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 없어도 더 쫄깃한 '응답1994'의 멜로

 

멜로는 신데렐라가 있어야 된다? 적어도 <응답하라 1994>에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다. <상속자들> 같은 드라마가 초거대 재벌가들 사이에 들어간 신데렐라 이야기로 너무 뻔하다는 비판을 받는 반면, <응답하라 1994>는 신데렐라 없고 심지어 촌스럽게까지 보이는 멜로만으로도 오히려 시청자들의 호평을 이끌어내고 있다.

 

'응답하라1994(사진출처:tvN)'

과거 <시크릿 가든>의 현빈과 하지원이 그랬고, <최고의 사랑>의 차승원과 공효진이 그랬듯이 잘된 멜로의 연기자들이 주목받는 건 당연한 일. <응답하라 1994>의 멜로는 정우라는 배우에 대한 신드롬을 만들고 있고 또한 늘 연기력 논란에 시달리던 고아라까지 매력적인 연기자로 재탄생시켰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이처럼 촌스런 멜로의 주인공들이 이토록 주목받게 된 것은.

 

<응답하라 1994>는 <응답하라 1997>이 그랬듯이 현재의 여주인공이 과거 1994년의 어떤 인물과 결혼을 했는가를 찾는 다소 단순한 멜로를 그린다. 그런데 이 단순해 보이는 멜로가 의외로 힘을 발휘한다. 누가 누구와 만났고 어떤 일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어떻게 관계가 발전됐는가 하는 점은 마치 첫사랑의 추억담처럼 우리를 아련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친오빠처럼 다가와 점점 가슴 뛰게 만드는 오빠로 느껴지게 되는 쓰레기 정우나, 그저 하숙집을 들락거리다 점점 가까워지게 되는 칠봉이 유연석은 그 설정 자체가 신데렐라 멜로와는 다른 <응답하라 1994>의 특별한 멜로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은 연세대라는 괜찮은 학벌의 소유자에다 직업적으로도 향후 의사가 될 의대생이거나 프로야구의 에이스가 될 야구선수다.

 

이것은 나정이(고아라)네 하숙집에 들어와 그녀와 장차 결혼할 지도 모를 다른 후보군들도 마찬가지다. 해태(손호준)는 순천시 버스회사의 막내아들이고, 빙그래(바로)의 부모는 충북 최대 규모의 양계장을 운영하며, 삼천포(김성균)는 한번 나가면 기름 값 1500은 드는 배를 가진 집의 아들이다. 물론 이들은 초재벌도 아니고, 드라마는 오히려 이 ‘잘사는 촌놈들’이라는 설정을 신데렐라 이야기로 활용하려 들지도 않는다. 유머 코드라면 모를까.

 

이들 촌놈들이 상경해 벌이는 멜로는 특별할 것 없는 당대 대학생들의 그것이다. MT를 가고 미팅을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팬클럽 활동을 하며 하숙방에서 술내기 게임을 하는 식이다. 그러면서 조금씩 마음이 움직이게 되는 그들이 보여주는 멜로란 오지 않는 삐삐를 밤새워 기다리거나 게임을 빙자해 뽀뽀를 하거나 혹은 아플 때 꼭 껴안아주는 정도가 대부분이다.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에 등장하는 그 흔한 결혼 반대하는 부모들도 보이지 않고 백화점을 통째로 쇼핑하듯 과시하는 남자의 모습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답하라 1994>의 멜로가 그 어떤 신데렐라 스토리보다 쫄깃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멜로 속에 존재하는 평등한 시선과 특유의 공감대 덕분이다. 이 드라마에는 1994년의 공기가 그대로 느껴진다. 어딘지 촌스럽고 능숙하지 못한 인물들의 행동들이 오히려 멜로를 더 아련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나정이를 좋아하면서도 표현은 친오빠처럼 무뚝뚝하게 던지는 쓰레기가 그렇고, 또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애써 속내를 감추려는 칠봉이가 그렇다. 해태와 조윤진(도희)의 관계를 보라. 그들은 대부분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면서 가까워진다.

