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틱>, 시한부에 늪에 빠지지 않으려면


JTBC 금토드라마 <판타스틱>에서 이소혜(김현주)는 말기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인물이다. 시한부라는 설정은 우리에게 두 가지 선입견을 불러일으킨다. 그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시한부라는 사실을 숨긴 채 상대방을 밀어내는 주인공의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버킷리스트를 적고 실현해가는 이야기다.

 

'판타스틱(사진출처:JTBC)'

사실 무수히 많은 시한부 설정의 이야기들을 봐온 시청자들에게 이처럼 두 가지의 선입견이 먼저 떠오른다는 건 이런 이야기가 너무나 많이 반복됐다는 걸 말해준다. 물론 이 두 이야기 설정에 극성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반복된 이야기는 식상하다. 제 아무리 좋은 음식도 계속 내놓으면 물리기 마련이다.

 

<판타스틱>이 초반 일찌감치 이소혜의 시한부 판정을 드러내면서도 시청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미디에 가까운 긍정적이고 유쾌한 분위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간간히 이소혜에게 엄습하는 암의 징후들이 불안감을 형성했지만 예전에 좋아했지만 헤어졌다 다시 만나게 된 류해성(주상욱)과의 밀고 당기는 관계는 웃음을 주기에 충분했고, 오랜만에 다시 결합한 학창시절의 3인방 이야기는 유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소혜에게 급성 폐렴이 오고 혹 같은 걸로 추정되는 것이 발견됐다고 하자 그녀는 돌연 류해성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그에게 자신이 홍준기(김태훈)와 사귀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선을 긋는다. 그러면서 상처받은 그가 영 마음에 걸려 홀로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건 전형적인 시한부 설정의 멜로 구도다. 사실 요즘의 시청자들은 이렇게 가슴 아파하고 숨기고 눈물 흘리는 시한부 설정의 고구마 멜로는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 어찌 보면 이야기의 위기 상황에서 <판타스틱>을 구원해낸 건 다름 아닌 주상욱이다. 우주대스타 류해성을 연기하는 그는 이소혜의 절친인 미선(김재화)네 부부를 찾아와 상심을 술주정으로 풀어낸다. 그의 조금은 과장된 연기는 침잠하던 드라마를 그나마 다시 발랄하게 만들어주는 힘을 만들었다.

 

물론 이야기의 구성상 이소혜가 류해성에게 자신의 시한부 사실을 알리게 되는 계기는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처럼 너무 질질 끌면서 숨기고 아파하고 상대방도 힘들게 만드는 전개는 시청자들이 원하는 게 아니다. 차라리 빨리 모든 걸 드러내고 힘겨워도 유쾌해질 수 있는 이야기들을 펼쳐나가야 훨씬 흥미로워질 수 있다.

 

주상욱의 존재감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만일 그런 캐릭터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를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만일 주상욱이 과장된 연기로 만들어낸 류해성이란 캐릭터가 없었다면 <판타스틱>은 그저 그런 드라마가 됐을 가능성이 높다. 시한부 멜로에 시댁에 구박받는 며느리의 복수극 같은 이야기의 반복.

 

하지만 우주대스타 류해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시한부 멜로가 어떤 양상으로 달리 보일지 기대하게 되고 또 이소혜와 그녀의 친구인 백설(박시연) 그리고 그 자신도 얽혀 있는 절대 갑질녀 최진숙(김정난)에게 어떻게 판타스틱한 응징을 할 것인가가 기대된다. <판타스틱>이 시한부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면 긍정적인 우주대스타 주상욱이 절실하다.

<국제시장><가족끼리 왜 이래>처럼 아버지를 다뤘어도

 

<국제시장>에 대한 관객들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뉜다. 한 개인으로서의 아버지가 살아낸 한 시대를 휴머니즘에 입각해 그려냈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 산업화의 역군으로서의 아버지의 희생만 강조한 채 그 이면에 놓인 어두운 시대의 질곡들은 말끔히 세탁되어 있어 지나친 편향으로 보기 힘들다는 평가가 나온다.

 

사진출처: 영화 <국제시장>과 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

감독은 현대사를 다루면서 선택과 집중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선택과 집중에는 배제의 의미도 들어있다. 모든 것을 흑백논리로 나눌 수는 없는 일이다. 즉 백만을 선택해서 보여주면 흑이 배제된다. 감독은 지나친 이념화를 우려해 흑을 배제한 채 백만을 선택해 보여줬다고 말하는 셈인데, 이것 자체가 흑백 논리를 전제한 발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논란은 바로 이 지점에서 생겨난다.

