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인', 그 무서운 뒷심은 어디서 오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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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인'(사진출처:SBS)

'싸인'의 상승세가 무섭다. 첫 번째 에피소드였던 한 유명가수의 죽음은 고 김성재의 의문사를 떠올렸지만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아마도 CSI 같은 세련됨을 기대했던 시청자들의 기대치에는 맞지 않는 우리식의 법의학 드라마라는 점도 작용했을 듯 싶다. 하지만 회를 거듭하면서 오히려 우리 식의 정서가 묻어나는 '싸인'은 힘을 발하고 있다. 두 번째 에피소드로 연쇄살인범의 등장과 함께, 긴박한 사건들을 다차원적으로 엮어내는 연출의 힘이 예사롭지 않다.

하지만 우리네 드라마에서 스릴러 같은 장르적 성격이 성공한 적은 극히 드물다. 고현정이 출연했던 '히트'가 그랬고, 손예진이 맹렬 기자로 등장했던 '스포트라이트(물론 이 작품은 스릴러는 아니지만 그런 요소가 강했다)'도 그랬다. 이유는 당연했다. 우리 드라마에는 멜로 같은 말랑말랑함에 시청자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싸인'은 이례적이다. 물론 멜로가 예고되어 있지만,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스릴러적인 사건들만으로 시청률이 급상승했다. 도대체 무엇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잡아 끈 걸까.

사실 작년 내내 우리 문화계에 불어 닥친 '정의' 신드롬은 이례적이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셀러에 오른 건 출판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정의'라는 키워드가 대중들에게 자극하는 부분이 컸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 책은 미국 내에서는 그다지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정의' 신드롬은 EBS에서 방영하는 샌델 교수의 강의로 이어지고 있다. 한번쯤 본 사람들은 그 강의가 대단히 매력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유머가 넘치는데다가 어려운 철학적 문제도 명쾌하게 구체적 사례를 통해 풀어내주는 샌델 교수의 힘이다.

작년 영화계를 강타한 건 스릴러 장르였다. '아저씨', '이끼', '악마를 보았다', '부당거래' 등등 그 어느 때보다 스릴러가 강세를 보였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역시 '정의'라는 키워드가 보인다. 특히 '아저씨'의 대성공은 물론 원빈이라는 배우의 힘이 작용했지만, 현실적으로 구현되지 않고 있는 사회정의라는 차원과 거기에 어떤 부채감 같은 걸 느끼는 고개 숙인 아저씨 감성이 맞물리면서 흥행에 불씨를 던졌다. 그만큼 현실이 채워주지 않는 '정의'에 대한 갈망을 영화라는 판타지 속에서나마 충족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싸인'은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다. 스릴러에도 어느 정도의 수위조절이 필요한 상황이다. 연쇄살인범이 여주인공을 잡아 두고 마치 장난치듯 죽음으로 몰아넣는 장면은 그래서 영화보다는 약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싸인'이 힘을 발휘하는 건 이 '정의'에 대한 갈망이 안방극장으로도 침투하는 것만 같다.

여기에는 장항준 감독의 촘촘한 연출력과 그저 연기로 부딪치는 박신양과 전광렬의 팽팽한 대결, 그리고 푼수 같은 털털한 이미지로 변신에 성공한 김아중의 몫이 크다.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와 긴장을 풀어주는 코믹한 설정들, 그리고 적절히 이어지는 멜로의 균형 감각도 좋은 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목을 끄는 건, 역시 올바른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그 '정의'에 대한 갈망이다. '싸인'의 다음 에피소드는 과연 그 갈망을 더 키워놓을 수 있을까.

