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 비지상파 드라마들 호평 받는 또 하나의 이유

 

이 정도면 뚝심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자신감이라고 해야 할까. 종영한 JTBC 금토드라마 <아름다운 세상>은 사실 너무 진중한 주제의식과 어두운 분위기 탓인지 초반 시청률에서도 화제성에서도 그다지 주목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래도 흔들리지 않고 뚝심 있게 하고자 한 이야기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 조금씩 시청자들이 그 드라마의 진심을 알아보게 되었고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시청률도 서서히 올랐고 드라마도 화제가 되었다.

 

결국 2.1%(닐슨 코리아)로 다소 저조하게 시작했던 시청률은 꾸준히 상승해 마지막 회 5.7% 최고시청률을 기록하며 마감했다. 중요한 건 결코 쉽지 않은 이 드라마의 이야기를 끝까지 완성도 높게 추구해 마무리했다는 점이다. 학교폭력으로 인해 다툼이 있었고 그래서 사고로 추락한 한 아이의 이야기는 그러나 사적인 복수의 차원을 넘어서, 제대로 된 진실규명과 사법정의가 이뤄지는 것이 진정한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 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걸 보여줬다.

 

학교 옥상에서 떨어진 아들이 자살로 위장되고 심지어 성폭력 범죄를 저질렀다는 누명까지 쓰게 되는 그 충격을 그 부모가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연루된 이들에 대한 복수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하지만 박무진(박희순)과 강인하(추자현)는 서로를 의지해가며 이 난관들을 헤쳐 나가고, 그들이 하는 일이 사적 복수가 아니라 좀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선택들이라는 걸 되새긴다.

 

그래서 말미에 이르러 박무진과 강인하는 아들의 추락과 누명에 연루된 두 아이들을 구해낸다. 아들 선호(남다름)를 집단적으로 괴롭히게 만들었고 추락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했던 준석(서동현)은 죄를 저지르고도 벌을 받지 않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래서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리려 하지만 박무진은 그것이 진정으로 용서받는 길이 아니라고 말하며 그를 구해낸다. 또 강인하는 준석의 아버지 오진표(오만석)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이것이 두려워 가해자로 선호를 지목했던 다희(박지후)를 껴안고 “너의 잘못이 아냐”라고 말해준다.

 

박무진과 강인하는 아이들은 잘못이 없다는 걸 확인시켜주고, 이 문제들이 결국은 어른들의 잘못이라는 걸 명백히 한다. 이로써 죄를 지은 어른들 때문에 아이들까지 죄의식 속에 살아가지 않게 만들며, 죄가 있다면 벌을 받고 이를 뉘우치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걸 아이들에게 보여준다. 어쩌면 이것은 이 드라마가 우리 사회 전체에 던지는 가장 큰 메시지일 게다. 수많은 사람을 죽게 만들고도 그만한 벌을 받지 않은 채 버젓이 멀쩡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보며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그런 아이들이 갖게 되는 실망감, 분노, 좌절, 무력감 등은 과연 우리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게 만들 수 있을까.

 

시작은 소소했지만 결말은 단단했던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드라마가 가능했던 건 애초의 그 의도들을 흩트리지 않고 끝까지 멀어 붙일 수 있어서다. 이런 행보는 여러모로 지상파 드라마들이 초반 부진을 ‘기획’이라는 명목 하에 개입해 이리저리 뒤흔들기도 했던 행보들과는 사뭇 다른 면모가 아닐 수 없다. 시청률에 못 미치면 대본을 고치고 무리하게 캐릭터의 설정을 바꾸거나 심지어 분쟁이 일어나 주인공 배우가 바뀌는 사태까지 벌어지곤 했던 게 지상파 드라마가 한때 해왔던 행보들이다.

 

물론 지금은 지상파도 시대적 요구에 의해 콘텐츠 완성도에 집중하려는 노력을 하는 추세지만, 여전히 시청자들에게는 그 많은 논란들이 잔상처럼 남아있는 게 사실이다. 일단 편성을 했으면 충분히 하려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내버려두는 것. 어쩌면 비지상파 드라마들이 최근 몇 년 간 약진한 가장 큰 비결이 아닐까.