 

어쨌든 이념적인 것을 뚝 떼놓고 바라보면 <국제시장>이 다루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우리네 아버지들이다. 가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포기하고 희생하는 아버지. 그런데 덕수(황정민)라는 인물이 격동의 세월을 가장으로서 버텨낸 삶이 이해는 되지만 깊은 공감으로까지 이어지지 않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 아버지가 현재를 이야기하기보다는 과거에 머무르며 그 과거만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들을 위해 모든 걸 희생했다고 하면서도 이 덕수라는 아버지는 자신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자식들의 삶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의 시계는 50년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와 동생을 잃었던 흥남부두에 멈춰 있다. 덕수라는 아버지의 입장에만 시선이 머물러 있기 때문에 가족들은 철없는 인물들정도로 피상적으로 그려진다. 그 중에는 아마도 4.195.16을 겪은 자식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80년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겪은 이도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90년대 IMF를 통해 깨져버린 개발시대의 환영이 경제적 양극화로 이어지는 걸 겪었을 수도...

 

그들은 일방적인 아버지의 시선에 의해 대상화되어 있다. 좀 더 양쪽의 입장을 공평하게 그려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아버지의 입장만큼 자식들의 입장도 똑같이 그려냈다면 <국제시장>은 감독이 그토록 얘기하는 진정한 세대 간 소통의 물꼬가 됐을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입장만을 열거한 후, ‘우리 덕에 잘 사는 줄 알라는 식의 이야기는 소통이라기보다는 지나치게 일방적인 느낌마저 준다.

 

물론 영화와 드라마는 장르적인 차이가 크지만 최근 무려 40% 시청률을 돌파하며 화제가 되고 있는 KBS 주말극 <가족끼리 왜 이래> 역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유사한 느낌을 준다. 아무래도 이렇게 아버지에 대한 재조명이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뤄지고 있는 건 그만큼 우리네 현실 속에서 아버지들의 입지와 위치가 좁아지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하지만 같은 아버지를 다뤄도 <가족끼리 왜 이래>의 차순봉(유동근)은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한 평생 두부를 만들어 자식들을 키운 아버지 차순봉이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자식들과 보내는 마지막 시간들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저 <국제시장>의 덕수가 보여주는 그런 일방통행식의 이야기를 전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자식들에게 불효 소송을 하는 시퀀스가 있지만 거기에는 어디까지나 자식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어딘지 가족에서 엇나가는 자식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제 자리를 잡기를 바라는 것.

 

차순봉의 버킷리스트에는 빼곡하게 해야 할 일들이 적혀 있지만 거의 대부분이 자식들의 앞날을 위한 것들이다. 딸 차강심에게 좋은 짝을 만나게 해주기 위해 선을 보게 하거나, 형제 남매들이 좀 더 돈독하게 지낼 수 있게 가족 댄스파티를 하는 것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차순봉의 버킷리스트에는 자신이 아닌 자식의 그리고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가 담겨져 있다.

 

이 드라마가 다루는 자식들 역시 마찬가지다. 차순봉의 시한부 인생을 알게 된 차감심과 차강재는 비로소 그 죽음 앞에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 새삼 눈물을 흘린다. 아버지를 위해 뭐든 하기 위해 자식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장면은 그래서 아마도 이 시대의 부모세대들에게는 하나의 판타지처럼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판타지에도 저 <국제시장>이 그려내듯 일방적인 느낌은 전혀 없다. 아버지 세대와 자식 세대 간의 자칫 단절될 수 있는 삶이 아버지의 죽음이라는(어쩌면 누구나 맞닥뜨릴) 절대적 사안 앞에서 극적인 소통을 이루는 장면들을 이 드라마는 보여준다.

 

물론 <가족끼리 왜 이래>가 대단한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드라마라고 말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가족드라마가 가진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 간의 양 방향적 소통을 이뤄가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소통을 얘기하면서 일방으로 던지는 방식을 보여주는 <국제시장>과는 사뭇 다른 느낌과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결국 가족의 힘이란 앞으로 나가는데 있다. 물론 그 나가기 위해 이전의 삶들이 중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조명하는 것이 나쁠 건 없다. 하지만 거기에만 머무른다면 그 가족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정체되거나 심지어 퇴행될 수밖에 없다. 결국 과거와 현재의 세대가 함께 나가는 길을 모색하는 것. 그것이 가족을 다루는 올바른 방식이 아닐까.