문근영의 발견, 장태유 PD의 성과 그리고 박신양의 숙제

'바람의 화원'은 시작하기 전부터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 이유는 이 범상치 않은 사극이 제시하는 세 가지 도전 상황 때문이었다. 그 첫째는 박신양이 첫 사극 도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며, 둘째는 문근영이 남장여자 출연으로 그녀에게 족쇄로 작용하던 국민여동생 이미지를 벗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장태유 PD가 역시 첫 사극 도전을 어떻게 해낼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종영에 와서 이 도전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문근영의 발견, 국민여동생에서 연기자로
'바람의 화원'의 최대 성과는 아마도 문근영이라는 배우의 재발견일 것이다. 문근영은 이미 국민여동생이라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었지만 바로 그 이미지가 족쇄로 작용했던 게 사실이다. 한 때 '사랑따윈 필요 없어'같은 영화에 출연하면서 성인연기자로의 변신을 노렸던 문근영이지만 대중들은 그 이미지 변신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람의 화원'에서 남장여자 설정의 신윤복이란 캐릭터를 만나 문근영은 비로소 이 족쇄를 벗어버릴 수 있었다. 여성의 이미지를 남장여자라는 캐릭터 속에서 중화시켜버리자 비로소 문근영의 연기자로서의 면모가 드러났고, 그것은 대중들의 호평으로 이어졌다. 극중 신윤복이 당대 사회에 갇힌 새로써 당당히 새장을 빠져 날아간 것처럼, 문근영은 이 작품을 통해 국민여동생이라는 새장을 벗어나 연기의 세계로 훨훨 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장태유 PD의 성과, 사극에서 더 빛난 연출
'쩐의 전쟁'을 연출했던 장태유 PD의 연출 스타일은 꼼꼼하고 빡빡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이 완벽주의자의 연출에 걸리면 배우들은 죽어난다는 곡소리를 하면서도 그 완벽한 결과물에 환호성을 지른다고 한다. '바람의 화원'으로 첫 사극 연출에 도전한 장태유 PD는 특유의 꼼꼼함으로 군더더기 없는 영상을 선보였다.

게다가 실험적일 수 있는 그림 속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풀어내는 연출은 오래된 시간 속에 박제된 옛 그림을 눈앞에 생생하게 살려놓는 특별함을 선사했다. 그림 대결과 감동(감상)을 통해 설명되는 그림의 묘미는 사극 외적으로도 충분한 미술적인 즐거움을 제공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현대물과 사극을 오가는 그 연출력을 인정받음으로써 장태유 PD는 앞으로 좀 더 폭넓은 연출의 세계로 뛰어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다.

박신양의 사극 도전, 비슷한 캐릭터 이미지가 발목 잡아
아쉬운 점은 박신양의 사극 도전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가 사극 연기에 실패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극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훌륭한 연기력을 보였지만, 그 김홍도라는 캐릭터의 해석에 있어서 지나치게 기존 캐릭터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보였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즉 김홍도에게서 '쩐의 전쟁'의 금나라 이미지가 반복되어 보이자 그 역할은 박신양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처럼 보였다.

물론 후반부에 와서는 어느 정도 역할에 적응이 된 모습을 보였지만 어쨌든 박신양에게 이 사극은 이제는 새로운 캐릭터에 대한 도전의 필요성을 알게 해주었다. 자칫 하나의 패턴으로 고정된 이미지는 아무리 좋은 연기력이라 해도 대중들에게 외면 받게 된다는 점을 숙지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여러모로 박신양에게는 연기자로서 숙제로 남은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람의 화원'은 여러 모로 새로운 소재와 새로운 연출, 연기가 어우러져 독특한 사극의 한 세계를 열어놓았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말할 수 있다. 그 도전이 아름다웠고 그 성과 또한 의미가 있었다.

‘윤복-홍도’ 라인보다 강했던 ‘윤복-정향’ 라인, 왜?

‘바람의 화원’이 그 베일을 벗기 전부터 세간의 관심은 남장여자로 등장하는 신윤복(문근영)과 스승이자 연인으로 등장할 김홍도(박신양)의 러브 라인에 쏠렸다. 혹자들은 제2의 ‘커피 프린스 1호점’을 예상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막상 드라마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뜻밖의 인물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정향(문채원)이라는 기생이었다.

정향과 홍도 사이에 선 윤복, 그 무게중심은?
어떻게 보면 이 사극의 멜로 구도는 남장여자인 신윤복을 가운데 두고 한편에는 김홍도가 다른 한편에는 정향이 서 있는 형국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정향을 사로잡아 두려는 김조년(류승룡)까지 포함시키면 전형적인 사각 구도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 멜로 구도의 독특한 점은 그 중심에 서 있는 신윤복이 그 어느 쪽을 선택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입장에 서 있다는 점이다.