 

최근 종영했던 tvN 드라마 <자백> 역시 단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그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이 드라마는 한 번도 한 눈 팔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필휘지하듯 밀어붙였다. 16부가 한 편의 영화처럼 꽉 짜여진 완성도를 가진 놀라운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그것이 허용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리스크가 크지만 완성도를 위해 내버려둔 결과는 좋은 작품으로 돌아왔고 결국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게 되었다.

 

다소 시청률이 저조하다 하더라도 끝까지 이야기를 밀어붙일 수 있다는 건 드라마들이 그저 재미만이 아니라 진중한 메시지를 담아낼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된다. 비지상파 드라마들은 그런 기반 아래서 세상에 대한 진지한 질문들을 던져왔고, 거기에 시청자들은 화답했다. 지금의 비지상파 드라마들이 갖게 된 위상은 바로 이런 한 걸음 한 걸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름다운 세상>은 그 또 하나의 예가 되는 작품이다.(사진:JTBC)

‘아름다운 세상’이 사이다 판타지보다 고구마 현실을 담는 건

 

JTBC 금토드라마 <아름다운 세상>이 그리는 세상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권력의 힘으로 거짓이 진실을 덮고 있고, 그 앞에서 힘없는 서민은 무력하기 이를 데 없다. 학교 이사장인 오진표(오만석)는 그 권력을 통해 자신의 아들 준석(서동현)이 저지른 죄를 은폐하고, 심지어 그건 가진 자들의 당연한 삶이라고 아이에게 말하는 인물이다.

 

준석의 엄마 서은주(조여정)는 사고를 당한 선호(남다름)의 엄마 강인하(추자현)의 친구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아들을 위하는 일이라며 그 은폐에 동참한다. 강인하의 남편 박무진(박희순)은 끝까지 진실을 향해 나가려 하지만 사고에 대한 결정적 증거를 말하려던 신대길(김학선)이 뺑소니로 사망하고 그것이 오진표의 사주라는 걸 직감으로 알게 되자 분노한다.

 

그래서 오진표를 찾아가 주먹질을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를 무력감에 빠지게 한다. 분명한 진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겨우 그런 폭력에 불과하다는 것에 절망한다. 심지어 사람까지 사주해 죽이고도 버젓이 조문을 가는 오진표의 뻔뻔함과, 아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친구에게조차 하지 말아야할 짓을 하는 서은주의 답답함, 그리고 그 부모 밑에서 역시 거짓 연기를 하며 진실을 은폐하는 준석의 엇나감까지 박무진이 처한 현실은 너무나 비틀려 있다.

 

아마도 시청자들은 <아름다운 세상>이 담고 있는 전혀 ‘아름답지 않은’ 현실을 보며 고구마를 꾸역꾸역 넘기는 듯한 답답함을 느낄 게다. 진실이라는 사이다는 등장할 듯 등장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고구마 은폐와 범죄의 연속. 도대체 이 드라마는 왜 이토록 답답함만을 의도적으로 안기고 있는 것일까.

 

뺑소니로 죽은 신대길이 박무진에게 선물로 준 선인장은 그래서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진실을 향해 나가는 박무진에게 신대길은 이렇게 말하며 선인장을 선물했다. “선인장을 닮으셨네요. 사막에서도 우직하게 버티는 놈이 선인장 아닙니까. 하지만 제가 오아시스가 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우리가 이 드라마를 통해 느끼는 감정은 바로 그 사막 한 가운데 놓여진 선인장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것은 <아름다운 세상>이 단지 진실을 은폐하는 자들에게 한 방을 먹이는 통쾌한 사이다 드라마가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사실 고구마니 사이다니 하며 단순화되어 표현되는 작금의 드라마들은 너무 현실을 단순화해서 담아내는 면이 있다. 즉 답답한 현실 상황을 드라마 속으로 슬쩍 가져와 비현실적이지만 그 순간만큼의 속 시원함을 안겨주는 사이다 판타지로 그려내는 것. 하지만 그런 판타지로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바뀐 듯한 느낌만 주어 현실에 대한 무감함만 커질 수도 있다.

