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회>, 사랑 타령 따위의 드라마가 아니다

 

JTBC 월화드라마 <밀회>에 처음 등장했던 오혜원(김희애)의 모습과 지금 현재를 비교해보면 너무나 큰 차이가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떻게든 상류층에 들어가려 안간힘을 썼다는 그녀. 그래서 그 언저리까지 올라가 으리으리한 집과 차와 커리어를 누리며 우아하게 살고 있다고 여겼던 것들이 후반부로 와서는 모두가 허상이었다는 게 드러난다.

 

'밀회(사진출처:JTBC)'

그녀는 결국 그녀가 말했듯 우아한 노비에 불과했던 것. 재단이 위험에 처하자 도마뱀 꼬리처럼 잘려져 버리는 그런 존재가 그녀의 실상이었다. 번듯한 교수 남편에 마사지 샵을 들락거리며 상류층들의 삶을 코스프레하고 있지만 그것은 전부 연기에 불과했다. 사실 부부관계라고 할 수도 없는 그녀와 남편 강준형(박혁권)의 관계는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위해 연기되는 말 그대로의 쇼윈도 부부였고, 그녀를 가족처럼 챙기는 것처럼 보였던 서한그룹 사람들은 그녀를 이용할 뿐이었다.

 

<밀회>가 다루려 했던 것은 결국 스무 살 차이 이선재(유아인)와 오혜원의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의 삶의 실상을 끄집어내기 위한 하나의 촉매제였을 뿐. 드라마는 우아하게 연기된 삶을 살아가던 오혜원이 그 삶이 거짓이며 심지어 추악한 욕망에 불과했다는 것을 궁극적으로 드러낸다. 이선재라는 순수한 존재가 오혜원의 숨겨져 있던 진짜를 꺼내주었던 것.

 

상류층의 삶이 가짜로 점철된 욕망 덩어리일 뿐이라는 건 이 드라마 초반에 이미 보여진 바 있다. 서필원 회장(김용건)의 후처인 한성숙(심혜진)과 그의 딸 서영우(김혜은)가 화장실에서 사로 머리채를 잡고 드잡이를 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재벌가의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는 가족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가족이라고 할 수 없는 관계. 그들의 관계는 어찌 보면 돈으로 겨우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필원 회장은 틈만 나면 다른 여자를 넘보고, 한성숙은 애정보다는 그의 재력에 달라붙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하며, 서영우는 결혼했지만 젊은 남자들만을 욕망하는 인물이다. 그런 상류층의 삶을 왜 오혜원은 그토록 갈망했던 것일까. 결국 우아해지고 싶은 돈과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끝단은 그들 상류층의 불행한 삶을 그대로 닮아가는 것일 뿐이다.

 

클래식 연주는 그래서 이 드라마가 다루는 가짜와 진짜의 이야기를 에둘러 말해준다. 흔히들 우아하게 차려 입고 공연장에 앉아 듣는 클래식 연주에는 물론 진짜 감상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도 있지만 또한 속물근성도 들어있다. 마치 그 음악을 들으면 자신도 상류층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들기도 하는 것. 또한 강준형 같은 이들에게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제자는 음악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영달을 위한 이용가치 정도로 받아들여진다.

 

지도 교수가 없어 연습 자체를 하지 못하는 친구들의 5중주를 위해 피아노를 쳐주는 이선재의 모습은, 그래서 오로지 성공을 위한 준비와 연습을 시키는 강준형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진짜 연주란 결국 마음과 마음이 오가는 이선재와 오혜원이 함께 피아노를 치며 교감했던 그것이었다.

 

쇼윈도 부부로 힘겹게 아내 역을 연기하던 오혜원은 잠시 자기 방에 들어왔다가 침대에 페이지가 열려진 채 엎어져 있는 리흐테르의 자서전을 본다. 이선재가 그리 해놓았던 것처럼 보이는 그 자서전을 읽으며 오혜원은 힘겹게 버티던 하루가 무너져 내린다.

 

우리는 차를 타고 떠난다. 피아노를 실은 차가 뒤따른다. 전염병을 피하듯 고속도로를 피해서 달린다. 어느 작은 도시 귀퉁이에서 연주를 한다. 극장이 될 수도 있고 학교가 될 수도 있다. 정말 좋은 점은 사람들이 속물근성 때문이 아니라 오직 연주를 들으러 온다는 것이다.’

 

리흐테르의 자서전에 밑줄이 그어진 이 글은 예술이 비웃는 속물근성과 이 드라마가 말하는 우아해 보이는 상류층의 가짜 삶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들어있다. 결국 <밀회>는 한갓 스무 살 차이의 남녀가 벌이는 사랑과 불륜 따위의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 아니다. 이 드라마는 상류층으로 대변되는 끝없는 욕망의 더러운 실체를 낱낱이 해부하고 있다. 심지어 클래식 연주 속에서조차 존재하는 속물근성의 이야기를 통해.

<밀회>, 연애도 사업으로 만들어내는 시스템의 놀라움

 

첫 연주를 마치고 CCTV 사각지대에서 격렬한 키스를 하다 자칫 무대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혜인(김희애)과 선재(유아인). 그리고 그 이상한 낌새를 따라 무대 위까지 올라온 혜인의 남편 강준형(박혁권). 그는 거기 어딘가에 분명 혜인과 선재가 밀회를 즐기고 있을 거라는 걸 감지하지만 쉽게 다가가지도 또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못한다.

