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호, 그가 있어 가능했던 '변호인' 천 만

 

<변호인>이 천 만 관객을 넘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재로 했다는 것 때문에 개봉 전부터 근거 없는 비아냥과 평점 테러까지 받았던 영화. 그런 영화가 천 만 관객을 넘겼다는 것은 반전 중의 반전이다.

 

사진출처:영화'변호인'

무수한 분석이 나온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실제 사건을 소재로 했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성향을 보이기보다는 보편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이념과 상관없이 누구나 볼 수 있는 영화로 만들었다는 점,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으로 내 편 없는 세상에 기꺼이 내 편이 되어준 서민들의 대변인을 그렸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송강호, 김영애, 곽도원 심지어 임시완까지 보여준 놀라운 호연까지.

 

하지만 이 모든 분석들 중에서도 단연 설득력을 갖는 건 송강호라는 배우다. 그가 연기 잘한다는 것은 이미 공인된 사실이지만 이번 <변호인>을 통해 발견한 것은 그가 연기력 그 이상을 가진 배우라는 점이었다.

 

그는 늘 서민들의 옆 자리에 서 있던, 마치 피곤한 일상에 영화라는 잠시 간의 여행을 떠난 관객의 믿음직한 친구이자 동료이자 가이드 같은 배우였다. <넘버3>미친 존재감이라는 서민들의 가치를 끄집어냈고, 좋은 놈도 나쁜 놈도 아닌 (소외된 서민들로서는 이상한 놈이 될 수밖에 없는 세상에) 이상한 놈으로서 어딘지 악당 같은 삐딱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이 가는 캐릭터를 만들어냈던 배우.

 

그가 <변호인>에서 연기한 송우석이라는 캐릭터에서는 그래서 영화 <밀양>의 종찬처럼 비극에 빠진 여주인공의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비춰주던 ‘secret sunshine’ 같은 존재가 보이고, <설국열차>의 남궁민수처럼 잘못된 시스템의 옆구리에 폭탄을 터트림으로써 관성화 된 정신을 깨우는 존재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송강호의 가장 큰 장점은 그 거창할 수 있는 일들을 지극히 인간적인 일로 바꿔놓는다는 점이다. <변호인>의 송우석이 만약 시대적 소명을 전면에 내세우는 인물이었다면 아마도 천만 관객의 발길이 영화관을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게 될 그런 보편적인 정서를, 내세우지 않고 자연스럽게 보여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것은 지금껏 송강호가 해왔던 특별한 연기의 세계다. 똑같은 역할이라도 그가 하면 다르게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그는 <우아한 세계>에서 조폭의 상스러움과 가장의 성스러움을 동시에 보여주었고, <괴물>에서 바보스러움과 가슴 찡함을 동시에 선사했으며, <박쥐>에서도 기괴함에 해학까지 보여주기도 했다.

 

즉 그는 역할의 균형을 잘 맞추는 배우라는 점이다. 그는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과장된 캐릭터라도 그 속에서 정 반대의 모습을 끄집어낼 줄 안다. 이것은 마치 관객이 그런 거짓말이 어딨어?’하고 물을 때 화답하듯 슬쩍 속내를 꺼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당신과 똑같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속물적인 속내를 슬쩍 끄집어냄으로써 관객을 안심시키는 그런 배우.

 

흥미로운 건 올 한 해 단 6개월 만에 무려 3천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이 괴물 같은 배우가 서 있는 위치다. 그는 이상하게도 주연으로 서 있으면서도 늘 우리 주변에 있는 인물로 각인되어 있다. 꼭대기가 아니라 늘 아래 서 있고,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 머물러 있는, 그렇지만 그 곳에서 늘 따뜻한 볕을 보내주는 ‘secret sunshine’ 같은 존재. 이것은 송강호의 진정한 힘이면서, <변호인>이라는 영화가 신드롬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이 시대의 서민들이 바라는 인물상인지도 모른다.

국밥 한 그릇이 전하는 진심과 거짓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재로 한 <변호인>에서 부산의 돼지국밥집은 중요한 공간이다. 그 곳에서 한때 가난해 막노동판에서 일했던 송우석(송강호)은 밥값을 내지 않고 도망친다. 그 돈으로 헌책방에 맡겨둔 자신의 고시 서적을 되찾은 그는 열심히 공부해 결국 고시에 합격한다. 판사로 활동하다 접고 돈이나 벌자며 변호사 사무실을 열어 돈을 좀 만지게 되었을 때 그는 가족과 함께 그 국밥집을 찾아가 과거 그 날의 일을 사죄하며 빚을 갚으려 한다. 그러자 국밥집 아주머니 순애(김영애)는 극구 마다하며 그런 빚은 다리와 얼굴로 갚는 것이라 말한다.