 

<아름다운 세상>은 쉬운 사이다 판타지보다는 답답한 고구마 현실을 제대로 느껴보기를 요구한다. 무엇보다 어른들이 자신들의 행동에 따라 얼마나 아이들이 영향을 받고 커나가는지, 또 그렇게 큰 아이들이 사회에서 어떤 일에 닥쳤을 때 어떻게 그 일을 해결해나가는지에 대한 양상을 들여다보라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드라마의 주제의식은 통쾌한 결말이 아니라, 그 과정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에 담겨 있다.

 

힘겨워도 진실을 향해 한 걸음씩 나가는 강인하를 바라보며 그래도 어떤 희망을 갖게 만드는 딸 박수호의 긍정적인 시선과, 심지어 살인을 사주하고도 이를 은폐하려는 오진표와 서은주를 보며 점점 그들을 닮아가는 오준석의 점점 희망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선이 대비되는 건 그래서다.

 

하지만 그 답답한 사막을 걷다보면 결국 오아시스를 만날 거라고 드라마는 말한다. 진실을 향해 내딛는 그 걸음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래도 결국 우리는 진실이 의외로 가까이 있다는 걸 알게 될 거라고. 선인장 화병 속에서 선호의 사라졌던 휴대폰이 발견되는 것처럼, 아름다운 세상은 그냥 주어지는 사이다가 아니라 넘기기 힘든 고구마 현실을 꾸역꾸역 넘기고 나서야 비로소 만나게 되는 어떤 것이라고.(사진:JTBC)

이제 겨우 서사의 시작 알린 ‘마녀’, 시리즈를 기대해

박훈정 감독은 전작인 <브이아이피>가 직면했던 여혐 논란이 뼈아팠던 게 아니었을까. <마녀>는 마치 그 작품에 대한 감독의 항변처럼 느껴진다. 최근 들어 <악녀>나 <미옥> 같은 여성 슈퍼히어로의 등장이 새삼스러운 건 아니지만, <마녀>는 확실히 이들 작품과는 색다른 지대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제목만 보면 이 영화는 슈퍼히어로물과는 사뭇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지고, 실제로 영화 중반까지는 너무나 토속적인 정경이 반복된다. 친자매처럼 친한 친구가 있고, 몸이 아프지만 소를 키우는데 남다른 정성을 쏟는 목장주 아버지와 치매기가 조금씩 보이는 어머니가 등장하며, 어려운 가계를 돕기 위해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는 주인공 자윤(김다미)이 그렇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악녀> 같은 액션을 먼저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중반까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중반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자윤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각성하고, 등장한 닥터 백(조민수)이나 미스터 최(박희순) 그리고 귀공자(최우식)와 그 일당들이 살풍경한 살육을 시작하면서 영화는 중반까지는 사실상 이 독특한 슈퍼히어로의 탄생을 보여주기 위한 밑그림에 불과했다는 걸 드러낸다. 그저 치고 박는 수준의 액션이 아니라 날아다니는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봤던 슈퍼히어로의 탄생.

영화 <마녀>의 백미는 그래서 후반부 이 괴력을 갖게 된 아이들이 탄생한 비밀스런 조직에서 벌어지는 슈퍼히어로 액션이 차지한다. 마치 마블의 플래시처럼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신출귀몰하게 움직이고, 주먹 한 방에 벽이 뻥뻥 뚫려버리는 괴력이 압도적인 액션들이다. 실험에 의해 이런 초인들이 탄생했다는 점은 <엑스맨>이 떠오르지만, 인간의 뇌 사용량을 극대화해 초능력이 가능하다는 설정은 뤽 베송 감독의 <루시>가 떠오른다. 

하지만 흥미롭게 다가오는 건 <마녀>의 자윤이라는 슈퍼히어로가 가진 선과 악 그리고 남과 여 그 중간 지점에 놓여진 캐릭터의 색깔이다. 자윤은 자신을 거둬준 부모에게 살갑고 착하기 그지없는 전형적인 여고생 캐릭터로 등장하지만 후반부에 가면 그런 선과 악의 개념은 깨져버린다. 또 여고생으로 등장하긴 하지만, 이 캐릭터는 그렇다고 여성성을 전면에 내세우지도 않는다. 이를테면 <악녀>가 그토록 놀라운 액션을 보여주는 기반에는 ‘사랑’이라는 막연한 여성성이 깔려있었고, <미옥>이 드러낸 힘도 ‘모성’에 기반 했다는 걸 떠올려보면 <마녀>는 그런 지점 자체가 없다.

