이상한 가족은 쉽게 답을 하지 못한다. 그저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으로 정해진 것이 이 가족의 삶이다. 서민가족의 삶이 그 곤궁함으로 인해 결혼조차 포기하려 했고, 어떻게 결혼은 했지만 아이는 결코 낳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 이상한 것처럼, 재벌가의 남녀가 만나자마자 마치 모든 게 결정되어 있었다는 듯 결혼이야기를 하고 심지어 아이를 낳을 계획까지 말하는 것도 이상하다.

<황금빛 내 인생>이 그려내는 이 가족들의 양태는 정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물론 그 양태는 정반대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그런 비정상을 만들어내는 원인은 같은 곳에서 비롯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돈이다. 현실이다. 없는 자는 없어서 가진 자는 너무 많이 가져서 그 가족의 삶이 피폐해진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짐이 되고 상처가 되며 심지어 굴레가 되는 가족을 진짜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가족 체계를 굳이 지켜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황금빛 내 인생>은 그래서 가족의 불편함을 보여주는 가족드라마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그토록 오래도록 불변의 가치로 여겨왔던 가족주의라는 틀에 대한 균열을 말하고 있다. 핏줄과 혈연으로 얽혀진 가족이라는 틀이 한때는 끈끈하게 서로를 엮어 우리를 생존하게 해주는 힘이었던 적이 있었다면, 지금은 그 끈끈함이 오히려 족쇄가 되어 서로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황금빛 내 인생>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가족주의를 극복하고 따로 ‘내 인생’을 세우고 또 같이 나아가는 진정한 가족을 지향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우리 시대가 추구해야할 가족의 새로운 가치가 아닐까.(사진:KBS)

‘황금빛 내 인생’, 가진 자들의 위선 고발하는 서민 자매들

최도경(박시후)이 “자꾸 신경 쓰인다”고 말할 때 서지안(신혜선)의 얼굴은 무표정 그 자체다. 얘기를 들어주는 그 얼굴에 감정은 1도 섞여있지 않다. 최도경은 내놓고 자신의 호의와 마음을 드러내는 중이지만, 서지안은 안다. 그가 입만 열면 말하는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것도 또 이런 호의도 사실은 위선적이라는 걸. 최도경은 입만 열면 자신은 해성그룹의 오너가 되도록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래서 정해진 혼사도 사업 계약하듯 당연히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것이 결국 가진 자의 위선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서지안은 알고 있다. 

호의라면 상대방이 그 배려를 받아야 호의라고 할 수 있지만, 최도경이 내미는 호의는 자신을 위한 일이다. 재력을 가졌지만 ‘노블리스 오블리제’까지 실천하는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기애가 그 호의의 실체라는 것. 진짜 호의를 베풀 것이라면 먼저 서지안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데 최도경은 ‘젠틀맨’이라는 자신의 허상에만 붙잡혀 있다. 서지안이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는 이유다. 서지안은 그 허상뿐인 가진 자들이 호의라며 내미는 화려한 식탁과 옷과 돈과 차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세계라는 걸 알았다. 그러니 괜히 건드리지 말라는 것.

KBS 주말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에서 서지안의 가족들은 출생의 비밀이 터지면서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지만, 그 안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건 가진 자들의 위선을 고발하고 나선 서지안과 서지수(서은수)라는 자매에 대한 새삼스런 발견이다. 서지안이 최도경을 밀어내며 그 위선을 고발하고 있다면, 서지수는 해성그룹의 재벌가의 딸로 들어가 뼛속까지 가진 자의 허위로 똘똘 뭉쳐 있는 노명희(나영희)와 그 세계를 공격하는 중이다. 

밥 먹을 때는 소리를 내지 말라고 하고, 마치 그들은 먹는 것조차 다른 걸 먹는다는 식으로 훈계를 하려 드는 노명희에게 서지수는 “왜 그래야 하는데요?”라고 되묻는다. 서지수를 해성그룹의 딸로 바꾸기 위해 그의 물건들을 허락도 없이 방에서 치워버리자 굳이 쓰레기차까지 쫓아가 그걸 가져와서는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가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면서 이렇게 “함부로 남의 물건을 버리는 건 예의냐”고 따진다.