 

<응답하라 1994>가 신데렐라 이야기 없이도 더 아련한 멜로를 그려낼 수 있는 것은 1994년이라는 과거의 한 지점이 가진 힘 때문이다. 현재가 아닌 과거, 그것도 첫 사랑의 추억이 있는 그 청순의 한 기억이란 현실적인 것과 일정부분 거리가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첫 사랑의 설렘에 집안 형편이나 학벌 따위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것은 또한 어쩌면 1994년만 해도 지금처럼 극심한 양극화가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할 것이다. 초재벌이 남자 주인공으로 나와 거의 하녀처럼 살아가는 여자 주인공을 보호해주는 이야기는 그것이 판타지를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치졸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돈이 많으면 많았지 그것이 사랑도 넘을 수 없는 계급이 되는 현실, 얼마나 치졸하고 치사한가.

 

그래서 이러한 양극화로 인한 수직적인 계급구조가 잘 보이지 않는 나정이네 하숙집에서 벌어지는 수평적이고 평등한 멜로는 이 시대에는 오히려 더 큰 판타지로 다가온다. 돈이나 현실이나 집안이나 학벌과 상관없이 누군가에 대해 진정으로 가슴 설레며 하는 사랑.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이 사랑은 그러나 심지어 치사한 신데렐라 스토리에마저 빠져들게 만드는 요즘 같은 세상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랑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요즘 청춘들은 학비 마련하랴 취업 준비하랴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조차 사치로 여겨지는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응답하라 1994>가 보여주는 이 너무나 편안하고 때로는 낭만적으로 여겨지는 청춘과 사랑이 왜 판타지가 되지 않을까. 이것은 양극화를 더 첨예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멜로의 극성을 만들어내는 신데렐라 스토리보다 <응답하라 1994>의 평범한 멜로가 더 강력한 이유다. 양극화 자체를 지워버린 완전한 평등의 멜로라니. 대단히 매력적이지 않은가.

폭력과 금력 미화하는 <상속자들>, 뭐가 문제일까

 

때로는 드라마 작가에게 능력이 오히려 독으로 비춰질 때가 있다. <상속자들>이 그렇다. 드라마만을 놓고 보면 <상속자들>은 재벌2세와 가난한 여자 사이에 벌어지는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다. 지금껏 김은숙 작가가 계속 해왔던 이야기의 반복이고 또 가장 잘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상속자들(사진출처:SBS)'

“나 너 좋아하냐?” 같은 김은숙 작가 특유의 대사 톤도 여전하고, 밀고 당기며 때론 아프고 때론 달달하게 이어지는 멜로 역시 꽤 강한 극성을 만들어낸다. 특히 이민호, 박신혜, 김우빈, 강민혁 같은 아이돌 스타들의 존재감은 어찌 보면 늘 봐왔던 김은숙 표 멜로의 역할 놀이에 강력한 힘을 부여한다. 어찌 보면 이들이 있어 드라마가 갖고 있는 비현실적인 구석들, 이를 테면 지나친 우연의 반복이나 제국고등학교 같은 과장된 설정들이 그나마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상속자들>은 전형적인 이야기에 비현실적인 상황들에도 불구하고 꽤 재미가 있다. 마치 아이돌 팬시 상품 같은 느낌이랄까. 김탄(이민호)이 캘리포니아에서 서핑을 하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풀빌라에서 사는 모습은 그가 아무리 유학이 아닌 ‘유배’라고 말해도 보통사람들에게는 판타지의 하나로 여겨지게 마련이다.

 