그래서 자윤은 애매모호한 경계에 선 슈퍼히어로의 느낌을 준다. 악당들을 물리치니 선한 존재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섬뜩함과 무자비함은 관객들조차 소름 돋게 만든다. 중요한 건 그 속내를 알 수 없고, 보여주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자윤이 싸우는 건 살아남기 위한 생존본능이지만, 거기에 달라붙는 ‘왜’라는 질문이 자꾸 만들어낸 선을 위해서인가 악을 위해서인가 하는 궁금증에는 답을 주지 않는다. 

<마녀>는 그래서 마치 마블의 슈퍼히어로물들이 시리즈를 구성하듯이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든다. 박훈정 감독이 아예 ‘Part1. The Subversion’이라고 부제를 달아놓은 건 이 영화가 꿈꾸는 연작에 대한 기대감을 담고 있다. 만일 자윤이라는 슈퍼히어로가 향후 ‘Part2’의 이야기로 이어진다면 우리만의 독특한 슈퍼히어로 무비의 역사가 시작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물론 연작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지는 영화들이 그러하듯, <마녀>는 아쉬운 지점들이 적지 않다. 특히 후반부의 액션이 폭발하기 전까지 전반부는 너무 설명적이라 다소 지루하다. 하지만 본격적인 액션이 시작되었고, 영화 말미에 다음 편에 대한 복선을 이미 깔아놓았던 터라 Part2에 대한 기대감은 크다. 선악과 남녀의 선을 뛰어넘은 독특한 슈퍼히어로 캐릭터의 탄생만으로도 반갑게 느껴지는 이유다.(사진:영화'마녀')

카멜레온 같은 그들, 연기변신의 끝은 어디?

연기자의 연기변신은 놀라울 것 없는 의무사항이다. 한 가지 작품만으로 기억에 남을 것이거나 배우가 아닌 스타만을 꿈꾸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 점에서 연기자라는 말에 제대로 걸맞는 배우들이 있다. ‘포도밭 그 사나이’의 순박한 시골청년에서, ‘왕과 나’의 내시,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 끔찍한 살인자로 변신을 거듭하고 있는 오만석, 늘 바른 이미지로만 보였지만 곽경택 감독의 ‘사랑’에서 소름끼치는 건달역으로 그리고 다시 ‘인순이는 예쁘다’에서 번듯한 기자로 변신한 김민준, 그리고 ‘얼렁뚱땅 흥신소’의 마음 따뜻한 건달역에서 ‘세븐데이즈’의 껄렁한 비리형사로 변신한 박희순이 그들이다.

광기 어린 눈빛과 순박함 사이, 오만석
오만석이 ‘포도밭 그 사나이’의 그 사나이 역할을 맡았다고 했을 때, 이미 그는 연기 변신의 또 한 발을 내딛는 셈이었다. 그는 일찍이 ‘왕의 남자’의 원작이었던 연극 ‘이’에서 왕의 남자인 공길 역으로 알려져 있었고, 가끔은 연산 역할을 할 정도로 변신의 귀재였다. 조승우의 광기 어린 연기로 소문났던 뮤지컬 ‘헤드윅’에서 조승우 대신 헤드윅 역할을 맡아서 그만의 색깔을 덧입혀 ‘조드윅’에 이어 ‘오드윅’을 완성하기도 했다. 그러니 ‘포도밭 그 사나이’에서의 시골청년 장택기는 그에게는 좀 심심한 역할이었다.