자신이 엄마라고 강변하는 노명희에게 “낳기만 하면 엄마냐”고 되묻고 그럴 거면 나가라는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나갈 테니 방 하나 구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한다. 자신이 성장하는 동안 한 게 아무 것도 노명희에게 그 정도는 요구할 수 있다며. 특히 자신을 길러준 부모들을 단죄하려 했었다는 걸 들은 서지수는 대노하며 “그럴 자격이 없다”고 선을 긋는다. 화를 낼 자격은 “자신 뿐”이라는 것.

<황금빛 내 인생>이 흥미로운 건 이 서지안과 서지수라는 평범했던 서민층 자매가 사건을 겪으면서 좀 더 자신의 진면목을 발견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지안은 늘 당당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했지만 자신 안에 존재했던 ‘속물근성’을 발견하고는 그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런 자신에 대한 부정은 이제 주변 사람들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이어진다. 가족이라고 모든 게 용서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는 새삼 깨닫는다. 결국 가족이라고 해도 자신은 자신 스스로 서야 한다는 걸 그는 알게 된 것.

서지수는 늘 순응하며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잘 적응해 밝게 살아왔지만 이 일을 겪으며 자신 안에 있는 의외로 당당한 면모들을 발견하고 있는 중이다. 늘 언니의 그늘 아래서 커왔지만 이제 스스로 서야한다는 걸 그는 알고 있다. 그래서 갑자기 부모가 둘이 생긴 상황 속에서 결국 중요해진 건 자신이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서지안과 서지수는 이 아픈 성장통을 통해 자신의 일을 찾아가고 있다. 서지안은 그토록 희구했던 대기업 입사가 허구였다는 걸 알게 되었고, 목공일 같은 본래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다는 걸 발견해가고 있다. 서지수는 예전부터 그랬지만 환경이 갑자기 바뀌었다고 해서 자신이 하려 했던 제빵의 길을 접지 않는다. 아니 어떤 면에서 보면 그 일을 할 때만이 자신이 행복하다는 걸 알고 있다. 

<황금빛 내 인생>은 그래서 ‘황금빛’의 허구에 한때 눈이 멀었던 이들이 그 실체를 파악하고 저마다 ‘내 인생’을 찾아내려 하고 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황금빛’ 인생일 것이니. 금수저 흙수저로 나누어 금수저에 대한 환상을 드러내는 현실이지만, 그 금수저가 가진 위선을 이토록 신랄하게 건드리는 드라마도 없을 게다. 그 어떤 사회극보다 신랄해진 주말드라마라니. 서지안과 서지수의 일침이 은근 통쾌하게 다가오는 이유다.(사진:KBS)

‘황금빛 내 인생’과 ‘변혁의 사랑’이 그리는 금수저 판타지 깨기

재벌가의 삶이 판타지를 주던 시대는 이미 지나버린 모양이다. 재벌3세가 등장하고 그 상대역으로 신데렐라, 남데렐라, 줌마렐라 같은 인물들이 주는 판타지는 최근 드라마에서 찾아보기가 어렵게 됐다. 물론 재벌3세라는 특정 캐릭터는 여전히 등장하지만, 이를 다루는 방식은 완전히 달라졌다. KBS 주말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과 tvN <변혁의 사랑>을 보면 지금 대중들이 바라보는 재벌가가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황금빛 내 인생(사진출처:KBS)'

<황금빛 내 인생>에 등장하는 재벌가 해성그룹은 그 부유함이 막연한 판타지를 주는 그런 곳이다. 서지안(신혜선) 같은 흙수저에게는 특히 그렇다. 어떻게 해서라도 마케팅팀에 들어가기 위해 인턴으로 갖가지 잔심부름까지 기꺼이 도맡아 하는 곳. 하지만 드라마는 애초부터 그런 판타지는 흙수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선을 긋는다. 죽어라 노력했는데도 어느 날 낙하산을 타고 들어온 금수저 친구에게 밀려나 정규직이 되지 못하는 곳. 그것이 굴지의 재벌가에서 일이라도 해보려는 흙수저에게 떨어지는 씁쓸한 현실이다. 