 

사진출처:영화 <변호인>

그저 밥 먹고 술 마시는 식당의 아주머니가 아니라 지친 이들을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의 정으로 풀어내주는 순애는 만인의 어머니 같은 존재처럼 보인다. 송우석의 성공을 마치 자기 자식의 성공처럼 축하해주고 그런 순애를 송우석 역시 한번 안아 봐도 되겠습니까?”하고 물을 정도로 어머니처럼 여긴다. <변호인>에서 국밥집은 그래서 사람과 사람이 훈훈하게 서로의 마음을 껴안는 공간으로 상징화된다.

 

그 국밥집 아들인 진우(임시완)는 그래서 송우석에게는 그저 국밥집 아들이 아니라 마치 친조카 같은 존재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강제 연행되어 무려 두 달이나 연락이 끊긴 상황에서 고문을 당하고 그 고통에 못 이겨 거짓진술을 했다는 건 그래서 송우석이 그의 변론을 맡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거창한 정치적 이유가 아닌 지극히 가족적이고 인간적인 이유가 송우석의 변화를 대중들이 공감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 가족적이고 인간적인 관계를 만들어낸 순애의 돼지국밥집은 중요하다. 여기서 국밥집은 이념이나 위치와 상관없이 인간과 인간이 연결되는 진심을 상징한다.

 

국밥집이라는 서민적인 공간은 물론 이처럼 훈훈한 정을 떠올리게 만들지만 때로는 그것이 거짓으로 판명 나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선거철 깜짝 시장을 방문해 평소에는 잘 먹을 것 같지도 않는 국밥을 훌훌 먹는 장면을 애써 연출하는 후보자들이 그렇다. 이런 경우 국밥집은 서민 코스프레를 하는 공간으로서 활용된다. 우리는 실제로 이것을 <MB의 추억>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 본 적이 있다. 과거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선거에 즈음해 만들었던 광고에 등장했던 국밥집 풍경. 욕쟁이 할머니가 국밥을 퍼주며 경제만은 살리라고 일갈했던 그 공간. 하지만 <MB의 추억>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는 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국밥을 떠먹는 후보자의 모습이 가감 없이 보여지기도 했다. 물론 거기 등장한 욕쟁이 할머니 역시 실제 인물이 아닌 연기자라는 게 드러나 마음 한 구석을 씁쓸하게 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광고는 연출된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 짧은 시간 속에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시 이 후보자의 연출을 뭐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그가 광고에서 메시지를 던졌던 대로 서민 경제를 살렸는가 하는 점이 중요할 게다. 그것이 후보 광고에 담겨진 국밥 한 그릇의 진심과 거짓을 설명해주는 것이 될 테니 말이다. MB의 국밥이 진심이었는지 거짓이었는지는 대중들이 판단할 문제다. 물론 그 답이 대체로 일치할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MB의 추억>이 나왔을 때 대중들은 오랜만에 웃음을 터뜨렸다. 다큐멘터리 영화라고 했지만 그 영화는 거의 코미디에 가까웠다. 당대 현실이 얼마나 코믹했던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변호인>이 나왔을 때 대중들은 오랜만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라고 했지만 그의 삶은 거의 영화처럼 극적이었다. 당대 현실이 얼마나 한 삶을 첨예하게 만들었는가를 알 수 있는 일이다. 거기 두 개의 국밥이 등장한다. 진심이 듬뿍 담겨진 국밥과 거짓으로 채워진 국밥. 어떤 국밥이 우리의 가슴을 훈훈하게 만드는가. 또 어떤 국밥이 먹고 싶은가. 현실의 허기를 채워줄 따뜻한 국밥 같던 그 분이 너무나 그립다.

<변호인>이 끄집어낸 30년 세월 무색한 색깔론

 

도시가 울긋불긋한 색으로 물들었던 크리스마스에 <변호인>3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신드롬을 만들었다. 들뜨기 마련인 크리스마스지만 이처럼 진지한 영화에 관객들이 몰려들었다는 건 지금의 대중들에게 크리스마스보다 더 갈급한 정서가 있다는 걸 말해준다. 빨갱이라는 말로 붉은 색에 대한 심리적인 벽이 세워져 있던 시절에는 산타클로스의 붉은 색 옷마저 심지어 불온한 어떤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리고 30여년이 지난 현재는 어떨까. ‘붉은 악마가 거리를 활보하는 시기를 거치기도 했지만 과연 이 색깔론의 트라우마는 극복된 것일까.