오만석의 연기 스펙트럼은 광기와 순박함을 오가는 그의 이미지에서 나온다. 그의 눈빛은 순박한 시골청년처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 강렬한 광기를 뿜어낸다. 그러니 순박한 청년과 내시로서의 광기를 보여줘야 하는 ‘왕과 나’의 김처선 역할은 정확히 그의 연기 스펙트럼과 맞아떨어진다. 이것은 최근 개봉한 영화 ‘우리동네’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가 맡은 경주는 살인자이면서도 어릴 적부터의 친구인 형사 재신(이선균)과 우정을 나누는 복합적인 성격의 인물이다. 이 극과 극을 오가는 눈빛은 그의 앞으로의 연기변신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반듯함 속에 숨겨진 막가는 열정, 김민준
곽경택 감독의 ‘사랑’을 다 보고서 엔딩 크레딧에 오르는 김민준이라는 이름을 본 많은 관객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김민준이 어디에 나왔다는 거야 하고 생각할 즈음, 영화 속 소름끼치도록 악독했던 치권이란 건달이 그였다는 걸 알고 진짜 소름이 돋던 기억이 있다. ‘외과의사 봉달희’의 이건욱이나, ‘썸데이’의 진표, ‘프라하의 연인’의 지영우 같은 댄디한 이미지를 가진 반듯함 속에 어디 그런 갈 데까지 가보는 막가는 열정이 숨겨져 있었는지 모두들 의아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찬찬히 떠올려보면 김민준은 늘 그렇게 반듯한 인물로만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다모’에서 그가 맡았던 장성백이란 캐릭터는 그 밑바닥에 잡초 같은 질깃질깃한 근성을 숨겨둔 인물이었고 ‘강력3반’의 김홍주는 기막히게 범죄의 냄새를 맡는 초보형사로 반듯함과는 역시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를 반듯하게 만든 것은 오히려 시청자들이나 관객들이었지 그 자신은 아니었다. 현실은 그를 다시 ‘인순이는 예쁘다’의 유상우로 앉혔지만 ‘사랑’에서 보여준 풀어진 눈빛의 김민준은 반듯함 하나만으로는 아까운 배우라는 걸 알게 해주었다.

타고난 복합 캐릭터의 연기자, 박희순
이윤기 감독의 ‘러브 토크’에서 박희순은 상처 입은 영혼의 소유자, 지석 역을 맡아 감정이 절제된 연기를 선보였다. 그의 우수에 찬 듯한 타고난 눈빛은 그다지 연기를 하지 않아도 지석 그 자체가 될만했다. 하지만 그 뿐, 그것은 진짜 박희순의 진가가 아니었다. 그는 사실 초창기부터 조폭 같은 악역으로 주로 등장했다. 특히 영화 ‘가족’에서 보여준 연기는 건달의 이미지를 그에게 깊이 각인시켰다. 그의 진가는 이 두 이질적인 요소, 즉 악역과 우수의 눈빛이 만났던 ‘얼렁뚱땅 흥신소’의 백민철에서 폭발적으로 드러났다. 흥신소 사람들과 대적관계에 서 있는 건달이지만 희경(예지원)을 사랑하고 치매를 앓는 노모를 가진 아픔을 동시에 보여주는 백민철이란 캐릭터는 그에게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100% 드러내게 해주었다.

그가 가끔씩 보여주는 우수에 찬 눈빛은 건달 특유의 건들거림과 부조화를 이뤄야 하지만 박희순은 이것을 하나로 잘 버무려 미워할 수 없는 건달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얼렁뚱땅 흥신소’의 백민철이 따뜻한 건달이라면, ‘세븐데이즈’의 김성열은 따뜻한 비리경찰인 식이다. 그 복합적인 캐릭터를 소화해내는 그 능력은 다름 아닌 오랜 연극과 뮤지컬 공연의 공력이다. 그는 극단 목화 출신으로 연출자 오태석 밑에서 바닥부터 기며 연극과 뮤지컬에서 잔뼈가 굵어온 연기자다. 뮤지컬 ‘그리스’나 ‘록키 호러 픽쳐쇼’는 그의 가능성을 입증시킨 작품들이다. 불혹을 향해 달려가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때론 소년 같은 느낌을 주는 이미지는 앞으로 더 복잡한 성격의 연기가 가능하리란 것을 예측하게 한다.

오만석, 김민준, 박희순의 연기변신에 대한 찬사는 이 시대 대중들이 연기자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지를 명확히 말해준다. 대중들은 카멜레온처럼 끝없는 연기변신을 시도하는 진정한 연기자를 원하지, 한 가지 굳어진 이미지로 스타가 되려는 연예인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현대인들의 복잡한 삶 속에서 발생하는 한 가지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감정들은, 이들의 다중적인 캐릭터에 공감하게 만든다. 어느 모로 보나 연기자들의 연기변신은 시대적인 요청이 되고 있는 셈이다. 영화든, 드라마든 혹은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다양한 연기의 세계를 종횡무진하는 그들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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