그런데 그 흙수저가 하루아침에 해성그룹의 잃어버린 딸이 되어 금수저가 되자 이 모든 닫혔던 문들이 열린다. 그래서 장밋빛 인생이 펼쳐질 줄 알았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하루에 천만 원씩 쓰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집안이지만 사실 사는 모양이 영 불편하다. 지켜야할 것도 많고 보는 눈도 많고 구설에 오를 일도 넘쳐난다. 재벌3세인 최도경(박시후)은 입만 열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외치는 인물이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미래가 모두 결정된 인물이다. 심지어 누구와 거래하듯 정략결혼을 해야 할 지까지.

서지안은 동생 서지수(서은수)가 진짜 재벌가의 잃어버린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게 힘겨운 지옥의 삶을 경험한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해성그룹의 사모님 노명희(나영희) 같은 인물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가를 실감한다. 게다가 이 재벌가 사모님은 입만 열면 ‘특권의식’이 철철 묻어나는 말들만 늘어놓는다. 서민들과는 말도 섞지 말라는 식이다. 서지안이 뒤바뀐 출생의 비밀 때문에 겪게 된 재벌가는 판타지가 아니라 지옥이다. 되도록 빨리 도망치고픈 그런 곳.

<변혁의 사랑> 역시 재벌가의 풍경은 그리 다르지 않다. 변혁(최시원)이라는 낭만주의자 재벌3세는 그 낭만적인 성격 때문에 집안에서 밀려난다. 형인 변우성(이재윤)은 동생을 영구히 밀어내기 위해 변혁이 일으키는 사건들을 은밀하게 더 키우는 그런 인물이고, 아버지 변강수(최재성)는 아들을 향해 몽둥이를 휘두르는 폭력적인 인물이다. 

물론 여기 등장하는 백준(강소라)이라는 프리터족 흙수저의 현실은 더 참담하다. 직업 갖는 걸 포기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살아가는 그는 겉으로 명랑해보여도 속은 문드러져 있다. 늘 돈을 빌려달라는 엄마에게 자신도 힘들다고 토로하면서도 다달이 모았던 적금통장을 깨서 주려고 가져가는 그런 딸. 그런데 철없게도 돈 쓸 줄만 아는 변혁은 그런 그가 안타까워 척척 돈으로 그걸 해결하려 한다. 

하지만 백준은 그런 변혁의 행동이 오히려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돈만 많았지 세상 사람들의 아픈 현실은 잘 모르고, 그렇게 돈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인물이 바로 변혁이기 때문이다. 재벌3세라면 뭐 하나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 것 같지만 변혁은 오히려 정반대다. 집안에서도 제대로 기를 피지 못하고 그렇다고 돈이 많다고 해도 한 사람의 마음 하나를 얻지 못한다. 

흔히 드라마가 재벌가 판타지를 담곤 했던 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가진 권력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던 당대의 정서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러한 권력에 대한 대중들의 시선은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갖가지 재벌가의 특권의식이 점철된 갑질 사건들이 주는 현실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단지 금수저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황금빛’ 인생을 살아가는 건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기도 하다. 

<황금빛 내 인생>이나 <변혁의 사랑>은 물론이고, <품위 있는 그녀>가 그려냈던 불륜과 치정으로 얼룩진 재벌가의 삶이나, <부암동 복수자들>에 담겨진 저들만의 세상에 대한 분노 같은 반감들은 최근 드라마들이 재벌가를 바라보는 달라진 시선을 담고 있다. 어차피 흙수저가 금수저가 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 그런 판타지는 애초에 ‘꿈 깨’라고 드라마가 말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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