 

'밀회(사진출처:JTBC)'

아내인 혜인과 제자인 선재가 보통 이상의 관계라는 걸 이미 눈치 챈 그지만 화를 내기보다는 한 발 물러선 게 그가 한 일이다. 그는 아내에 대한 사랑보다 자기애가 더 큰 남자다. 교수로서 번듯한 제자를 하나 키워내는 일이 자신의 그 어떤 것보다 큰 공적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사실은 아내의 탈선이 자신에게 고통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제자를 키워내는 행복보다는 약하다고 여긴다.

 

혜인과 선재의 심상찮은 케미스트리를 감지한 이사장 한성숙(심혜진)이 학장 민용기(김창완)에게 전화해 아예 두 사람을 엮어놓는 게 어떠냐고 묻고 민용기도 여기에 가담하는 에피소드는 의미심장하다. 민용기는 또 강준형을 불러 혜인이 선재를 전담하는 건 어떠냐고 묻는다. 누가 시킨 것인가 하고 의심하는 강준형에게 민용기는 혜인의 젊었을 시절 스타일과 선재가 잘 어울린다며 적임자라고 강조한다.

 

강준형 역시 이를 허용하는 과정은 남녀 간의 연애관계, 아니 나아가 불륜이라고 해도 그것이 사업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면 남편조차 허용하는 시스템의 견고함을 보여준다. 강준형은 그저 바보이고 쪼다이며 시쳇말로 찌질이처럼 보인다. 그는 선재를 내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아내에게 화를 내지도 못한다. 또 이 모든 시스템이 결국은 사업적 성공으로 이용되며 두 사람의 불륜을 지원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어떤 저항조차 해보지 못한다.

 

그는 시스템이 그를 위해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이 돈의 흐름을 위해서만 굴러간다는 걸 모르는 바보다. 아내를 허용해 제자를 얻을 것 같았지만, 그래서 사랑은 잃어도 자기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상황은 그리 흘러가지 않는다. 진짜 사랑에 빠진 아내의 달라져가는 모습은 그를 비참하게 만든다. 왜 자신이 아니라 어린 청춘에게서 그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아내의 밝은 미소와 웃음이 나오게 되었던가. 강준형의 고통은 이러한 끝없는 비교에서 비롯된다.

 

혜원이 우아한 노비라면 강준형은 그녀의 남편이 아닌 노비의 노비처럼 사는 인물이다. 그녀의 그늘 아래서 그녀가 노비 생활하는 대가로 주어지는 교수직을 허영처럼 누리면서 제자 하나를 얻기 위해서 또 그녀를 내주면서. 그가 그녀를 쥐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녀가 그를 쥐고 있는. 정확히 말하면 시스템에 의해 두 사람 모두가 쥐어져 있는. 집으로 돌아와 우아하게 위스키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여유란 사실 이런 굴종의 대가들로만 얻어지는 것들이다.

 

너 혜원이 찾는 대로 빨리 한남동 가라고 그래. 조사 들어왔대.’ 무대 위에서 혜원과 선재를 찾던 그에게 때마침 날라온 영우(김혜은)의 문자가 그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어떻게든 아내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지만 그렇게 드러내 놓는 순간 자신이 짐짓 모른 척 했던 아내의 불륜을 드러내놔야 한다. 무대에 선 그는 마치 햄릿처럼 고민한다. 찾느냐 마느냐. 그러다 그가 고작 선택한 것이 이렇게 어디에 대고 하는 지 모를 외침이다. “오혜원! 빨리 한남동 가! 검찰에서 나왔대! 당신 찾는대! 제발 가!”

 

그 목소리에는 분노와 동시에 더 이상 멀리 나가지 말라는 간절한 애원이 뒤섞여 있다. ‘제발이라는 말이 그 정조를 담아낸다. 물론 불특정한 관객에게 던지는 외침에 불과하지만 그 소리는 고스란히 밀회를 즐기던 오혜원의 귀에 닿는다. 화들짝 놀란 오혜원은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선재의 품을 벗어난다. 강준형은 무대 뒤쪽 어둠으로 사라진다.

 

마치 연극무대의 한 장면 같은 이 짧은 시퀀스 속에는 이 사회 시스템에 대한 날카로운 고발을 담고 있는 이 드라마의 전체 구조가 들어가 있다. 피아노가 있고 장중한 음악이 깔리지만 그것은 이 비극적인 무대에 올려진 혜원과 선재 그리고 강준형이라는 세 인물이 처한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사랑을 꿈꾸지만 사업으로 이용되는 불륜이 있고, 그런 허겁지겁 순간의 불륜조차 시스템의 부름에 의해 모두가 이끌려 간다.

 

놀라운 건 이 강준형이라는 인물을 연기하는 박혁권이라는 배우의 존재감이다. “대사가 박혁권의 입에만 들어갔다 나오면 파닥파닥 살아있는 생선이 된다. 놀랍도록 리얼한 연기를 보여준다.”고 극찬한 김희애의 말처럼 그의 연기는 독특하리만치 확실한 그만의 아우라를 담고 있다. <하얀거탑>에서 장준혁(김명민)과 같은 팀 닥터 역할로 등장했을 때부터 어딘지 남다른 느낌을 주던 그였다. <하얀거탑>에 이어 <아내의 자격>, <세계의 끝>, 그리고 <밀회>까지 안판석 감독의 사람이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박혁권에 의해서 이 찌질한 강준형이라는 인물을 동정적으로 들여다본다는 점은 중요하다. 그것은 단지 강준형을 벗어나 선재에게 간 혜원이라는 설정이 아니라 강준형도 혜원도 모두 시스템에 포획된 존재로서의 비극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그 공감이 바탕이 될 때 비로소 이 드라마를 단순 불륜극이 아닌 사회극으로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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