정향과는 실제 육체적인 동성이고, 김홍도와는 대외적으로 알려진 성으로서의 동성이다. 이 상황은 신윤복으로 하여금 보통의 남녀 간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사극의 멜로를 그 이상의 것으로 끌어올리는 원동력이 된다. 즉 정향과는 육체적인 사랑이 아닌 미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되고, 김홍도와는 단순한 남녀 관계를 넘어선 사제이자 동료로서의 애정까지를 포함하는 사랑으로 다루어진다.

여기서 그림은 그 닿지 않는 사랑에 대한 그리움의 매개체로서 위치를 잡는다. 김홍도와 신윤복이 함께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나, 손에 묻은 먹 자국을 닦아주는 장면은 그 어떤 육체적 접촉보다 더 아련하게 다가왔고, 정향과 신윤복이 나누는 눈빛이나, 가야금과 그림이 어우러지는 장면 역시 그 어떤 달콤한 대사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전반적인 사극의 흐름 속에서 살펴보면 정작 초기에 기대했던 김홍도와 신윤복의 멜로 라인은 그다지 살아나지 않았고, 대신 신윤복과 정향의 멜로 라인이 부각되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멜로 라인의 균형을 깨게 만든 것일까.

왜 윤복과 홍도의 멜로가 살지 않은 것일까
그것은 신윤복 신드롬이 사회적으로 크게 이슈화되면서 남장여자라는 설정이 갖는 극의 부담감 때문이었을 수가 있다. 신윤복과 김홍도의 러브라인을 깊게 파고 들어가면 이 사극의 아킬레스건이자 매력인 동성애 코드가 부각되게 된다. 물론 정향과 신윤복의 관계 역시 동성애적 상황인 건 마찬가지지만, 우리나라에서 남-남의 동성애 코드를 보는 시각과 여-여의 동성애 코드를 보는 시각에는 큰 차이가 있다. 즉 여-여의 동성애 코드는 과거부터 남성들의 성적 소비 대상으로서 받아들여져 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단정은 조금 과도한 듯하다. 이 사극 속에서는 그 멜로의 힘의 균형이 윤복-정향 쪽으로 기울었다 뿐이지, 여전히 윤복-홍도의 멜로가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극은 전체적으로 멜로 구도를 그리면서 육체적인 애정표현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만큼 그림 같은 것을 통해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중간에 윤복과 홍도가 키스하는 장면을 연출하려 했다가 뺀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설득력이 있게 들리는 것은 박신양의 사극 연기 논란과 관련된 것이다. 연전연승을 거듭해온 박신양이 연기하는 김홍도에서 ‘쩐의 전쟁’의 금나라가 자꾸 연상되었다는 점이다. 연기로만 두고 봤을 때, 사실 박신양이 ‘바람의 화원’을 통해 떨어지는 연기력을 보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박신양의 고정된 이미지가 김홍도로 고스란히 이어졌다는 지점에 있다. 이것은 대중들에게 식상하게 다가왔다.

익숙한 배우의 익숙한 캐릭터? 참신한 배우의 참신한 캐릭터!
반면, 아직 새내기로 연기 역시 서투른 문채원은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이라는 신선한 캐릭터로 주목받았다. ‘닷냥 커플’로 대변되는 정향과 윤복의 러브라인이 힘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배우와 캐릭터가 조합된 결과로 보여진다. 이미 연기력이 검증된 익숙한 배우의 늘 봐왔던 캐릭터(혹은 연기)보다, 연기력은 아직 떨어지지만 참신한 배우의 참신한 캐릭터가 더 주목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로써 문근영을 빼고 이 사극으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배우는 박신양이 아닌 문채원이 되었다.

문근영이 과거 힘겨웠던 것은 국민여동생이라는 고정된 이미지를 탈피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남장여자 설정의 신윤복으로 그 이미지를 탈피해 이제 한 연기자로 발돋움하게 된 문근영과는 상반되게, 한편으로 점점 고착되어가는 박신양은 이 사극을 통해 숙제 하나를 갖게 된 셈이다. 최고의 연기자라면 늘 같은 이미지에서 뱅뱅 돌기보다는 새로운 영역에서 새로운 이미지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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