 

사진출처:영화 <변호인>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같은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빨갱이로 지목되어 무단 감금, 고문을 당하던 시절이 있었다. 과거를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빨갱이라는 말은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게까지 느껴질 지도 모른다. 사람에 색깔을 덧붙여 특정 세력으로 지칭하는 것이 어찌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을까. 파랭이. 노랭이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 색깔론은 분단 이후 우리네 사회에 끊임없이 등장하며 대중들의 판단을 흐트러뜨리는 괴물로 자리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심지어 2013년 현재까지도 그러하다. 무언가 정치적 입장이 다른 이들을 무조건 종북으로 몰아세우는 태도는 빨갱이라는 괴물을 또 다시 소환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변호인>에 대한 남다른 대중들의 열광은 이 지긋지긋한 색깔론에 대해 대중들이 얼마나 염증을 갖고 있는가를 말해준다.

 

<변호인>을 이야기하면서 가장 먼저 거론되는 건 역시 그 주인공인 송우석(송강호)이라는 인물이다. 그가 바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델로 한 인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 자체가 사건보다 인물의 변화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부림사건(부산의 학림사건)’이 이 영화의 진짜 소재지만 <변호인>은 그 사건을 정공법으로 다루기 전에 우선 송우석이라는 속물 변호사가 어떻게 인권 변호사로 거듭나게 되는가 하는 그 과정에 더 집중한다.

 

그 과정에서 국밥집 아주머니인 순애(김영애)와 이 사건에 피해자가 된 그녀의 아들인 진우(임시완)가 소개되고 송우석은 사건을 맡기 전부터 이들과 가족 같은 유대관계를 맺는다. 이 부분은 이 영화가 단순히 사건의 재현에 머물지 않게 만든 중요한 성과로 보인다. 송우석은 정의감에 불타서가 아니라 자신이 조카처럼 생각하는 젊은이가 부당하게 고문을 당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에 인간적으로 분기하는 것이다. 정치적 사안들에 불감해진 대중들에게는 송우석의 지극히 인간적인 변화과정은(정치적인 선택이 아닌) 그래서 설득력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인물에서 잠시 시선을 거둬 사건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결국은 빨갱이 논란으로 귀결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영화 속에서 송우석 변호사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실제 에피소드이기도 한, E.H. 카가 소련의 빨갱이가 아니라 영국의 외교관이었다는 사실을 문서로 증명해낸다. 영국 측에서 보내온 서한에는 E.H. 카가 대단히 저명한 역사학자이고 그의 책이 더 많은 한국인들에게 읽히기를 바란다는 이야기까지 들어 있었다.

 

게다가 당시 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어느 대학에서나 사서 읽을 수 있던 책이었다. 송우석 변호사는 따라서 이 책이 버젓이 비치되어 있는 서울대를 나온 검사나 판사를 지목하며 당신네들의 학교는 그러면 빨갱이 학교라며 질타한다. 또 알리와 포먼이 경기할 때 김일성이 알리를 응원했다고 해서 피고인이 알리를 응원하면 이적행위냐고 일갈한다. 다소 논리가 우습게까지 여겨지지만 이런 실제 에피소드들을 영화화한 장면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것은 당시가 얼마나 비상식적이었는가다. 심지어 검사가 이에 대해 법정에서 김일성을 고무 찬양하는 행위를 삼가 달라고 말하는 대목은 그래서 실소마저 자아내게 만든다.

 

빨갱이를 두둔하는 것 역시 빨갱이라는 무서운 논리는 그래서 대중들이 비상식적인 일들을 목도하고도 선뜻 나서지 못하게 되는 기제로 작용했다. 송우석 변호사의 용기는 그래서 이러한 암묵적인 억압을 넘어서기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거창한 정치적인 견해나 입장이 아니라 존엄성을 인정받아야 할 인간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시선과 고통 받는 그 누군가가 타자가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이다.

 

빨갱이라는 우리식의 주홍글씨는 지금도 여전히 당대를 경험한 이들의 심리적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하지만 송우석이라는 변호사가 주저하다가도 결국은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하고 말하며 변호함으로써 그 트라우마를 이겨냈던 것처럼, 이 영화는 송우석의 변화를 통해 작금의 대중들 속에 남겨진 상식에 대한 지극히 당연한 갈증과 몰상식에 대한 분노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는 지점에서 법정에 선 송우석 뒤에 끝없이 호명되는 그의 변호인들의 대열에 대중들을 함께 서게 만든다. 빨갱이로 대변되는 국가의 억압은 여전히 유효한가.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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