 

<가족끼리 왜이래>, 뻔해 보여도 눈을 뗄 수 없는 까닭

 

<가족끼리 왜이래>는 전형적인 KBS표 주말드라마다. 여전히 대가족이 등장하고 자식들은 저마다 부모 맘 같지 않아 속을 썩인다. 가족 갈등은 드라마의 메인 테마이고 거기에 신데렐라 상황과 결혼 문제도 빠지지 않는다. 이 정도는 KBS 주말드라마의 공식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무수히 많이 봐왔던 가족드라마와 <가족끼리 왜이래>는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가족끼리 왜 이래(사진출처:KBS)'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이 드라마는 한 번 보면 눈을 떼기가 어렵다. 거기에는 지극히 보편적인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불효자식들부모 맘 몰라주는행동들이 마음을 서늘하게 한다.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들여다보지도 않고, 또 언제나 늘 그렇듯이 도움을 주던 부모라는 존재를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이라면 이 뻔해 보이는 이야기가 가진 울림이 의외로 커질 수 있다.

 

주말 가족드라마 같은 장편 드라마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드라마의 운용이다. 어떤 갈등을 전면에 내세우고, 또 그 갈등이 향후에 가장 큰 이야기 줄거리와 어떻게 연결되어 더 큰 폭발력을 만들어내는가 같은 효과는 드라마 운용의 능력이 좌우하기 마련이다. 또 드라마가 전체적으로 너무 무겁거나 우울하게만 흘러가도 문제이고, 그렇다고 너무 가볍기만 한 것도 피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가족끼리 왜이래>는 드라마 운용 면에서 작가의 노련함을 느낄 수 있는 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특히 드라마의 분위기를 적절히 유지해내는 균형 감각이 탁월하다. 아버지 차순봉(유동근)이 자식들에게 뭐든 오냐오냐 해주며 자신은 정작 바보처럼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던 초반부만 해도 이 드라마가 지나치게 아버지 신파로 흘러가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만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차순봉이 갑자기 자식들을 상대로 불효자식 소송을 단행하면서 드라마는 침체된 분위기를 다시 띄웠다. 그래서 그 기조에 이 차순봉이라는 아버지의 가슴 아픈 부성애를 바탕에 깔아놓고는 그 위는 코믹한 전개로 흘러가게 하는데 성공했다. 차강심(김현주)과 문태주(김상경)의 밀고 당기는 관계는 로맨틱 코미디의 설정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드라마에 전형적인 혼사장애 문제를 심어 넣어 유쾌한 활력을 불어넣는다. 김상경이 왜 문태주라는 인물을 연기하면서 이토록 과장된 연기변신을 했는가가 이해되는 대목이다.

 

이 가볍게 터치해나가는 드라마의 분위기는 결국 차순봉의 시한부 인생이 밝혀지는 그 순간의 폭발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아무 것도 모르고 웃고 즐기던 그 분위기가 사실은 아버지 차순봉의 희생과 배려 안에서 가능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자식들이 어떤 반응을 보여줄 것인가는 그래서 이 드라마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한다.

 

KBS 주말드라마의 성격상 전통적인 시청층인 부모 세대들이 이 드라마의 주 시청층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 차순봉으로 대변되는 아버지의 입장은 고스란히 부모 세대의 마음을 울린다. 자식이 유명한 의사지만 정작 그 자식이 아버지의 병조차 모르고 있다는 아이러니는 이 시대 모든 잠재적 불효자들의 부채감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불효자들의 회한은 의외로 거대한 힘을 발휘한다.