김탄의 집안에서 운영하는 제국고등학교는 ‘사탄들의 학교’라고 일컬어지지만, 가진 자들의 재수 없음의 이면에는 고등학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으리으리한 환경과 커리큘럼에 대한 막연한 동경 역시 깔아놓고 있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그 막연한 동경 속에 자꾸만 바라보게 함으로써 그들의 이해할 수 없는 세계와 행동들마저 도취시키는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최영도(김우빈)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렇다. 그가 단지 가난하고 클래스가 다르다는 이유로 준영(조윤우)이 같은 아이를 구타하고 왕따시키며 고소하겠다고 협박을 하는 장면은 사실 상식적으로는 납득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시선은 왕따 당하는 준영이의 입장보다는 왕따시키는 최영도의 입장에 가 있다. 물론 현재는 달라졌지만 김탄 역시 과거에는 최영도와 다름없는 캐릭터였다. 이 드라마는 이 부유한 친구들이 소위 고통이라고 부르며 그것 때문에 폭력과 금력을 쓰는 것들을 정당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이미 제목에서 드러나 있다. <상속자들>에 붙어있는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버텨라’라는 제목에는 이들 태어날 때부터 왕관을 쓰게 되어 있는 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고통’이라는 것을 이 드라마가 다루겠다는 의도가 들어있다. 그렇다면 그 고통이라는 것이 도대체 뭘까. <상속자들>의 김탄이나 최영도처럼 ‘왕관을 쓰려는 자’의 고통이란 대부분 아버지의 여성 편력과 그로 인해 콩가루 집안이 된 가족사에서 비롯된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 ‘왕관을 쓰려는 자’들의 고통을 다루는 일이 과연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그 왕관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이 현실에는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보면 아마도 이들 ‘왕관을 쓰려는 자’들은 드라마가 슬쩍 보여주는 것처럼 거의 상류층 1%에 해당할 것이다. 상류층 1%의 고통을 얘기하는 드라마는 어쩌면 그 자체로 나머지 99%를 그저 배경으로 치부하면서 이 1%의 세계가 가진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차은상(박신혜)은 바로 그 99%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으리으리한 저택의 메이드룸에서 살고 있다는 공간 설정 자체가 이 인물이 처한 현실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 차은상이라는 인물이 이 부유한 저택에서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시키는 심부름을 해야 하고 명령에는 오로지 예스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드라마는 그녀에게 김탄과 최영도가 조금씩 빠져드는 판타지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들이 왜 그녀에게 이토록 목매게 되는지는 잘 설명이 되어있지 않다.

 

그 이유를 드라마는 클리쉐로 넘겨버린다. 우연적인 만남의 반복과 왠지 모를 끌림이라는 상투적인 방식이다. 김탄은 갑자기 차은상에게 “나 너 좋아하냐?”고 묻고는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 최영도 역시 마찬가지다. 정략결혼으로 이복동생이 될 지도 모를 유라헬(김지원)을 열 받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인 차은상에게 갑자기 관심을 갖는 식이다. 즉 이 모든 멜로의 키는 가진 자들이 쥐고 있다. 그들은 사랑할 여유조차 없는 현실에 처한 차은상에게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혹자들은 결국은 신데렐라 판타지를 다루는 로맨틱 코미디에 대해 너무 심각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재벌가의 신데렐라 판타지를 즐기기에는 이미 현실이 너무 많은 재벌가들의 문제를 드러내주었다. 사모님의 수상한 외출이나 특목고 에서 벌어진 사배자 전형의 편법 운용 같은 사례는 심지어 대중들의 공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최근 재벌가를 다루는 드라마들이 과거와 달라진 점은 아마도 이러한 대중들의 정서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게다. <추적자>가 권력이 가진 힘과 싸우는 한 서민을 통해 정의의 문제를 제기했다면, <황금의 제국>은 그 재벌가가 가진 태생적인 비극을 다루었다. 하다못해 <결혼의 여신> 같은 드라마도 재벌가 판타지를 오히려 깨는 이야기를 다루지 않았던가.

 

김은숙 작가처럼 멜로를 잘 쓰는 작가도 없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잘 쓰는 것이 작가의 품격을 높여주는 것은 아니다. 자칫 능력은 오히려 잘못 사용되어지면 파괴적인 힘이 될 위험성이 있기 마련이다. <상속자들>에서 폭력과 금력이 이른바 그들의 고통이라는 근거로 미화되는 것은 그래서 제 아무리 판타지 설정의 로맨틱 코미디라고 해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버텨라’라고 말하지만 지금의 힘겨운 현실에서 왕관을 쓰려는 자의 고통이란 엄살처럼 여겨지는 면이 있다. 개념이 잘 보이지 않는 <상속자들>. 재미만 있다고 모든 게 다 용서될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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