 

죽음이란 너무나 보편적이어서 어찌 보면 뻔해 보이기까지 하는 소재가 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뻔하게 여겨온 우리의 잘못이 더 클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신드롬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그 죽음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과거보다 훨씬 더 깊어졌다. 그만큼 우리가 주변에서 죽음을 더 많이 접하게 되면서 생겨난 자각일 것이다. <가족끼리 왜 이래>의 차순봉이란 아버지가 매일 적어가는 버킷 리스트는 그래서 너무 뻔하게 여겨지면서도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남격> 폐지 논의, 과연 소재고갈 탓일까

 

<남자의 자격(이하 남격)>이 4년여 만에 폐지 논의에 들어갔다고 한다. 전투기 조종에서부터 마라톤, 그리고 하모니 같은 초창기 <남격>이 보여주었던 참신한 기획들과 호평을 떠올려보면 어쩌다 이렇게 초라한 처지에 몰리게 되었는가가 의아할 정도다. 항간에는 소재 고갈과 시청률 저조가 그 원인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폐지 논의의 원인일까.

 

'남자의 자격'(사진출처:KBS)

지난 주 있었던 윤형빈 혼수 논란은 어찌 보면 현재 <남격>이 이런 상황에 몰리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실 멤버 결혼을 축하해주기 위해 동료들이 선물을 하는 것은 그다지 잘못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이러한 사적인 일이 공적인 방송을 통해 나가게 될 때는 거기에 합당한 이유와 근거가 있어야 했을 것이다. <무한도전>이 하하의 결혼에 즈음해 했던 축의금 콘셉트의 특집에서 막판에 기부라는 선택을 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한 공적 기능이 없다면 왜 시청자들이 그들만의 사적인 일들을 굳이 봐야한단 말인가. 게다가 혼수 물품으로 몇 백만 원 운운하는 것은 예능의 주요 시청자라고 할 수 있는 서민들의 감정을 건드린 것과 다르지 않다. 윤형빈 혼수 논란은 그래서 그것을 방송 소재로 하겠다고 결정한 제작진의 실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남격>이 대중들과의 공감대에서 실패하고 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남격>이 초창기 그토록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이 중년의 아저씨들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안되는 몸이지만 그래도 젊은이들의 춤을 배우려 했고, 술 담배와 스트레스에 찌들어 관리하지 못했던 몸을 관리하려 했으며, 젊은 시절 갖고 있었으나 어느새 현실 때문에 지워버린 꿈에 다시 도전해보기도 했다. 그들의 도전은 중년 시청자들은 물론이고 젊은 세대들에게도 공감대를 주었다. 심지어 귀여운 아저씨들의 이미지까지 생겼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저씨 예능의 가장 큰 도전은 그 아저씨 이미지에 대해 대중들이 갖기 마련인 호불호에서 생겨난다. 즉 아저씨가 진짜 아저씨처럼 보일 때, 매력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초창기 <남격>은 무언가 아저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새로운 도전들을 통해 이 위험성을 상쇄시켰지만, 차츰 언젠가부터 이 도전의 이미지가 사라지면서 아저씨는 부정적인 이미지의 아저씨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남격> 합창단을 무려 3년에 걸쳐 했던 것은 이런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첫 번째 합창단 이야기에 물론 엄청난 관심을 받았지만 그것을 매년 반복하는 것은 어딘지 <남격>의 매너리즘처럼 보였다. ‘죽기 전에 해야 할 101가지’라는 <남격>의 부제를 떠올려 보면 합창단 콘셉트가 이렇게 반복할 만큼 어울리는 소재인가 의구심이 생겨난다. 결국 ‘죽기 전에 해야 할’이라는 절박감을 똑같은 아이템을 반복함으로써 날려버린 결과가 생긴 셈이다.

 

무언가 굵직한 아이템들이 시도되지 않고 그저 소소한 아이템에 머물게 될 때 <남격>의 아저씨들은 그래도 여전히 아이 같고 순수하며 열정만은 청춘인 그 매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이렇게 없냐’는 네티즌의 비판적인 시선은 그래서 생겨날 수밖에 없다. 나이 들어가는 것을 하나의 배수진처럼 치고 마치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실행하는 비장함이 살아있을 때 <남격>은 제 빛을 발할 수 있다.

 

<남격>의 폐지 논의는 그간의 흐름들을 볼 때 당연하다고 여겨지지만 그래도 남는 아쉬움은 있다. 즉 <남격>이 포착해 놓은 중년 아저씨들이라는 훌륭한 세대적 포인트가 못내 아깝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혹시 진짜 초심으로 돌아가 자격 있는 아저씨들의 때론 땀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고 때론 여전히 귀엽게까지 다가오는 그 매력을 볼 수 있는 <남격>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일까.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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